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윤정 옮김, 무라카미 요오코 사진 / 문학사상사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에세이의 장점이자 단점은 글쓴이의 감정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음 상태가 고르지 못하고 삐딱하게 바라보며 쓴 글은 읽는 이의 마음도 불편하게 만든다. 반면 상쾌하고 기분 좋게 쓴 글은 주제를 떠나 읽는 이의 마음까지 환하게 만든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연달아 몇 편씩 읽고 있지만 여행에세이는 세 번째였다. 하루키를 따라 여행을 하다 보니 책의 권수가 아닌 타국, 지역으로 구분하면 엄청나게 많은 곳을 다녀온 기분이 든다. 그렇기에 여행하면서 느꼈던 기분들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는데 하루키도 밝혔듯이 이번 여행은 순조롭고 즐거웠으며 보기 드물게 말썽이 거의 없는 여행이었단다. 그래서였을까? 글에서도 묻어나는 평화로움과 즐거움이 이국적인 풍경과 함께 내 마음속에도 스며들었다.

 

  글에서 묻어나는 즐거움은 좋았는데 여행의 목적은 다름 아닌 술, 그것도 마셔본 적도 없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위스키에 관한 것이었다. 술이라곤 스무 살 때 주량 테스트 해본다고 마셔본 게 전부라 그쪽 세계에 관해서는 외계인 취급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가끔 정말 더운 여름에 시원한 맥주 광고를 보면 ‘정말 저걸 마시면 시원할까?’란 호기심을 품어보긴 하지만 그렇다고 행동으로 옮겨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무리 하루키의 글이라도 위스키에 관한 여행기를 읽어야 한다니(공장 견학 2탄이라도 되는 듯, 역시 재미났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늘 그랬듯 금세 하루키의 글에 빠져들었고 술을 좋아하지도 마시지도 않는 내가 위스키란 도대체 어떤 맛일지 무척 궁금해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위스키를 찾아서 마셔보겠다는 소리는 아니고 위스키란 술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작은 섬 아일레이까지 찾아간 열정에 감탄을 더할 뿐이다. 여행에 목적이 있어야 여행이 순조롭다는 말을 그제야 이해하게 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길을 떠나면 모든 과정이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작가를 좋아 그 작가의 고향을 찾아간다거나 좋아하는 화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 음악이 좋아 음악가가 태어난 나라를 방문하는 것과 똑같은 목적의식이 술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을 말이다. 그 목적이 타인에게 해를 주거나 범죄에 악용되지 않는 거라면 한번쯤은 뚜렷한 목표를 가진 여행도 좋을 것 같았다.

 

  먼저 찾아간 아일레이 섬은 맛 좋은 위스키를 만들어 낼 조건을 갖춘 데다 아름답기까지 하지만 점점 인구는 줄어들고 섬 생활의 한계를 갖고 있기도 한 곳이었다. 거기다 훌륭한 위스키를 만들어낸다는 주민들의 자부심과 장인정신은 묘하게 맞물려 보는 이로 하여금 그곳의 풍경에서 묻어나는 평온함과 위스키의 향기가(맡아본 적이 없음에도 왠지 달콤할 것 같다. 모두 저자의 황홀한 묘사 때문이다.) 느껴졌다. 우리나라 술로 따지자면 소주공장에는 가공된 향이 난다면, 막걸리 공장에는 구수한 냄새가 날 것 같은 순전히 어떠한 근거도 없는 내 생각일 따름이지만.

 

  저자는 위스키의 황홀경에 빠져 음악에 비유하기도 하고 곧바로 아일랜드에 찾아가서는 <율리시스>를 떠올리며 비교하기도 한다. 위스키 맛을 모르니 비유에 맞장구를 쳐줄 순 없었지만 왜 그러한 비유를 드는지는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많은 종류의 위스키 중에서도 섬세하게 다른 맛이 나는 것들을 구별하고 드러내려는 노력. 위스키에 대한 애정(사심도 가득했다.)이 듬뿍 담긴 글이었다.

