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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나온 책인데 나는 이제야 발견했다. 발견했다고 말하는 건 내가 찾던 책이어서 그렇다. 이 책의 7할은 사진이다. 페레토는 서울을 주도적 서사가 없는, 어떤 식별 가능한 경계도 없지만 눈길을 사로잡는 크고 작은 ‘순간’들로 구성된 도시로 보고 있다. 그걸 건출물에 한정해 몇 개의 고리로 묶어서 보자면 교회, 아파트, 도시의 문신인 간판, 과거를 인식하는 한옥과 인공적 전통, 플라스틱 건축인 비닐하우스, 서구형 성채인 예식장, 가진 적 없는 서구의 근대형 대학 건물, 골프장과 골목형 익명의 건축 등이다. 음악으로 표현하면 유럽과 아메리카 주요 도시가 재즈라면 서울은 한가지로만 설명할 수 없는 유튜브와 비슷하다는 관점. 그것을 “관찰하라, 묘사하라, 해독하라, 탐지하라, 분류하라, 되살려라.” 그리하여 “더 평범하게 보는 법을 익혀라.”라는 조르주 페렉의 철학으로 펼치고 있다. 사진의 뷰를 지면으로 옮겨 “알프스 속의 맨해튼”이 되어버린 서울을 숙고하고 비밀을 누설하며 추론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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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일환 시인을 모르던 시절에 아이는 초등학생이었어요. 겨울날 방바닥에 누워 둘이 같이 발바닥을 부비며 읽던 동시집이 있었어요. 아이가 한 편을 읽으면(동화책에 나오는 마귀할멈들아,/우리 집에 빗자루 많다./엄마 몰래 와서/다 타고 가 버려라.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 다음은 내가 아무 곳이나 펼쳐 읽고(엄마 차 타고 가는데/갑자기/택시가 옆에서 끼어들자/엄마가 욕을 했다./나도 옆에서/한마디 거들었더니/엄마 얼굴이 굳어졌다./“그런 말 하면 못써./어른에게 저 새끼가 뭐야?”/시무룩한 표정으로/“저 택시라고 한 건데…”/순간,/엄마 얼굴이 빨개졌다. ―「엄마 얼굴이 빨개졌다」) 그 다음은 아이가 읽고.
-나도 그런 적 있는데. 내가 할머니랑 전화하면서 고향이 어쩌구 하니까 네가 끼어들어서 “할머니, 엄마가 고양이 키우면 안 된대요” 하고 일렀었어.
-이씨, 내가 고향이랑 고양이도 모르냐. 내가 언제 그랬어.
그러다 둘이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말장난하며 웃었던 기억이 나요. 박일환 시인의 동시집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창비, 2013)은 그렇게 겨울날 이불장난하며 펼쳐본 추억의 책이 되었지요.
전태일문학상을 받고 박일환 시인을 알게 되었을 때 아이한테 자랑하듯 말했던 기억도 나요.
-나, 그 시인 만났다. 그 저새끼 시인 있잖아.
-ㅋㅋ 그새끼.
또 한참을 낄낄거리며 그때는 『학교는 입이 크다』(한티재, 2014)를 펼쳐 책놀이를 했었지요. 그러다 아이도 크면서 내 책상에 있던 『바다로 간 별들』(우리학교, 2017)과 『덮지 못한 출석부』(나라말, 2017)는 내가 읽기도 전에 아이가 가져갔고, 아이도 그만큼 자라 세월호의 아이들을, 진도 앞바다에서 부르는 출석부를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동시를 읽던 아이가 소설을, 아픈 시들을 읽어나가는 나이가 된 거지요.
올해 고등학생이 되고 학기 초에 아이는 자율동아리를 하나 만들었어요. ‘씀’이라는 이름의 동아리인데 말 그대로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쓰는 동아리예요. 가끔 내게 조언을 구하면 책을 소개해주곤 했는데 그것 말고도 아이들이 선정한 책들이 어마무시하더군요. 어느 날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읽는다고 했고, 또 어느 날은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읽겠다고 덤비다가, 가을이 시작될 땐 랭보도 읽고 이상도 읽더군요. 책도 읽고 소설도 쓰고 시도 쓴다고는 했지만 뭐 대충 하겠거니 했는데, 어느 날은 쉬운 시론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이 책을 주었지요. 주면서 “이 선생님이 처음 학교에 부임했을 때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학생들이랑 눈도 못 마주쳤대. 그래서 창밖만 보며 수업하곤 했는데 그러다 만난 학생이 지금은 출판사를 차려서 거기에서 첫 책으로 이 책을 냈다네. 재밌지?” 뭐 이런 에피소드도 들려주었지요.
-엇, 이 선생님은 빗자루, 출석부 맞지?
아이는 시인의 이름을 책으로 기억하고 있더군요. 아이는 이렇게 선생님의 동시집과 소설과 시집과 이번에는 『청소년을 위한 시쓰기 공부』(지노, 2018)를 보며 초등학생을 지나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아이 말로는 다른 시론집을 하나 보았는데 이 책이 동아리 친구들이 같이 읽기에 힘들지 않고 시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설명해주어서 좋았대요. 그리고 그 동아리는 1년을 마무리하며 자율동아리 대상을 받았다는 훈훈한 자랑질을 합니다. ^^ 다 같이 1년 동안 한달에 두 번씩 모여 좌충우돌 책을 찾고 읽고 수다 떨고 그걸 글로 쓴 결과물이 선생님들이 보기에도 흐뭇했던 모양이에요. 일환 선생님, 선생님의 책들이 아이를 이만큼 키웠답니다. 여섯 명이 같이 받은 상이어서 아주 즐겁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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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삼례 나라슈퍼 삼인조*

