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지도>를 읽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추론구조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이 책은 그리 깊이있는 편은 아니다. 주로 여러 대학의 심리학과에서 수행한 실험들의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몇 가지 가설이랄까, 일반화를 시도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 물론 재미는 있다. ^^ 가령, 동양인은 본질을 보고 서양인은 형식을 본다거나, 동양인은 타협을 추구하고 서양인은 규명을 요구한다는 등의 극단적 주장들이 있는데 어찌 재미가 없을쏘냐.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동양인은 슬픔 와중에 기쁨이 있고 기쁨 와중에 슬픔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주장이었다. 책은 이 이야기를 '새옹지마'의 교훈과 연계하여 말한다. 지금의 횡재가 언제 악재가 될지, 지금의 고통이 언제 축복이 될지 그 누구도 모른다는 '새옹지마'의 초인적 덤덤함은 동양인의 '순환론'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서양인과 일체의 접촉없는 동양적;;; 삶을 살아온 나로서는 '그런가' 할 뿐이다. 그리고 사실, 서양인에게라고 '삶이란 돌고 도는 것, 맨 몸으로 왔다가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식의 덤덤한 관조가 없겠는가? 없다기보다 알더라도 추구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요, 오히려 그 순환의 동그라미를 응차응차 일직선으로 펴는 것이 진정한 인간 삶의 승리라고 생각하는 의식적인 방향성이 있다고 설명함이 옳지 않겠나 싶다.

좌우간, 인생은 돌고 돌며(이 돌고 돈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 개념은 아니다), 높다란 기쁨은 불안한 슬픔이고 지극한 슬픔은 우아한 기쁨이라는 사실을 적은 책장 앞에서 읽기를 멈추었다.

실로 그렇다. 산다는 것은 그렇다. 어디 산다는 것만 그러하던가? 비즈니스도, 인간관계도, 일도, 사랑도 (아아 상투적이군) 모두 그러하다. 지극한 것들은 통하며, 지극하게 간 것은 최초로 돌아온다. 이 사실을 이토록 담담하게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서른살인 나는 스무살의 내가 부럽지 않다. 이 사실을 몰랐던 - 혹은 알지만 인정할 수 없었던 - 스무살에는 항상성을 유지하는 변화라는 것이 어째서 인생의 금과옥조가 될 수 있으리오, 라고 눈을 흘겼다. 쭉쭉 나아가야 했으니까.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내 우울과 무력감이 하등의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벗어나지를 못했었다.

지금은? 지금은 언제나 하이퍼다 -_-;;; (아닌가...) 나는 변한다. 나도 변하고 주위도 변하고 비즈니스도 변하고 인생도 변한다. 기쁘면서 동시에 슬프고, 슬프면서 동시에 희망적이고, 바쁘면서 지루하고, 한가하면서 치열하다. 돌고 돌며, 동시에 여러가지이고, 병행하는 모순들을 양 팔에 힘차게 안고 끌고 간다. 그러니까 그리 기분나쁠 일도 없다. 반나절만 웅크리고 기다리면 희망의 순서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아, 나이드는 것이 좋을 때는 이런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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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side 2004-04-23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하지 않는 건 스탈라님의 글솜씨 입니다 ! 제가 스탈라님을 첨 알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죽~ ^^ (부럽습니당)

zooey 2004-04-23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돌고돌고. 우리는 계속해서 스텝을 밟을 수밖에 없는 처지. 있는 힘을 다해 나아갈 수밖에요. ^^ (sunnyside님 말에 동감)

starla 2004-04-26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오랜만에 쓴 페이퍼에 영광스런 두 분의 코멘트입니다. -_-;;;

to sunnyside / 그때부터 지금까지 -> 요게 꽤 됐습니다 그려... 헐헐...
to zooey / 아앗, 저의 favorite haruki 역시 <댄스 댄스 댄스>.
 

음악을 말로 설명하는 것처럼 소용없는 짓도 또 없다. 제법 전문적으로 대중음악평을 쓰고 있는 친한 선배와 만나 입만 열면 하는 말이다.

이 선율, 이 리듬, 그리고 선율과 리듬 사이 어느 무중력같은 공간에 작은 알갱이처럼 부유하는 느낌. 어떤 음악은 마치 머리 위에서 오로라 같은 것이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온 몸을 젖게 한다. 머리 꼭대기로부터 전기적 자극이 벼락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다.