 

  아일레이 섬에서는 그곳의 풍경과 술이 빚어내는 향기와 섬사람들의 삶이 엉켜 뭔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면 아일랜드에서는 좀 더 개인적이고 사유가 담긴 위스키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그곳을 떠나서야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깨달았다고 했듯이 아일랜드 풍경을 보자 아일레이 섬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스키와 잘 맞는 곳인지를 나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저자의 말마따나 순조로운 여행이어서 그런지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 때문에 떠나기를 망설여 하는 나에게도 여행의 묘미를 잔뜩 주었다고나 할까? 일단은 저자처럼 순조로운 여행을 하려면 떠나는 목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론 - On Life
이택광 지음 / 북노마드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며칠 전 잠을 자다 심하게 가위가 눌렸었다. 아무리 목소리를 내어 남편을 불러보아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남편을 겨우 불렀고 가위에 심하게 눌렸었다고 하자 뭔가 힘든 일이 있냐며 물어왔다. 가위에 눌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래저래 자잘한 고민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형체가 내 몸을 꽉 누르던 그 순간이 너무나 생생해 지금도 잊히지 않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답답함이 가슴을 탕탕 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 당했던 답답함이 느껴져서 놀랐다. 가위가 눌렸을 때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한다는 답답함이었고 이 책을 읽으면서는 뭔가 알듯 말듯 나를 간질이는 언어의 나열에 대한 답답함이었다.

  제목을 보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알려줄 것 같은 책이다. 하지만 저자도 말했듯이 ‘인생론 자체를 이야기하고, 역설적으로 인생론에 반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사실 인생론 따위는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시발점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과 자기계발 담론의 문제점이다. 여전히 자기계발 도서들은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자기수련 지침서에서 최근에 주목을 끌었던 힐링, 즉 감정에 호소하는 도서들이 각광받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계발 도서를 한번쯤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곳에 쓰인 내용들이 나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경제적인 면과 연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부단한 노력과 약간은 허황된 믿음이 없으면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뿐 내 삶에 적용시키기에는 가장 중점인 내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틀에 박힌 방법에 스스로를 길들이려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너무나 쉽게 알게 된다. 그래서 불끈 솟아올랐던 의지는 금방 사그라지고 다시 익숙한 내 삶의 일상으로 돌아와 버린다. 문제는 노력하지 않는 나에게도 있겠지만 하나같이 똑같은 얘기를 다른 방법으로 하고 있는 그 책들이 과연 사람들에게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나의 생각을 대입시키며 저자의 글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부분이 나왔을 때 초반에 내가 언급했던 답답함이 생겼다. 고등학교 때 시사를 알겠다며 스스로 신문 구독을 하면서도 정치면은 쳐다도 안보고 넘겼던 내게 정치에 대한 담론은 답답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저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글을 읽으면서 내 생각을 덧붙일 수 없다는 것, 그간 언론을 통해 알게 된 정보를 포괄적으로 나열하며 객관적인 시선은 물론 주관적인 생각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자가 어떠한 담론을 펼치든 어떠한 사고도 생성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에는 질적인 문제와 외적인 문제들을 곁들어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었지만 뚜렷한 해답은 없었다. 정보의 나열과 간간히 섞여 들어가는 저자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저자 또한 이러한 책 제목을 붙여놓고 과연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걸까 하는 의문의 들었다. 뭔가 매끄럽긴 하지만 저자의 생각을 쉽게 간파할 수 없는 글. 톨스토이가 말한 인생론처럼 삶을 더 좋게 만든다는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은 알겠으나 역시나 그 목적과 의미를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데에 자기계발서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자기계발 이전에 ‘자기’를 들여다보고 바꾸라는 것, 그리고 인생을 허황된 희망이 아닌 현실적으로 살아봐야 하며 살아야 할 목적을 잃지 말라는 격려 아닌 격려(?)를 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일요 화가’라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 매끄럽게 구성되어 있는 일상에 균열을 내는 것. 저자는 일상에서 조금씩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 일요 화가가 되어보라고 한다. 그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다. 여전히 실천이 어려울 뿐. 그리고 내게 주어진 삶이니 내가 꾸려나가야 하며 삶의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어쩌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생각을 말할 수 없는 분야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고 괜히 실천이 어려울 뿐이라고 허세를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4-12-25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택광씨가 쓴 예술 관련 글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이 책만큼은 읽을 필요가 있을지 망설였어요. 뜬금없이 나온 책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안녕반짝 2014-12-31 02:1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냥 그랬어요.
 
