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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에서 겪게 되는 갈등들을 모두 담은 놓은 듯 전형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사랑, 질투, 성장, 열정 등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관계의 밀고 당김에 따라 역동적으로 표현하였고, 사물들의 빛과 색을 보는 것으로써의 그림, 정돈된 배경 속에 흐트러짐 하나를 만들어주는 균형과 일탈의 미가 담긴 그림을 알게 해주었다. 이야기하는 힘 역시 대단하다. 한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가 없다. 열심히 이야기를 좇다보면 그림이 한번씩 척~하니 나타나 그림이 만들어진 순간에 함께 있는 듯 현장감을 더해 준다, 그 절정은 단연 ‘진주 귀고리 소녀’ 그림이다. 그 그림이 완성되기까지의 팽팽한 긴장과 애증이 절정에 이르고 책장을 넘겨 그림을 마주했을 땐 숨이 멎는 듯 했다.
소녀에게 화가는 운명적 사랑이었다, 손만 닿아도 불에 닿은 듯 뜨거운 첫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신분이 맞지 않는 위험한 사랑. 반면 푸줏간 집 아들은 현실적인 사랑이었다, 가난한 그녀의 집 식탁에 고기를 놓아줄 수 있는, 그래서 엄마를 기쁘게 해 줄 남자. 그 두 사랑 사이를 오가는 소녀의 마음은 드라마 소재로 곧잘 쓰이는 뻔한 갈등 구도이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은 뻔하게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던가.
돈을 벌기 위해 하녀로 일하게 된 열일곱 소녀는 자신이 살던 세계와 전혀 다른 곳에 와서 일과 사람, ‘모든 것들과의 낯설음’을 겪는다. 가족들과 인사하고 집을 떠나는 모습, 주인집에서의 첫 날 그 모습에 나는 대학 진학과 함께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첫 출근하던 날이 생각났다. 그 때 얼마나 낯설어했던가! 앞으로도 몇 번이나 낯설어할까. 소녀를 하녀로 데려가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주인은 소녀를 사랑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질투는 무섭다. 주인의 딸은 호시탐탐 그녀를 괴롭히고, 동료 하녀는 냉담해졌고, 화가의 아내는 분노한다. 사랑받기를 원하고 그 사랑이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향할 때 질투를 느끼는 마음,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랴.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으로 서로 다른 두 세계 사이에서의 혼란을 짚고 넘어간다. “그림 역시 우리와 하느님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거다. 개신교의 촛불이건 가톨릭의 촛불이건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그림은 단지 촛불일 뿐이니까.” 본질을 꿰뚫는 이 말! 그림에 대해서는 한 수 배웠다고 표현하는 게 적당하겠다. 초고속 디지털 시대에 불쑥 마주친, 몇 달 동안 한 작품에 정성을 들이는 그리는 화가의 자세는 낯설면서 존경스러웠다.
화가와의 만남으로 그림에 대해 알아가는 소녀를 통해 우리도 흰구름에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초록색도 있고 잿빛도 들어있다는 것을 배운다.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며 화가는 실제 그 사물과 상관없는 듯한 바탕색들을 칠한 뒤 색을 덧칠해 사물이 받고 있는 ‘빛’을 색으로 표현한다. 아~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구나. 나는 이제야 그림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사물의 빛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볼 때 더욱 잘 드러난다. 그 시대에는 신기한 큰 상자였던 그 물건, 지금은 바로 카메라다. 얼마 전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렌즈를 통해 보면 눈으로 볼 때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사진이 실제를 왜곡한다고 생각했다, 사진발이라고 하는 것. 그러나 렌즈가 빛을 더 잘 보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기하다.
인상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화가가 무언가를 찾지 못한 그림을 지켜보던 소녀는 참을 수 없는 욕구에 ‘감히’ 대상이 되는 정물에 손을 대는 장면을 들겠다. 정돈된 풍경 속에 눈을 간질이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 아하~ 그리고 소녀를 그린 그림에서 허전한 그 무엇을 마침내 찾아내는 장면. 바로 진주 귀고리로 화폭 전체의 균형을 잡아준 것. 오~
끝으로 이 책에 얽힌 내 사연은 이렇다. 직장 상사가 대단한 작품이라며 이 책을 추천했다. 빌려달라고 했더니 사서 보란다. 왠지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결국 사서 읽었다, 소설책을 말이다! 지금은 회사에 책 들고 와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침 튀기며 책 선전을 하고 있다. 내가 이리 될 줄 정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