오선지에 음표를 빌어 그려져 있을 때에도 진짜 음악은 아닌 법인데, 하물며 말로 그것이 어떻게 설명이 되겠는가. 문학에 대해서건 이론에 대해서건 영화에 대해서건 무용에 대해서건 평이란 그 자체로 존재론적 고민을 끌어안고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일이라지만, 음악에 대한 평은 그 중에서도 가장 손에 잡히지 않는 일 같아 보인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음반평은 가수나 연주자의 뒷배경이나 연주이력을 소개함으로 시작하여, 해당 음반의 전작과의 차이점이나 동일점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하고 맺곤 한다. 특히나 음반 속에 포함된 부클릿의 평치고 참신한 것은 정말 없다. (좀 다른 얘기지만, 왜 부클릿을 음반 속에 포장해두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애초에 그 음반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그 정도 이야기는 스스로 쓸 수도 있는 것일 텐데 말이다. 부클릿을 밖으로 한 번 포장해보라. 모르긴 몰라도 매출이 늘텐데.)

문체, 비유의 방식, 정보의 깊이, 논란을 부추기는 시각의 극단화 - 어떤 것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다. 클래식 쪽은 조금 사정이 낫다고 생각되지만, 이 쪽은 잘 모르니 뭐.

아주 좋은 음악을 들을 때는 - 지금 듣고 있으니까 이런 글을 쓰게 된 건데 - 이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의 소용없음 때문에 슬프기도 하고 경이감을 느끼기도 한다. 스스로 음악을 하는 사람은, 음악에 대한 느낌은 음악으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일찌기 깨달은 현명한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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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바위 2004-03-30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현의 노래>가 떠오르네요. 김훈이 음악을 소재로 소설을 쓴다는 얘기를 듣고 큰 기대를 했는데..... 실망했습니다. 글의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현의 세계에 대한 묘사에서는 별로 가슴을 치는 바가 없었거든요...김훈이 실패했다면 불립문자의 음악세계를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봐야겠죠? 그런데 이 페이퍼를 쓸 때 들었던 `아주 좋은 음악`은 무엇이었나요?
 

 

 

 

 

 

갑자기 생각이 나서 <빨간 기와>와 <까만 기와>, 이어서 <상상의 초가 교실>을 찾아들었다. 슬프면서도 씩씩하고 무연하면서도 희망적인 이야기가 적량의 카페인처럼 필요한 시점이었다.

차오원쉬엔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가 북경대 교수이며, 중국 국어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사랑받는 적통의 작가라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세 권의 책의 책날개에 씌어진 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런 것 하나도 몰라도 좋다. 이 세 권의 책을 사랑하는 데에는 어떠한 지식도 필요없다. 각자의 조금의 기억만이 필요할 뿐이다. 각자의, 유년에 대한, 아주 조금의 기억들!

<빨간 기와>에 편집자 추천을 준 나와 <까만 기와> <상상의 초가 교실>에 편집자 추천을 준 현재의 문학 담당자 모씨에게는 취향의 공통점이 - 물론 -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의 기호가 어쩌다 일치해서 차오원쉬엔의 책 3권에 - 그나마가 우리나라에 번역된 전부인데 - 아낌없이 추천이 붙게 된 것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들 어쩌랴. 차오원쉬엔의 성장소설의 감동은 너무나 깊고 넓은 것이어서, 나는 이제 이 책들의 표지만 보아도 눈 밑이 무거워지며 물이 차오른다. 이 소설들 속의 주인공들을 생각하면 나는 슬프면서도 웃음이 나고 무연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기대에 몸이 단다.

성장소설은 복고인가? 분명히 일면 그러하다. 그러나 성장소설은 또한 미래의 구상이다. 아이를 둔 부모든 아니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성장하는 작은 인간들에 대해서 숲에 자라는 작은 풀들에게 느끼는 만큼의 책임감은 느끼게 마련이다.