주말엔 숲으로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남편의 코고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시간을 보니 새벽 5시 54분. 평소에 코를 골지 않는 남편인데 연속 4일 야근을 하더니 몹시 피곤했나보다. 코 골지 말라고 남편의 코를 살짝 쥐어 잡고 아이가 깰까 슬그머니 안방을 빠져나왔다. 이 시간에 내가 누릴 수 있는 호사는 리뷰를 쓰거나 책을 읽는 것뿐이다. 그것도 아이가 깨지 않을 때까지 늘 불안한 마음을 한켠에 갖고 말이다.

  그럼에도 잠시나마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진다. 주말 아침이라고 해서 나에게 특별한 날이 되지 않듯이 외출을 한다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집 근처를 나가는 일도 거의 없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집에 좀 더 오래 있으며 그마저도 잘 보지 않는, 평일에는 볼 수 없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좀 더 볼 수 있다는 게 특별하다면 특별할까? 그래서인지 이 책 제목을 보니 약간의 대리만족이 되었다. 내가 만약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삼십대 중반에 애인도 남편도 없는 상황이라면 그녀들처럼 주말을 즐기지 못했을 거다. 결혼에 대한 압박감, 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하루하루 시들어 갔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상을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그녀들의 고민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경품으로 당첨된 자동차 때문에 시골로 이사한 하야카와는 번역일을 하고 있다. 그나마 시골로 내려오자 일이 더 줄어 버렸지만 시골 생활에 조금씩 적응하자 과외도 하고 기모노 입는 방법에 대한 무료 강연도 하면서 나름 바쁘게 보내고 있다. 그런 하야카와가 있는 시골로 종종 놀러오는 두 친구가 있다. 출판사 경리부에서 일하고 있는 마유미, 여행이 좋아 여행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여행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세스코다. 시골에서 맛 볼 수 없는 음식이나 간단한 선물을 사서 하야카와에게 와 하룻밤을 묵고 가면서 점점 시골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매료되어 간다.

  마유미와 세스코는 따로 오기도 하고 함께 오기도 하지만 늘 한결같이 반갑고 즐거운 친구들이다. 오래된, 친한 친구들이 그렇듯 만나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어떤 얘기든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사이다. 다만 우리네 정서와 좀 달라 깍듯이 예를 갖춘다거나 상대방에게 너무 세세히 신경 쓰는 것들은 낯설기도 했고 어떤 상황에서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있어 가장 부러웠던 건 함께 자연을 느끼는 체험을 한다는 것이다. 하야카와에게는 친한 친구들과 함께 숲을 걷는다는 게 좋았고, 마유미와 세스코는 잠시 복잡한 도시를 떠나 시골에 있는 친구도 보고 자연을 느끼며 재충전을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인간관계로 인해 점점 지쳐가는 세스코에게는 이런 시간이 위로와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도 도시의 번잡함과 치열함을 경험한 날들이 있었다.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는 있었지만 도무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내가 제대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건지 생각할 틈도 없이 바빴다. 주말에도 자주 쉬지 못했고 일에 모든 것을 맞추다보니 개인적인 여유를 생각할 틈이 거의 없었다. 나에게 하야카와 같은 친구가 있었다고 해도 부족한 잠을 채우느라 주말에 찾아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주말에라도 시골에 있는 친구를 찾아가 함께 숲을 걷고 자연을 느끼고, 내가 하지 못한 것들을 배우고 온다면 분명 삶의 활력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녀들이 일상을 모두 잊고 도피하듯이 숲을 걷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소홀히 했다면 공감을 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갖고 있는 고민과 어려움들을 숲을 걸으면서 친구에게 듣거나 느꼈던 일들을 되새기면서 현실에 충실하려는 모습이 피부에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며 훌쩍 숲으로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도 오랜 도피의 발단이 아닌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 위한 시도라고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 - 인문학자 이택광, 이상을 찾아 떠난 두 화가의 빛과 어둠을 말하다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다 읽고 꼭 12년 전에 읽은『반 고흐, 영혼의 편지』을 다시 구입했다. 있는 책을 다시 읽으면 되겠지만 그 사이 표지가 바뀌어 그 책도 함께 보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12년 전에 그 책을 읽고 고흐에 흠뻑 빠져 지금껏 좋아하고 있지만 지금 다시 읽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다시 읽어 볼 생각을 하지 못하던 나였는데 이 책을 읽고 나자 그 책이 다시 읽고 싶은 당김이 있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책에서는 고갱과 고흐가 아를에서 함께 지냈던 그 시간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술사에 길이 남을 법한 강렬한 만남. 아를의 노란집에서 고갱과 고흐가 함께 지내며 당시에 그렸던 그림들도 소개하고 그곳에서 고갱과 고흐에게 한껏 다가가고 있다. 고갱과 고흐가 아를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하면 고흐가 귀를 자른 이야기밖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이 책을 통해 좀 더 가까이에서 그들의 상황을 지켜본 것 같았다. 마치 당시의 두 화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제 3자가 되어 그 모든 정황을 지켜본 듯 세밀했다.

