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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에세이>

. 하명희(소설가)

 

마음을 건드리는 말

 

 

소위 지나간 아름다움이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으며 매혹시킨다. 폐허에는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다.” 로베르트 발저, 빌케 부인, 산책자(한겨레출판, 2017)

 

 

 

마음이 복잡할 때는 우선 문을 열고 나온다. 복잡한 마음을 데리고 나오든 문 안쪽에 두고 나오든 문을 열고 나온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로 갈까. 지하철 타는 걸 좋아하지만 문에서 나와 또 문으로 들어가는 게 싫을 땐 걷는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발이 가는 데로 몸을 옮긴다. 발은 처음엔 익숙한 곳으로 나를 이끌지만 어느 정도 걷다보면 시간을 거스른 곳에 내가 있다. 그 시간과 공간은 대개 골목이거나 사잇길이거나 고양이 꼬리를 따라 움직이는 다른 시선이 머무는 곳이다.

1월 중순, 무턱대고 집을 나와 지하철 2호선이 머리 위로 지나가는 아랫길을 따라 걸었다. 중간에 지겹거나 힘이 들면 다음 역까지만 걸어가 지하철을 타면 되는 안전한 길이다. 그 길에는 아무도 버스를 기다릴 것 같지 않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고, 그 앞엔 누군가 버려놓은 소파가 있다. 한 번도 그 소파에 앉은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그날은 누군가 있었다. 그는 두 겹 세 겹의 옷을 껴입고 손가락 마디가 잘린 장갑을 끼고 있었다. 소파에는 두 개의 종이가방이 있었는데 그는 검정 비닐봉지를 하나씩 꺼내 소파에 늘어놓다가 다시 종이가방에 넣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려면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듯 뒤지다가, 그만 목적을 잊고 비닐봉지 개수 세기에 빠져버린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금속 공장을 바라보았다. 그 앞 길가에 있는 용접기에선 불꽃이 튀고 있었다. 얼굴에 용접용 마스크를 낀 한 할아버지가 엉덩이를 쳐들고 철과 철을 이어붙이고 있었다.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꼬스름한 용접 향이 났다. 무언가를 이어 붙이는 일엔 불이 튀고 향이 난다. 그렇게 이어진 철을 다시 끊어놓으려면 또 한 번의 불꽃이 튀겠지. 그때도 꼬스름한 향이 날까.

그때 비닐봉지를 세던 그와 시선이 부딪혔다. 비닐봉지를 뒤지던 그도 용접 불꽃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나 사이를 이어 붙일 만한 뭔가는 없었지만, 그 잠깐 사이 나는 그가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고 느꼈다. 나도 절로 그를 향해 답례하듯 목례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하던 일, 그러니까 비닐봉지를 꺼내 도로 넣는 일로 돌아갔다. 나는 멋쩍어서 혼자 웃었다. 이럴 땐 복잡해진 마음 따위 잊고 다른 놀이에 빠져들게 된다. 비닐봉지를 뒤지는 그처럼 발길이 먼저 다른 곳에 닿는 것이다.

 

작은 길을 따라

발길은 전철역 구간을 빠져나와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 한강으로 이어지는 쪽으로 향한다. 뚝방길이다. 그래, 여기 유한양행이 있었지. 저녁이면 하얀 모자를 벗고 철문에서 쏟아져 나오던 사람들. 그 길엔 밥집이 많았고 저녁 불이 켜지는 포장마차가 늘어서 있었지. 포장마차가 끝나는 곳의 골목을 끼고 돌면 키 큰 나무로 자란 쥐똥나무 열매가 후드득 떨어졌어. 쥐똥 같은 열매를 주워 던지던 친구네 집이 여기 어디 있었는데. 이럴 땐 발이 기억을 따라온다. 친구네 집이 있던 골목을 지나쳐 누런 겨울 풀들이 넘어진 공터 앞에서 멈춘다. 기억이 무언가를 기억해내듯 이끈 길이다. 방금 전 내가 친구네 집을 기억했듯 누군가도 내가 살던 집을 기억해내고는 이 공터 앞을 서성일까.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하며 두리번거릴까.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은 앞뒤로 열두 가구 셋방이 붙어 있던 판잣집이었는데, 얼마 전 그곳은 공터가 되었다. 집주인은 없고 땅 주인만 남았기 때문일까. 그래도 버젓한 주택가로 변한 동네에서 꽤 오래 버틴 셈이다. 버려진 냉장고가 쓰레기를 담고 입을 벌리고 있는 곳, 도주하듯 급하게 이사 간 것처럼 책장이 넘어져 있고 이불이 풀들을 덮고 있는 곳, 방과 방을 구분하는 벽이었을 여기저기 떨어진 나뭇조각들. 이곳에 집이 있었다는 걸 누가 알까.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들은 이 집을 떠나 어디로 갔을까. 공간과 사물과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선 낯선 감정들이 생겨난다. 지나갔으되 마음을 건드리는그 자리에선 폐허의 감각이 돋아나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길로 연결되기도 한다. 공터에는 이쪽과 저쪽으로 넘나들며 죽어가는 풀들을 눌러놓은 작은 길이 나 있다. 나는 집이었던 공터에 생긴 작은 길을 따라 찻길을 건너 뚝방에 올랐다.

철과 철이 만나는 곳엔 꼬스름한 용접 향이 피어나지만, 한강과 작은 강이 만나는 곳엔 모래턱이나 다리가 생겨난다. 서울에서 돌로 된 가장 오래된 다리인 살곶이다리 위로 자전거가 한 대 지나가는 게 보인다. 살곶이다리를 건널 수도 있지만 나는 이번에는 다른 길로 걷기로 한다. 성동교 중간쯤에서 한강으로 가는 물길을 좇으면 작은 모래턱이 보인다. 모래턱에 있던 새들이 물길을 거슬러 날아오른다. 새들을 따라 중랑천변으로 눈길을 돌리면 성수동과 신설동을 오가는 전철이 보인다. 다리 반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다. 나를 스쳐 지나간다. 나는 새들이 날면서 허공에 똥을 싸듯 퉤, 내 앞에 침을 뱉는다.

열일곱이었나. 이 길에 서면 그 시절 여섯 달 동안 아르바이를 해서 산 내 마이마이가 떠오른다. 반대편에선 나보다 한두 살 많은 무서운 언니들이 오고 있었지. 그들은 방금 전 내 옆을 지난 사람처럼 그저 스치지 않고 내게 말을 걸었어. , 그거 내놔. 대답할 새도 없이 그들은 새것으로 반짝이는 하얀색 마이마이를 낚아채고는 제 것처럼 가방에 넣었지. 안 돼, 그거 주세요. 내가 말했던가. 싫어, 그거 내거야, 했던가. 아니지,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고 그들은 지나갔지. 한번 지나간 것은 잡을 수 없다는 듯, 노래처럼 경쾌한 발걸음으로 키득대며 내가 왔던 방향으로.

뒤를 돌아본다. 그사이 30년이 지났다. 30년이 지나도 그때의 저릿한 마음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들은 모르겠지. 내가 그 이후로 욕망을 지우고 숨기며 살았다는 것을. 가지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봐도 눈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빼앗길 수 있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는 걸. 이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 기억이나 추억으로 부르기에는 아린 감각이다. 나는 새의 위치, 허공에 뜬 것처럼, 이 길을 지날 땐 그래도 된다는 듯 30년 전엔 뱉지 못한 침을 또 한 번 뱉는다. 사방으로 몰아치는 강바람이 내 뒤로 침을 옮겨놓는다. 핸드폰으로 그때 다 듣지 못한 노래를 찾아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한양대역으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 발렌슈타인의 보편적 엄마, 유니버셜 마더가 떠다닌다.

 

책방이라는 헤테로토피아

그 길에서 침을 뱉어서일 것이다. 30년 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 어느 날 문득 그 길에 섰을 때, 그때로 돌아가면 가장 해보고 싶었던 일. 그것을 마음대로 해버렸으므로 그날의 부대낌이 지하철을 타고 이곳에 내리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그날 내가 폐허가 되어버린 옛집을 보았으므로, 그 사이로 난 작은 길로 건너왔으므로 생긴 변화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내 기억은 30년 전 처음 그 책방으로 향하던 발길을 되돌아 걷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책방이 있는 대학 쪽으로 걸었다. 유난히 몸통이 굵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그 골목의 대장처럼 서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2층은 원서, 1층은 인문사회과학 서적이라고 씌어 있는 예전 간판에 전화번호 역시 예전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맞은편 지하로 자리를 옮겼지만 오가는 사람들이 들어와 가방을 맡기거나 게시판에 메모를 남기곤 했던 곳. 고등학교 시절 이 책방은 다른 학교 친구들과 만나는 만남의 장소였고, 연락을 남기던 아지트였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종일 앉아 책을 보는 도서관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이제는 사라져버린 판잣집에는 없던 책들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생겨나는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이 책방이 문을 닫는다고 들었다. 철거되어 공터로 남은 옛집과는 다르게 이 책방은 왜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을까. 책방 이름이 박힌 녹색 간판에는 since1985라고 적혀 있었다. 녹색 간판에 빨려 들어가듯 나는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자신을 풀벌레라고 부르는 책방 주인이 인사를 건넨다. 스물여덟에 이 책방에 들어와 지금은 쉰넷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내가 이곳의 오랜 손님이었다는 걸 알아보고는 소식 들으셨죠? 책방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요, 라고 말했다. 손님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내 기억일 뿐 나는 1년 만에 이 책방에 다시 온 거였다.

