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헤로도토스, 역사(, 2009)

이제야 만난 헤로도토스의 역사. 여러 번 읽을 책이니 그 방대함에 눌리지 않을 작정이다. 찬사도 빼겠다. 대신 한 인간,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쓸 수밖에 없었던 그 동기들을, 이야기들을 갖겠다. 기원전 485년경에 태어나고 그가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인 기원전 424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을 헤로도토스와의 여행을 쓴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는 르포의 기원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르포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고, 그 최초의 기록이 이 책이라고 그는 말한다. '최초' 혹은 '최고'가 흔한 시대이지만, 그 거리감을 익히자. 헤로도토스가 태어난 때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이다. 그때 부처가 죽었고 얼마 후 노나라 공자가 죽었으며 340년 후 사마천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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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의 시대, 르포 읽기

 

 

0. 김진숙,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 2011)

10년쯤 되었을까. 르포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대략 그런 것 같다. 2011년 김진숙 지도위원의 소금꽃나무가 나왔을 때 당분간 소설가들은 침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설의 본령은 이야기이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들을 현실과 뒤섞어놓은 죄, 그것은 꿈꾸기가 아니라 죄였다. 소금꽃나무를 보며 소설가들의 허황된 이야기가 한 시대의 죄가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소금꽃나무는 꾸며지지 않은 현실의 비극이었고, 작가들이 외면한 인간들의 끝없는 저항의 처절한 내부 보고서였다. 목숨을 담보로 한 현실의 저항은 한 사람의 일생을 보게 한다. 그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을 보게 하고, 그 사람이 몸 담고 있었던 사회 현실을 보게 한다. 해서 소금꽃나무는 한 시대의 작품으로 내게 남았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저 정도의 치열한 현실(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상상/환상'을 포괄한다)을 가지지 않은 글은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비겁한 자기애나 감상만으로 글을 포장하고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개인적인 선언 정도였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나는 얼마나 돌아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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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빼기-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읽기

 

 

드디어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가라타니 고진을 처음 안 것이 1999년이니까 벌써 9, 내 결혼기간 정도 된다. 물론 그동안 고진의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았으므로 그 기간 동안 그와 같이 살았다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읽어줘야만 할 것 같은 유혹의 순간들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첫번째는 내가 편집한 책의 저자에 의해서였다. 저자가 말하길, 국내 권위 있는 비평가가 고진의 글을 그대로 베껴먹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는 자기 파를 형성할 만큼 탄탄한 젊은 후학을 거느린 비평가였다. 두 번째는 거의 십년 만에 고운 시절의 친구를 다시 만났는데 그녀의 이메일주소가 가라타니였다. 그녀는 철학을 전공했고 그때는 국문과에 편입해 박사과정에 있었는데 아마 그녀를 균열시킨 인물이 가라타니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녀와 같은 길을 걸었다면 경제학을 전공하고 문창과로 전과하여 가라타니를 만났을 수도 있다. 대학교에 갈까를 고민할 때 내가 왜 '경제학'을 선택했었는지는 아직도 아이러니이다. 가장 큰 동인은 내가 전혀 모르는 불모지였기 때문일 듯하다. (물론 나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세 번째는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行人때문이다. 소세키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심리는 그의 작품 제목을 통해 더 확연해지곤 하는데 내겐 '()'이 그랬다. '()' '()' 발음하다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가라타니는 소세키 작품에 영감을 얻어 '고진行人'이라는 멋지구리한 명으로 개명했다 한다.

 