차오원쉬엔이 이 소설들을 통해 얼마만큼의 미래의 구상을 보여주었는가, 새삼 생각해본다. 어쩌면 구상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다만 확신하건대, 미래의 어떤 구상 속에서도 아이들은 차오원쉬엔의 아이들과 똑같이 생겼을 것이다. 그의 소설의 아이들은 볼이 붉고 뛰어놀아 숨이 차고 신발에 흙이 가득하다. 그의 소설의 아이들은 금방이라도 종이를 뚫고 나와 내 곁에 있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더 자주 성장소설을 읽을 것이다. 내 인생을 이해하는 좋은 방편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 소설들의 갈피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일이 늘 것 같다. 내가 나이를 먹어 다만 어린 시절의 나의 일부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래서 쌓아두는 소설들이 수십권은 될 터인데, 그 중 차오원쉬엔의 것들은 제일 위에 몇 번이고 놓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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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2-28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에게도 성장소설이 필요하다...내 좋은 깨우침이네요. 늘 성장기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하긴 또래가 좋은 이유도 바로 같이 성숙해 가는 세대이기 때문인 이치와 같은가 봅니다.

starla 2004-02-28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피솔님, 차오원쉬엔 책 한번 읽어보세요. 뭉클하답니다. ^^ 누군가 말하길 <내 영혼의 아이들> 중국판이라고 ^^

zooey 2004-03-01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오원쉬엔. 아아,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죠. ㅠ.ㅠ 2월 내맘대로 좋은 책 찜!
 
 전출처 : 파롤란토 > 그런데 레닌이 누구야?

"너무 재밌다...그런데 레닌이 누구야? 주인공은 알렉스잖아."
<굿바이 레닌>을 보고 나온 20대 초반 여성 관객의 멘트다.
지난해 FILM2.0에 실린 '말말말'중 단연 으뜸이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레닌을 모른다고 탓할 수도 없지만,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엔
뭔가 엄청난 문화적 재앙이 도래할 것만 같다.

- FILM2.0 162-163 합본호 <편집장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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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la 2004-01-30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구나. 역시 film2.0의 편집장이니까 이 일화에서 '문화적 재앙'을 예감하는 구나, 싶어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 재앙으로 말하자면 어디 문화적 재앙 뿐이겠는가... 그보다도 대체 저 관객은 어떻게 [굿바이 레닌]을 볼 생각을 했던 건지... 뭐가 그리도 재미났는지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흐흐흐...

▶◀소굼 2004-01-30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단순히 통일독일을 숨긴다는 것만으로 웃기다고 한걸지도;으음, 달력에 15일 굿바이레닌DVD출시라고 써놨었네요...그냥 지나쳤으면서;

땡구 2004-01-31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그래도 “문화적 재앙”운운은 좀 오바...인네...싶네요. 필름2.0 편집장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렇게 겸손하지 못하게 말하면 안되죠. 저로 말할거 같으면 대학 3학년 영미비평 수업시간에 후배 여학생이 발표하면서 계속해서 ’미셀 포컬트(Michel Foucault)‘, ’미셀 포컬트‘ 할 때 이후로 그런 부분은 웃으면서 덮어주자!.... 했다면 당연히 거짓말이겠고, 가만 생각해 보니 저 역시 [푸코의 추]를 읽기 전까지는 움베르토 에코와 미셀 푸코를 잘 구분하지 못했던거 같기도 하고... -_-;;

여튼... 레닌..하니 91년도 겨울에 어찌 어찌해서 모스크바에 갔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삭풍이 불던 붉은 광장, 테트리스 성을 등지고 왼쪽의 레닌묘에 늘어선 관람객 만큼이나 오른쪽에 길게 줄지은 맥도날드 입장 행렬! 음식이 입에 안맞아서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레닌묘 입장 행렬의 맨 끝에서 찰칵 사진 한 장만 찍고 바로 맥도날드로 달려갔던 기억이 나네요. 햄버거 먹고 조금 더 돌아다니니...묘지 뒤켠에 멋드러진 레닌 동상이 있어서...이야 반갑다! 하면서... V 하면서 사진 찍고 그랬죠. 아...근데.. 오래된 객지 생활에 그 사진들이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요. 찾고 싶은데....흠흠..

비로그인 2004-01-31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7년 여름이었던가 러시아에 갔었는데... 그 때는 이미 레닌 동상은 고사하고 조그만 석고 흉상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레닌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 한방 찍고 기념품 하나 사가야지 했던 바램이 여지없이 무너지나 싶던 순간... 시장을 돌다 티셔츠 가계에 레닌 얼굴이 크게 찍힌 여름 반팔티를 발견하고는 막 달려갔죠.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레닌 머리 위로 노란색 아치가 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Mac Lennin"이라고 써 있더군요. 그 때야 황당하고 서글프고 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자본주의의 포식성이 섬뜩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좀더 예의바르고 정갈한 자본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요...쩝...