-26년 동안 여길 지키셨잖아요. 아무도 못 하는 일을 하신 거예요.

그에게 인사를 하려고 들른 갈색 모자를 쓴 중년의 남자가 나 대신 끼어들었다.

-저는 오늘 부산에서 왔거든요. 기사 보고 꼭 한번 와보고 싶어서 지금 대학 입학 결과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랑 같이 왔어요.

이번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는 부산에서 온 청소년들도 한마디 얹는다.

그들이 나누는 얘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책장을 둘러보았다. 출입문 옆에는 청색이 바래 옥색이 된 바탕에 흰 새와 검은 새가 그려진 포스터가 붙어 있다. 이곳을 들락거리면서도 그동안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은 포스터다. 포스터는 1990421일에 연극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가 상연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제야 떠올랐다. 책방에 붙은 이 포스터를 보며 이 연극 보고 싶다고 친구와 나누었던 열일곱 살의 대화. 풀벌레는 찻길 건너편에 있던 원래 공간의 흔적을 이렇듯 지금의 서점 곳곳에 옮겨놓은 거였다. 포스터만으로도 이곳의 시간은 기억이 고이고 열리는 다른 공간, 헤테로토피아(Les Hétérotopies)가 된다. 푸코에 의하면 유토피아는 뭔가 거창한 목적과 당위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의 공간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다락방과 광장, 정원과 양탄자, 영화관과 묘지, 목요일 오후 부모의 커다란 침대 같은 것들이다. 그는 이런 현실화된 유토피아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공간과 시간이 뒤섞이는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책방에 들어왔을 때 훅 끼친 책 먼지 냄새, 기억을 되찾게 해준 포스터만으로도 이곳은 내게 열일곱 살로 돌아가는 헤테로토피아가 된 셈이다.

 

마음을 건드리는 말

포스터 옆 책장 하나에는 녹색평론사의 책들이 꽂혀 있다. 시내의 대형 서점에서는 볼 수 없는 컬렉션이다. 그 옆엔 풀방이 있다. 계단 아래 공간을 방으로 만들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지하의 다락방 같은 곳이다. 책방에 온 손님들이 책 읽기 모임도 하고 토론도 하는 방이라고 했다. 벽에는 철학이란 철학을 넘어서기 위한 도구이다라는 낙서가 붙어 있다. 풀방 옆에는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맞은편에 있던 책방의 책장을 뜯어 와 80년대 서적을 꽂아놓은 공간이 있는데, 노동 등을 다룬 인문사회과학 서적뿐 아니라 북한 문학이나 시집까지 80년대 금서를 아우르고 있다. 내가 책방을 둘러보는 동안 풀벌레는 책방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들른 손님들과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책을 몇 권 뽑아 의자에 앉았다. 열린 문으로 꽃무늬 스카프를 두른 키 작은 여자가 들어와 책장 사이를 돌며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게 보였다. 풀벌레는 인사를 건네며 찾는 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그냥 천천히 둘러보겠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보았던 포스터를 살피다가, 녹색평론사 책꽂이에 꽂혀 있는 케스매와 소년을 만지작거리다가, 풀방을 지나 80년대 책꽂이 앞을 서성이며 책을 꺼냈다 넣고 다시 꺼내기를 반복했다. 시집이 꺼내졌다가 끌로드 모르강의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이 펼쳐졌다가 했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 90년대 초에 나온 북한 SF 소설인 푸른 이삭을 지나 새 책이 진열된 매대 앞에서 손가락으로 책등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동작이 비닐봉지를 넣었다 빼고 다시 넣던, 마을버스 앞 그의 행동과 닮아서 유심히 지켜보던 나는 서점 판매원을 가장하여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찾는 책이 있으세요?

-, 찾는 건 아니고요. 얼마 전에 느티나무책방에서 나온 책 읽는 모임에 관한 책인데, 책 제목이 뭐였더라.

-같이 읽고 함께 살다요.

-맞아요, 나무 색깔 표지였는데 있을까요?

나는 그녀가 한 것처럼 손가락으로 매대에 진열된 신간들의 책등을 하나씩 훑었다. 손가락 끝에 나무 색깔이 걸렸다. 책을 받아 든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실 책을 사러 온 건 아니고요, 그냥 이 책방에 한 번은 오고 싶었어요. 이런 곳이구나.

도시에서 책방은 멈춤의 시간을 준다. 나는 그녀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곳에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그녀가 먼저 물었다.

-혹시 퇴촌이라고 아세요?

-그럼요.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는 그녀가 이야기를 꺼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연애할 때 남편의 방에 가봤는데 방에서만 지내던 사람이라서 그 방이 제겐 무척 특별했어요. 남편이…… 어릴 때부터 장애가 있었거든요.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야말로 책방이더라고요. 그래서 언제든 이 책방을 바깥으로 열어두고 싶다 생각만 하고 있다가 결혼하고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불쑥 저질러버렸어요. 더 지나면 못 할 것 같아서요.

-퇴촌에서 책방을 여셨나요?

-아니요. 동네 도서관이요. 도서관은 책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줄 알고 앞뒤 안 재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하고 싶은 걸 하자 하고요. 그런데…… 얼마 전에 문을 닫았어요.

-유지하기가 힘드셨나보군요.

-그래도 제가 얻은 게 더 많더라고요. 5년 이웃들이 동네 친구가 되면서 베짱이도서관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진짜 베짱이처럼 기타 치고 노래하고 아이들 같이 키우면서 잘 놀았어요.

-저도 오늘 불쑥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그냥 발길이 이곳으로 끌렸어요. 저도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서점이라서 문을 닫는다고 하니까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그러다가 불쑥.

그녀는 불쑥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듯 눈주름이 잡히며 미소를 지었다.

-오래된 서점을 접는다고 해서 쓸쓸할 줄 알았는데…… 제가 기운을 얻고 싶었나봐요. 같이 읽고 함께 살다, 이 책을 읽을 땐 이곳이 떠오르겠어요.

그녀는 책을 사고 나가면서 다음 달에 또 들르겠다고 했다. 풀벌레는 그녀가 산 책에 이 책방의 독서 모임도 소개되어 있다고 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꼭 다시 들르겠다고, 도서관을 접고 책 정리를 하며 많이 울었는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기운을 받았다고 했다.

그 말이 흔들리던 나를 붙잡았다. 철과 철이 만날 땐 꼬스름한 용접 향이 피어나고 한강과 작은 강이 만날 땐 모래턱이나 다리가 생기지만, 책과 사람이 만나는 서점에서는 시간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흐른다. 열일곱 살 내가 이 책방에 처음 왔을 때 느꼈던,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이상한 기운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던, 아무도 내게 간섭하지 않았던 이 책방에는 내가 모르는 자유를 가르쳐주는 이야기가 늘 배경처럼 흐르고 있었다. 나는 곧 문을 닫을 책방에 다음에 꼭 다시 오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깊은 의미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이곳을 기억하겠다는 말이었고, 30년 전 어느 날 내가 했던 말이었으며, 폐허가 된 공터에서 느꼈던 마음을 건드리는말이었다. 집이 허물어진 공터에도 고르게 햇살이 내려앉듯, 그 공터에 사람들이 지나며 작은 길이 생기듯, 책방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 또 다른 시간을 이어나갈 것이다. 이것은 내가 아직 배우지 못한 기억의 또 다른 방식이다.

그날 집에 돌아오니 책방에서 산 책이 가방에 없었다. 설마 하며 사진으로 찍어둔 예전 간판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풀벌레는 책을 챙겨놓을 테니 언제든 와서 찾아가라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배운 말로 다음 달에 꼭 가겠다고 했다. 이날 우리는 처음으로 30년 전의 전화번호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보보담> 2019.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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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하는 사람들

 

 

1.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가 모임(최사모) : (노순택, 정택용), 박승화, 이승훈, 홍진훤, 조우혜, 박김형준, 이우기, 최인기

2.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비정규직대책 한국교회연대 : 박정범 목사

3.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 양한웅 집행위원장

4. 십시일반 음식연대 : 유희

5. 파견미술팀 : 전진경 작가

6. 밥통 : 손지후 매니저

7. 사회적파업 연대기금(사파기금) : 김영아 운영위원

 

           

1. 빛에 빚지다,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가 모임

 

(사진 1) :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가 모임 2016년 달력,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2009년 용산참사를 기점으로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가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한 해의 사진들을 모아 달력을 만든다. 2010년에는 기륭전자 해고노동자들, 2011년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2012년에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 2013년에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동자들, 2014년에는 밀양, 강정, 청도, 그리고 2015년 이들은 연대했던 사람들을 위한 연대의 달력을 만들었다. 이들이 만드는 달력의 이름은 빛에 빚지다이다. 사진가들에게 빛은, 빚은, 연대란 뭘까? 한 달에 한 번씩 정기모임을 하는 자리에서 물었다.

요즘 이런 얘기를 많이 들어요. 최소한의 연대! ‘최소한의 변화를 위한 사진가 모임이라는 이름을 접했을 때도 그랬어요. 이분들은 연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예전에 우리가 생각했던 저항이나 연대와 같은 거창한 무엇이 아닐 것 같은데, 그렇다면 뭘까. 다시 물을 게요. 최사모 회원들, 아니 사진가들에게 연대란 뭔가요?”