일본인의 이름은 엄밀히 말해 명자名子와 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메이지 8(1875)'평민명자의무령'이 내리면서 국민國民이 되기 위해서는 그동안 대충 불러오던 성(여기서 ''은 천황이 하사하는 ''과는 달린 평민들 사이에 이름처럼 불리던 것을 뜻한다)을 폐지하고 명자를 가져야 한다는 호적부 정리를 통해 구축된 것이다. 고진이 그랬던 것처럼 명자는 그대로 두고 자주 불리는 명만 바꾸는 예는 흔한 경우이다. 한국의 성씨가 300개 가량 있고 10억 인구의 중국은 500개인데 비해 12천 인구의 일본의 성씨가 29만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성이 아니라 명인 것이다. 늑대와 춤을에서 지금껏 남아 있는 기억은 '주먹쥐고 일어서'와 같은 인디언의 이름인데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의 이름도 샘터 옆에 사는 고이즈미(小泉), 마을 중간에 사는 나카무라(中村), 산속에 사는 야마모토(山本), 기러기 가게에 사는 '맛의 달인' 카리야(雁屋), 메이저리그의 장남 이치로(一郞) 등 재미있지 않은가. 중국에서라면 학자를 칭하는 장자, 노자, 맹자에 붙는 ''자가 한국에서는 산야에 흔한 명자, 화자, 말자로 일본에서는 아키코明子, 하나코花子, 미즈코末子로 불리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서양에서도 라스트 네임, 즉 성은 그 집안의 내력을 알려주는데 방앗간이나 제분공 집안은 밀러Miller, 대장장이나 금속세공인 집안은 스미스Smith, 금만 세공하는 집안은 골드슈미트Goldschmidt, 벽돌공 집안은 아인슈타인Einstein, 직조공 집안은 베버Weber, 유대인 상인 집안은 크레이머Kramer, 빵집 집안은 베이커baker 등 다양하다.

 

가라타니 고진처럼 내게 '이름'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 인물은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후앙 네포무세뇨 크리스핀 크리스피뇨 드 라 상띠시마 트리니다드 루이스 이 피카소Pablo Diego Jose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Crispin Crispiano de la Santisima Trinidad Ruiz y Picasso'이다. 번역하면 나 파블로 피카소는 "백부인 파블로, 할아버지인 호세, 아버지인 프란시스코 데 파울, 외할아버지인 후앙 네포무세뇨, 대부인 크리스핀, 대모인 크리스피뇨, 그리고 어머니인 루이스 이 피카소에 의해 태어났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름에 대해 길게 얘기한 것은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고진의 철학과 서양 철학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에 있었던 장부 정리법 중에 꿔준 돈을 갚으면 막대기를 버리는 식의 셈식이 있었다. 갚았으니 계산하고 할 것 없이 빚이 없어졌다는 거래방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 수학자들이 이 셈식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이가 있는가 하면 원시적인 방식이라고 멸시하는 두 부류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감명을 받은 사람은 실용학문인 수학에서 빼기의 합리성을 발견했다. 빼기가 실제 생활에서 쓰일 때는 거래의 철학으로 꿔준 돈이 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멸하는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빼기의 합리성을 발견한 부류는 학문의 유용성을 현실에서 찾는 유물론자였다고 할 수 있고, 거래 내역을 회계장부에 남겨 이자를 계산하거나 돈을 꾼 사람의 내력을 이후에도 관리하고자 하는 지배층의 사고, 즉 더하기 사고를 비판하는 자리에 있게 된다. 문제는 막대기를 버리는 방식이 미개하다고 보는 측의 사고가 지배층의 사고를 내포 내지 은닉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변한다고만은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미개하다고 본 것에는 '학문의 발전'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순수학문에 대한 미래 지향적인 사고가 깔려 있다. , 학문이란 빼는 것이 아니라 더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변증법적인 사고는 사실은 유물론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고래의 관념론자들의 사고 방식이었고 서양 철학사의 근간이 되었던 사고방식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서양인의 셈 방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핀란드의 한 생선가게에서 청어가 1,700원이라고 하자. 잔돈이 없어서 2,000원을 줬다. 우리 식으로라면 주인은 머릿속으로 또는 손으로 2000-1700=300을 계산한다. 그리고 거스름돈 300원을 건네준다. 받은 돈에서 물건값을 빼면 거스름돈이 나온다는 (당연한, 그러나 서양인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셈식이다. 반면 핀란드인 가게주인은 2000=1700+300이라는 도식이 머리에 그려진다. 우선 1700원을 꺼내 옆에다 놓고 내 손에 100, 100, 100원 합해서 300원을 주면 1800, 1900, 2000원이 된다. 그러고 나서 옆에 있던 1700원은 다시 가게주인 앞치마로 들어간다. 받은돈을 채우려면 물건값에 내가 갖고 있는 돈을 더 더해서 받은돈이 채워지면 그만큼을 준다. 이러한 셈식에는 '거스름돈'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다. 물건값은 원래 확고부동한 것이고 거기서 내것을 더해주는 것(돌려주는 것이 아니라)이 그들의 방식이다. 더하기의 복잡성은 사실 필요할 때 빼기를 못하기 때문에 형성된 서양인의 사고방식은 아닐까, 못한다는 것은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문화적 패턴이다. 즉 관습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손님과의 거래는 요즘 유행하는 '타자와 주체'의 문제로 확대해볼 수도 있다.) 이는 퍼스트 네임, 미들 네임, 라스트 네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가계, 직업, 종교와 연관시키켜 계속 더해나가는 그들의 관습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관습적인 사고방식의 차이는 고진과 서양인의 '철학하는 방법'상의 변별점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가라타니 고진이 흥미로운 것은 고래의 학문이 앞선 학자들을 비판하면서도 거기에 덧대어 자신의 학문을 특화시켰다고 한다면, 그는 거기서 한걸음 나아가 과감하게 학문에서 가지치기(무식하게 말하면 '합리적인 빼기', 성급하게 말하면 '중심 읽기세우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칸트와 반칸트주의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헤겔과 마르크스가 탄생할 수밖에 없는 선행되는 정신적 문화를 읽고 그들의 공통점(중심/가능성)을 취한다. 내 식의 간단한 도식으로 만들면 이렇다.

