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시작했다.
동물은 어떻게 하나의 대상이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런 대상화를 정상적인 일로 배우게 되는가? 장애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우리가 동물들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가? - P32
만약 동물을 둘러싼 억압과 장애를 둘러싼 억압이 서로 얽혀 있다면, 해방의 길 역시 그렇지 않을까? - P33
워낙 좋다는 말을 듣고 시작했기에 이야기의 연결고리가 삐그덕거리는 부분이 더 잘 보였던 것 같다. 나쁘지 않지만 괜찮지만 우러나온 이야기 라기보단 ‘만든’ 이야기라는 게 느껴지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어야 했나? 라는 생각도 든다. <랩걸>에 이어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과학 관련 에세이는 내게 어필이 안 된다는 걸 다시 느꼈다. <랩걸>보다 글은 좋았다. 기대가 컸기에 아쉬운 것으로. 제목을 자극적으로 지으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물고기 fish’란 과학적 분류가 아니다. 그건 다른 방식의 분류지 존재하지 않는게 아니다. 아버지가 ‘너는 중요하지 않아’ 라고 이야기한 것도 우주적 차원에서 이야기한거지 인간적 차원에서 이야기한 게 아니다. 이 책에서 그런 범주의 차이를 가볍게 뛰어넘어 유사성 혹은 차이 혹은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 같다. 어류는 범위가 수정되었을 뿐 여전히 사용하는 분류체계로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나) 번역의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이 책이 ‘어류’에 대한 새로운 오해를 불러올 수 있을 것 같다.원론적으로 과학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에 대한 지식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에 언제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모든 과학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천동설과 지동설, 뉴턴 역학과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등 과학은 그런 과정을 거쳐왔다. 범주화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저자가 과학을 본인이 이해하는 좁은 범주 안에 넣어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쉽다.자기 기만 얘기는.. 긍정적 자기 기만을 권장하는 미국 같은 사회에서는 특히 의미있는 이야기 같다. 하지만 나는 글쎄.. 사실 나는 좀 긍정적 자기 기만을 하며 살고 싶다. 안 되어서 그렇지.
내가 하고싶은 말을 잘 정리 못하는데 그걸 해서 책으로 내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 비혼 비출산이 대안은 아니라고 전에 쓰면서 왜 그런지를 설명하자니 복잡하고 막막하다고 느꼈는데, 이것이 부분적인 설명이 되겠다.반대말을 하지 말고 옳은 말을 하자.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토론들을 볼 때 자주 드는 생각이다.
얼마 전에도 SNS에서 "여러분, 우리 아이를 낳지 맙시다"라는 문장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출생률 때문이 아니라, 이 순간을 살아가는 ‘아이’ 때문이다. 사회가 여성에게 "아이를 낳아라"하고 말하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도 "아이를 낳지 말자"라고 받아치면 안 된다. 사회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으니 주지 않겠다고, 벌주듯이 말하면 안 된다. 이 말은 곧 사회가 자격이 있으면 상으로 아이를 줄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린이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말은, 애초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그 끝이 결국 아이를 향한다. 아이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된다. 미래에만 해당되는 말이라면 괜찮을까? 미래의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정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말은 결국 어린이와 양육자를 고립시킨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만든다.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은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이야기가 약자를 배제하자는 결론으로 향하는 것이.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중략)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 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지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우리에게 자녀가 있든 없든, 우리가 어린이와 친하든 어색하든, 세상에는 어린이가 ‘있다’. 절망을 말을 내뱉기 전에 어린이를 떠올려 보면 좋겠다.<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사계절, 2020, pp. 218~220)
평생 쉬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줄 알았다면 다른 일을 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른 일도 힘든 건 마찬가지 아닐까? 힘이 들 때 지칠 때 이 구절을 되뇌어 보기로 한다. 사 두었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를 이 책을 읽고 나서 읽기로 마음 먹었다.
모든 여자가 천문학자, 수학자,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여성이든 자신이 선택한 일에 완벽을 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야가 예술이거나 문학, 과학이라면 우리는 평생 쉬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여성들이 우리가 가진 모든 권리를 활용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지식을 좇아, 진실을 좇아 끊임없이 계속해서 노력해나갈 권리가 있습니다. 평생에 걸쳐 연구할 우리의 권리를 누가 부정합니까? … 우리에게는 또 다른 권리가 있습니다. "남자들이 자신의 일을 잘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일을 잘해낼 권리입니다. 나는 우리가 이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염려스럽습니다.과거의 누구보다 자기 일을 잘해내는 여성은 그것으로써 모든 여성 동지를 돕습니다. 비단 현 시대의 여성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여성들까지 돕게 됩니다.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그 여성은 인류를 움직이는 것이며 그것은 성장입니다.