같이 행동하는 거긴 한데, 우린 딱히 연대라기보다는 우리 모임 자체가 연대가 아닐까 싶어요. 여기서 뭔가 해보자, 하는 것들이 생겨나거든요. 힘도 되고. 우리가 힘을 받으니까 바깥으로 카메라를 들이밀 수도 있고, 오고가는 거죠.”(이승훈)

정주하지 않고 떠나는 거. 그게 우리한테는 중요해요. 작업을 하려면 대상과 만나야 하니까.”(박승화)

사진 작업 자체가 풍경이나 사람에 대한 착취거든요.”(홍진훤)

왜 그렇죠?”

우리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작업을 하거든요. 예를 들어 투쟁 현장에 있으면서도 사진가는 싸울 수가 없어요. 찍어야 하니까. 찍히는 쪽 입장에서는 싸워야 하는데 거기다 카메라를 들이미니까 굉장히 화가 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해요. 내 식으로 그 순간을 찍거든요. 대상에 대한 착취라고 할 수 있죠.”(홍진훤)

다른 분들은 어떠세요?”

기록을 남긴다는 의도에서는 빚지다는 게 맞는데, 이걸 돌려준다는 것은 피난처, 면죄부, 또는 자기 위안일 수도 있어요. 철저하게 외로운 작업이고.”(박승화)

사진을 여러 장 찍고 그걸 쫙 펼쳐놔요. 그러면서 고르죠. 고르고 나면 어떤 목소리가 있단 말이에요. 처음부터 의도했던 건 아니고, 작업물을 보면서 다시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런 거요. 다시 생각해보는 고민들을 이 모임에서 다시 공유하거든요. 이런 것도 연대 아닐까. 아니면 같은 자로 연습이라고 해도 좋아요.”(조우혜)

관심 가는 곳에 내가 있는 거죠. 거기 카메라가 있고. 내 관심을 따라가는 건데, 그걸 보여주고 싶더라고요. 사진가는 직접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걸 기록할 수는 있잖아요.”(박김형준)

관심을 가지는 게 연대 아닐까. 어떤 의미에서는 활동가들처럼 기록으로 사회문제를 보여주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거니까.”(이우기)

나는 이제 사진을 배우는 사람으로 조금 겸손하게 접근하고 싶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을 보는 게 연대라고 말하면 좀 그런가? 그런 걸 찍는 거고.”(최인기)

  

  

 

 

 

 

 

 

 

 

 

 

 

 

 

 

 

 

 

 

 

2. 우는 자와 함께 울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비정규직대책 한국교회연대 박정범 목사

 

(사진 2) : 동양시멘트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하는 사순절 금식기도회

 

“‘교회가 위기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종교의 종교 없음에 대한 탄식일까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주일날 예배가 잘 안 되는 거죠. 예전 같으면 청년예배라고 해서 청년들이 모이고 고민하는 활동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청년들이 알바 하러 가야 하잖아요.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는 거죠. 또 하나는 중년층들도 비정규직인 분들이 많으니까 예배 참석뿐 아니라 교회에 헌신할 수가 없어요. 불안한 노동을 하다보니 가계도 불안하고 주일에 쉬어야 하는데 시간을 낼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 마음도 불안할 수밖에 없고요. 주일 예배를 지킬 수 없으니 교회의 위기라는 말이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거죠.”

비정규직의 문제가 노동이라는 거대한 틀뿐 아니라 교인들의 현실이고 교회의 문제가 되는 거네요.”

그렇죠. 종교라는 게 우리가 고독한 존재이고 그것에 대해 철학하는 시간을 가지고 사색하게 하거든요. 교회에 대한 헌신도 그 사색을 통해 오는 거고요. 그런데 사색은커녕 예배에 참석할 시간도 없는 이런 시대에 돌입해 있단 말이에요. 우리가 비정규직 문제에 주목하고 활동하는 건 어떻게 보면 사회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먼저 그동안 적재되어 있던 교회의 문제, 외면해왔던 노동의 문제에 다가가보자는 의미가 더 큰 거죠.”

저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비정규직대책 한국교회연대를 출범했다고 했을 때 교회의 사회적 연대, 그러니까 교회 밖으로 나아서 사회문제에 동참하는 것들을 떠올렸는데,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 있는 거네요.”

우리의, 그러니까 교회의 문제로 바라봐야 하는 거죠.”

작년 11월에 출범하고 아직 1년도 안 되었잖아요. 그동안 어떤 활동을 하신 거죠?”

우선 출범 전에 준비모임에서 비정규직 이야기 마당을 마련했어요. 알바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세 분을 초청해서 간담회를 하면서 한 분당 12명의 청중단을 사전에 모집했어요. 청중단을 미리 신청 받아서 이후에도 그분들과 이어지도록 하는 거였죠.”

새로운 간담 방식이네요. 다른 활동들은 어떤 게 있나요?”

지역 순회 기도회도 있습니다. 4회 정도 기획하고 있고요. 올해는 대전과 전주에서 그 지역의 비정규직 센터와 연계해서 한두 명을 교회에 보냅니다. 그러면 그 교회 상임목사님이 비정규직에 관한 전체 설교를 하고 비정규직 센터에서 오신 분들이 현장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신도들이 다 함께 기도하는 거죠. 기도가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직접 접하고 신도들의 기도가 더해질 때, 무언가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장으로 가는 것보다 노동의 문제를 교회로 끌고 들어오는 거네요. 신도들이 있는 교회로.”

그렇죠. 올해는 1113일 전태일 열사 기념일이 주일이에요. 그래서 그날을 비정규 노동자들을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고 공동기도 주간으로 하는 일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전체 공문으로 나가는 거라면 엄청난 일이네요. 목사님이 생각하는 연대란 뭔가요?”

“‘우는 자와 함께 울라.’ 로마서 1215절 말씀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연대는 정화(淨化)와 같습니다. 우는 자가 있는데 우리는 그들이 왜 우는지를 몰라요. 아니 우는 자가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기도 해요. 그것이 지금 종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는 자들을 만났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들과 함께 울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우리가 하는 일은 우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주변을 보게 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인 거죠.”

 

 

3. 인연의 끈을 연결하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양한웅 집행위원장

 

(사진 3) : 노동법 개악 정리해고 반대 오체투지

 

이전에 불교계에서 노동위원회라는 기구를 결성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전혀요. 처음 있는 일이지요.”

작년에 출범한 한국교회연대도 정식 명칭이 비정규직대책 한국교회연대예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인권연대라는 분과는 있는데 교회에서도 비정규직대책이라는 공식 명칭을 띠운 것은 처음이라고 해요. 그만큼 노동의 문제, 특히 비정규직의 문제가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거겠지요.”

그렇습니다. 저희가 처음 노동위원회를 결성할 때가 한창 쌍용자동차 문제가 터지던 때였어요. 노동권을 지키겠다는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하나씩 죽어나갈 때, 노동이 종교에게 말을 건 거지요. 생명을 설파하고 마음의 안식을 줄 수 있는 종교가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 그런 물음들이 저희에게 답하게 만들었어요. 철도 노동자들도 그렇지만 한진중공업 크레인에도 사람이 올라가 있고. 시급했습니다.”

그런 노동위원회가 올해 초에 이름을 바꾸었죠. ‘사회노동위원회라고.”

저희가 만 4년 반 동안 활동을 해보니 노동만으로는 안 되는 거죠. 노동의 문제가 노동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유성기업, 세종호텔, 동양시멘트, 하이디스와 같은 장기투쟁장에 법회로 참여하는 것뿐 아니라 빈곤, 장애인, 성소수자, 인권, 국가폭력의 현장과 결합하는 일들을 꾸준히 해오고 있거든요. 그간 활동 중 송파 모녀의 자살 사건을 접하고 사회 빈곤층에 대한 법회와 추모제도 계속 하고 있고요.”

그간의 활동을 더 알고 싶은데요. 제가 인상 깊었던 것은 불교가 할 수 있는 일 중 노동자들의 쉼과 쉼터를 제공하는 일이었어요. 소위 위안부할머니들의 쉼터로 나눔의 집이 있고, 쌍차 투쟁에서는 와락, 세월호에서는 이웃, 그리고 지금 자금을 마련하려고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쉼터로 꿀잠이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조계종에서 싸움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도반을 만든 이후 어떻게 운영되는지 궁금합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쉼이 되어야 하거든요. 쉴 시간이 있어야 마음의 안식도 얻고 위로도 받을 수 있지요. 그런데 투쟁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분들을 보면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있어요. 그런 상태로는 서로에게 힘이 될 수가 없죠. 저희는 그분들에게 쉴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었습니다. 실제 도반은 비구니 스님이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경청으로부터 시작해요. 그러고는 쉼이 필요한 활동가들이 서로 어깨를 주물러요. 몸을 만지는 건데요, 이게 그간의 긴장을 풀어줍니다. 그런 다음은 방목(放牧)이에요. 쉬어도 좋고 책을 봐도 좋고 이야기를 나눠도 좋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요. 저는 그걸 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종교가 할 수 있는 마음을 확장하는 방법입니다.”

“12일이 너무 짧은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위원장님에게 연대란 뭔지 묻고 싶어요. 불교에서 말하는 연대란 뭔가요?”

