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근했더니 한 친구가 메신저로 아래 기사를 날려줬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모를만한 사람도 한번쯤은 예전 삼성그룹 이미지 광고에서 봤을 윤송이 박사는 내 대학동기이다. 물론 말이 대학동기이지,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이 친구는 전자공학동 나는 자연과학동 소속도 달랐으므로 '같은 학교 같은 학번이었다' 정도가 옳은 표현이겠다. 하지만 한 학년에 100여명 남짓 여학생이 있을 뿐으로 모든 여학생은 서로 다 아는 사이였고 그런 면에서 또 모르는 친구라고 할 수도 없다.

역시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꽤나 히트였던 드라마 '카이스트'의 이나영역, 어리버리하지만 천재적인 공대생역의 실제 모델이 이 친구였다고 한다. 이 친구의 에피소드 - 후에 이나영의 에피소드로 극화된 - 란 것들이 어지간히 전설적이라고들 한다. 실제로는 어땠냐고 내 주위 사람들도 내게 숱하게 물어왔다. 대답은 "잘 모르는 친군데". 어쨌든 내가 알기로 이 친구는 상당히 스마트하지만 또한 노력이 엄청난 편에 가까웠다. 사실 밥먹다 아이디어가 생각나 식판 떨어뜨리고 실험실로 돌아갔다는 게 뭐가 기행인가. 그런 친구는 수도 없이 많다. 그보다는 1학년 때부터 실험실에 끼워달라고 교수님께 졸랐다는 에피소드가 이 친구의 실제 모습에 가까울 것 같다.

이 친구에 얽힌 내 개인적인 기억은 학창시절의 것이 아니다. 이 친구를 열심히 관리하려 하고 있는 모일보에 내가 기자로 있던 시절의 기억이다. 바로 그때 이 친구가 그 명성찬란한 MIT 미디어랩 최연소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맥킨지컨설팅으로 들어온 것이다. 모일보는 당장 이 미래의 브레인 풀을 알아보고 갖가지 기사에 등장시켰다. 밀레니엄을 바라보며 상당히 신선한 연재물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이 친구는 취재를 당하기 위해 모일보 신사옥에 자주 드나들었고, 나는 아, 내가 계속 기자로 있으면 이렇게 친구를 취재하기도 하겠구나, 라는 너무 지당해서 멍청할 정도인 생각을 했다.

기사를 내게 날려준 친구로 말하자면 윤송이 박사가 이사로 있는 와이더댄닷컴 모그룹의 한 자회사에 다니고 있다. 당연히 그 친구는 아래 기사의 주인공에 대해서 자주, 많은 생각을 할 것이다. 나도 그 친구도 사실은 아래 기사의 주인공이 회사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 베일에 가려있다고들 하니까 말이다 - 가 제일 궁금하다. 나로 말하자면 가끔 질투는 아니지만 꼭 질투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아직도 피부가 대학시절 그대로인 사진을 볼 때 그러하다. -_-;;;

그런데 우리의 감정이야 어쨌든 간에 상관없고, 아래 기사의 내용이 충격적이다. 제안을 한 사람이나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다는 쪽이나 이래저래 내가 이해하기엔 미궁이다.

정치는 직업일 것이다. 아니 정치는 정말 직업이다. 도덕인가 정치경제 시간에 들었던 '정치인은 국가에 봉사하고 국민의 뜻을 섬기며' 어쩌구는 예쁜 말에 불과하다. 정치가가 무슨 자원봉사자인가. 나는 정말이지 봉사 따위 바라지 않고 내 뜻을 섬겨주기도 바라지 않는다. 내 뜻과 달라도 좋다. 제대로 된 전문가가 행한 입법이고 정치라는 게 납득이 되면 행복하기만 하겠다.

그래서 이 친구가 어떤 선택을 할지가 궁금해진 것이다. 모르는 일이다. 이 친구가 남몰래 정치가의 꿈을 키워왔는지도. 그 직업이 적성에 맞으리라 생각하는지도. 그렇다면 별 할 말은 없다. 그게 아니라면, 친구, 직업을 바꾸는 데 신중하길 바란다. 높으신 분들의 권유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기 미안해 '선뜻 대답을 못하는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엔 실로 수많은 직업이 있다. 나는 아직 열정이 담긴 직업을 찾는 것 이상의 행복은 또 있기 어렵다고 믿고 산다. (유치하다는 건 나도 안다.) 그간 신문기사가 보여준 이 친구의 인생은 그런 의미에서 행복해보이는 것이었다. 정치든 뭐든 진심으로 내 직업이어야 한다. 직업은 시절이 좋다고 했다가 시절이 나빠지면 발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훈의 말을 도용해 써먹자면 연봉이 억 단위인 사람도 누구나 직업 앞에서는 밥벌이의 지겨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걸 넘어서는 직업, 그것이 당신에게 정치인가.