<캘리반과 마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읽었던 중세독일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이 케플러의 어머니의 경우를 실례로 들어 상세히 기술되어있다.
《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에는 화자의 어머니가 있었다. 이 어머니는 약초 의사로, 정령을 소환하여 아들이 달로 항해하는 일을 돕는다. 케플러의 어머니 또한 실제로 약초 의사였다.
케플러의 서술에 따르면, 《꿈》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주워들은 마을의 이발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카타리나 케플러를 마녀로 몰기로 했다. 마침맞게도 이발사의 남매인 우르줄라가 절교한 친구였던 케플러 부인과 서로 담판을 지을 일이 있었다. 우르줄라 라인홀트Ursula Reinhold는 카타리나 케플러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다. 또 우르줄라는 이 노년의 미망인에게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별생각 없이 경솔한 마음으로 카타리나는 이 남부끄러운 고백을 요하네스 케플러의 남동생에게 이야기했고, 그 역시 별생각 없이 그 사실을 이 작은 마을에 퍼트리고 다녔다. 추문을 가라앉히기 위해 우르줄라는 낙태해야 했다. 아직 의학적으로 조악한 수준이었던 낙태 시술을 받은 우르줄라는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고, 이를 감추기 위해 자신이 마법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주장했다. 카타리나 케플러가 자신에게 요술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닌 것이다. 얼마 후 우르줄라는 스물네 명의 귀 얇은 마을 사람들을 꼬드겨 이 노파가 마법을 부렸다는 이야기를 하도록 만들었다. 한 이웃은 카타리나가 거리에서 딸아이와 팔을 스친 뒤 딸의 팔이 마비되었다고 주장했다. 푸줏간 주인의 아내는 카타리나가 근처를 지나가자 남편의 허벅지에 맹렬한 통증이 엄습했다고 맹세까지 하면서 말했다. 절름발이인 학교 교사는 10년 전 어느 날 밤 카타리나의 집에서 케플러가 보낸 편지를 읽어줄 때 양철 컵에 따라준 무언가를 마신 후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카타리나는 마법을 써서 닫힌 문을 통과하고 갓난아기와 동물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카타리나 케플러 본인도 사건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걸핏하면 사람들과 다투곤 하는 성마른 성미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중상모략으로 우르줄라를 고소하려 했다. 현대 미국에서 먹힐 법한 인상적인 대응이었지만, 중세 독일에서는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셈이었다. 발이 넓은 우르줄라의 가족이 지역 유지들과 끈을 댔기 때문이다. 그다음 카타리나는 하급 판사에게 은 술잔을 뇌물로 주면서 자신의 재판을 기각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부탁은 즉시 죄를 인정하는 행위로 해석되었고 그 결과 민사 사건으로 끝났을 일이 마녀 행각에 대한 형사 재판으로 격상되었다.
케플러가 어머니의 혐의를 벗기기 위해 편지를 쓴 노력은 전부 허사로 돌아갔다. 이 시련이 시작되고 5년째가 된 해에 카타리나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8월의 어느 깜깜한 밤 무장한 경관이 카타리나 딸의 집으로 들이닥쳐 그곳에서 카타리나를 체포했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은 카타리나는 나무로 된 이불 상자 안에 숨었다. 이 무더운 계절에는 흔히 그렇듯 발가벗은 채였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끌려가기 전에 옷을 걸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옷을 입지 않은 채 상자째 들려나가 심문을 받기 위해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증거를 재구성하려 했던 케플러의 노력은 모두 허사가 되었다. 이런 모욕을 겪으면서도 카타리나가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는 사실 자체가 카타리나에게 불리한 증거가 되었다. 체포와 심문을 겪으면서 카타리나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노파가 뉘우치지 않고 악마와 계속 연락을 하고 있다는 증거로 언급되었다.
카타리나는 마녀 행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바퀴에 큰대자로 매달리게 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고 있었다. 바퀴에 매다는 형벌은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흔히 사용된 잔혹한 방법이었다. 그 시대의 기대 수명을 이미 수십 년 넘긴 이 노파는 체포된 이후 열네 달 동안 어두운 감옥에 갇혀 무거운 쇠사슬이 달린 족쇄를 찬 채 돌바닥에서 잠을 자면서도 내내 침착함을 잃지 않으며 위협을 견뎌냈고 그 어떤 혐의도 자백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