종교가 가진 의무입니다. 종교는 사회적 약자, 권력으로부터 상처 입은 사람들을 보듬어야 하거든요. 그들을 위해 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사랑 받는 것이 종교의 의무입니다. 스님들은 오랜 동안 산사에서 생활하면서 세상사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있어요. 어리석은 중생아, 그러면서 가르치려고만 하면 쉬운 말로 꼰대가 되는 거죠. 세상사에 다치고 헤매는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마음공부를 하는 수행인데, 그러기 위해서 불교의 인연(因緣),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끈으로 연결하는 거지요. 그게 연대가 아닐까요?”

 

 

4. 하늘이고 힘이고 사랑이 되는 밥, 십시일반 음식연대유희

 

(사진 4) : 갑을오토텍에서 400인분의 음식을 배식하는 유희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400인분의 음식을 준비하세요? 식재료 준비하고 손질하고 운반하고 배식하고 뒷정리까지 하려면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실 텐데요. 그 많은 일을 혼자 하신다고 들었어요.”

알음알음 도와주는 분들은 늘 있어. 얼마 전부터 십시일반 음식연대라고 누가 명함을 파줘서 내가 어디 간다고 페북에 알리면 주변에서 돈도 보내주고 일손도 보태주고 하더라고. 그래도 웬만한 건 혼자 하지. 엄마가 손이 크신 분이셨어. 동네에 자식이 감방 사는 아줌마가 있었는데, 나보고 이만큼 큰 시멘트 봉지를 들라고 하는 거야. 그때는 그런 봉지에 쌀을 가득 담으면 몇 달은 살았을 거야. 그런 봉지를 들라고 하고 그 집에 가져다놓는 거야. 지나가다 거지가 있으면 꼭 나보고 돈 몇 푼이라도 나눠주라고 그러고. 그때는 몰랐는데, 엄마한테 배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손 큰 거. 나누는 거. 또 하나는 밥이 그냥 밥이 아니라는 거. 그때 그 사람들의 눈빛을 봤던 것 같아. 절박한 눈빛, 그게 뭔가로 채워질 때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지.”

어릴 때 본 그분들의 눈빛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니 밥이 하늘이라고 하신 말씀이 더 크게 다가와요.”

밥은 하늘이고 힘이고 사랑이다! 연대가 뭐냐고 물었잖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어. 근데 내가 말하고도 괜찮은 것 같아. 말해놓고 나니 진짜 그런 것 같더라고.”

어디로 밥을 해갈지 계획을 안 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비정규직 관련 연대자들을 만나는데 약속 잡기가 제일 힘든 분이셨어요. 정해진 게 없다고 하셨죠? 그때 가서 가고 싶은 데로 가니까 그때 연락하자고. 오늘도 갑자기 나 콜트-콜텍 농성장에 옥수수 쪄서 간다. 올 거면 그쪽으로 와라.’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거고요.”

내가 조직 활동도 해봤고, 장사도 해봤고 길거리 포장마차도 해봤잖아. 투쟁장에 밥을 해가면서 몸에 익은 것 중에 하나야. 계획을 하면 즐거움이 사라진다고 해야 할까. 내가 힘들고 짜증나서 한 밥은 신기하게 사람들도 알더라고. 그런 밥은 힘이 안 나는 거지. 그러면 다시 내 힘도 빠지는 거야. 그런 거 뭐 하러 해? 돈 들이고 품 들이는데 마음까지 넣어야 그게 밥이지. 그런 게 서로 힘이 나게 하는 밥이라고. 그런데 계획을 짜면 일은 잘 돌아갈지 몰라도 그쪽도 지치고 나도 지치더라고. 일이 돼버리는 거지. 그래서 자유롭게 즐겁게, 가고 싶은 데로 가자. 그렇게 하는 거지.”

“1989년에도 전국노점상연합에서 활동하셨지요? 저희 엄마도 그때 포장마차를 하셨는데 거리정화로 매일 포장마차를 뺏기고 찾아오고 그러던 때였어요. 근데 언제부터 투쟁장에서 밥을 하신 거예요?”

“1995년인가, 최정환이라고 리어카에 카세트 싣고 파는 사람이 있었어. 그때도 거리정화로 상인들을 쓸어버릴 때였지. 그 사람이 척추장애로 휠체어 타고 장사를 했거든. 그 사람한테는 리어카와 카세트가 생계를 유지하는 전부였을 텐데 그걸 뺏으니까 살 수가 없는 거지. 그때 그 사람이 분신을 했다고. 내가 전국노점상연합회 문화국장 하던 때였어. 강남 성모병원이었나, 거기로 달려갔지. 근데 사람이 죽었어도 싸우는 사람은 먹어야 하잖아. 그때 처음 1천 명 밥을 했지. 밥솥 사고 큰 들통 사서 국밥을 해서 온 동지들한테 먹였는데 힘들어서 기절까지 했어. 그것이 시발점으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네.”

밥은 하늘이고 힘이고 사랑이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연대라고요. 좀 더 설명해주세요.”

내가 보기에는 이래 뵈도 별명이 울보. 내 마음에 뭔가 닿으면 울렁울렁 한다고. 밥 한 끼는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울음도 막아주더라고. 노래 같은 거지. 밥 먹으면서 노래까지 마음에 차면 힘이 생기지 않겠어? 그게 사랑이고. 그러니까 밥은 하늘이고 힘이고 사랑이 되더라고.”

 

 

5. 파견과 점거, 곁의 확장, 파견미술가 전진경 작가

 

(사진 5) : 콜트-콜텍 부평 공장 점거 후 벽에 그린 낙타 그림

 

“‘파견미술이라는 단어가 생소해요. 파견미술팀은 언제부터 생긴 거지요?”

파견미술팀이라기보다는 현장에 가면 항상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더라고요. 저의 경우는 2006년 대추리에서 비슷한 작업을 하는 분들을 많이 만났고, 기륭전자에도 결합했었고, 용산참사를 거치면서 현장이 작업장이 되는 경험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GM대우 부평공장에서 하청 노동자들이 싸울 때 천막에 그림 그리고 전시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는데 이윤엽 판화가가 노동자들 쪽을 보면서 우리도 파견미술가라고 할까?’ 그런 농담을 던졌어요. 생각해보니까 진짜 그래요. 우리는 스스로를 현장으로 파견시킨 거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예술이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래? 진짜 우리 파견 나온 것 같네.’ 누군가 맞받아치더라구요. 거부감이 없었지요. 자연스럽게 현장에서 만들어진 이름이지요.”

“2012년 콜트-콜텍 부평 공장을 점거하셨잖아요. 그곳 분들이 스카시1라고 부른다면서요? 그때 벽에 그린 낙타 그림이 저한테도 큰 울림이 있었어요. ‘저 사람들 대단하다, 그런데 무섭지 않을까?’ 낙타 그림이 그런 걸 전달하더라고요. 어때요? 실제로 불법점유를 한 건데 무섭지 않으셨어요?”

스쾃이 발음하기가 좀 그러니까 아저씨들이 스카시라고 부르더라구요. 현장 분들이 나를 그렇게 편하게 대해주는 별칭이랄까요. 빈 공장 점거할 때 힘들었죠. 근데 대추리부터 용산을 거치면서 내 작업장이 밖으로 확장될 때마다 다른 것들로 채워지는 걸 느꼈어요. 새로운 무엇이 무서운 걸 이기는 거죠. 그 사이에서 예술이 비집고 태어날 때 굉장히 기뻐요.”

봄에 들어가서 7월에 부평구 갈산동 421-1 콜트-콜텍전전시회를 하고 얼마 안 가 침탈당했잖아요. 그때 제가 후회를 많이 했어요. 꼭 가보고 싶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다시 볼 수 없는 전시가 되었으니까요. 공간예술이란 게 이런 거구나, 그 과정이 다 담겨 있는 것이 그 전시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맞아요. 처음부터 전시회를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회사가 떠나고 빈 공장만 남은 곳을 제가 점거했단 말이에요. 그곳에서의 작업물은 그 시간뿐 아니라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 담고 있었던 거예요. 낙타 그림만 해도 건물주가 찾아와서 부랑자 취급을 하고 그러니까 내 화를 다스리기 위해 그린 거거든요. ‘나는 예술가 입니다로 시작하는 글을 벽에서 썼는데 벽을 볼 때마다 책임감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때 벽에다 낙서도 많이 했어요. 건물주가 수시로 용역분들을 보내는데 매일 항의하면 기운이 빠지잖아요. 그래서 벽에다 내가 할 말들을 적었지요. 어느 날은 그분들이 와서 자기들도 할 말이 없으니까 내가 나중에 건물주가 되면 당신 같은 작가가 들어가 작업하는 방 하나 내주겠다그런 농담도 던지고 그랬어요. 그런 모든 게 전시에 담기더라고요.”

그런 과정을 통해 관계가 생기고 매주 목요일마다 콜트-콜텍 드로잉데이를 하고 계신 거군요. 묻고 싶었어요. 미술가에게, 선생님에게 연대란 뭔가요?”

같은 편에 서는 것. 그리고 나의 곁을 확장하는 과정이 연대 같아요. 현장에 있는 것, 그것을 담아내는 것, 그들의 상황을 알려내는 것, 옳은 소리나 바른 소리를 외치는 것만이 연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이 생기더라고요. 이웃이라고 해도 좋아요. 그 곁과 내 작업이 만나는 곳이 현장, 내게는 작업장이고 그것이 교환되는 것이 연대 아닐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태도는 유동적이잖아요. 그 유동을 포착하되 에너지를 교환하고 확장하면서 서로의 삶을 배워나가는 것, 그게 연대 같아요.”