*****

한나라 비례대표 1번 윤송이씨 영입추진

[동아일보]
한나라당이 여성에게 돌아가는 비례대표 1번에 최연소 여성박사로 유명한 윤송이씨(29·사진)를 영입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27일 확인됐다.

윤씨는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김문수(金文洙) 공천심사위원장이 찾아와 영입제안을 했다”면서 “그러나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험이 없어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씨는 “조만간 입장을 정해 김 위원장에게 연락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윤씨 영입은 한나라당의 노쇠한 이미지를 타파하기 위해서다.

윤씨는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에서 3년6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해 최연소 여성박사가 됐다. 이후 한국 맥킨지사 경영 컨설턴트를 거쳐 ㈜와이더댄닷컴 이사로 활약 중이다.

특히 윤씨는 과거 SBS드라마 ‘카이스트’에서 탤런트 이나영이 열연한 천재 공학도의 실제모델로 젊은층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비례대표 1번에 30대 초반의 젊은 전문직 여성을 내세우겠다고 공언해 왔다. 특히 김 위원장은 “모두가 다 깜짝 놀랄 만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해 왔다.

한편 한나라당은 언론인 박찬숙(朴贊淑)씨의 영입도 추진 중이다. 박씨는 이날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영입 제의를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밝히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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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01-2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생각나네요. 드라마 카이스트는 안봐서 모르겠지만. 왠지 정치에 관련되면 사람 버린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래서 방송인 손석희님이 정치에 뛰어들지 않는 것에 대해 참으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구요. 선택은 물론 본인에게 있겠죠. 이용 할지 이용 당할지...

mannerist 2004-01-2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우당 윤선희(이사람도 그쪽 수학과던가요. 가물가물)에 대한 맞대응을 넘어 오버군요. 쯧쯧... 뛰어난 누뇌의 소유자인만큼 잘 판단했으면 좋겠네요. 거기가 어떤 집단인지, 자신이 전국구 1번으로 들어갈때 어떤 상징성을 띨 지... 예전 이명박이 민자당 입당할때 자신의 비젼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현실적 힘이 있는 여당에 들어가야 했다는 기능주의에 함몰되지 않기만 빌 뿐입니다.

starla 2004-01-29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윤선희씨 같은 경우야 제 발로 제가 선택한 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해서 이리저리 찾아들어간 케이스니까, 충격적으로 젊다고 해도 뭐 소신과 능력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사람이 정치를 직업으로 선택하든 자유니까요. 다만 위의 친구의 경우 정치와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라고 늘 생각해왔는데, 저런 경우를 보게 되니... 등떠밀려 학생회장 선거 나가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흐흐흐...

leslivres 2004-02-13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한나라당이 삼성한테 정치 자금 받아 먹은 것과 삼성 씨에프에 나왔던 윤송이 씨가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1순위 공천 대상자라는 게 대관절 연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

-지나가는 과객-
 

 

 

 

 

Ancap Aladino 4

상품가 : 146,000 won | product code: 404510-010241
원산지 : Italy | 제조(공급)사 : Caffe_Museo | 재료 : Ceramic + Stainless | 사이즈 : 4인용 - 밑바닥 x 높이 : 10 x 17.5 (cm)

내가 꼭 사야만 할 것 같은 에스프레소 메이커를 발견했다.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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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저휙휙 2004-01-2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스프레소 메이커가 아니라 우리 회사 마스코트 아닌가요? ㅋㅋ

sunnyside 2004-01-22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알라디노~~

▶◀소굼 2004-01-28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거 비비면 상품권 나오나요?;;

starla 2004-01-28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ㅎㅎ sa1t님 저도 저걸 비비면 뭔가가 나왔으면 합니다. 돈이나 -_-;; 책이나 ---;;
 

결국 사람은 자기 자신 만이 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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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구 2004-01-13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알파벳 I, 애정의 첫번째 대상"..어느 책에선가(못된 버릇처럼 '어느..', 이런 식이지만, 그래봤자 '앰브로스 비어스 [악마의 사전]' -_-;;) 잘 찔러준 적이 있죠.

