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헛되지 않아요 - Suffering is Never for Nothing
엘리자베스 엘리엇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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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세상 누구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살면서 한 번쯤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몸부림치는 불가사의다. 28쪽


 

그렇기에 누구나 고통이라는 불가사의로 들어가기를 싫어한다. 들어가기는커녕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게 고통이다. 그런데 저자는 ‘고통은 헛되지 않아요’ 라고 말하고 있다.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 고통이 결코 이유 없지 않다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늘 내 안에 있었다. 그런데 ‘고난은 원치 않은 것을 갖거나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라며 ‘모든 고난을 망라’하는 이 말 앞에서는 맥이 탁 풀려버렸다. 고통은 고난에서 비롯되었기에 꼭 엄청난 고통이어야만 고난을 받고 있다고 여겼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내 삶의 곳곳에 고난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다 인정해버린 것처럼 고통이, 고난이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고통은 헛되지 않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큰 교훈은 대개 가장 큰 고난에서 얻은 것이다. 38쪽

 

결혼한 지 27개월만에 선교를 위해 들어간 에콰도르 인디언들에게 남편이 살해되고, 당시에 10개월 된 딸이 있었음에도 남편을 죽인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 곳에 다시 들어가 사역을 했던 저자. 16년 뒤 미국으로 돌아와 신학자와 재혼을 했지만 3년 반 만에 암으로 또 다시 남편을 잃었다. 세 번째 남편은 현재 살아 있지만 저자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런데도 저자는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았으며 그렇게 큰 고난 속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자신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겪어보지 못했기에 이해한다는 말을 섣불리 할 수 없다며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그런 저자를 보면서 난 아직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이다 혹은 두렵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럼에도 어떻게 저렇게 하나님을 향한 충실한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욥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고난과 전혀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수만 가지 질문을 품고 있었고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59쪽

 

욥처럼 저자도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자신을 외면하지 않으실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고, 수만 가지의 질문을 하고 깨달아갔다. 그리고 어떠한 순간에도 반응이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감사여야 한다.’고, 즉 감사와 수용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이다. 배우자를 두 번이나 잃는 극심한 순간에도, 자신보다 더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을 알게 될 때에도 저자는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납득하기는 힘들지만 하나님의 섭리이며,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며, ‘그 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나와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작은 것에도 불평과 불만이 쏟아지고 신세한탄이 되는 나와는 달리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만 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고난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에 내가 고난을 당하면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나를 위해, 내 안에서 고난을 당해 주신다. 내가 고통을 당할 때 그 분도 고통을 당하신다. 173쪽

 

저자는 오랜 생각 끝에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온 고통을 받아들였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단지 고백하고 받아들였다고 했다. 우리에게 닥친, 닥칠, 닥치고 있는 모든 고통을 이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적어도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는 스스로 지나신 곳보다 더 어두운 곳으로는 나를 인도하시지 않는다.’ 라는 사실만 인지해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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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기록장을 정리하다 문득, 읽었지만 리뷰를 기다리는 책들이 몇 권인지 궁금했다.


 

나에게 리뷰는 책을 읽고 난 뒤에 다시 한 번 책을 곱씹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꾸역꾸역 리뷰를 남겼다. 그리곤 잊어버렸다. 리뷰가 남아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언제든지 기억하고 싶으면 리뷰를 찾아보면 된다는 알 수 없는 자신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뷰에 되도록 스포일러를 하지 않은 탓에 다시 읽어봐도 결말을 모르는 책들도 있고, 내가 쓴 글이 낯설게 느껴져 감정에 휩쓸리는 등 부작용도 심심찮게 드러나고 있다.