 

 

6.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끼어들게 만드는 밥,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밥차밥통손지후 매니저

 

(사진 6) : 삼표동양시멘트 천막 농성장

 

오늘은 몇 인분이에요?”

“50인분이요.”

올해 초였나요? ‘위안부문제에 대한 한일합의에 반대하면서 소녀상 지킴이로 나선 대학생들이 한겨울에 비를 맞고 한뎃잠을 자고 그럴 때도 음식을 해가지고 가셨잖아요. 세월호 2주기 때는 주먹밥 3천 개를 하셨고. 그 많은 음식을 준비하려면 손이 많이 갈 텐데, 재료 준비부터 배식, 설거지까지 품이 많이 들 텐데 따로 식당이 있나요?”

저희는 협동조합이에요. 조합원들이 출자해서 회의하고 준비하고 출동하고. 저는 그걸 총괄하는 매니저이고요. 출동 때는 '밥알단이라고 자원활동 그룹에 공지를 띠우면 그때마다 시간 되시는 분들이 오세요. 대규모 음식 준비는 과천에 중등무지개학교라고 있어요. 학교를 중심으로 무지개교육마을이 형성된 곳인데 그곳에서 주방을 열어주셔서 많은 음식을 준비할 때는 그곳 주민들이 품앗이로 나서주기도 하고 그럽니다.”

협동조합이라면 여러 명이 회의하고 계획하고 결정해야 하니까 아무래도 과정과 절차가 중요할 것 같아요. 장단점이 있을 텐데 밥통은 어떻게 만들어진 거지요.”

“2013년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제안을 하셨어요. 길 위에서 싸우는 많은 사람들이 밥 먹고 힘을 내야 하는데 부실하게 끼니를 때우는 게 마음에 남았던 것이죠. 협동조합인 밥통을 만들면서 저희는 원칙을 정했지요. 우선 단체 행사에는 출동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우리는 드러나지 않고 열악한 곳을 찾아가는 후방 지원이다. 이 두 가지 대원칙을 세우고 회의를 통해서 연대할 사업장을 정하고 있습니다. 출동 2주 전에 계획이 잡히기는 하지만 또 급하게 지원해야 하는 사업장일 때는 시급하게 결정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원칙을 세우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고 있어요. 대원칙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윤곽이 잡히네요. 밥으로 연대를 한다는 것은 선생님한테 무슨 의미인가요? 전직을 버리고 이 일에 뛰어든 계기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아요.”

대학생들한테 밥을 먹여야 한다고 출동했을 때였어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연일 엄청 추운데 그날은 비까지 내렸어요. 학생들이 밤새 그 추운 데서 덜덜 떨었구요. 그 친구들한테 밥을 해주는데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다들 한 가지씩 뭔가를 해요. 누구는 밥 먹는 아이들 다 먹을 때까지 우산 씌워주고, 또 여러 명이 비닐을 넓게 펴서 밥 먹는 동안 지붕 만들어주고, 또 누구는 밥차를 기웃거리다가 숟가락 가져다주고 설거지도 해주고. 그 추운데 다들 움직이더라고요. 흐르는 거지요. 밥이라는 게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먹는 만큼 그게 또 비슷하게 마음을 덥혀주는 거예요. 연대요? 가장 멋진 연대는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끼어들게 만드는 거요. 밥통이 오면 누구나 할 게 있어요. 집회에 참여하게 하고 접근성을 높이는 거지요. 밥 먹으면서 자연스레 이야기도 나누잖아요. 그렇게 좋은 연대가 어디 있어요? 저는 집회 참석했을 때 혼자 멀뚱히 있다가 씁쓸하게 가는 게 싫더라고요. 하다못해 밥이라도 먹고 가라그런 거지요.”

 

7.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돈 앞에 스러지지 않도록, 사회적파업 연대기금김영아 운영위원

 

(사진 7) : ‘사파기금, 5년 동안 뭐했니?’ 투쟁과 연대운동 평가 대토론회

 

얼마 전에 사파 5주년 행사를 했었지요? 201179일 희망버스에서 사회적 파업연대기금을 제안해보면 어떨까 하는 얘기가 나왔다고 들었어요. 제가 만난 연대자들도 그 전후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구상하고 제안하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더라고요. 그만큼 노동 환경이나 조건, 노동 구조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일 텐데요. 궁금해요. 외국에서도 이런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고 사회적 의제로 삼고자 하는 기금 형태의 연대가 있나요?”

파업을 지지한다는 기금을 모으는 연대 행위는 저도 처음 접하는 것이었어요. 제가 지금 다산콜센터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처음 사파기금을 접한 게 2012년이었어요. 그때 저희가 한참 노동조합을 만들었던 때였거든요. 지금이야 감정노동이다 서비스노동이다 해서 저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저희 스스로도 그 노동의 강도, 감정노동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곤 했거든요. ‘다들 잘하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지그런 식으로요. 저희가 전화기가 있는 칸막이 안에서 종일 일하니까 서로 교류할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되어 있어요. 그런데 노동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 칸막이가 치워지는 경험을 했죠. 서로 얘기를 나누다보니까 그런 게 나한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였구나, 라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래서 서울시에 직접고용하라고 요구할 수 있게 되었고요. 처음에는 몇 시간, 다음에는 하루 파업을 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서울시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면서 시청 점거를 하기도 했어요. 그때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 저희의 투쟁을 지지해주었죠.”

사파기금에서는 파업 현장에 기금을 지원하는 것뿐 아니라 여러 가지 연대 방식을 고민하고 있던데요. 어떤 건지 소개해주세요.”

“‘찾아가는 현장연대라고 해서 여론에 알려지지 않고 열악한 환경에서 투쟁하는 사업장에 방문해서 힘을 실어주기도 하고요, 사파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사파산행도 있습니다. 겨울에는 기금으로 침낭을 구입해서 길거리에서 장기 투쟁하는 사업장에 전달하기도 하고, ‘사파의 작은 희망버스라고 벌써 다섯 번째인데 최근에는 구미 아사히 공장을 방문했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전문가들이 아닌 파업 당사자들이 투쟁을 끝내고 혹은 투쟁 중에 쌓인 문제들을 들고 토론에 참여하는 고리로 사파포럼이 있어요.”

연대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그것이 예전과 같은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각자의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더군요. 사파기금에서 말하는 연대란 뭔가요?”

이번 5주년 행사 때도 느낀 것인데요. 이번 행사에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재능교육, 콜트-콜텍, 골든브릿지증권, 스타케미칼, 기륭전자, 부산 생탁 택시, 아사히글라스 노조, 청주시 노인병원, 동양시멘트노조, LG유플러스 비정규지회, 티브로드, KTX 승무원노조, 현대자동차 비정규노조, 유성기업, 하이텍알씨디노조, 세종호텔, 꿀잠 등이 참석하였어요. 그런 거 아닐까요? 비정규직 투쟁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장기투쟁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사측이 알고 가압류 걸고 투쟁장이 열악하니까 여론에 알려지지 않은 곳에는 사냥개도 풀었잖아요.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압박이 들어오는데 그런 가운데 우리는 끝까지 당신들을 지지하겠다, 당신들의 파업을 지지하고 당신들이 바꾸려고 하는 구조적인 문제들에 함께 하겠다는 걸 표명하는 거죠. 그리고 그런 연대 사업장을 수평으로 연결시키는 거죠. ‘사파포럼을 통해 투쟁의 문제를 사회화하고, ‘찾아가는 현장연대로 사람의 힘을 보여주고, 추울 때는 침낭연대를 하고, 돈이 없는 투쟁장은 모아진 파업기금을 전달하고요. 그야말로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돈 앞에 스러지지 않도록 모아진 연대기금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거지요. 그것이 사파기금에서 말하는 원칙을 지키는 연대입니다.” (<꿀잠> 특별호 '당신의 노동은 안녕한가' 2017.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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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별법의 공정한 집행과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작가들의 팽목항 답사 르포> 2015123~24

 

대한민국의 달력은 364일이다

 

 

“2014415일 화요일 오후 9시경, 인천에서 제주도로 향하는 카페리 세월호는 승객 447명과 승무원 29, 476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발했다. 승객 중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과 교사 15명도 함께 탑승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펴낸 416 세월호 민변의 기록(생각의길, 2014)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난해 922일까지의 기록이다. 지금은 2015131. 지난 달력을 새본다. 4월은 15일이 지났고, 5월은 31일이, 6월은 30일이, 7월은 다시 31일이,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가 바뀌었고, 1월은 31, 2월은 28, 3월은 다시 31, 그리고 4월은, 4월은, 4월은 올까. 우리가 4월을 어떻게 맞을까. 지난해의 달력은 260일이었다. 올해의 달력은 104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한해의 하루를 잃어버렸다. 대한민국의 달력은 364일이다. 2015416일은 과연 올까. 온다면 어떻게 올까. 아이들을 태우고 올까. 맹골수도 밑바닥에 가라앉은, 아니 우리가 가라앉힌 선체를 들어올리며 올까. 429일이 재보선일인데 선거 때문에 세월호는 묻히고 가라앉은 배는 스스로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가루가 되지는 않을까. 아직, 아직도 바닷속에 수장된 아홉의 몸은 돌아올까. 어떻게 해야 돌아올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품은 작가들이 세월호 특별법의 공정한 집행과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마음으로 지난 23일부터 12일 여정으로 팽목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기억하고 기록하다

 

안산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이자 이번 작가들의 팽목항 방문을 기획한 이시백 소설가는 말했다.