"그럴 때가 있다.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감격이나 환희나 새 생명의 빛이 아니라 기분 나쁘게 버얼건 짐승의 혓바닥처럼 보이는 시기가 있다. 숨쉬고 배 채우고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그 자체가 마냥 귀찮고 무겁고 버겁기만 할 때가 있다. 책도 읽기 싫고, 음악도 듣기 싫고, 사색다운 사색은 아예 시작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 때가 있다.

그 시기가 좀 길어진다 싶으면 그게 바로 늙는 것이리라. 엊그제 읽은 책의 내용도 가물가물 기억나지 않고, 마음먹고 영화 한 편을 보다가도 딴 생각을 하고, 남의 얘기가 5분만 이어져도 한 귀로 흘려 듣는다. 나이 먹어 꼬장꼬장 자기 고집만 내세운다는 말이 슬며시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그 소리가 그 소리 같고, 결국은 내가 대충 옳은 것만 같다."

......라고 어디에선가(..그래봤자 여전히 예전에 일하던 회사에서 만들던 웹진 -_-;;) 짧은 산문을 읽었던 적이 있죠?

지금은..게을러지고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고민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만나다 보면... 히히...버티지 못하고 반성,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 모름지기...사내라면 아내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자신을 책망할 줄도 알아야지.." 하면서요.

지금은 절판된 만화 [좋은사람]에서 기타노 유지가 말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주변에 좌우되지 않고 해나간다는 거... 그런 사람들이 볼 때, 나나 보통의 샐러리맨들은 바보들 같겠지. 아무 꿈도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같을 테니까. 하지만. 주변에 좌우된다는 건 사람 속에 살아간다는 증거 아니겠나? 사람들 속과 주변에서 적으나마 자신이나 누군가가 즐거워한다면. 그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면, 사람들 속에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그 편이 몇 배는 더... 괜찮은 일 아닐까?"

늦었지만..요참에 새해 다짐 비스무리한 거..그런거 해 봅니다. 그냥 뭐.. 좀 더(겨울 추위에 굳어 버린 아랫입술의 각질만큼..) 열심히 살자구요. 보란듯한 사내, 남편처럼... 나를 위해, 은살살을 위해, 코순이를 위해... 말이에여. -_-;; V

▶◀소굼 2004-01-13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어 버린 입술의 각질이 갈라지고 터지기 전에 발라줍시다;[광고가 될까봐 상표명은 그만두기로;][[터친 경험이 있는 소굼;;펑~ 펑;]

'남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와 '사람들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뭐 꼭 반대되는 경우는 아니지만 어차피 생각의 차이니까,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면 되겠지요. 주체는 '나'니까...대신 살아줄 삶도 아니니까^^;
[꼭 자기만 아는 것처럼 말하죠; 다 아는 걸 말이에요;]
 

알라딘 마을이 생긴 후로는 전혀 모르던 분들의 서재를 우연히 방문하는 경우도 늘었다. 모처럼 짬이 나서 원없이 서재 순방을 한 뒤 새삼 다시 느끼는 점은, 서재를 꾸린 분들이 참으로 다양하고 그 서재에 담긴 책들도 그만큼 다양하며, 누구든 적어도 어느 면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넘볼 수 없는 정도의 깊이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냥 독자였다면, 그  사실이 반갑고 감동적이라 만족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편집자로서 나는 그렇게 편하고 말 수만은 없어 문제다.