  그렇다고 고증을 뒷받침하는 글도 아니고 둘의 짧은 동거 기간 동안에 의미부여를 통해 독자에게 메시지를 심어주려는 글도 아니다. 고갱 없는 반 고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는 가설을 세워 그 당시의 모든 정황을 유추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빈약할 수 있는 기록에 저자 나름대로 살을 붙이고 최대한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제 3자의 입장에서 고흐과 고갱을 지켜본다는 느낌이 강했고, 편지와 당시에 그려진 그림, 그리고 여러 증언들이 드러나 있었음에도 새롭게 접근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시간을 정지해 놓고 두 사람의 내면과 외부를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것 같았다.

  고갱과 고흐가 노란집에서 머물렀던 사건(미술사에서 정말 흔치 않은 일이기에)은 행복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저자의 글을 읽다 보니 불행과 행복이 모두 공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행이라면 고흐가 고갱을 노란집으로 불러들인 순수한 의도가 고갱에게 맞지 않았다는 사실이고, 외롭고 내면으로 불안한 고흐에겐 고갱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고갱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아를로 내려와 고흐와 함께 지내게 되어 고흐만큼 행복감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 짧은 만남이 고갱에게도 충분한 자극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자극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갱 또한 자신에게 집착하고 뜻도 화풍도 맞지 않았던 고흐와의 만남을 결코 잊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아를을 떠난 뒤 고흐를 다신 만나고 싶지 않았을 정도로 강렬했으니까.

  당시의 고갱과 고흐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지 않았기에 고흐가 귀를 자르고 결국엔 자신에게 총을 쏘고 죽음을 맞이한 사실을 보고 고갱을 원망했던 것도 사실이다. 좀 더 고흐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더라면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흐가 꼭 고갱 때문에 귀를 잘랐다는 정확한 이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당시의 고흐 같은 사람을 감당하기엔 고갱 뿐만 아니라 누구나 힘들었을 거라는 사실이 고흐를 더 안쓰럽게 했다. 늘 술에 절어있고 그림 그릴 때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며 매음굴에도 드나들며 불규칙적이고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과 동고동락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둘의 이상적인 목적이 맞지도 않았지만 그런 사람과 한 곳을 보며 나아간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내 곁에 그런 고흐가 있었더라면 나라도 그곳을 떠나고 싶어졌을 것이다.