 

내 독서기록장은 중학교 3학년 때인 1996년 11월에 시작되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1995년에 국어 과목을 가르치던 담임선생님께서 독서록을 남겨보라고 하셨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선생님은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전근을 가셨고, 거의 일 년이 지난 후에 기록장을 남겨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입학할 고등학교가 정해진 뒤였고, 시간이 남아돌아 어쩔 줄을 몰랐다.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기특하게 미리 공부를 당겨서 하는 학생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시간들을 책으로 때웠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지금처럼 평준화가 아니었다. 성적으로 학교가 정해지던 때라 입학 할 고등학교가 정해진 뒤에는 대부분(?) 자유를 만끽하기 바빠서 내가 독서기록장을 기입할 당시는 그야말로 교실은 어수선 그 자체였다. 그런데도 그 시간에 책을 읽었다. 그때부터 책에 대한 허세가 있었고, 그 허세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말 그대로 기록장이었다. 번호, 책 제목, 지은이, 출판사를 기록하고 간단한 줄거리를 남겼다. 대부분 책 뒤표지에 있는 요약을 참고해서 적었고, 내 느낌을 간단히 남겼다. 그래서 1997년 1월에 읽은『노인과 바다』는 한 줄짜리 기막힌 리뷰가 탄생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을까 하는 것과 왜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며칠 밤을 새우며 잡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독서기록장에 기록된 이 글을 읽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촌철살인인데?’ 감탄을 했다가 2008년에『노인과 바다』를 재독하고 그제야 작품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이 소설은 그저 아름다웠다는 것. 그 사실을 이해하기엔 17살의 나는 너무 어렸다고 말이다. 그렇게 20대 초반까지 기록으로, 짧은 단상처럼 독서기록장을 유지하다 본격적으로 리뷰를 쓰기 시작했다. 리뷰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독후감에 불과한 글들이었다. 그럼에도 내 스스로에게 놀랐던 건 750권까지 손으로 일일이 노트에 기록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존의 기록을 모두 블로그에 다시 옮겼고, 751권부터는 블로그에 바로 리뷰를 올렸다. 그 리뷰가 현재 1,956권이 되었다.

 

 

 

 

독서를 하면 무조건 리뷰를 남겼기에 독서량과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았다. 리뷰를 남기지 못하면 독서를 못할 때도 있었고, 일부러 리뷰를 쓰기 위해 내달리는 독서를 멈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작년부터 책과 관련된 일을 시작하면서 독서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리뷰가 따라가지 못했다. 순진하게도 올해 중순까지 언젠가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모두 남길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다 11월에 읽은 책읽기 기록장을 정리하면서 ‘불가능하겠구나!’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럴 바에는 지금까지 읽은 책이라고 번호를 붙여보자 싶어서 블로그며, 파일에 따로 보관중인 개인 기록장까지 모두 뒤졌다. 한참을 뒤지고 있는데 2010년 7월부터 2012년 12월까지의 기록이 없었다. 아무래도 전에 썼던 노트북에 기록이 저장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꽤 오랫동안 썼던 노트북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고, 수리를 차일피일 미루다 현재 쓰고 있는 저렴한 노트북을 구입하면서 그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는 자료가 뭔지 아예 잊어버렸다. 하지만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대부분 남기지 못한 게 작년부터였으므로, 세세한 기록은 없지만 기록되어 있지 않은 시기에 읽은 책에 대한 리뷰는 모두 남겼을 거라 생각한다. 기록이 누락되었던 시기는 이직으로 바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내 삶을 재정비하던 터라 이후에 차근차근 읽은 책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기억한다. 내 책장은 읽은 책, 안 읽은 책, 읽다 만 책, 리뷰를 써야 할 책을 철저히 구분하고 있으므로 아마 나의 예상이 어느 정도 맞을 듯싶다.

 

빠진 기록을 제외하면 읽었으나 리뷰를 남기지 못한 책은 2016년 이전까지 8권, 2017년에 7권, 2018년에 54권, 2019년 11월까지 153권으로 총 222권이다. 현재 기록이든 리뷰를 남긴 책은 1,956권이므로 1997년 11월부터 2019년 11월까지, 꼭 23년간 읽은 책은 2,178권이다. 물론 정확하지 않은 기록이고, 그저 개인 기록이기 때문에 크게 의미 있는 것도 아니다. 작년부터 한 해에 읽은 책이 200권을 넘어가기 시작했으므로 23년간 읽은 책의 평균을 내보면 약 96권이 된다. 그저 23년 동안 기록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숫자일 뿐이다. 내 스스로 얼마나 게으르고 끈기가 없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이렇게 오랫동안 기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다.