 

칸트-칸트의 가능성(세계의 보편종교로서의 '윤리')=(덜칸트)/반칸트/(비칸트).

데카르트-데카르트의 가능성(세계 내의 외부에 존재하는 '주체')=덜데카르트/반데카르트/비데카르트(스피노자).

헤겔-헤겔의 가능성(세계의 '운동')=덜헤겔/반헤겔/비헤겔(마르크스).

 

물론 이것은 앞서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대입할 수도 있다.

 

칸트=칸트의 가능성(세계 보편종교)+덜칸트/반칸트/비칸트.

데카르트=데카르트의 가능성(세계 내의 외부에 존재하는 주체)+덜데카르트/반데카르트/비데카르트.

헤겔=헤겔의 가능성(세계의 운동)+덜헤겔/반헤겔/비헤겔.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우선 각 가능성에 대한 중심잡기부터 해야 한다고 말한다.

 

칸트의 가능성(세계 보편종교)=칸트+(덜칸트)/(반칸트)/비칸트(마르크스).

데카르트의 가능성(세계 내의 외부에 존재하는 주체)=데카르트+덜데카르트/반데카르트/비데카르트(스피노자).

헤겔의 가능성(세계의 운동)=헤겔+덜헤겔/반헤겔/비헤겔(마르크스).

 

우스운 말이지만, 내가 고진을 읽으려고 작정하고 훑어보기 시작한 네 번째 계기는 그가 십수년간 피워온 담배를 끊었기 때문이다. 트랜스크래틱 때문이란다. 에릭 호퍼가 자살에 실패하고 목적지도 없이 그저 길을 걷다 얻어 탄 차에서 듣게 된 충고 때문에 괴테의 희망이 아니라 용기를 발견했듯 나도 목적 없이 올라탄 그에게서 뜻밖의 무언가를 주울 수 있을까. 시대 부적응자인 나를 그가 조금은 안착시켜줄까. (2007. 11)

 

1.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김경원 옮김, 이산, 1999

マルクスその可能性中心』(講談社, 1978 / 講談社学術文庫, 1990

2.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박유하 옮김, 민음사, 1997(1980)

日本近代文学起源』(講談社, 1980/ 講談社文芸文庫, 1988

隠喩としての建築』(冬樹社, 1979/ 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1989

批評とポストモダン』(福武書店, 1985/ 福武文庫, 1989

3. 탐구 1, 송태욱 옮김, 새물결, 1998(1986)

探究I』(講談社, 1986/ 講談社学術文庫, 1992

4. 탐구 2, 권기돈, 새물결, 1998(1989)

探究II』(講談社, 1989/ 講談社学術文庫, 1992

5. 언어와 비극, 조영일, 도서출판b, 2004(1989)