사실 제대로 된 서평을 쓰자면, 한국에 한두명 있을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들고 가야 할 것이다. 인터넷 서점의 편집자가 논평이나 분석이나 연구나 수필을 쓸 필요는, 물론, 전혀 없다. 편집자는 알라딘에 오는 분들의 눈을 대신 달고 책을 딱 한 발만 먼저 보는 사람이다. 그 눈의 소유자는 두렵게도 너무나 다양한 사람일 수 있으므로, 누구의 눈을 달아야 할 것인가 또 문제다. 전에 다니던 신문사에서라면, 명쾌한 답이 있었다 - 중학교 3학년생의 눈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냥 중학생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3학년인지는 잘 모르겠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수준차는 중1에서 고3까지 어마어마한데?) 알라딘 편집자는 그 눈을 알기 위해 판매통계에 기댄다. 그 분야에 있어서 가장 평균적인 연령의, 가장 평균적인 독서를 하는 분의 눈을 다는 것이 가장 공평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좀더 짱구를 굴리면 그 책을 클릭해서 볼 사람으로 대상을 좁힌 다음 프로파일을 추론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줍잖은 예측은 대부분은 대충 들어맞고, 가끔은 말도 안되게 빗나가고, 많은 경우 제대로 알 수도 없다. 책이 누군가의 눈에 띄는 데에는 단순한 진열(즉 알라딘의 의도)이나 미끼(가격이나 이벤트)나 충격요법(미디어추천 등)을 넘어서는 무언가 매지컬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눈으로 보기엔 딱 2% 부족한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고 내 눈으로 보기엔 딱 2% 넘치는 책이 대중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결국 인터넷 서점 편집자의 작업은 목적이 비교적 명확한 것이지만, 한계 또한 명확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실망스럽게 생각하진 않는다. 한계가 있는 일이라 재미가 없다거나, 한계가 있어서 못해먹겠다, 는 건 싫어하는 일을 할 때 자주 동원되는 변명이지, 진정 깊숙하게 마음쓰는 일에 대해서는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그 한계가 유발하는 어쩔 수 없는 울타리를 이렇게 저렇게 뛰어넘고, 뛰어넘다가 울타리를 조금 무너뜨려 울기도 하고, 울타리를 무너뜨렸다고 사람들한테 혼나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다시 울타리를 따라서 가면서 교묘하게 그 바깥까지 넘나드는 비밀구멍을 발견하기도 하고, 남들이 그 비밀구멍을 알아채버리면 좀 실망하지만 누가 먼저 발견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거라고 고쳐 생각한 후 즐거워지기도 하고...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모자라 찾아내지 못한 책이나, 알았지만 내게 주어진 한계 탓에 오래 마음쓸 수 없었던 책들에 대해 무수한 서재의 무수한 조용한 독서가들이 정곡을 찔러 말해주고 있다는 것은 고마워할 일이다 - 이것이 사실 애초부터 찾기 쉬운 곳에 이미 놓여있던 정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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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20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해 시작을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는 것으로 했다. 에구, 에구, 몇번 토하고 정말 죽을 것 같이 아파서 시집도 못 가보고 죽기는 억울해 할 수 없이 간 것이다. 주사맞는 것도 끔찍히 싫어하고 아픈 것도 죽어라고 못 참고, 암튼 엄살이 무지 심한 사람이니까...

일주일 내내 약을 먹어도 여전히 소화가 안 되서 오늘 병원서 수면내시경을 했다. 깨보니 옆에서 어떤 아저씨의 비명소리... "에구, 에구, 죽겠어요, 꺼~억, 꺼~억, 못 하겠어요. 끅!" ㅋㅋㅋ 의사가 나보고도 참을만하다며 그냥 내시경하라더니, 저 아저씨 수면내시경 안하고 그냥 하다가 병명도 알기 전에 죽겠네... 역시 세상은 둘 중 하나다 : 돈이 있건, 몸으로 때우건... 난 엄살이 심하니 돈 많이 벌어야하네... ^^

병명은 다행히 암도 아니고 위염도 위궤양도 아니었다. 위출혈이란다. 의사가 갸우뚱한다. 의사 : "왜 위에 출혈이 일어났지?" 나 : "전 알지요~~~." 의사 : "이유가 뭐죠?" 나 : (안갈켜주지, 맞추면 용치... 할려다가)"ㅋㅋ 작년 마지막 날 저녁에 친구랑 밥먹구 영화보구 나오면서 찬 쥬스를 다 마시고 쥬스에 들어있던 얼음까지 내것, 친구것, 다 깨물어 먹었거든요..." 의사 : "왜 얼음을 먹죠? 더운 여름도 아닌데..." 나 : (왜 안돼? 씨~이...) "얼음이 맛있어요. 정말 좋아하거든요." 의사 : "다른 음식은 또 뭘 좋아하죠?" 나 (신나서) : "햄버거, 피자, 스파게티, 수제비, 칼국수, 빵, 라면, 그리고요, 며칠 전부터 자장면이랑 탕수육 먹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소화 안 될까봐 못 먹었어요. 글고 제일 제일 좋아하는 건 커피에요." 의사랑 간호원이랑 함박 웃음을 띠며 말없이 나를 본다. 의사 : "전형적인 나쁜 식습관이군요. 말도 안 듣겠지요?" 그리고 내게 단도직입적으로 선포를 했다. "인스턴트 다 끊으시고요. 밀가루는 되도록이면 피하구요. 커피도 끊으세요." "네? 병 나을때까지만요?" "아뇨... 앞으로는 그런 것 절대로 드시면 안됩니다." "그런게 어딨어요? 말도 안돼요.." "특히 커피는 백해 무익합니다. 끊으세요." 그때부터 나와 의사의 말씨름이 시작됐다. 다른 건 그렇다쳐도 커피는 도저히 끊을 자신이 없다. "백해무익 아니에요. 집중이 잘 되요." "그냥 집중해 보도록 하세요." "비타민 씨도 들어있어요." "비타민 씨는 아주 극소량입니다. 그리고 다른 영양소 다 파괴해요." "전 카페인 중독이라 못 끊어요." "일주일만 끊어보세요. 그러면 끊어집니다." "옛날에 3일 동안 못 마시고 죽을 뻔 했어요." "언제부터 마셨죠?" "고3때요." "거봐요. 그 전에 안먹고도 살던 겁니다. 끊으세요." "그럼 다른 마실 걸 일러주셔야죠." "물을 마시세요." "전 물 많이 마시면 토할 거 같아요."........ 어쩌구 저쩌구... 지금 생각하니 그 의사 선생님, 인내심이 많았던 것 같다. 마시건 말건 신경 안쓰면 됐을 텐데...