 

 

*오지랖 넓은 친구가 내가 읽은 책 1,000권에 대해 정리해준 기록이다.


 

누락된 222권의 리뷰를 모두 다 남길 수 없다. 그리고 모두 남긴다고 해서 내게 엄청난 의미로 다가오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읽은 책 기록장 앞에라도 번호를 붙여보려고 한다. 해가 바뀔 때마다 1번부터 다시 시작하는데, 어렵게 찾아낸 2,178이라는 숫자부터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한다. 계속 밝혔듯이 ‘나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책을 읽었소!’ 라고 젠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개인의 기록일 뿐이다. 23년간, 나름의 독서 끝에 얻은 교훈은 보여주기 위한 독서, 권수를 위한 독서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책 내용을 기억하고 저장할 순 없지만 한 권의 책이 얼마나 진득하게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는지가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읽었던 책을 최근에는 다시 꺼내 읽는 횟수가 잦아졌고, 그런 책들은 대부분 장기 기억으로 남겨두고 싶은 책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는 중이다.

 

2,178이라는 숫자를 끌어내기 위해, 그리고 왜 그 숫자를 쓰기 시작하려는 이유가 많이 거창해졌다. 꼭 23년이 된 독서기록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리 개념이니 괘념치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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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둘리 2019-12-0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시네요! 새삼 기록과 보관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고 갑니다. :)

안녕반짝 2019-12-02 22:02   좋아요 0 | URL
어쩌다 보니 기록을 오래 하게 되었네요.
저도 이렇게 오랫동안 하게 될 줄 몰랐지만요^^

초록별 2019-12-02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의 정성에 감탄과 부러움과 저도 해보야겠다는 용기를 주시어 감사드려요 ~~^^;

안녕반짝 2019-12-02 22:02   좋아요 0 | URL
독서 기록은 언제든지 추천합니다^^

cyrus 2019-12-02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가 독서 통계를 직접 해주다니, 정말 대단해요. 누가 내 대신 서재에 있는 책들을 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ㅎㅎ

안녕반짝 2019-12-02 22:01   좋아요 1 | URL
저도 제 서재의 책이 몇 권인지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세었던 게 4천 권이 좀 안되었으니 지금은 훌쩍 넘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할 뿐 세어 볼 엄두도 안 납니다^^

sirdky 2019-12-04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멋지십니다. 저는 책 사모으는 양에 비해 읽는건 정말 소수인데요. 큰 자극 얻고 갑니다.^^

얄라알라 2020-02-04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신만큼 기록이 놀랍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줄 알았습니다 - 셀프 구원인가, 진짜 구원인가?
박한수 지음 / 두란노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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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진행 중입니다. 약속은 확실하지만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전하지만, 그리고 지금 구원의 상태에 있지만 이 상태가 영원하지 않으므로 선한 싸움을 쉬지 않고 해야 합니다. 203쪽

 

마음이 급해졌다. 책을 다 읽자마자 거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남편에게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며 이 책의 내용을 전했다. 서로의 믿음을 보며 결혼했다고 하지만 솔직히 일상에서 믿음의 삶이 자주 흘러나온 것은 아니었다. 서로 존중하지 못하고, 기 싸움을 하며 믿음의 가정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제대로 된 회개가 이뤄지지 않았고, 이미 구원 받았다는 확신 때문이 안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내 마음을 전달했다. 내 스스로도 구원 받았다는 확신 때문에, 자잘한 죄들을 끊임없이 짓고 있었고, 회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지옥을 외면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비슷한 남편의 얘기를 듣고 왜 그동안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교회는 지식을 전해 주는 곳도, 신학을 강론하는 곳도 아닙니다. 힐링해 주는 곳은 더더욱 아닙니다. 교회는 영혼을 살리는 곳입니다.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치르겠다고 각오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58쪽

 

