[諸子思想 과제]

諸子百家 사상의 교육적 의미가 구체적인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으며, 이를 어떤 식으로 응용, 실천할 수 있을 것인지 정리하시오.


ㅇㅇ고등학교 교사 해콩

 


墨家思想的 側面


  墨子는 철저하게 피치자의 입장에서 기층 민중의 시각으로 세상의 문제점을 짚어나갔으며 그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했다. 세상이 불화하는 이유는 ‘서로 사랑하지 않음’에 기인한다고 보아 兼愛야 말로 세상의 부조리를 일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유가의 영향을 받았지만 유가의 ‘차별적 사랑’을 부정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이상적인 사랑을 실천할 것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까닭은 현실 사회의 상황과 너무나 큰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적이긴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이론이라는 데 큰 맹점이 있었던 것이다. 墨家가 소수 무사집단에 한정되고 오래지 않아 소멸된 역사적 사실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실천하기는 더욱 힘들다는 사실의 방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간혹 너무나 헌신적인 교사를 만날 기회가 있다. 항상 아이들의 입장을 세심하게 배려함은 물론이고 그들의 불편을 줄여주고 고통을 덜어주려 애쓴다. 같은 교사의 입장에서 이런 교사를 만나고 옆에서 아이들에 대한 그 마음씀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사들의 단점은 교사 본인이 지치기 쉽다는 것이다. 교육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두 해에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백년을 기약해야하는 큰 도모이므로 교사가 오래도록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몸과 마음을 다칠까 노심초사하며 하나에서 열까지 챙겨나가다 보면 교사의 심리적․육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희생이 따르는 것은 필연적이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교사의 善意를 무시하거나 이용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 이렇게 자기희생적인 교사의 정신적인 타격은 아이들과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교사들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한 가지 더 유념해야할 것은 ‘교사의 무조건적인 봉사와 희생이 과연 아이들에게 교육적이기만 한가’하는 점이다. 아이들은 곤란과 궁핍, 갈등과 다툼 등 어려움 속에서도 배운다. 주어진 문제 상황을 판단하고 선택하고 해결방법을 고민하며 스스로 삶의 방법을 터득해 나간다는 뜻이다. 세심한 것까지 하나하나 배려하는 교사는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아이들에게서 실패를 통해 배우는, 아주 소중한 기회를 박탈하기 쉽다.

  더욱이 아이들의 학교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여러 가지 사항에 있어서는 교사 자신만의 희생과 봉사를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개인 신상에 관계된 일이나 비교육적인 일이 아니라면 아이들에게도 공동의 짐은 나누어지도록 해야 한다. 공동체 생활에서 자기가 맡은 몫을 책임감 있게 해나가는 것과 아이들 자신이 스스로를 챙기는 것은 그들의 장래를 내다볼 때 그 자체로 아주 중요한 교육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결정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아이들과 의논해야한다는 것이다.

  교사의 차별 없는 사랑 아래에서 공동체의 민주적인 의사결정 방법과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배워나가게 된다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교육의 실천이 될 것이다.

 

 

道家思想的 側面


  일체의 인위를 부정하여 그것이 가지는 허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인간 중심적인 잣대로 사물의 가치를 단편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반대하여 세상 모든 존재는 인간중심의 편협한 가치판단을 떠날 때 비로소 함께 평등한 존재가 된다는 ‘萬物齊同’의 원리 역설한 것이 도가이다. 그들은 사물이 가지는 다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며 인간 사고의 편벽됨을 지적, 겸허하게 우주의 커다란 원리인 자연의 道로 회귀할 것을 역설하였다.

  동일한 가치를 상정해두고 대부분의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이 그것의 획득만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앞을 다투는 우리 사회의 교육에 있어서 참과 거짓을 뒤집어 생각해볼 줄 알며 다양성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도가적 관점의 수용은 참으로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사의 교육관이나 학생관에 있어서도 도가적 측면으로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일방적으로 아이들을 맞춰 넣는 기능을 한 것은 아닐까? 그것은 불량품을 가려내고 일정한 질을 유지하는 제품만을 생산하고자 하는 공장의 기능을 연상시킨다. 우리 교육의 목적인‘弘益人間’이 무색해질 만큼 비인간적이며 강압적인 방법이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되는 일도 잦다. 근대이후 발생한 ‘학교’의 성격 자체가 다음세대의 사회화를 위해 인류문화를 효율적 전달한다는 목적에 맞추어 성립된 것이므로 그 출발에서부터 인위를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성정을 인정하는 도가의 無爲自然的 관점에 어긋난다 하겠다.

