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사람을 위한 글쓰기>. 이 책을 11월에 읽기 시작했는데 어제서야 겨우 다 읽었다. 재미있는 책도 아니고 좋아하는 주제도 아니지만 필요성에 의해 읽다보니 그냥 꽂아만 두기도 했고 읽다가 괴로우면 방치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2월 부터다.
제목 때문에 오해를 많이 살 것 같은 이 책의 원제는 'Write No Matter What: Advice for Academics' 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academic writing 자체에 대해 (그러니까 논문 혹은 책 내용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얘기하는 책이 아니고, '글을 계속 써서 출판해야 하는' 공부하는 사람, 결국 직업적 학자가 글을 쓰는 과정, 즉 어떻게 생산성 있게 지속적으로 쓸 지에 대한 요령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책 중 일부 내용은 학자가 아니라도 글을 계속 써야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고
리뷰가 별로 없길래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한다.
맨 앞에도 나오지만 이 책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생산성 있게 글을 쓰려면 스트레스가 낮은 환경에서 좋아하는 글쓰기 과제를 자주 접해야 한다
이다. 대개는 스트레스가 높은 환경에서, 부담스러운 글쓰기 과제를 드물게 접한다는 뜻이다.
초반부에는 일과 글쓰기를 병행하는게 왜 힘든가, 학문적 글쓰기가 왜 힘든가를 이야기하는데
결국 글쓰기가 저자의 연구 능력 혹은 내적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가 아니라 (보통 학계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당연히 갖추어야 하는 자질이라 생각하지만) 숙련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심리적으로 압박받지 않고 숙련공의 태도로 효과적으로 글을 쓰는 것에 집중하자고.
그 다음부터는 실질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스트레스가 낮은 환경에서 자주 연구 과제를 접하기 위한 세 가지 길들이기 방법,
그리고 글 쓰는 데에 필요한 시간, 공간,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
세 가지 '길들이기' 방법은
- 연구 과제 상자를 만들기
- 감정 환기 ventilation 파일을 쓰기
- 매일 최소 15분 동안 글을 쓰기
이다.
연구 과제 상자는 한 주제에 대한 자료를 모아두는 것이고, 꼭 실제 상자가 아닌 컴퓨터의 폴더가 될 수도 있다.
감정 환기 파일은 글을 쓸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는 것인데, 적어보면 내가 뭘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느 부분에서 불안해하는지 뭐가 나에게 걸림돌이 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일기 혹은 모닝 페이지와 같은 역할인 것 같다.
"글쓰기 과제가 재미없고 마음에 들지 않으며 내가 왜 이러고 사는 지 모르겠다는 말 따위를 떠오르는 대로 마구 썼다. 15분간 자유롭게 다듬지 않은 거친 어조로 마구 쓰고 나면, 하루를 잘 보낼 수 있다."
15분 동안 글을 쓰라는 이유는 짧은 시간 동안 매일 글을 쓰는 것이 가끔 오랫동안 쓰는 것보다 창의력이나 생산력 측면에서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발적으로 편안하게 "몇 분 동안 글 쓰는 시간"을 최대한 자주 가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한다. 15분 글쓰기가 습관으로 잡히면 자신감도 생기고 더 길게 쓸 수 있게 된다고.
(당연히 매일 15분만 써서 되는 것은 아니고)
그 밖에 중요한 내용이 몇 개 있는데,
글 쓸 시간과 공간, 에너지를 확보하라는 것이다.
공간은 정돈되고 혼자만 보낼 수 있는 글쓰기 공간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시간과 에너지는 삶에서 우선 순위를 정해서 중요한 것 (여기서는 글쓰기)에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할애하라는 것이다.
"가장 좋은 시간과 가장 좋은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일에 소중하게 쓰자."
(그러니까 내가 이 부분이 특히 문제가 있었던 것인데, 나에게 가장 좋은 시간 그리고 에너지를 요즘에는 알라딘 서재 혹은 페미니즘 책읽기에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보다 이 부분이 더 재미있고 또 이 일에 더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데, 이제 필요에 의해서 각성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 사실 어느 정도 도피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또 도피가 최근의 일만이 아니기도 하고)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건 폭식하듯이, 지칠 때까지, 쓸 말이 바닥날 때까지 글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매번 자신이 소모되기 전에 글쓰기를 멈추고, 다음 글의 출발점이 될 지점을 표시해두고 (메모하고), 다음 날 다시 돌아가라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여전히 기운이 남아 있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때까지만 쓰고 멈춰라."
마지막에는 대중 학자를 위한 글쓰기라는 작은 챕터가 붙어 있는데, 최근 십 년 정도 사이 대중 학자들이 책을 내거나 글을 기고하고 방송에 등장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시대의 요구랄까. (그래도 그런 책들 중 여전히 <코스모스>가 최고인 것 같다) 나도 계기가 있어 아주 작은 시도를 해 본 적이 있으나... 그런 글을 쓴다는 건 학문적 글을 쓰는 것보다도 더 어렵고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일이더라.
추천하거나 인용하는 책이나 논문은 한국에 출판된 것이 별로 없다. 두 권이 있는데 둘 다 품절이지만 참고하실 분들을 위해 올려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