‘영혼을 살리는 곳’이 교회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여 스스로 넘어진 적이 많았다. 그리고 남 탓을 하고 그런 것들이 만족이 되지 않으면 무기력감에 빠졌다. 최근에도 그랬고, 이 책을 읽고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또한 내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죄의 이유를 알았다. ‘회개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는데, 나는 행함이 없었다. 바로 ‘거짓된 회개’ 때문이었고, ‘이전에 눈물로 후회하며 죄를 고백한 것이 회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죄를 깨닫고 회개했다면 ‘100%가 되어야 완전해’지는데 어정쩡하게 회개하고 셀프 구원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은밀한 죄를 짓고 있다면 지금 당장 멈추십시오. 습관적으로 작은 죄를 짓고 있다면 지금 당장 멈추십시오. 지금 당장 멈추지 않으면 그 죄가 멸망으로 이끌고 갈 것입니다. 195쪽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께 내가 짓고 있는 은밀하고 작은 죄들을 고백했다. 그 죄들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남편에게도 그동안 우리 가족에게 습관적으로 지었던 죄들을 고백했고, 이 회개가 행함과 연결되도록 달라지고 싶다고 말했다. 내 스스로 내가 짓고 있는 죄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방치하고 외면했던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서(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회개했고 변화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게 구원이다.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이 믿어진다. 수없이 넘어지고 쓰러졌지만, 그럼에도 다시 나를 일으켜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 나는 죄인이지만 죄에 파묻혀 살긴 싫다. 나중은 없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행하고 싶고, 지금 고백하고 싶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진정한 회개에 이르렀다는 사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평생 이뤄져야 하는 일임을 믿고 따르는 것까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구원은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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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의 비밀을 알고 있는가? 이순신 장군 동상의 얼굴이 누구의 얼굴인지에 대해 알면 놀랄 것이다(동상의 제작자 김세중의 얼굴을 본 딴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입고 있는 갑옷은 조선식 갑옷이 아니라 중국식 갑옷이다. 그리고 제작자 측에서는 현충사에 있는 칼을 참고해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은 실제 이순신이 사용한 조선선 '쌍룡검'이 아니라 일본도다. 그런데 이 칼이 일본도인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칼을 쥐고 있는 손이 오른손이라는 사실이다. 오른손에 칼을 든 것은 명백한 패장敗將의 항복을 의미한다.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우리 민족의 기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패배의 역사를 보여주는 절망적인 조형물일 수도 있다. 『안중근 사라진 총의 비밀』51쪽



-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동상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의미 있는 동상,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동상을 확인도 안하고 만들 수가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알게 된 나도 그렇지만, 이순신 동상의 비밀은 충격적이다.


무엇이든 왜곡될 수 있다.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그럴 수 있고, 잘못된 정보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도 역사를 지키는 일이 아닐까? 조형물이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나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는 마음에 대한 가릴 수 없다고 여기지만 그럼에도 잘못된 것은 올바르게 고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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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사라진 총의 비밀 -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빼앗긴 M1900을 찾아서
이성주 지음, 우라웍스 기획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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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장군이 하얼빈 의거에서 사용한 M1900을 복각한다.


이 ‘황당한’ 프로젝트의 시작은 총을 좋아하는 40대 세 남자가 우연히 중국 하얼빈에 있는 안중근 기념관에 전시된 총을 보고 나서였다. 실제 안중근이 사용한 모델과 다른 ‘브라우닝 하이파워’가 전시되어 있었고, 한국 안중근 기념관에도 ‘플라스틱 덩어리 총’이 전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 만들어 볼까’ 라는 호기심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는 엄청난 일이 되어버렸다. 2018년 4월에 생각하고 의거 일에 맞춰 같은 해 10월 26일에 전달하려 했지만, 더 의미 있게 안중근 장군 의거 110주년인 2019년에 맞춰 진행되었다. 얼핏 시간이 넉넉하겠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을 보면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 흔들릴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다.