 

임명선(37)

나는 여태껏 누구도 때려본 적이 없다. 집에서는 아버지,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맞았고, 경찰관에겐 경찰봉으로, 교도소에선 수감자들에게 맞았다. 나는 어릴 때 술 취한 아버지를 피해 여동생들과 도망다녔다. 폐가나 다리 밑이 우리 집보다 좋았다. 아버지가 아침에도 술을 마실 땐 책가방 없이 학교에 갔다. 친구들이 놀려 거리를 배회했다. 스무 살에 살인죄로 내가 체포되었을 때,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있었고 정신질환을 앓던 어머니는 내가 몇 년 형을 언제 선고받았는지 모른다.

 

강인구(36)

왼팔에 장애가 있던 엄마는 노점에서 과일을 팔았다. 십만 원짜리 월세방,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엄마를 괴롭혔다. 일곱 살 때다. 아파서 괴롭게 누워 있던 엄마가 흰 종이에 뭔가를 써서 나한테 주었다. 신나게 가게로 달려가 쪽지를 내밀었다. 내가 사온 것을 털어 넣은 엄마 입에서 자꾸만 하얀 게 나왔다. 뽀글뽀글 나오는 거품을 옷소매로 닦아주며 나는 어머니 품에서 잠들었다. 어머니가 날 끌어안고 잔 그날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이상한 약을 사다 줘 엄마가 죽었다며 아버지는 없는 엄마 대신 나를 쥐어박았다. 나는 열아홉 살에 살인범이 됐다. 세상은 아버지를 지적 장애인이라 부른다. 나도 똑같다고 한다. 아버지처럼 나도 한글을 모른다. 조서도 진술서도 모르고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

 

최대열(36)

하반신 마비 1급 장애인 어머니와 척추 장애 5급 장애인인 아버지 대신 나는 일찍부터 가장 노릇을 했다. 누나는 중학교 졸업하고 열아홉 살에 시집갔다. 나는 지적 장애라 읽고 쓸 줄 모르지만 동생만큼은 공부시켜 주고 싶었다. 어린 동생과 부모님을 돌보며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매형이 다니는 공사판에서 일하던 중 경찰한테 끌려갔다. 부모님도 돌봐야 하고, 돈 벌어 집도 사야 하고, 동생 학교도 보내야 하는데나 없는 동안 식구들이 어찌 살까 그것만 걱정됐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불었다.

 

*199926일 오전 4시쯤 전북 삼례읍 나라슈퍼에 침입해, 할머니 유모 씨(당시 76)의 입을 테이프로 막고 숨지게 했다는 이유로, 세 명은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을 마쳤다. 이들은 20153경찰의 강압수사 때문에 허위자백을 했다며 재심을 청구했다. 부실, 조작 수사의혹이 있었던 이 사건에 대해, 재판부는 삼례 3인조가 처벌을 받았지만, 20163, 이모 씨(48)가 자신이 범인이라며 자백하고 피해자의 묘소를 찾아가 참회하며 용서를 구한 데다, 유족이 촬영한 경찰 현장검증 영상 등을 토대로 무죄로 인정할 만하다고 판단해 재심을 결정했으며, 201610월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김해자, 모른다-삼례 나라슈퍼 삼인조전문, 해자네 점집(걷는사람, 2018)

 

(null)--------

이 시에 달린 주는 20181222일 한 줄이 더 첨가되어야 한다. “조사5팀은 진범이 자백을 한 이 사건에서 당시 수사 검사였던 최성우 전 검사에게 부실 수사 책임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고, 최성우 검사는 억울한 누명을 쓴 삼례 3인조를 기소하고, 피해자 세 사람을 상대로 3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라고. 이것이 그들의 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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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8-12-28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련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세 분의 개인사는 처음 접하네요. 강인구씨의 사연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듯 합니다.