지난 한 해는 세월호 참사로 인한 비탄과 분노의 시간이었습니다. 자유실천위원회에서는 그동안 추모 문예제와 집담회, 동조단식, 세월호 연장전, 4시간 16분 낭독회 등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법과 이후 조사 활동을 지켜보고 있지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겐 정부의 불성실한 대처와 세월의 망각 속으로 세월호 참사가 잊혀져 가는 것이야말로 죽음보다 더 깊은 절망일 것입니다. 지금 작가들이 할 일은 아직도 사랑하는 가족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실종자들과 유족들의 슬픔을 나누고 그런 슬픈 일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입니다.”

이시백 소설가는 작가들에게 기억하고 기록하라라는 시대적 물음에 답하도록 격려하였다. 이어 정희성 시인은 그동안 팽목항 현장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해 마음에 늘 부담이 있었다. 같이 가려는 분들은 대부분 팽목항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차분하게 되돌아보자는 차원에서 조용히 다녀오려고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소설가 윤정모는 “416 당시 주변의 작가들과 연극인들이 일주일 동안 밥을 못 먹고 탈수증으로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선생은 416 참사는 그만큼 일상을 살 수 없는 충격과 상실이었고, 작가들은 이런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을 으로 먼저 받아내는 존재가 아닌가, 그것을 언어로 풀어내는 존재라고 하였다.

 

 

안산 분향소 참배와 유족들과의 만남

 

2015123일 금요일 오전 11, 작가들은 팽목으로 가기 전 안산에 있는 희생자들의 합동 분향소를 찾았다. 416으로부터 263일이 지난 이날도 476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발한 카페리 세월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망자는 304, 아직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 9명도 사망자가 되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과 교사 15명 중 생환자는 학생이 75, 교사는 단 3명이다. 합동 분향소에는 교복을 입은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같은 배를 탄 사람들과 국화꽃을 받고 있다. 그 향이 너무 짙어 어지러웠다. 밖으로 나오니 숨이 쉬어졌다. 꽃들이 사람을 질식시키는 현장, 그 꽃이 제대로 펴보지 못한 어린 영혼들이어서 울음도 막혔다.

 

참배를 마치고 유가족들과 만남의 자리가 있었다. 유가족들은 온전한 실종자 수습을 위한 세월호 인양 및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126일부터 20일간 안산에서 팽목까지 도보행진을 계획 중이라고 했다. 도보행진은 선박 인양과 실종자 수색에 힘을 실으려는 유가족들의 안간힘처럼 들렸다. 도보행진 전에 세월호 유족 모임을 사단법인으로 출범시킬 거라는 각오도 밝혔다. 이 또한 그간 정부의 거짓말에 당하기만 했던 유가족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힘을 모으려는 의지라고 했다. 2학년 4반 고 김동혁 군의 어머니는 부모로서 그간 겪은 이야기를 하며 한번도 진도체육관에서 애들을 기다리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진도체육관은 팽목에서도 30~40분 거리에 있고 팽목에서 사고 지점까지는 1시간 반을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가까운 동거차도에서 유족들이 기다렸어야 했다. 그런데 지상파, 카메라는 동거차도에 들어갔는데 왜 유족들만은 그곳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게 하지 않았는지, 왜 유족들에게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지금도 그게 너무 화가 난다고 하였다. 어머님은 지금 416을 후회하듯 또 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동안 특별법에 전념하느라 실종자 가족들은 외면 받았다고, 설령 그것이 아이들이 배에 없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 해도, 지금은 인양만이 유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유족들은 편지 하나 쓰는 것도 힘들다고 했다. 무엇이든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들에게 요구했다.

 

하나,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대책, 지혜, 방법을 알려 달라.

하나, 유가족은 국민과 떨어져서 투쟁하고 싶지 않다. 온국민이 피해자다. 이것은 대학살이다. 선체 인양은 아이들의 언니, 동생, 이웃의 생명을 보장하는, 보장하라는 요구여야 한다. 이것은 생명선언이다.

하나, 유가족의 30퍼센트가 외자녀 가족이다. 우리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제발 가족들을 바쁘게 해달라. ‘세월호로 사고를 쳐달라. 사람들이 세월호를 잊고 이대로 묻혀버리는 것이 가장 두렵다. 언론에서 세월호를 잊지 않도록 작가들이 도와 달라.

 

유족들은 부모의 보물인 새끼들을 가져갔으니 잘못 건드린 것이다, 부모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겠다고 했다. 11일 떡국 행사처럼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쓰겠다고도 했다. 유가족들이 원하는 건 진실인데 학교 당국과 이 정부는 밥과 쌀과 약만 준다고도 했다. 그리고 “2015년은 2학년이었던 아이들이 고3이다, 부모로서 이 아이들과 함께 졸업하고 싶다고 말하며 울음을 뱉었다.

안산을 출발해 진도에 있는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밤 8시였다. 각자의 짐을 풀고 작가들은 간담회에 참석했다. 간담회는 세월호 참사 이후 줄곧 안산에 있는 유족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보듬고 있는 소설가 박혜지의 보고와 작가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실종자를 기다리는 팽목항

 

숙소에서 보이는 바닷가를 보며 새벽을 기다렸다. 아침은 어디서 올까, 하늘과 바다는 어디서 만날까. 바다는 하늘을 안아줄까 하는데 바다와 땅의 경계에서 닭이 울었다. 새벽도 오기 전에 하늘을, 바다를 깨우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닭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닭은 새벽을 이렇게 깨우고 있었다. “호철아한 번이 안 되면 두 번, 두 번이 안 되면 세 번, 그렇게 새벽이 깰 때까지 닭은 운다. 새들은 자기 이름을 부르며 운다던데, 닭은 남의 이름 부르며 운다. 다시 들어봐도 분명 호철아하며 울었다. 팽목항에 가면 실종자들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숙소를 나와 팽목항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팽목항까지는 50여 분이 걸렸다. 전날 유족분이 울분을 토했던 거리가 얼마나 먼 거리였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팽목항에는 유가족분들이 하는 가족식당이 있다. 유족분들은 45명이나 되는 우리의 아침을 손수 차려주었다. 가족식당 문에는 제발 우리 은화를 찾아주세요라는 호소문이 걸려 있었다. 호소문은 은화를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 성빈이의 엄마가 쓴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슬픈 연대가 있을까?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는 딸에게 친구 은화를 찾아주고 싶다는 엄마의 호소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적어야 하나. 팽목 분향소에서 2-9반 고 진윤희 양의 외삼촌이자 416 이후 지금까지 팽목항을 지키고 있는 팽목지기 김성훈 씨로부터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실종자를 찾게 되면 아이들에게는 번호가 매겨집니다. 82, 83번 희생자. 키가 알려지고, 얼굴 모양새, 나이가 알려지고, 입고 있던 옷이 알려지면 그것을 보고 부모님이 찾아옵니다. 다시 오열이 시작되면 번호였던 아이들이 이름을 찾게 됩니다. ……지금 아버님들은 거의 대부분 손을 떨고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증상이 심한 것이죠. 어머니들도 술과 담배를 아주 심하게 하십니다. ……부모님들은 지금 자신을 죽이고 계십니다. 어떤 분은 전재산을 털어서 물 쓰듯 쓰고 있죠. 그 이유는 빨리 돈을 쓰고 돈을 다 쓰는 날 이 생을 마치시겠다고. 팽목은 평소에는 상당히 평온해 보입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틀려지는 곳이죠. 화장실 뒤쪽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등대 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아버님들은 술을 마시거나 스마트폰을 잡고 있는데, 아이들 사진을 보거나 아니면 게임에 빠져 계십니다. 게임이라도 집중해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지금 저를 포함해 세월호 가족들은 모두 환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신적인 문제 육체적인 문제 모두. 어머니들 중에는 장운동이 멈춘 분도 있습니다. 들어가는 게 있는데 나오는 게 없는 것이죠. 그래서 그 어머니는 병원에서 어떤 진단도 내리질 못합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니까요. 또 어떤 어머니는 비가 오는 밤이면 사지가 마비되고 숨을 못 쉽니다. 원인을 몰라요. ……왜 그런 증세가 보이냐면 그 아이가 비오는 밤에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416의 연장인 것이죠. 저는 아직도 포르말린 냄새와 통곡소리를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냄새도 통곡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오히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죠. 왜냐하면 그 통곡소리가 들려야 실종자들을 찾은 것인데 지현이를 마지막으로 그 통곡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지금 팽목은 슬픔만 가득한 곳입니다.”