똑같은 총이 없다고 해서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50쪽


이런 의문이 충분히 들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왜 안중근 장군이 M1900를 사용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져본 적도 없고, 복각의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총기 복각’에서 ‘사격 재현’으로 일이 커지면서 우리나라가 총기 청정 국가이며, 그렇기 때문에 총기 반입은 엄청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어렵게 미국에서 M1900를 구했지만(판매자에게 이 모든 사연을 설명하면서까지) 문제는 배송이었다. 결국 우리나라가 총기 청정 국가일 수밖에 없는 사실이 증명되면서 사격 재현은 미국에서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안중근의 총을 찾는 이야기가 아니다. 총을 통해서 인간 안중근의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 그 자체다.


안중근의 총을 찾아가는 이야기에 역사가 빠질 수 없다. 이토 히로부미란 인물을 이해하고, 왜 그를 사살해야 했는지를 알려면 일본 역사도 알아야 했다. 저자는 총을 찾는 프로젝트는 흡인력 있게 전달하면서 안중근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은 깊고 진중하게 펼쳐 놓는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제국주의의 기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므로 막부의 끝자락을 거쳐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근대화에 들어서면서 제국주의로 가는 모든 과정을 되짚는다. 얼핏 우리에게 우호적(절대 목적 없이 그럴 수는 없다)으로 보인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했을 당시 일본은 오히려 한일합방을 앞당겼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토 히로부미는 ‘큰 잡음 없이 식민지 확보에 나서겠다는 것이지 식민지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안중근 의사가 아니었다면 ‘일본에게 완벽하게 종속’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안중근 장군의 총 사격 시간은 ‘6초’였다. 그리고 ‘현대 권총 사격법으로도 상식 밖이라 할 수 있는’ 한 손 격발이었다. 결국 ‘M1900과 7.65밀리미터 탄이 한 손으로도 충분히 반동을 받아 낼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가면서 총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거기에 안중근 장군은 본래 총을 잘 다루는 명사수에다 의거를 개시하기 3개월 전부터 집중적인 훈련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다 시야가 제한되어 있는 악조건 속에서도 ‘일곱 발을 발사해 표적 넷에 여섯 발을 맞혔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신기’에 가까운 능력이지만 ‘안중근의 실력’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미국에서 사격 재현 실험은 세 가지였다. 한 손 사격과 양손 사격의 정확도 측정, M1900 자동권총과 리볼버 권총의 연사 속도 측정, 덤덤탄의 파괴력 측정이었다. 저자는 두 명의 전문 슈터에게 두 종류의 총 사격을 맡겼고, 그렇게 긴 어려움을 뚫고 모든 실험이 끝났을 때 ‘선택을 했으니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 년 반 동안 이 프로젝트를 위해 달려오면서 직접 M1900를 조우하고, 사격 재현을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동안 저자에게 들을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므로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안중근 장군이 사용한 M1900는 분명 실존했지만 사라져버렸다. 일본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진 채 그 총을 되찾고 싶어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총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사격 재현도 국내가 아닌 미국에서 하고,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본 국가 기관에 방문해 흔적을 찾으러 간다. 여전히 총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지만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 있는 다이린지(대림사)의 주지 스님으로부터 이 프로젝트의 또 다른 의미를 듣게 된다.


익히 알고 있듯이 뤼순 감옥의 간수 지바 도시치와 안중근은 우정을 나누었고, 사형 선고를 받기 직전에 지바 도시치에 유묵을 건넨다. 지바 도시치는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다니던 절인 다이린지에 유묵과 위패를 함께 모셨고, 지난 1979년 안중근 장군 탄생 100주년에 맞춰 한국으로 반환되었다고 한다. 주지 스님에게 프로젝트의 의미를 전달했더니 그 일을 반대하시면서, ‘지엽적인 부분에 천착해 또 다른 분란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안중근이란 분의 본령에 다가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해주었다. 계기야 어찌 되었건 ‘안중근이란 사람이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우리에게 남긴 뜻을 후학들이 이어받’도록 노력해야 하는 일이 우리의 할 일인지도 모른다. 방법이 다를 뿐이지 우리도 ‘인간 안중근’이 걸어갔던 그 길이 무엇인지 묻고, 나름대로의 방향을 향해 가는 게 보답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남은 철학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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