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생각이 나서 <빨간 기와>와 <까만 기와>, 이어서 <상상의 초가 교실>을 찾아들었다. 슬프면서도 씩씩하고 무연하면서도 희망적인 이야기가 적량의 카페인처럼 필요한 시점이었다.
차오원쉬엔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가 북경대 교수이며, 중국 국어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사랑받는 적통의 작가라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세 권의 책의 책날개에 씌어진 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런 것 하나도 몰라도 좋다. 이 세 권의 책을 사랑하는 데에는 어떠한 지식도 필요없다. 각자의 조금의 기억만이 필요할 뿐이다. 각자의, 유년에 대한, 아주 조금의 기억들!
<빨간 기와>에 편집자 추천을 준 나와 <까만 기와> <상상의 초가 교실>에 편집자 추천을 준 현재의 문학 담당자 모씨에게는 취향의 공통점이 - 물론 -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의 기호가 어쩌다 일치해서 차오원쉬엔의 책 3권에 - 그나마가 우리나라에 번역된 전부인데 - 아낌없이 추천이 붙게 된 것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들 어쩌랴. 차오원쉬엔의 성장소설의 감동은 너무나 깊고 넓은 것이어서, 나는 이제 이 책들의 표지만 보아도 눈 밑이 무거워지며 물이 차오른다. 이 소설들 속의 주인공들을 생각하면 나는 슬프면서도 웃음이 나고 무연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기대에 몸이 단다.
성장소설은 복고인가? 분명히 일면 그러하다. 그러나 성장소설은 또한 미래의 구상이다. 아이를 둔 부모든 아니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성장하는 작은 인간들에 대해서 숲에 자라는 작은 풀들에게 느끼는 만큼의 책임감은 느끼게 마련이다.
차오원쉬엔이 이 소설들을 통해 얼마만큼의 미래의 구상을 보여주었는가, 새삼 생각해본다. 어쩌면 구상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다만 확신하건대, 미래의 어떤 구상 속에서도 아이들은 차오원쉬엔의 아이들과 똑같이 생겼을 것이다. 그의 소설의 아이들은 볼이 붉고 뛰어놀아 숨이 차고 신발에 흙이 가득하다. 그의 소설의 아이들은 금방이라도 종이를 뚫고 나와 내 곁에 있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더 자주 성장소설을 읽을 것이다. 내 인생을 이해하는 좋은 방편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 소설들의 갈피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일이 늘 것 같다. 내가 나이를 먹어 다만 어린 시절의 나의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래서 쌓아두는 소설들이 수십권은 될 터인데, 그 중 차오원쉬엔의 것들은 제일 위에 몇 번이고 놓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