言葉悲劇』(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1993

ヒューモアとしての唯物論』(筑摩書房, 1993/ 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1999

終焉をめぐって』(福武書店, 1990/ 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1995

反文学論』(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1991

漱石論集成』(第三文明社, 1992/ 平凡社平凡社ライブラリー, 2001

坂口安吾中上健次』(太田出版, 1996/ 講談社文芸文庫, 2006

差異としての場所』(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1996

6. 윤리21, 송태욱, 사회평론, 2001(2000)

倫理21』(平凡社, 2000/ 平凡社ライブラリー, 2003

『〈戦前思考』(文藝春秋, 1994/ 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2001

7. 일본정신의 기원-언어, 국가, 대의제 그리고 통화, 송태욱, 이매진, 2003(2002)

日本精神分析』(文藝春秋, 2002

8. 근대문학의 종언, 조영일, 도서출판b, 2006(2005)

9. 트랜스크리틱-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송태욱, 한길사, 2005(2001)

トランスクリティーク――カントとマルクス』(批評空間, 2001

10. 세계공화국으로世界共和國, 조영일, 도서출판b, 2007(岩波新書, 2006)

世界共和国――資本=ネーション=国家えて』(岩波書店岩波新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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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을 따라가지 않는 편이다. 이건 뭐 그냥 기질이다. 나는 유행보다는 그 유행이 지나간 뒷자리가 더 궁금한 사람이니까. 해서 가라타니가 한창 유행하던 1999년에는 슬쩍 그를 비껴나 있었고 어느 날 그가 궁금해졌을 때는 거의 십년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번역된 그의 텍스트를 우선은 전부 읽어보았다. 그가 궁금했을 때는 이미 그는 거론되지 않고 있을 때였고, 간간이 그의 텍스트를 누군가 도용하고 있다는 식의 소문만 들리던 때였으므로 그가 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의 텍스트를 읽으려면 또 어마무시한 서양 철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헤겔과 데카르트와 칸트를 알아야 했고, 중심을 잡으려면 마르크스를 더 알아야 했다. 따라갈 수가 없어서 그의 사고방식(빼기의 합리성)만 메모해 놓은 것이 다시 칠팔 년 전이다. 어떤 하나의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무식하지만 내겐 늘 이런 식이다. 정말 무식하다. 무식해서 뭔가를 말할 수가 없다. 근데 책을 읽는다는 게 원래 그렇다고 말해주는 책을 만나면 반갑다. 모르니까 자꾸 보는 거지. 내가 뭘 모르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다 알면 미쳐버리겠지. 그러니까 자꾸 모르는 것들에 접근하는 그것, 그것이 읽기 아닌가라고. 이런 책들을 만나면 묘한 안도감이 드는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군. 아무튼 텍스트도 이런데 사람은? 말이 난무하는 곳을 기웃거리다 접어버린다. 그냥 하던 대로 가던 길이나 가지 뭐. 읽던 책을 놓으니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 다 그런 거지 뭐. 새벽에 깨버려서 일기장을 뒤지다.(201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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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타자를 찾아서

 

 

나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세상에 널려 있는 참혹함에 대한 침묵이므로,

거의 일종의 죄악이라면, 그것은 어떤 시대인가!

- 베르톨트 브레히트, 후대에게

 

어떤 이야기가,

그것이 너무 많이 이야기된 것이므로,

거의 일종의 죄악이라면,

그것은 어떤 시대인가?

- 파울 첼란, 나무 없는 나뭇잎 하나-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위하여전문

 

 

그것은 어떤 시대인가?’ 최근 읽은 책들의 화자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이것은 어떤 시대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우연인지 그들은 파울 첼란의 시를 끄집어내어 제목으로 쓰고 있는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저자인 사사키 아타루木中가 그렇고, 이반 일리치 또한 데이비드 케일리와의 대담 내용을 편집한 책 이반 일리히의 유언(원제는 미래의 북녘으로 흐르는 강에The rivers north of the future’. 미래의 북녘으로 흐르는 강에/나는 그물을 던지네/그대가 머뭇거리며/돌에 새겨진 그림자를/달아맨 그물을)에서 미래의 북녘으로 흐르는 강에라는 첼란의 시 제목을 달았습니다.