 

김성훈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이 솟아서 다 받아 적기가 힘들었다. 분향소를 나오려는데 실종자의 가족인 아버님 한 분이 내게 리본을 한 움큼 내밀었다. 나는 참았던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은 멍한 눈빛으로 손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술 취한 내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등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얼마나 많은 슬픔이 슬픔 위에 얹어져야 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낼지 긴 숨이 뻗어나왔다. 작가들은 등대 앞에서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는 노래와 시를 읊었다. 이번 팽목항 방문을 계기로 세월호 참사를 기록하고 추모하는 행사를 하자는 묵시적인 눈빛을 교환했다.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이 먼 길을 장이 막히고 비만 오면 숨이 막히는 유족들이 떨리는 손과 발로 걸어서 걸어서 온다고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하루를 우리에게 되돌려주기 위하여 그들은 팽목항을 향해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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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진실 인양 촉구 문화제 참관기

 

다시 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사진1 : 바다 위의 꽃들로 사라져간 아이들을 기리며

 

일 년이 지난 광화문 광장

 

일 년은 별 하나가 태어날 시간 한 우주가 태어나 피었다가 사라질 시간

감나무마다 수천의 새잎 돋고 흰 감꽃 사이로 수백의 어린 감들 이쁜 푸른 엉덩이를 내밀 시간

수천 마리 벌 나비 앙앙거리고 뾰족한 주둥이 꽃가루 칠갑을 하고 어른이 될 시간, 되어 다시 제 새끼를 낳을 시간

김사인 일 년

 

2014415일 오후 9,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는 카페리 세월호는 승객 447, 승무원 29, 476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발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5415, 인천항을 출발한 세월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은 세월호에는 304명의 생명이 있으며, 아직 아홉의 생명은 몸을 찾지 못했다. 1년이 지났다. 아니 1년이 지났다고 한다. 김사인 시인의 시처럼 별 하나가 태어날 시간이 지났다. “한 우주가 태어나 피었다가 사라질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물어야만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생명이 태어날 수 있는 곳인가? 생명이 자랄 수 있는 곳인가? 생명이 잠들 수 있는 곳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써야 하는가? 이런 물음을 가지고 한국작가회의에서 준비한 ‘4.16 진실 인양 촉구 문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다.

1년 동안 유가족들이 노숙을 하고 단식을 하고 머리카락를 깎아야 했던 곳, 교황이 다녀가고 정치인들이 다녀가고, 일반 시민들이 다녀갔지만, 대통령은 한 번도 다녀가지 않은 곳, 교차로를 사이에 두고 빨간 앞치마를 두른 이상한 엄마들(‘엄마부대봉사단’)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생업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는 곳, 건물이 저렇게 많은데 노란 리본을 단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 1년이 지난 광화문은 휑했다. 차도를 건너니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한 서명 운동을 촉구하는 자원봉사자들과 기억의 문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아이들 이름표가 보였다. 기억의 문을 통과하면 노란 배가 있고 그 속에는 노란 편지들이 담겨 있다. 그 뒤로 시민 한두 명과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헌화를 하고 있었다. ‘누구나 오셔서 함께 기억하자는 문구가 적힌 노란리본공작소에는 서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민들이 둘러앉아 리본을 만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유가족 단식단과 시민동조 단식단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상 뒤로는 세월호 1주기 제3차 연장전의 하나로 사진가들이 설치해놓은 빈 방이 있었다. 광장에 들어앉은 빈 방에는 배내저고리와 아이들이 돌아오는 금요일 저녁 밥상에 있어야 했을 세 벌의 수젓가락이, 옷들어 켜켜이 쌓인 여행가방이, 혼자 돌아온 한 짝의 운동화가, 몸을 잃은 교복이, 주인을 잃은 책상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유가족 10여 명이 정부 시행령을 폐기하라는 피켓을 세우고 밤새 노숙을 한 모습으로 청와대를 향해 앉아 있었다.

 

사진 2 : 고마워, 사랑해, 잊지 않을게. 시를 몸으로 표현하는 마임작가 이정훈

 

그날의 바다, 무너진 일상

 

기상 악화로 출항이 늦춰져 실랑이를 하고 있었을 그 시간으로부터 1년이 지난 광화문 광장에서는 록밴드 폰부스Ponebooth바다의 꽃들4.16 진실 인양 촉구 문화제의 불을 밝혔다. 이어 하나둘 자리에 앉은 사람들 속으로 세월호 침몰 당시 아이들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이거 보이시죠? 배가 60도 기울었어요. , 나 진짜 무섭다, , , 진짜 살고 싶어.”, “왜 내가 수학여행을 와서. 나는 꿈이 있는데. 나 지금 개무섭다고! 구조대가 오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냐고요? ……진짜 무섭고,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데. 나 진짜 울 것 같아요. 나 어떻게 해요?” 아이들의 음성은 긴박했다. 한 아이가 구궁쿵 소리가 나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라임을 뽐내겠다고 핸드폰에 당시의 심정을 남겼다.

 

내가 지금 탄 세월호, 나는 갔어야 했어 넷츠호.

이런 미친놈들의 항해사? 너 때문에 나는 죽사.

이런 길 속에 나는 묻혀? 넌 나를 못 쳐.

내가 니들 뺨을 쳐?

우리가 출발 예정 시간 여섯 시 삼십 분.

우리가 출발한 시간 여덟 씨.

이런 씨발.

니들이 그따구로 이 배를 운전?

지금 배는 85.

내 머릿속 온도는 지금 100!”

 

아이의 머릿속 온도는 1년이 지난 오늘, 광화문 광장을 슬픔의 온도로 채우고 있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참았다. 이어 휘민 시인의 사회로 문화제가 시작되었다. 희생자 정지아 학생이 쓴 4월의 편지와 엄마의 답글을 학생들과 김선향 시인이 가족의 애타는 심정을 대신해 읽었다. 마임작가 이정훈은 백승남의 작품 사랑하는 너에게를 몸과 손끝으로 표현했다. 시인 정영관과 소설가 이후경은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획단이 쓴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통해 4.16 이후 무너진 일상을 들려주었다. 허윤옥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한 하루가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온다던 봄기다림마저 잃는 일은 없을 거라고약속했다. 시인 도종환은 아이들의 생일을 기리기 위해 쓰여진 생일시로 아이들이 사라진 세상의 아픔을 들려주었다. 빛은 어둠을 배경으로 태어난다고 했던가. 광화문 광장에 어둠이 내리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얼굴이 더 또렷이 보였다.

 

사진 3-1 : 참혹한 슬픔과 그럼에도 진실을 건져내기 위해 오직 진실만이 위로라고 외치는 김해자 시인과 작가들

사진 3-2 : 4.16 이후 무너진 일상을 들려주는 작가들

 

가라앉는 말, 떠오르는 진실

 

어둠 속에서 12명의 작가들이 진실이 물에 잠기는 참혹한 슬픔과 그럼에도 우리가 언어를 통해 건져올려야 하는 진실을 풀어냈다. 이영주 시인은 바다에서 죽지 않는 손이 올라온다”, “그 손을 잡아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슬픔을 시작할 수 없다고 시를 통해 선언했다. 신용목 시인은 세상의 모든 외로움이 밥을 먹을 시간의 칸마다 아이들의 모습을 새겨넣었다. 이지호 시인은 사이렌은 대피 신호가 아니라 학살 경고였다고, “오지 않을 미래가 식어간다”, “자본주의의 거인이 아이들을 잡았다고 슬퍼할 수 없는 분노를 표출했고, 허은실 시인은 소풍, 이라고 말하려 했는데/슬픔, 이 와 있는 막막함을 왔다가 가는 파도의 들고남으로 읊어주었다. 소설가 신혜진은 안산 분향소에 있는 엄마공방의 풍경을 들려주며 만약 지하철에서 누가 울거든, 버스에서 벚꽃이 흩날리는 바깥을 내다보며 어깨를 들썩이거든 울지 마라는 말 대신에 티슈 한 장 건네자고 듣는 이들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박일환 시인은 수업 시작종이 울렸는데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 교실을 끌고 우리를 진도 앞바다까지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출석을 불렀다. 김사인 시인은 동덕여대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여 지은 시로 지난 봄의 민들레 씨앗들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다음 계절의 별자리를 기다리게 해달라고 1년 동안 쌓인 울음에 불을 붙이며 소지했다. 나 또한 진실을 바다로 덮어버린 국가의 폭력과 그 폭력을 덮으려고 하는 언론과 언론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본의 협잡을 바다를 엎어서라도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진실 인양 촉구 문화제를 위해 부산에서부터 달려온 김요아킴 시인은 광장에 있는 유가족들의 몸부림을 곡기 끊은 벌판에 빗대어 잔잔하게 사람들을 울렸다. 시인 나종영은 “4.16 세월호는 80년 광주의 5.18이었다고 괴물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을 고발했다. 안오일 시인은 지독히도 외로웠던 우리들의 주검이/이 나라를 건져 올릴 인양선이 될 때까지끝끝내 함께 가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마지막으로 김해자 시인은 삶이 거짓말처럼 참혹할 때 죽음이 더 삶답다고, 그러니 섣불리 위로하려 하지 말라고, “유일한 위로는 진실이라고 고통을 끌어안은 위로의 길을 터주었다.

