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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량魍魎,그림자 속의 그림자*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로 시작해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까지. 아직 살아 있음은 여전하다. 여자의 삶 속에는 일곱 권의 시집이 있고한 권의 산문집이 있고, 두 권의 번역서가 있고, 한 권의 번역 민담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여자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첫 시집에서 자신을 분절해 사방으로 뿌려대던 여자는 자신의 이전과 이후를 자신의 이름으로 각인시키도 하였으나, 그것이 얼마나 안전한 분해인지, 얼마나 편리한 분절인지를 두고 가볍게 말했다. "마치 착한 흑인도 있는 것처럼 흑인을 인정해주는 듯한 명명법"이라던가.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마치 착한 여자도 있는 것처럼 여자를 인정해주는 듯한 명명법." 끊임없이 자신을 해체한 청춘을 통해 내가 익힌 수사는 반복되는 <쓸쓸>이다. 여자의 쓸쓸은 도대체 무엇에서 왔을까.

"왜 나는 '한 아이가 뛰어가고 있다'라고 낙서하는 것일까"

여기에 힌트가 있을 것도 같다.

망량, 나는 그녀를 망량이라고 부르려 한다. 그림자 속의 그림자. 자기 그림자를 어쩌지 못하는 그 속의 그림자의 삶, 또는 (루머처럼) 살아 있음. 그것은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때로부터 "빈 배처럼 텅 비어" 돌아가는 때까지 어둠. 그 어둠 속에서 여자는, 망량은 쓸쓸하다. 뛰어가는 아이를 보고 있는 그림자의 그림자는 쓸쓸하다. 어둠은 아이를 아이이도록 내버려두지 않아. 제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려면 뛰어갈 수가 없잖아. 뛰어본 적 없는, 아이인 적 없는 슬픔여기서 "한 인간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먼 풍경"임을 낙서로 고백하는 망량의 슬픔을 쓸쓸이라고 발음해본다.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 망량의 고백은 그래서 "쓸쓸해서 머나먼" 또 하나의 풍경이 된다. 삶을 루머로, 풍경으로 바라보기. 쓸쓸하겠지. 살지 않고 바라보기.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평화

 

'물의 방'에 누워 있는 여자는 세계를 보고 있다. "너로 인해 찾아온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을 꽃잎처럼 포개고, 가만히." 여자의 사랑은 종기처럼 곪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자는 버림받은 자들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풀잎이 비밀에 젖""별이 하얀 식은땀을 흘리는" 방에서, "내 사랑아, 너는 행복했었니?" 물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헛되고 헛됨을 완성하기 위하여 여자는 또다시 고요히 "냉동된 달빛"을 안는다. 혹은 낳는다. "시체나라의 태양"이 되어버린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오고" 여자의 애인은 어느새 "태평양처럼 누워" 있고 여자는 개떼처럼 몰려드는 추억을, 시간의 가시뼈를 잘못 삼킨 죄를 오로지 받아낸다.

여자의 세계는 실패들의 전시장이 되어버렸다. 상처들의 쓰레기 더미. 그 물의 방으로도 "커다랗고 예쁜 고래 한 마리"가 들어와 가만 있다가 간다. 망량이 사는 이 세상은 아직도 '언 강'이고 '먼 땅'이다. 여자는 물의 방에 있으므로 "세상은 바람이 독점"하고 있다그곳에서 여자는 잠든 체 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는 여자들을, 외로운 여자들의 공동체를 들여다본다.

그러면서도 스며드는 것들, 네가 왔으면 좋겠다는, 치명적이라는 병이 스며든다. 그 병이 슬픔이라면 그 "슬픔에서는 수프의 냄새가 난다"고 여자는 말한다. "나는 간다I go. 나는 간다Ego." 여자가 가는 곳에는 내가 있다. 너에게로 가지 못하고 나에게 가는 길은 에고의 길이다. 그 길이 여자를 망량이 되도록 이끌었다.

망량의 길에서 여자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다고. "삶 뒤에 또 삶이 있다는 것, 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수없이"라는 말이 sad처럼 들리고, '이쁘다''기쁘다'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렇게 여자는 기억이 시작되는 창가에서 한 세월, 한 사막을 내려다본다. 드디어 물의 방에서 나온 것이다.

물의 방에서 나와 여자가 쓴 시들은 전부 "물 위에 씌어진" 것들이다. 여자는 자신이 시원병에 걸렸다고 토해내고 그것은 "아름다움이 없으면 삶은 쓸쓸해진다"는 하나의 그림자를 갖는다. 고독과 슬픔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혹은 그는, 늘 아름다움으로 슬프다. "그것이 그의 빼어난 아름다움"이라고 여자는 말한다. 여자의 시원병은 쓸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슬픔,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슬픔, 그 모자라고 넘치는 하나가 여자에게는 도달하고 싶은 가지고 싶은 시원이었을 것이다그것은 내가 보기에 '아름다움'이다.

"사람이 사람을 초월하면 자연이 된다"고 하는데, 여자는 자연이 되어버린 것일까. 망량은 자연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 모양이다. "물은 잘 잠들지만 바람은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슬픔도 없어 슬퍼진 이 세상에서 슬픔밖에 몰랐던 죄"를 고백하는 여자는 이미 자연이 되어버린 것 같다. 행복도 아름다운 음식이라는 것을 몰랐던 죄, 여자의 시원병은 그것을 고백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여자는 말한다.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라고. 아득히, 나 아닌 어떤 것으로. 기억과 추억의 형상물인 여자가 되어 "나의 생존증명서는 시였고, 시 이전에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다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라고. 얼마나 세상에서 떨어져 살아왔는지, 여자는 "보고 싶다"고 쓰고 그 말에서는 "비릿한 날것의 생"이 들어 있음을 오늘 처음 알았다고 말한다. 지독하다. 달은 술에 취해 흘러가고 여자는 망량을 떠나보낸다. "내 그림자가 쓰러져 울고 있다" 일곱 권의 시집 중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쓸쓸히.

