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것.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세상의 아이들,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다.”
-구정은, <값싸게 쓰이다 버려지는 노동> 중,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후마니타스, 2018)

연말이면 본 책들을 다시 보거나 사놓고 보지 못한 책들을 건드리게 되는데 이 책은 올해 만난 내 책. 내가 좋아하는 책은 인용할 수 없는 책. 책 하나에서 끝나지 않고 도대체 이 사람은 무슨 책을 옆에 두었을까 궁금한 책. 책의 내용은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고 싶고, 참고목록은 내가 읽어온 것들과 겹치지만 빵과 벽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인간 없는 세상, 새로운 생명의 역사, 위기와 분쟁의 아틀라스 등 읽어봐야지 다짐하게 하는 책. 책에 오탈자가 하나도 안 보이고 참고문헌과 찾아보기, 사진자료까지 책의 형식에 충실한 책. 그러니까 책! 구정은 (Ttalgi Koo) 언니, 내가 편집자라면, 번역자라면 이 책을 번역해 해외로 내보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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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울음은 깊고도 고요했다. 소리를 악물고 깊이 자기 안으로 울음을 밀어 넣고 있는 모습이 처음 봤을 때의 그 자세와 같았다. 그가 다가가 여자의 등을 어루만졌다. 울어요, 크게 소리 내서 울어도 돼요. 여자의 몸이 흔들리면서 그의 품으로 들어왔다. 오랫동안 잠을 못 잤어요. 밤과 낮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견디다가, 겨우 수면제에 의지해 눈을 붙여도 불현듯이 잠이 깨요. 안간힘을 쓰며 버티다가 겨우 여기까지 와요. 누군가 한 사람은 내 얘기를 들어줄 것 같아서. 여자의 말은 혓바닥이 잘린 듯 끊어졌고, 말의 상간엔 울음이 치고 올라와 몸을 떨었다.

(...)

여자는 울음을 그치고 넝쿨처럼 두 팔로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섹스는 어둡고 슬프기도 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여자의 몸에서 순간순간 냉기가 느껴졌다. 여자는 죽은 남편의 허상을 껴안고 뜨거운 여름을 건너왔을 것이다. 그가 이마를 쪼는 불볕의 사양을 힘겹게 건너왔듯 어쩌면 여자가 견딘 것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세부와 이유를 가졌든 때때로 이 삶이 내 것인가 순간순간 의심하고 불안했던 것처럼, 그는 오랫동안 혼자의 시간을 견디며 이 순간까지 다다랐다.

사랑한다는 말은 해줄 수 없지만, 그는 여자를 깊이 안았다. 그리고 더 뜨겁고 순전하게 욕망의 끝을 향해 빠져들었다. 어느 순간, 이것이 환영이 아닐까 싶을 땐 여자의 목을 조르고도 싶었다."

-홍명진, <해피크리닝> 중, 《당신의 비밀》(삶창, 2017)

 

*감각적이고 세련된 현대 소설의 바다에서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도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그 자체로 빛나면서 주변을 밝히는 반딧불이가 있다. 쓸쓸하지만 사라져가는 호타루를 만났을 때처럼 곁을 보게 하는 소설. 여럿이 같이 있는데 유독 외로울 때는 조용히 빠져나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을 때처럼 홍명진의 소설을 뒤적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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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주로 자신이 머무르는 거처나 집의 이름을 자나 호 대신 사용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출신 지역을 이름으로 사용하곤 했다. 앞의 것을 당호堂號라 하고 뒤의 것을 택호宅號라 한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도 당호를 사용한 이름이다. 사임당의 본명은 인선인데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름은 사임당이라는 거처하던 집의 이름이었다. 허균이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도 본명은 초희이지만 자신이 머물던 작은 집의 이름인 난설헌으로 더 유명해지게 되었다. 이는 궁중의 여인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빈궁도 자신이 거처하던 궁의 이름을 따 혜경궁 홍씨로 알려져 있다.”

-김대현, 당신의 징표(북멘토, 2018)

 

*읽다가 무릎을 친 부분이다. 조선 시대에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여성들은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는 기생이거나 자기만의 방을 가진 여성들이었다는 점을 연결하는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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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꿨어요. 그즈음엔 매일 밤 꿈을 꿨던 것 같아요. 형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있는 그런 꿈. 어둠뿐인데 소리가 들렸죠.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는 듯했어요.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고. 짐승이 보이지 않는데 짐승의 소리가 났어요. 고양이 울음소린가 하면 오소리 발자국 소리로 변했어요. 후드득! 저건 물결을 차고 날아오르는 가마우지의 날갯짓을 닮았어요. 간혹 미끄러운 소리도 들렸어요. 네, 미끄러운. 소리에도 촉감이 있답니다.

(...)

한번은 고막이 찢길 듯 지나치게 높고 큰 소리가 들렸어요. 아주 절박한. 포식자에게 쫓기고 있는 짐승이었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 절박한 소리를 낼 리가 없으니까요. 뒤엉킨 소리를 헤치고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저마다 감정이 숨어 있어요. 슬픔 비슷한. 그래서 모든 감정은 슬픔으로 환원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죠."

강진, <멸종의 기록> 중, 《하티를 만난다면》(강, 2018)

 

*콜센터에서 일하는 내가 “소리를 들을 수 없어 멸종된 동물이 있다”는 오래 전 당신과의 통화 기록을 돌려 들으며 동물의 뼈를 맞추듯 '이야기'의 원형을 복원하고 짜맞추는 장면이 멋지다. 강진 소설가의 소설을 처음 보는데 이야기가 풀리는 방식과 단백한 문체에 막 빨려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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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도 종종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이를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그를 떠올리면 꽃에게 물을 주고, 화산을 쑤셔주고 활화산에서 밥을 해먹는 어린 왕자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몸을 동그랗게 구부려 아주 작은 별을 껴안은 채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모습만 생각난다. 꼭 그러고 있을 것만 같다.

오늘도 나는 수평선을 향해 배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왔다.

-한창훈, <네가 이 별을 떠날 때>(문학동네, 2018)

 

 

*그러고 보니 어린 왕자는 바다를 본 적이 없겠지. 작가는 일만 번 걸어본 바닷가에서 그걸 주운 게 아닐까. 그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다는. 수평선으로 사라진 것들의 아련한 것들을. 모래사막의 코끼리 말고 “바다가 뭐야?” 묻는 소년에게 물고기 그림을 그려주는 생텍스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물고기를 만나러 바다로 들어갔던 어린 왕자와 함께 수평선을 오래 바라보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려지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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