 

브레히트는 당신이 살았던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를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라고 말합니다. 파울 첼란은 너무 많이 이야기된, 그래서 시적 절망이 가득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또 해도 그것이 죄악이 되어버리는 시대를 나무 없는 나뭇잎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나무 없는 나뭇잎의 시대라. 고통의 근원이 단절되어버린, 각자의 고통만 있고 혼자 썩어지기를 기다리는 시대! 파울 첼란은 그런 시대를 살다가 물에 빠진 사람에게 황금을 던져주는 시대를 증명하기 위해 센 강에 몸을 던진 것은 아니었을까요. 일리치는, 또 사사키는 그런 파울 첼란의 절망을 온몸으로 으스러지게 껴안기(융해融解) 위해 그의 시를 되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절망을 되살린다는 것은 우리 시대가 절망할 수도 없는 시대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왜 우리는 내 마음이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내보일 수도 없는 무력한 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요.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요. 나무 없는 나뭇잎들이 떼굴떼굴 구르며 한 세대를 지나는 동안 나무 자체를 잃어버리고, 다른 나뭇잎들은 소용이 없어진 절망을 잊어버린 시대에 던져진 것은 아닐까요. 혹시 우리는 타자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고백하자면 일리치를 따라 읽는 동안 저는 이런 발음할 수 없는 절망이, 너무 많이 이야기되어 절망할 수도 없으므로, 절망이 절망을 잃어버린 그것은 어떤 시대인지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일리치에게 배운 대로 제도화된 희망이나 절망을 거부하면서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길을 찾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비판하고 있는 현대를 만들어놓은 제도의 이면을 살피며 천천히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은 선생이 되어주었어요. 특히 각 책에서 그가 질문을 완성해가는 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어떤 정신의 흐름, 이야기의 흐름, 시대의 흐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에피메테우적 인간으로 호명되는 순간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Deshooling Society(1970)왜 사람들은 학교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가정의 기원을 탐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학교 교육이란 무엇일까? 학교 제도는 사회 제도나 서비스 기관이 아닌 하나의 의례가 아닐까? 이런 범세계적인 의례가 전세계에 성공적으로 퍼질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학교처럼 범세계적인 제도라면 교회와 무슨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질문을 확장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계시가 필요하며, 이 계시는 엄격하게 조직된 의례(출석의무나 고해성사와 같은)를 통해서 가장 잘 내려 받을 수 있다는 현대의 관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하고 묻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이러한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지난한 길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벗이었던 에릭 프롬조차도 처음부터 그의 질문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단절시켜버렸으니까요. 때문에 그는 학교 없는 사회를 상상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붙여줄 이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친구를 얻는다면, 그 어둠도 또한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는 협력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별들 하나하나가 다 다른 것처럼 사람들마다 그 나름대로 독특하고 흥미롭다"고 느끼는 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도 혼자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 속에서 즐거움과 슬픔을 오로지 자기 혼자 짊어질 수 있는 나중에 오는 자입니다. 그는 그런 새로운 사람들에게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이라고 이름 붙일 것을 제안합니다. 우리가 나중에 오는 자라는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으로 호명되는 순간, 우리는 작고 초라한 지렁이의 몸짓으로 기어서라도 온몸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존엄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질문들을 더 따라가봅니다.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아름다운 정의

 