 

*망량은 물에 사는 정령이다. 어린 도깨비라도 한다. 도깨비도 천진한데 그 도깨비가 어리다면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는 정체. 시인은 그 정령에게 '그림자의 그림자'라는 이름을 주고 있다. 어린 정령이 쓰러져 울 때, 망량은 더이상 어리지 않다. 그 사이에 시인의 시적 화자가 쓸쓸히 얹혀진다. 쓸쓸로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정령, 시인의 시원이 거기에 있나, 있을 것 같다. 어려서 아프고 어려서 슬픈, 망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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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읽으면 좋은 책들

 

 

 

 

 

 

 

 

 

 

 

 

 

 

 

 

 

 

 

 

 

 

 

 

 

 

 

 

 

 

 

 

33. 조선해어화사, 이능화(동문선, 1992)   

33-1. 조선여속고, 이능화(민속원, 1992)

 

34. 역주 동국세시기(한국문화사, 1958/1999)    

세로본 활판인쇄 복사본이다.

 

35. 류쿠설화집 <유로설전>(보고사, 2008)

 

36. 조선동화집, 조선총독부 편(집문당, 1924/2003)

 

37. 조선설화집, 손진태(민속원, 2009)   

드디어 다시 나왔다. 고마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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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1, 2, 최상일(돌베개, 2002)

아침에 라디오에서 브람스의 자장가가 나오는데, 밥 먹다 말고 아이가 한 말씀 하신다. 왜 요즘에는 엄마가 자장가를 안 불러줘. 자장가만 그렇겠니, 그러고 보니 글자를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마음대로 지어대던 잠자리 이야기도 뚝 그쳤구나. 아마 이 책을 구했던 이유가 아이를 업고 동네를 돌며 자연스럽게 흥얼대던 자장가들이 신기했던 때였지 싶다. 내 안에 이렇게 많은 자장가가 있었나, 잠투정하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흥얼대면서도 그 자연스러움이 참 좋았었다. 최상일 선생은 1989년부터 <한국민요대전>을 진행하며 사라져가는 구전민요를 기록했는데 그 기록물이 이 책이다. 참 멋진 작업이고 멋진 책이고 멋진 사람이다. 두 장짜리 시디도 선물로 주는데 듣고 있으면 마음이 선해진다. 선하다가 턱턱하다가 울컥 하다가 퍽 웃게 되는 대목까지 희비희비고락을 만나게 된다. 민요 가락이나 가사뿐 아니라 어디서 이렇게 많은 목소리의 교향악을 들을 수 있을까 싶다.

 

32. 신화 전사를 만들다/신화 이야기를 창조하다, 김용호(휴머니스트, 2009) 

신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분류표를 선생이 먼저 해주었다. 나는 따라 읽으며 첨삭하고 보충하면 되겠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낳는 신화의 세계는 기원이나 해석보다 이야기, 구성, 인물들로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흠이라면 분류는 좋았으나 기대했던 것보다 내용이 좀 빈약하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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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1, 2, 주강현(한겨레신문사, 1997/2004)

민족이라는 단어는 싫지만 민속이라는 단어는 좋아한다. 조현설 선생의 작업과 많은 부분 겹치지만 이 책의 장점은 우리 문화, 다른 말로 하면 '민속'의 곳곳을 긁어내는 데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주강현 선생이 하는 작업이 많이 보편화되어 있는 듯하다. 도깨비, 장승, 솟대, 구들, 새끼줄, 서낭당, 배꼽, 매향, 바위동물원, 풍물굿, 쌍욕, 장 삼형제, 두레, 모정과 누정, 장례놀이. 다시 읽어보니 또 새롭네. 한 삼백년쯤 전에 서해의 갯벌에 숨겨놓았던 침향이 어느날 솔향기에 갯내를 더해 두둥쿵 떠오른다면 어떨까. 낙동강의 풍광이 다 사라지기 전 미륵처럼 떠오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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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 조현설(한겨레출판, 2006)  

다시 읽어도 재미있네. 궁금했던 것들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더 궁금해지는 책이다. 내가 궁금했던 것들이 많은 부분 겹친다. 서천꽃밭이나 꽃감관, 하늘줄인 노각성자부줄, 처음으로 이런 인물도 있구나 무릎을 치게 했던 자청비, 거대한 거시기 편을 읽을 땐 신라가 궁금했었는데 심작가도 이런 데서 힌트를 얻었겠다는 생각. 신화의 열쇠를 '우리' 안에서 찾기보다는 비슷한 신화소와 열결하는 것은 좋은데 대부분 북쪽 지역에 한정하고 있다. 아래로는 일본신화가 있고 더 넓게 몽골리안 루투를 따라가다보면 북해와 아메리카까지도 훑을 수 있지 않을까. 선생은 간단하게 언급하면서 배제하고 있지만 '남방문화설'에 대한 접근도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물론 어디서 기원했는가보다는 같은 벼농사 지역이나 해양문화권에 대한 다양한 신화들을 알고 싶다. 우리의 경우 바닷길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으니 해양문화와의 접촉을 설득할 수는 없지만 기원이나 영향과 같은 문제를 접어놓고 본다면 언어나 생활 등에서 나타나는 고고학적 주장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간 접할 수 없었던 주장들이라 좀더 새롭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신화는 망망한 바다에서도 나무를 키우던 시대의 과학이 아닌가. 아쉽게 재밌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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