돌바람 2018-12-28 14:44   좋아요 1 | URL
강인구 씨 사연 많이 아프지요. 검사는 강인구 씨가 정신병을 연기했다고 재심을 통해 자신의 인격이 침해당했다고 손해배상청구를 했어요. 미친거죠.

잉크냄새 2018-12-28 18:38   좋아요 1 | URL
그나저나 참 오랫만에 인사드리게 되네요. 십년 넘는 세월이 후다닥 지나가버렸네요.
잘 지내시죠?

돌바람 2018-12-29 05:18   좋아요 1 | URL
십년! 그렇더구라구요. 십년이 후딱 지났는데 잉크냄새님은 어제 본 듯 거리감이 없으니 인사도 까먹었어요. 전 잘 지내요. 벌써 한해가 다 가고, 이렇게^^

paviana 2019-01-28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책에 있는 글 따라 돌바람님 서재에 왔더니, 진짜 오래간만에 잉크냄새님 글도 보네요. ㅎㅎ 페북은 페북이고, 여기서 뵈니 돌바람님도 반갑네요. ㅎㅎ

돌바람 2019-05-19 12:39   좋아요 0 | URL
한 십년이 훌쩍 지나갔네요. 여기서의 인연은 또 바람처럼 다른 곳에서도 만나지고 그러는 게 신기하고 재밌어요.^^
 

 “기억하는 것.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세상의 아이들,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다.”
-구정은, <값싸게 쓰이다 버려지는 노동> 중,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후마니타스, 2018)

연말이면 본 책들을 다시 보거나 사놓고 보지 못한 책들을 건드리게 되는데 이 책은 올해 만난 내 책. 내가 좋아하는 책은 인용할 수 없는 책. 책 하나에서 끝나지 않고 도대체 이 사람은 무슨 책을 옆에 두었을까 궁금한 책. 책의 내용은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고 싶고, 참고목록은 내가 읽어온 것들과 겹치지만 빵과 벽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인간 없는 세상, 새로운 생명의 역사, 위기와 분쟁의 아틀라스 등 읽어봐야지 다짐하게 하는 책. 책에 오탈자가 하나도 안 보이고 참고문헌과 찾아보기, 사진자료까지 책의 형식에 충실한 책. 그러니까 책! 구정은 (Ttalgi Koo) 언니, 내가 편집자라면, 번역자라면 이 책을 번역해 해외로 내보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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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울음은 깊고도 고요했다. 소리를 악물고 깊이 자기 안으로 울음을 밀어 넣고 있는 모습이 처음 봤을 때의 그 자세와 같았다. 그가 다가가 여자의 등을 어루만졌다. 울어요, 크게 소리 내서 울어도 돼요. 여자의 몸이 흔들리면서 그의 품으로 들어왔다. 오랫동안 잠을 못 잤어요. 밤과 낮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견디다가, 겨우 수면제에 의지해 눈을 붙여도 불현듯이 잠이 깨요. 안간힘을 쓰며 버티다가 겨우 여기까지 와요. 누군가 한 사람은 내 얘기를 들어줄 것 같아서. 여자의 말은 혓바닥이 잘린 듯 끊어졌고, 말의 상간엔 울음이 치고 올라와 몸을 떨었다.

(...)

여자는 울음을 그치고 넝쿨처럼 두 팔로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섹스는 어둡고 슬프기도 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여자의 몸에서 순간순간 냉기가 느껴졌다. 여자는 죽은 남편의 허상을 껴안고 뜨거운 여름을 건너왔을 것이다. 그가 이마를 쪼는 불볕의 사양을 힘겹게 건너왔듯 어쩌면 여자가 견딘 것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세부와 이유를 가졌든 때때로 이 삶이 내 것인가 순간순간 의심하고 불안했던 것처럼, 그는 오랫동안 혼자의 시간을 견디며 이 순간까지 다다랐다.

사랑한다는 말은 해줄 수 없지만, 그는 여자를 깊이 안았다. 그리고 더 뜨겁고 순전하게 욕망의 끝을 향해 빠져들었다. 어느 순간, 이것이 환영이 아닐까 싶을 땐 여자의 목을 조르고도 싶었다."

-홍명진, <해피크리닝> 중, 《당신의 비밀》(삶창, 2017)

 

*감각적이고 세련된 현대 소설의 바다에서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도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그 자체로 빛나면서 주변을 밝히는 반딧불이가 있다. 쓸쓸하지만 사라져가는 호타루를 만났을 때처럼 곁을 보게 하는 소설. 여럿이 같이 있는데 유독 외로울 때는 조용히 빠져나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을 때처럼 홍명진의 소설을 뒤적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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