▶◀소굼 2004-01-31 0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란색 아치의 레닌은 깨는군요-_-;;언제 어디서나 어떻게든 맥도날드인건가;;

starla 2004-01-31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c lennin 이라 ㅠ.ㅠ

실상 모든 문화적 체험의 생산자는 듣는 대상을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는 거겠죠. [굿바이 레닌]을 그냥 본 저 관객은 나름대로 레닌에 대한 추억들까지(!) 간직한 위의 댓글러;;; 들과는 다른 대상이었고, 그 관객이 뭐라고 한다고 [굿바이 레닌]의 문화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정말 '문화적 재앙'이란 표현은 좀 오버인지도 흐흐... 책에도 그런 책은 많아요. 정말 재미있는데, 이 유머의 코드는 스키마를 필요로 한다, 라고 판단될 때. 아무리 재미있어도 그런건 내가 누군가의 스키마를 통째로 알지 못하는 이상 추천하기 어렵잖아요. 이럴 때는 마구잡이로 추천하고는 이해 못한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문제겠죠...

아 횡설수설;;
 

아침에 출근했더니 한 친구가 메신저로 아래 기사를 날려줬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모를만한 사람도 한번쯤은 예전 삼성그룹 이미지 광고에서 봤을 윤송이 박사는 내 대학동기이다. 물론 말이 대학동기이지,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이 친구는 전자공학동 나는 자연과학동 소속도 달랐으므로 '같은 학교 같은 학번이었다' 정도가 옳은 표현이겠다. 하지만 한 학년에 100여명 남짓 여학생이 있을 뿐으로 모든 여학생은 서로 다 아는 사이였고 그런 면에서 또 모르는 친구라고 할 수도 없다.

역시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꽤나 히트였던 드라마 '카이스트'의 이나영역, 어리버리하지만 천재적인 공대생역의 실제 모델이 이 친구였다고 한다. 이 친구의 에피소드 - 후에 이나영의 에피소드로 극화된 - 란 것들이 어지간히 전설적이라고들 한다. 실제로는 어땠냐고 내 주위 사람들도 내게 숱하게 물어왔다. 대답은 "잘 모르는 친군데". 어쨌든 내가 알기로 이 친구는 상당히 스마트하지만 또한 노력이 엄청난 편에 가까웠다. 사실 밥먹다 아이디어가 생각나 식판 떨어뜨리고 실험실로 돌아갔다는 게 뭐가 기행인가. 그런 친구는 수도 없이 많다. 그보다는 1학년 때부터 실험실에 끼워달라고 교수님께 졸랐다는 에피소드가 이 친구의 실제 모습에 가까울 것 같다.

이 친구에 얽힌 내 개인적인 기억은 학창시절의 것이 아니다. 이 친구를 열심히 관리하려 하고 있는 모일보에 내가 기자로 있던 시절의 기억이다. 바로 그때 이 친구가 그 명성찬란한 MIT 미디어랩 최연소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맥킨지컨설팅으로 들어온 것이다. 모일보는 당장 이 미래의 브레인 풀을 알아보고 갖가지 기사에 등장시켰다. 밀레니엄을 바라보며 상당히 신선한 연재물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이 친구는 취재를 당하기 위해 모일보 신사옥에 자주 드나들었고, 나는 아, 내가 계속 기자로 있으면 이렇게 친구를 취재하기도 하겠구나, 라는 너무 지당해서 멍청할 정도인 생각을 했다.

기사를 내게 날려준 친구로 말하자면 윤송이 박사가 이사로 있는 와이더댄닷컴 모그룹의 한 자회사에 다니고 있다. 당연히 그 친구는 아래 기사의 주인공에 대해서 자주, 많은 생각을 할 것이다. 나도 그 친구도 사실은 아래 기사의 주인공이 회사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 베일에 가려있다고들 하니까 말이다 - 가 제일 궁금하다. 나로 말하자면 가끔 질투는 아니지만 꼭 질투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아직도 피부가 대학시절 그대로인 사진을 볼 때 그러하다. -_-;;;

그런데 우리의 감정이야 어쨌든 간에 상관없고, 아래 기사의 내용이 충격적이다. 제안을 한 사람이나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다는 쪽이나 이래저래 내가 이해하기엔 미궁이다.