  수업이란 교과서나 참고서의 내용을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행위일 뿐인가? 교과서의 내용은 정말로 불변의 진리인가? 사유하는 방법을 교육해야하는가, 사유의 결과물인 지식을 전달해야하는가? 공부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성적이나 등수는 한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좋은 대학과 좋은 직업은 과연 진정한 행복을 그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현재의 삶을 저당 잡혀야 하는 교육은 바람직한 것인가? 어떤 학생이 모범학생이며 또 어떤 학생이 문제학생인가? 등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교육의 본질에 관한 질문에 대해 도가적 입장에서 답을 고민해 본다면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교육의 문제는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풀릴 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목적을 챙겨보고 그 방법을 반성해야한다. 아이들의 개성과 자율성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하며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권리를 그들에게 돌려주어야할 것이다.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의 가치로움을 일깨워주는 교육이 절실하며, 인간 자신도 커다란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며, 따라서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물질적 대상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조화하여 살아가야한다는 아주 소박한 진리도 교육의 일부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도덕경]을 교육적 관점에서 풀이한 파멜라 메츠의『배움의 도』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교사가 일을 다 마쳤을 때 학생들은 말한다. “대단하다! 우리가 해냈어.”

‘교육’의 근본적 의미를 반성하는 일과 함께 道家思想的 側面에서 바라본 우리들 교사의 역할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荀子思想的 側面


  荀子의 ‘性惡說’은 인간의 본성 자체를 악하다고 규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타고난 욕망은 후천적인 환경에 의해 얼마든지 惡으로 발현될 수 있다고 보았기에 이를 예방하거나 교정하는 수단으로 ‘禮의 교육’을 강조한 것이다. 그가 말한 僞란 사고력과 판단력을 길러 禮를 실천하게 하는 긍정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이 단순히 노자의 無爲나 맹자의 性善說과 배치되는 개념은 아니다. 인간이 타고난 性은 그 자체로 善과 惡을 규정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며 어떤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사고하느냐에 따라 性善에 주목하거나 性惡을 주장한, 논리 전개상의 차이일 뿐이다. 노자의 無爲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해야한다,

  ‘교육’을 인간의 성장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보았다는 점에서 순자의 이론은 현대 학교 교육의 관점에 가장 근접한 이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내용면에 있어서도 오늘날의 학교 교육이 순자가 말한 ‘禮’를 추구하는 것인지는 깊이 고민해보아야 한다. 사실 현대 학교교육은 欲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는 인격을 함양한다는 목적을 지향한다기 보다는 인간의 개인적 욕심을 가능한 한 높은 수준으로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고 고백해야한다. 이는 荀子的 관점에서 볼 때 본말이 전도된 현상이라 할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현실 교육을 비판․반성하고 공동체의 조화를 위한 교육, 스스로의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교육의 본질을 회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法家思想的 側面


  중앙집권적 국가지상주의를 표방하는 法家는 강력한 법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儒家에서 중시한 仁과 義에 의한 이상적 사회건설을 비현실적이라 비판하였으며, 堯舜의 정치철학을 구시대의 유물로 상정하여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법가의 논리에 부합하여 세워진 秦나라는 創業 15년 만에 무너져 守成에 실패하였다. 이것은 法家의 논리적 허점을 여실히 드러낸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학교교육 현장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교칙’이다. 엄격한 ‘교칙’은 교사들에게는 아이들을 지도할 확실한 명분을 제공하고, 아이들에게는 교사의 지도에 무조건 순응해야하는 굴레가 된다. 물론 어떤 아이들은 교칙이 있어서 학교생활이 더욱 편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아이들은 자신의 의사가 반영된 적 없는 교칙에 의해 두발, 복장, 심지어 양말색깔에 머리핀 종류까지 규정받는 현실을 숨막혀한다.