산업사회의 위기(문제가 아니지요)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반 일리치가 통합해낸 지식의 총본은 자율과 공생입니다. 공생을 위한 도구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산업시대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성장을 멈춰라Tools for Conviviality(1973)에서 일리치는 대량생산 체제의 더 큰 성장이 환경을 적대적으로 만들고, 개인의 자연스러운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무력하게 만들며, 개인 상호간의 비판이나 교류가 불가능한 외로운 인간을 제조하고, 사회를 극단적으로 찢어놓는 전문화로 공동체를 파괴하면서 발전할 때(발전을 강제할 때) 사회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고 질문이 아닌 경고를 합니다. 권력은 양극화되고 좌절은 보편화된 산업사회의 유일한 대안은 성장을 멈추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70년대의 절박한 경고로부터 우리는 40년을 더 지나왔습니다. 그의 절박한 호소는 유효할까요? , 그렇습니다. 당장 우리는 다 살았으니 괜찮다. 우리 아이들 때문에 싸운다는 밀양의 힘든 싸움만 보더라도, 4대강 사업이 어질러놓은 강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해서 정의로운 사회는 한 사람의 자유가 오직 다른 사람의 동등한 자유에 의해서만 제한받는 사회라는 정의가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인지 공감할 수 있었지요.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고 억압한다면 나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정의라는 좌표를 얻은 셈입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억지로 이해할 필요 없다는 어쩌면 간명한 진실을 배웠어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개인의 몫이며 이는 그 개인이 자율적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해줍니다. 그가 말하는 대안도 어쩌면 간명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산업사회에 대항하는 유일한 대안은 함께 일하고 서로 보살피는 사회에서 더 행복해질 거라는 통찰을 공유하는 길뿐이라는 것이죠. 고로 정직해진다는 것은 소비, 쓰레기를 제한할 필요를 깨닫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계가 우리를 대신해줄 것, 전문가가 우리를 배운 사람,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 역시 근본적으로 줄이는 것을 깨닫는 거라고 말합니다. 쉽지만 지켜지기 어려운 이러한 것들을 그는 산업사회의 대안으로, 나아가 이러한 삶의 변화야말로 혁명적인 변화가 아니라면 뭐가 혁명이냐고 혁명의 근거를 묻는군요.

 

그는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Energy and Equity(1974)에서 일정한 에너지 사용량이 사회질서의 한계임을 밝히고 속도에 마비된 상상력의 공간에서는 시민으로서의 자유가 고객으로서 더 좋은 서비스를 받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대치된다고 보았습니다. 때문에 에너지 소비가 이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스피드 자본가의 세계적인 계급구조가 생겨나고 또 시간의 교환가치가 지배력을 갖게 된다고도 했지요. 이것은 에너지 사용이 한계를 넘어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현상을 예견한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여기의 시점으로 볼 때 우리의 시간은 소비되고 절약되고 투자되고 낭비되고 사용되는 경제적인 그 무엇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과학의 한계는 한계를 모른다는 것에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한계를 알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게 되어버리죠. 때문에 에너지 사용량이 사회질서의 한계를 넘어도 과학은 그것을 해결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진보된 에너지를 찾아야 하니까요. 과학에서 자연은 극복하여야 할 대상이지 공생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 그것이 한계를 넘었음을 보여주는 보고서가 이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대안은 성장을 멈추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는 슬프고 지켜지기 어려운 한계입니다. 과학이 자신의 사명을 되돌려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공허해지는 한계입니다. 아마 이반 일리치는 그렇기 때문에 에피메테우스에게 그것을 찾아가는 시련을, 절망을, 벗들을, 희망을, 고독을 동시에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잃어버린 몸과 내면화된 가치들

 

병에 대한 우리의 공포는 오류이다.” 병에 대한 공포가 오류일 수 있다니.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아니 그렇구나, 그랬구나. 저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Limits to Medicine(1976)를 보며 이런 과정을 겪었어요. 학교 없는 사회를 상상하기 전, “학교 교육은 왜 의무적으로 받아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학교에 대한, 교육에 대한 신화가 깨졌듯이 병에 대한 공포가 오류일 수 있다는 그의 질문으로 인해 나의 몸이 내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 의료화된 신체를 자각하게 되는 거죠. 몸을 잃어버린 우리의 감각과 거세되어버린 치유 능력, 병원에서 태어나 죽는 것이 순례가 되고 풍토병이 되어버린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하여 고통과 불쾌함을 삶의 요소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던 삶과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죽음으로 인해 삶이 얼마나 풍성해졌는가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거세된 삶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앞서 책에서 말한 절망향kakotopia일 수밖에 없겠구나 동감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일리치는 이 책을 다시 쓰게 된다면 의료산업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사람들은 이제 병원병latrogensis(의사를 뜻하는 그리스어 이아트로스iatros와 원인을 뜻하는 제네시스genesis를 합한 말로 병원의 진찰과 치료가 도리어 병을 만드는 점에 주목한 단어)에 대해 잘 알고 있으나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대신 18세기를 거쳐오면서 의술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근본적으로 변화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거라고요. 마찬가지로 학교 없는 사회를 다시 쓰게 된다면 학교라는 의무 제도의 폐지보다 조건 없이 주어지던 여가의 선물이었던 교육이 절박한 필요로 굳어진 추세, 사람들이 그에 동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 배경을 다룰 것이라고 했지요. 제도의 문제를 밝히면 그것의 치료도 가능할 것 같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제도화된 가치들이 내면화되어버려서 그것이 형성된 배경부터 근본적으로 따져 묻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죠.