정치는 직업일 것이다. 아니 정치는 정말 직업이다. 도덕인가 정치경제 시간에 들었던 '정치인은 국가에 봉사하고 국민의 뜻을 섬기며' 어쩌구는 예쁜 말에 불과하다. 정치가가 무슨 자원봉사자인가. 나는 정말이지 봉사 따위 바라지 않고 내 뜻을 섬겨주기도 바라지 않는다. 내 뜻과 달라도 좋다. 제대로 된 전문가가 행한 입법이고 정치라는 게 납득이 되면 행복하기만 하겠다.

그래서 이 친구가 어떤 선택을 할지가 궁금해진 것이다. 모르는 일이다. 이 친구가 남몰래 정치가의 꿈을 키워왔는지도. 그 직업이 적성에 맞으리라 생각하는지도. 그렇다면 별 할 말은 없다. 그게 아니라면, 친구, 직업을 바꾸는 데 신중하길 바란다. 높으신 분들의 권유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기 미안해 '선뜻 대답을 못하는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엔 실로 수많은 직업이 있다. 나는 아직 열정이 담긴 직업을 찾는 것 이상의 행복은 또 있기 어렵다고 믿고 산다. (유치하다는 건 나도 안다.) 그간 신문기사가 보여준 이 친구의 인생은 그런 의미에서 행복해보이는 것이었다. 정치든 뭐든 진심으로 내 직업이어야 한다. 직업은 시절이 좋다고 했다가 시절이 나빠지면 발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훈의 말을 도용해 써먹자면 연봉이 억 단위인 사람도 누구나 직업 앞에서는 밥벌이의 지겨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걸 넘어서는 직업, 그것이 당신에게 정치인가.

*****

한나라 비례대표 1번 윤송이씨 영입추진

[동아일보]
한나라당이 여성에게 돌아가는 비례대표 1번에 최연소 여성박사로 유명한 윤송이씨(29·사진)를 영입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27일 확인됐다.

윤씨는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김문수(金文洙) 공천심사위원장이 찾아와 영입제안을 했다”면서 “그러나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험이 없어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씨는 “조만간 입장을 정해 김 위원장에게 연락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윤씨 영입은 한나라당의 노쇠한 이미지를 타파하기 위해서다.

윤씨는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에서 3년6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해 최연소 여성박사가 됐다. 이후 한국 맥킨지사 경영 컨설턴트를 거쳐 ㈜와이더댄닷컴 이사로 활약 중이다.

특히 윤씨는 과거 SBS드라마 ‘카이스트’에서 탤런트 이나영이 열연한 천재 공학도의 실제모델로 젊은층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비례대표 1번에 30대 초반의 젊은 전문직 여성을 내세우겠다고 공언해 왔다. 특히 김 위원장은 “모두가 다 깜짝 놀랄 만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해 왔다.

한편 한나라당은 언론인 박찬숙(朴贊淑)씨의 영입도 추진 중이다. 박씨는 이날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영입 제의를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밝히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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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01-2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생각나네요. 드라마 카이스트는 안봐서 모르겠지만. 왠지 정치에 관련되면 사람 버린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래서 방송인 손석희님이 정치에 뛰어들지 않는 것에 대해 참으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구요. 선택은 물론 본인에게 있겠죠. 이용 할지 이용 당할지...

mannerist 2004-01-2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우당 윤선희(이사람도 그쪽 수학과던가요. 가물가물)에 대한 맞대응을 넘어 오버군요. 쯧쯧... 뛰어난 누뇌의 소유자인만큼 잘 판단했으면 좋겠네요. 거기가 어떤 집단인지, 자신이 전국구 1번으로 들어갈때 어떤 상징성을 띨 지... 예전 이명박이 민자당 입당할때 자신의 비젼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현실적 힘이 있는 여당에 들어가야 했다는 기능주의에 함몰되지 않기만 빌 뿐입니다.

starla 2004-01-29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윤선희씨 같은 경우야 제 발로 제가 선택한 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해서 이리저리 찾아들어간 케이스니까, 충격적으로 젊다고 해도 뭐 소신과 능력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사람이 정치를 직업으로 선택하든 자유니까요. 다만 위의 친구의 경우 정치와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라고 늘 생각해왔는데, 저런 경우를 보게 되니... 등떠밀려 학생회장 선거 나가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흐흐흐...

leslivres 2004-02-13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한나라당이 삼성한테 정치 자금 받아 먹은 것과 삼성 씨에프에 나왔던 윤송이 씨가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1순위 공천 대상자라는 게 대관절 연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

-지나가는 과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