  작년 두발자율을 주장하는 아이들의 요구가 수용되어 각급 학교에 아이들의 두발을 가급적 ‘자율화’ 하라는 권고공문이 전해졌다. 교칙을 정할 때 아이들의 의사를 반영하라는 내용 또한 여기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간 시간이 지난 지금, 교육청에 보고된 회신공문과는 달리 학교 안에서 바라보는 학교의 모습은 여전하다. ‘여전히’ 교칙을 결정할 때, 아이들의 의사가 수렴되는 과정은 생략되기 쉽고 두발을 포함하여 복장과 행동 하나하나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학생다움’이라는 기준에 의해 규제 당한다.

  학급에서 지켜야할 규칙을 정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강력할수록 학생들의 생활지도가 편하다고 여겨지며 이렇게 교칙이나 학급규칙이 엄격한 학교, 학급일수록 ‘모범적’이라고 표현된다. 다시 말해 이렇게 막강한 교칙을 가지고 있는 학교는 규율이 엄격한 일사분란한 학교로 인식되어, 그런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단정하고 모범적이라고 -혹은 모범적일 것이라고-여겨진다. 이는 또한 성적에도 영향을 준다고 인식되어 공부 잘 하는 학교로 소문나기도 한다. ‘외모 등에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공부만 하는 착한(?)학생들이 성적도 좋아 일류대 합격률이 높다’는 명제는 ‘엄격한 교칙을 적용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말아야한다’는 주장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채 교칙이나 학급규칙을 정하고, 여기에 일방적으로 아이들을 맞춰가는 것은 이젠 역부족이기도 하지만 (외모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아이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이러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자체로 이미 바람직한 교육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수의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할 때, 그러한 방법이 효과가 있기도 하지만 교육적 안목으로 볼 때 그것은 확실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생활지도 방법이며 장기적으로 그 효과가 유지될지도 의문이다. 일정한 규칙은 어느 사회에서나 필요하다. 그러나 秦의 예에서 보았듯이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강력한 법은 인간성을 파괴하거나 최소한 인간관계를 악화하기 쉽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강력한 법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불신한다는 전제하에 시행되기 때문이다.

  학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성과 인간관계를 무엇보다 소중히 해야 하는 ‘교육적’ 공간이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그 효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고 강압적인 규율로 스스로를 부정하고 인간을 불신하게 하는 방법 보다는 인간성을 길러주는 교육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믿고 기다려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儒家思想的 側面


  儒家 학설의 가장 큰 의미는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상정한다는 데 있다. 孔子가 강조한 ‘仁’과 ‘禮’, 孟子의 ‘良知’, ‘良能’, ‘浩然之氣’ 등은 인간의 선험적 도덕성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기르는 방법에 대한 언급인 것이다. 도덕의 실천은 늘 주체적인 것이며 그러한 인간은 누구든지 존엄하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儒學은 이렇게 주체적인 방법으로 자신과 타인을 다스려 가는 원리, 즉 윤리적 규범인 동시에 정치와 교육의 원리이다. 자신이 도덕적인 존재임을 깨닫고 그것을 주체적인 판단으로 실천할 수 있는 존재로 이끌어 내는 것이 ‘교육’이며 ‘정치’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교육적’ 모습에 근접하려면 儒家的 理論을 따라야 할 것이다. 儒家에서 말한 교육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도덕의 주체적 실천자로서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는 易地思之와, 나를 미루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推己及人의 정신을 내면화하여야 할 것이다. 禮로서 자신을 조절하는 것이나 詩나 樂의 공부도 인격완성을 위한 교육내용으로 유가적 교육에 포함된다.

  오늘날의 학교 교육은 그 목적이나 내용, 방법적인 면에서 근본을 망각한 교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물으면 서슴없이 좋은 대학, 좋은 직업을 이야기하며 그것은 대부분의 학부모나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업은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높은 지위를 보장하는 삶과 연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목적부터 어긋났으니 그 내용이나 방법 또한 바로서기를 바랄 수 없다. 진리탐구가 되어야하는 교육의 내용은 물질과 지위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니 교육방법 역시 단순 암기나 주입에 그치기 마련이다. 대상에 대한 애정 어린 관찰이 필수적인 孔子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과 같은 교육방법은 아이들은 너무 많고 시간은 늘 부족하며 전해주어야 하는 내용은 쌓여있는 오늘날 현실에 있어서는 거의 실천불가능한 상황이다. 여기에 비인간적인 생활지도가 개입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현실이다.