 

잃어버린 타자를 찾아서

 

80년대의 저작과 강연, 연구 등을 통해(과거의 거울에 비추어In the mirror of the past, 1992) 일리치는 이러한 사회적 인식이 생겨난 역사적 변환점, 혹은 분수령을 찾아나섭니다. 그는 게의 걸음으로 지금 여기라는 끈을 놓지 않으면서 뒷걸음질하며 역사적 변화들을 살핍니다. 그의 뒷걸음질을 따라가다 보면 책의 역사, 감각의 역사, 지각의 역사, 정주의 역사, 몸의 역사, 생명의 역사, 물의 역사, 교육의 역사 등을 두루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인식을 통해 아주 중요한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지요.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화할 것이라는. 고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복닥거리는 것도 언젠가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의 확장이 그것이죠. 여기서 잠시 숨을 돌리고 싶었어요.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신자유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그 흔한 명제가 왜 유독 일리치를 통해 끄집어내졌을 때는 감동으로 다가왔을까. 그리고 다시 앞서 책들을 뒤적이다 멈추었습니다.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Shadow Work(1981)에서 자신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하나의 구제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대해 생생하게 말하는 능력, 실제로 존재했던 그대로를,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대로를 말하는 능력을 높이고 싶다고도 하지요. 그가 구제로서 역사를 붙잡은 것은 사람들이 필요, 필연, 임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이해시키고 싶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의 생각과 그것을 되묻는 과정을 따라 읽으며 발전이나 성공이 얼마나 허무한 개념인지 깨달았다고 하면 너무 성급한 것일까요. ,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더라도 일리치를 만나버린 이상 나는 더 이상 발전이나 성공에 매달린 모습으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질질 끌려갈 수는 없겠죠. 그가 역사에 몰두했던 이유와 근거, 그리고 부채꼴로 퍼지던 현대에 대한 인식의 혼란스러움은 결국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한 노력이었음을 알아버렸으니까요. 사실을 사실로 인식하기 어려운 시대, 사실을 획득한다는 것은 절망을 절망이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지요. 우리가 은연중에 몸에 익히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절대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닌 역사적 산물, 혹은 인식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은 분명 제게는 현대를 이해하는 거울이 된 것 같습니다.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의 윤곽을 잡기 시작할 때 자신의 책상에 있던 나딘 고디머의 소설버거의 딸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소설에서는 건강하고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여성이 나온다고 해요. 그녀는 자신의 평범한 생활이 아파르트헤이트, 즉 타인과의 격리로 인해 얻어진 안정임을 자각하고 고민을 거듭하지요. 작가도 일리치도 이 평범한 여성을 통해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합니다. 이런 것은 아닐까요. 보라고. 현대사회는 희생자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 사회라고.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혹은 그림자 영역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에서는 평범한 보통의 사람조차 타인에게 고통이 되는 조건을 만들고 있는 거라고.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타인에게 고통이 되는 조건을 무시할 수 없는 병을 앓을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거겠죠. 만약 이런 병을 앓지 않는다면 그것은 좋은 것Good이 아니라 감성의 상실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감성의 상실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하고 극복해야 하는 병이 아닐까, 책을 접으며 우리가 잊고 있었던 감성의 상실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됩니다. 타인을 만나는 것이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나를 만나던 시대로부터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왔지만 그것의 회복은 역시 나를 만나듯 타인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조금씩 관계가 회복되고 생각이 눈빛을 타고 흐른다면 돌에 새겨진 그림자를 달아맨 그물을 어딘가로 던지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잃어버린 타자를 만나는 일은 궁극에는 나를 만나는 일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게 합니다.(201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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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책들은 10년 전에 미토에서 나온 현대 제도 비판 5부작을 읽고 재작년에 그 외 저작을 가지고 친구들과 함께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다. 최근에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느린걸음, 2014)가 출간되었는데 제일 얇다. 일리치의 저작 중 읽고 싶은 책은 텍스트의 포도밭이 남은 셈이다. 10년 동안 텍스트와 현실을 왔다갔다 한 것 같다. 그러면서도 뭔가 미진했는데, 그의 텍스트로는 90년대 이후를 읽어내기 갑갑한 부분이 걸렸었다(그의 일관된 기계문명비판으로는 지금의 스마트 세상에 끼어들 수가 없다ㅠㅠ). 그러다 작년부터 관심이 가기 시작한 미하엘 엔데의 저작을 모아 읽기 시작했는데, 스포일러 없이 모모를 다시 끄집어낸 내가 대견했다. 모모를 읽어내는 다른 방법을 중학생 이후 이제야 혼자 찾아낸 것 같아 감격적이기도 하다(몇 개의 글들을 찾아보니 남들은 이미 다 아는데 나만 이렇게 늦다). 그래서 엔데의 유언을 조금 보다가 비밀을 미리 알고 싶지 않아서 덮어버렸다. 내가 혼자 찾아볼 테다. 모모의 출간이 1973년이라는데, 일리치와 엔데는 책을 통해 만나지 않았을까? 서로의 저작을 보았을 텐데, 왜 서로 언급이 없을까. 지금까지 읽은 일리치의 저작에서는 미하엘 엔데에 대한 언급은 보지 못했다. 둘이 만났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그들도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으려고 덮어두었을까. 흐뭇해하면서?! 올해 말에는 엔데의 유언을 읽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당장 읽고 싶어도 덮어둘 만한 책이 있다는 건, 네 계절의 나무가 자라는 비밀의 책을 품은 듯 든든하군. 반짝이는 것들을 모아 땅속에 보관해놓은 다람쥐가 된 기분이다. 어디다 보관했는지는 까먹어도 상관없다. 봄이 되면 스스로 땅을 뚫고 반짝일 테니까.(2006 5부작 읽고 2015년 다시 읽다)