 

사진 4-1 :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고도 차마 애도도 추모도 할 수 없는 참담함을 잊지 않고 끝까지 추궁하겠다는 한국작가회의 선언문을 낭독하는 문동만 시인

사진 4-2 : ‘어둠을 뚫고 진실이 길을 밝히기를시민들의 소원을 담은 소원문을 소지하는 정우영, 김사인 시인

 

아직, 깊고 어두운 물 속입니다

 

밤은 어두워 더욱 깊어졌다. 깊은 어둠 속으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전 멤버인 노래하는 나들의 추모곡이 울렸다. 나혜철 시인의 팽목항으로 부치는 편지와 문화제의 핵심인 한국작가회의 작가들의 다짐을 모은 선언서 낭독이 이어졌다. 문동만 시인은 선언서를 통해 기억에는 시효가 없고 진실에는 한도가 없다”, “이곳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지옥인지 오래오래 말하겠다는 다짐을 밝혔으며,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아야 하는 작가의 자세와 함께 핍박당하고 모욕당했으니 함께 분노하고 요구하자고 선언하였다. 밤의 공기가 차가웠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가 아이들의 폐에서 뿜어져나오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작가들은 미래를 인양하라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시민들의 소원을 담은 소원문이 광화문 광장의 어둠을 밝히며 타올랐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못한 4월의 진실은 거리 곳곳을 돌아 다시 이곳, 광화문 광장으로 귀향할 날을 기다린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함께 맹골수도 밑바닥을 뒤져 찾아낸 진실을 들고 바다 위의 꽃들을, 꽃들의 가족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세상은 한 뼘은 자라 바다의 꽃들을 피울 것이다.(<내일을여는작가> 2015.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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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으로 부치는 편지세월호 도보 순례의 이름은 진실입니다

 

은화 어머님께

 

 

지금은 해 뜨기 전 다섯 시입니다. 여기는 서울의 높은 건물 10층에 있는 병상이에요. 아래를 보니 차가 움직이는 게 한둘 보이는군요. 이 새벽에 저들은 어디를 가는 걸까요. 어제 만난 초등학교 때 친구는 하루 종일 고았다면서 생강탕을 가지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초등학교 친구라는 게 그렇습니다. 아프다고 말한 적 없는데, 일 년에 한두 번 연락할 뿐인데도 이상하게 아플 때마다 제일 먼저 연락이 닿아요. 먼저 알고 제게 연락을 해옵니다. 잘 지내니? 이 한 마디면 그간의 시간들이 잘과 지내니 사이 행간에서 발음되지도 않은 채로 묻어나오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또 가슴이 저립니다. 잘 지내니라고 물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숨과 숨이 교차해야 알 수 있는 행간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은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한 줄을 쓰고 다시 눕고 한 줄을 다시 쓰기 위해 일어납니다. 조금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게 보이겠네요. 지난달 한국작가회의 작가들과 팽목항에 내려갔을 때, 그곳은 바다와 하늘의 경계 따위는 보이지 않더군요. 어둠이 섞여 검푸른 짙음을 만들며 몸을 섞는데 먼 데서 소리가 들렸어요. 진도의 닭 울음소리를 들어보신 적 있나요? 여러 번 듣고, 믿기질 않아서 숙소에 있는 작가들에게도 물었어요.

저 닭 울음소리 들리세요?”
작가들은 귀를 모았습니다. 세상에, 진도의 닭은 이렇게 우는 거예요.

호철아!”

한 번이 아니면 두 번, 두 번이 아니면 세 번, 새벽이 깰 때까지 바다와 하늘이 뒤섞인 그곳을 향해 외치고 있었어요. 그러자 바다를 품은 하늘과 하늘을 품은 바다가 열리며 기적처럼 해가 나오더군요. 새벽이 열리는 거였어요. 그렇게 진도의 하루는 남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되더군요. 새들은 자기 이름을 부르며 운다고 하던데, 아니었어요. 진도의 닭은 남의 이름을 부르며 새벽을 깨우고 있었습니다.

저도 병상에서 닭처럼 울어봅니다.

은화야! 은화야! 은화야! 은화야!”

은화는 우리에게 하루를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주는 이름이 된 거지요. 우리는 세월호 참사 이후 416일이라는 하루를 잃어버렸어요. 대한민국의 한 해 달력에는 하루가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365일이 아니라 364일을 살아야 해요. 416 이후라는 게 있다면요, 그 이후 4월은 15일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금요일에는 돌아와야 하는 봄소풍 간 아이들이 5월에는 오겠지 했습니다. 5월에 못 온 아이들이 6월에는 올 줄 알았어요. 6월에도 못 온 아이들이 더운 여름에는 올 줄 알았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는데 아이들은 오지 않았어요. 길가에 은행잎은 왜 그렇게 노랗던가요. 노랗게 떨어진 은행잎 하나하나가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이름 같아 길에 서서 한참을 운 적도 있습니다. 이것은 폭력입니다. 건질 수 있는 아이들을 물 속에 남겨둔 학살이에요. 우리는 그 학살을 눈 뜨고 지켜본 가담자였어요. 그 죄가 너무 깊어 움츠리고 있었습니다. 발음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본 것들이 믿기지 않아 한참을 우회했습니다. 나와 너를 가르고 일반 희생자들과 단원고 희생자들을 가르고 유가족들과 실종자들을 가르는 동안 300일이 지났습니다.

 

팽목항에 붙어 있는 호소문이 떠오릅니다. 가족식당 문에는 제발 우리 은화를 찾아주세요라는 호소문이 걸려 있었어요. 호소문은 은화를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 성빈이의 엄마가 쓴 것이었어요. 세상에 이렇게 슬픈 연대가 있을까요?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는 딸에게 친구 은화를 찾아주고 싶다는 성빈이 어머님의 호소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적어야 하나요. 매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수다를 떨며 학교에 갔다는 승희가 바다에서 나온 후 은화도 빨리 데리고 갈게라고 했다던 승희 어머님의 약속을 우리는 또 무어라 기록해야 한단 말입니까.

팽목 분향소에서 416 이후 지금까지 팽목항을 지키고 있는 윤희 삼촌 김성훈 씨로부터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금 아버님들은 알코올 중독 증상이 심해 거의 대부분 손을 떨고 있다고요. 어떤 분들은 전재산을 털어서 돈을 물처럼 쓰고 있다고요. 빨리 돈을 쓰고 돈을 다 쓰는 날 이 생을 마치시겠다 한다고요. 아버님들이 술을 마시지 않을 때는 스마트폰을 잡고 있는데, 아이들 사진을 보거나 아니면 게임에 빠져 계시다고, 게임이라도 집중해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요. 팽목항은 평소에는 평온해 보이지만 밤만 되면 화장실 뒤켠에서, 등대 앞에서 오열이 터져나온다고요. 어머님 중에는 장운동이 멈춘 분도 계시다고요. 들어가는 게 있는데 나오는 게 없다고, 병원에서 어떤 진단도 내리질 못한다고요. 비가 오는 밤이면 사지가 마비되고 숨을 못 쉬는 어머님도 계시다고요. 이 모든 증세가 416의 연장이라고요. 윤희 삼촌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의 삼촌으로 불러달라는 김성훈 씨는 아직도 포르말린 냄새와 통곡소리를 잊지 못하겠다고, 그런데 지금은 그 냄새와 통곡소리조차 들리지 않아서 오히려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하셨어요. 지금 팽목은 통곡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슬픔만 가득한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분향소를 나오려는데 실종자의 가족인 아버님 한 분이 제게 리본을 한 움큼 내밀었습니다. 저는 참았던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어요. 리본을 든 아버님은 멍한 눈빛으로 손을 심하게 떨고 계셨어요. 슬픔이 뒤흔들고 있는 명징한 몸 앞에서 우리는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을 만나고 있습니다. 등대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며 얼마나 많은 슬픔이 슬픔 위에 얹어져야 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낼지, 저 무너질 대로 무너진 떨리는 손들을 어떻게 부여잡아야 할지 몰라 바다만 바라보았어요. 남현철님 박영인님 조은화님 허다윤님 이영숙님 고창석님 양승진님 권재근님 권혁규님. 바다를 향해 실종자들의 이름만으로 쓰여진 정우영 시인의 팽목항을 쏟아내야 했습니다.

 

지금은 하루의 절반이 지난 낮 세 시예요. 안산에서 팽목항으로 향한 걸음이 광주를 지나고 있다고 하네요. 봄은 어느새 눈이 되어 옵니다. 아이들이 계절을 짊어지고 옵니다. 잃어버린 아이들이 바람을 타고 사방에서 몰아칩니다. 눈이 오는데 왜 눈물이 나나요. 아이들은 안 온 것이 아닙니다. 못 온 거였어요. 올 수 없도록 바다를 가두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버린 국가를 인정할 수가 없어요. 2014415일 승객 447명과 승무원 29, 476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발한 세월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려 했던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과 교사 15명 중 생환자는 학생이 75, 교사는 단 3명뿐입니다. 돌아오지 못한 것은 304명의 생명만이 아닙니다. 출항에서 침몰까지 14시간의 진실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304명의 샛노란 이파리들이 눈송이로 날리며 증언하고 있어요. 이것은 폭력입니다. 학살이에요. 우리가 붙잡아야 할 단 하나의 무기는 진실입니다. 바다를 엎어서라도 밝혀내야 하는 것은 우리를 이 무구한 슬픔 앞에 가슴을 치게 만든 세월호가 아닙니다. 진실을 바다로 덮어버린 국가의 폭력이며, 그 폭력을 누가 왜 덮으려고 하는지 밝히지 않는 언론이며, 언론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본의 협잡입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려고 눈이 옵니다. 아무리 덮어도 덮을 수 없는 물결이 되어, 이 폭력의 한가운데, 맹골수도 밑바닥을 향해 걷고 있는 순례길에도 눈이 오겠지요. 그들의 가슴에는 이런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진실 규명순례의 이름은 진실입니다. 진실만이 바다가 되어버린 이름들을 뭍으로 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슬픔이 너무 깊어 몸 속에 슬픔의 지도를 새기고 있는 그 길에 다음 구호를 외치며 우리 작가들도 함께 하겠습니다.

 

실종자 9명이 세상의 중심입니다. 실종자는 찾아내고 세월호는 인양하라.”

 

201529

하명희 드림

 

http://www.pressian.com/news/scrap_proc.php?mode=insert&no=123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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