병원 나오면서 막 울었다. 첨엔 그저 눈물이 났는데 나중엔 억울해서 막 울어버렸다. 커피 없이 앞으로 일을 어떻게 하며 또 어떻게 사나... 무슨 낙으로 사나... 인스턴트는 그렇다 쳐도... 도저히 커피는 안 되는데... 하루종일 고민을 하다 낼 다시 의사 선생님한테 전화를 해 볼 생각이다. "저기요, 하루에 한잔도 안 되나요?"라고 여쭤보고 안 된다고 하시면 독한 맘 먹구 끊어야지, 별수 있나... 된다면... 된다면 정말 하루에 딱, 딱 한잔만 마실건데... 요즘은 에스프레소랑 카페모카랑 번갈아가며 마셨었는데... ㅠ.ㅠ 친구한테 어리광 부렸더니 다른 음료들을 많이도 주절댄다... 웬 맛없는 쓸데없는 음료는 그리 많은지... 이 세상에 커피 하나면 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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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la 2004-01-08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커피를 무진장 좋아한다. 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마셨는데, 생각해보니까 어머니가 무지하게 커피를 좋아하셨던 탓이 큰 것 같다. (새는 말이지만, 나의 어머니는 카페인 중독징후 - 커피를 안 마시면 아침에도 눈이 안 떠지고, 두통이 오고, 온 몸이 마취된 것처럼 흐느적거려 힘이 안 들어가는 등의 - 를 보여 병원에 다니신 적도 있다. -_-;)

대학합격통지를 받은 겨울, 인생 최초의 돈벌기 - 과외 아르바이트 - 를 해서 받은 금쪽같은 급료로 처음 달려가 산 것도, 아버지 어머니의 내의가 아닌, 브라운 커피 메이커였다. 어찌나 좋았던지!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아메리카노, 라떼류, 라떼류의 극단 다방커피 - 모든 종류의 커피를 좋아하지만, 최근엔 건강을 생각해서 가급적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아메리카노 타입의 블랙커피로 제한하고 있다. 그래도 하루에 아마 6잔은 마실 걸? ㅠ.ㅠ

커피는 다 좋은데 - 소화가 안된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무시하고 있다 - 이빨에 누런 착색을 일으킨다는 게 유일하게 미운 점이다. 역시 어머니를 고대로 빼닮아 이가 얇고 약한 나로서는 수년 내에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의 찌꺼기를 이빨에서 확인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나 한 십년 지나면 의학이 발달할 거니까 상관없어 -_-

Smila 2004-01-0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임신중이라 커피를 못 마시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죽을 지경입니다.

비로그인 2004-01-0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때 여름만 되면 냉면사발에 냉커피를 타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국자로 퍼먹는 버릇이 생겨버렸어요. 온(?)커피도 무지하게 좋아하는(단, 저는 한가한 시간에만 온커피를 마십니다) 저도 좀 걱정이 되네요. 서랍에 굴러다니는 클라렌 샘플을?!

Laika 2004-01-09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를 마시며 위에 글 읽다가 놀랐습니다. 어쩜, 내가 좋아하는건 다 있네, 인스턴트, 모든 종류의 밀가루 음식, 특히, 커피!
그나저나 정말 저 의사분 괜찮으시네요.. 대체로 의사들 저렇게 성실하게 답을 해주지 않던데요...

▶◀소굼 2004-01-10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를 먹으면 졸려서;; 요샌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지경에 이르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