 

학교 없는 사회Deshooling Society(미토, 2004)

성장을 멈춰라Tools for Conviviality(미토, 2004)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Energy and Equity(미토, 2004)

병원이 병을 만든다Limits to Medicine(미토, 2004)

그림자 노동Shadow Work(미토, 2005)

이반 일리히의 유언The rivers north of the future(이파르, 2010)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Ivan illich in conversation(물레, 2010)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In the mirror of the past(느린걸음, 2013)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느린걸음, 2014)

반자본 발전사전(아카이브, 2010)

텍스트의 포도밭(현암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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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In the vineyard of the text-A Commentary to Hugh's Didascalicon(현암사, 2016)이 출간되었다. 한 사람의 궤적을 책을 통해 쫓아다니다 언제쯤 나오려나 번역을 기다리다 이제야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정영목 선생의 번역이라니 광화문 나갔다가 얼른 들고 왔다. 텍스트의 포도밭이 내 손에 있다. 텍스트로. 일리치가 11세기에 주목했던 이유가 대략 설명이 될 것 같고, 암송으로 포고로 책이 바로 지혜하는 자였고 그것을 보는 것, 느끼는 것, 듣는 것을 통칭하던 '읽기'11세기를 거치며 어떻게 텍스트 안에 갇히게 되었는지 경험할 수 있겠다. 텍스트 읽기가 학자들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균열지점을 본다는 것은 설렘이다. 지금 다시 읽기를 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작년에는 미하엘 엔데와의 만남을 보고 싶었고, 올해는 다시 사사키 아타루와 만나는 지점을 탐구하고 싶다. 사사키도 분명 이 사람을 본으로 삼았을 텐데 한 마디 언급도 없다니 좀 괘씸하고...(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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