  儒家的 敎育의 실천이 어려운 오늘날 학교 교육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참된‘교육’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것은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아닐까 한다. 십 년도 안 되는 짧은 경험이지만 교사로서 아이들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교육적’ 방법은 ‘학생을 신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신규로 4년간 근무했던 실업계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은 서로를 경계 대상으로 간주하기 바빴다. 상처를 주는 대상으로 서로를 바라보니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생겨 더욱 냉담해지고 폭력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들은 교사에게 너무 쉽게 거짓을 말했고 학교 규칙은 그들에게 有名無實한 덕목이었다. 그들에게 수업이나 공부는 이미 필수사항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살펴보니 이런 아이들은 살아오면서 어른들에게 받아온 상처가 너무 컸다. 정서가 불안하거나 어른을 무조건 적대시 하는 아이들일수록 이런 저런 결손가정의 아이들이었으며, 그들이 받은 상처와 그들이 내뿜는 폭력성은 비례했다. 당연히 학교성적도 그들의 정서적 안정정도에 비례했다. 처음엔 잔소리도 하고 벌도 주고 때려보기도 했지만 이미 오랜 시간 폭력에 노출되어온 아이들은 그 폭력에 너무 쉽게 순응하여 교사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폭력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 교사를 난처하게 했다.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과 대화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니 천천히 조금씩 마음을 열어왔다.

  사실 아이들의 습관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는 않는다. 대화로 해결하려는 동안에도 지각과 결석과 사고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최소한 ‘거짓’을 말하는 횟수는 줄었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는 늘어났다. 무엇보다 상대를 서로 적대시하는 상황에서 벗어난 것,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물론 끝까지 믿음을 져버리는 아이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 아이에게 주어진 비교육적이며 폭력적인 환경 때문이며 어른들의 잘못이므로 누가되든 어른들이 감당해야할 몫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교육의 방법은 대화와 믿음이어야 하고 궁극적 목적은 ‘이해’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그 아이들을 보며 깨달았다. 자신을 이해하는 마음을 넓혀 타인을 이해하며 나아가 사회와 자연을 이해하는 것, 비단 아이들에게만 주어진 과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자신과의 대화, 자신에 대한 긍정을 토대로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믿고 타인과 대화해야하는 주체적이고 민주적인 삶을 숙명적으로 타고난 ‘인간’이어야 한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대할 때, 끝까지 믿고 지켜봐주는 일 외에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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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15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法家思想的 側面과 儒家思想的 側面에서의 교육 방법

아이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채 교칙이나 학급규칙을 정하고 이에 일방적으로 아이들을 맞춰가는 것은 法家的인 교육방법이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이러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기에 엄격한 교칙을 적용하기에도 쉽지 않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바람직한 교육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수의 아이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할 때는 그러한 방법이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장기적, 교육적 안목으로 볼 때 그것은 확실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생활지도 방법이다. 물론 일정한 규칙은 어느 사회에서나 필요하다. 그러나 秦나라의 예에서 보았듯이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강력한 법은 인간성을 파괴하거나 최소한 인간관계를 악화하기 쉽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강력한 법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불신한다는 전제하에 시행되기 때문이다.
학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성과 인간관계를 무엇보다 소중히 해야 하는 ‘교육적’ 공간이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그 효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고 강압적인 규율로 스스로를 부정하고 타인을 불신하게 하는 방법 보다는 인간성을 길러주는 교육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교육’에 가장 근접한 것은 儒家的 理論을 따른 교육일 것이다. 儒家에서 말한 교육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도덕의 주체적 실천자로서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는 易地思之와 나를 미루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推己及人의 정신을 내면화하여야 할 것이다. 禮로서 자신을 조절하고 詩나 樂의 공부도 인격완성을 위한 교육내용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최선으로 생각하는 교육의 목표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다. 좋은 학벌은 좋은 직업으로 이어지고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높은 지위를 보장하는 미래의 삶과 연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목적부터 어긋났으니 그 내용이나 방법 또한 바로서기를 바랄 수 없다. 진리탐구가 되어야하는 교육의 내용은 물질과 지위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니 교육방법 역시 단순 암기나 주입에 그치기 마련이다.
이렇듯 유가적 교육의 실천이 어려운 오늘날 학교 교육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참된‘교육’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십 년도 안 되는 짧은 경험이지만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교육적’ 방법은 ‘학생을 신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비록 더디더라도 아이들을 믿고 대화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다보면 도덕적 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해쳐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