  이렇듯 가설도 있고 추측도 있고 사실과 정황도 모두 드러나 있다. 그렇게 세세하게 당시의 모습을 재연한 것 같은 글을 읽고 있으면서도 뭔가 메마른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 상황을 바라보며 이 글을 써내려간 저자의 안쓰러운 마음과 애정이 느껴지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흐름이 인간미를 떨어뜨린 것 같다는 아이러니한 기분을 느꼈다. 지극히 감정적인 나와는 달리 중심을 잡고 써내려간 글임에도 오히려 그 중심이 조금은 서운하게 느껴졌었다. 어느 한쪽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당시의 둘을 바라보는 시선에 추측보다 저자의 감정이 더 실려 있었다면 조금 중심에서 벗어났더라도 더 가까이 다가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갱과 고흐가 함께 머문 그 시기를 되짚어보는 시선은 독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결국 둘의 유토피아는 없었지만 각자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던 의의를 그림에 가득 실었다. 화가로써의 짧은 생을 마감한 고흐보다 타히티로 건너가 원시의 세계를 찾아내려 했던 고갱이 좀 더 뜻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고흐나 고갱이나 어느 누가 더 그럴듯한 결과물을 냈느냐고 단정 지을 순 없다. 그들의 삶과 이상향이 녹아 있는 작품을 바라보는 갤러리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 의미 찾기는 당시의 그들이 염두에 두지 않았던 현재의 우리, 그리고 우리도 알 수 없는 미래의 누군가에게도 계속 이어질 작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셜록 홈즈 전집 5 (양장) - 셜록 홈즈의 모험 셜록 홈즈 시리즈 5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시드니 파젯 그림 / 황금가지 / 200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BBC에서 만든 드라마 <셜록>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 책을 다시 집어 드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지 모른다. <셜록>을 보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무료로 <셜록> 시즌 1,2를 방영해주어서 한번 봐볼까 하고 다시보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 열광한 것도 아니고 그나마 몇 년 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주연한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을 재밌게 보았지만 <셜록>만큼 강렬하지는 못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드라마치고 원작을 잘 반영했다는 느낌과 동시에 셜록 홈즈 역의 베네딕트 컴버배치(처음 알게 된 배우이고 이름도 어렵다!)란 배우와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랩을 하듯 읊조리는 긴 대사를 어떻게 외웠을까란 경의감(아!)과 함께 아이폰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 현대적인 셜록 홈즈에 빠져 들고 말았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영국 시민들은 이런 걸 드라마로 본다니! 부럽다!’란 감탄사를 연발했다. 물론 시청 제한을 해야 하는 내용들이 있긴 했지만 이런 드라마를 텔레비전을 통해 볼 수 있다면 정말 살 맛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이야기를 보지 않고 못 배기게 만드는 흡인력은 정말 굉장했다. 시즌 1,2를 보고 나자 시즌 3가 궁금하던 차에 마침 OCN에서 셜록데이라고 해서 시즌 3 전편을 다 보여주었다. 아이를 들쳐 업고 드라마에 빠져 있는 내가 좀 당황스럽긴 했지만 시즌 4는 도대체 언제 볼 수 있는지 미치도록 궁금하고 감질맛이 났다. 그래서 그 여운을 달래고자 읽다 만 셜록 홈즈 전집을 꺼내든 것이다. 이미 영상으로 만난 짜릿함이 파고들어 책으로 만나던 셜록 홈즈의 매력을 다잡기가 힘들었지만 시즌 4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끌어낼지 더 기대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부제목처럼 셜록 홈즈는 여러 의뢰인을 만나면서 많은 모험을 하게 된다. 첫 이야기인「보헤미아 왕국 스캔들」에서의 ‘그 여자’만이 홈즈에게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보여주며 홈즈도 당할 때가 있단 사실을 보여주어 재미를 더했다. <셜록>에서도 홈즈가 유일하게 마음을 준 여자로(난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질투도 났다.) 등장하기도 했는데 이 이야기를 재해석한 것이라 생각한다. 홈즈는 다양한 의뢰인을 만나면서 이리저리 이동하고 사건을 해결하는데 간단히 해결하기도 하고, 결말이 너무 힘이 빠질 때도 있었고, 어떻게 해결할지 너무 궁금한 사건들도 있었다. 오로지 셜록과 왓슨만 믿고 이야기 속에 빠진 터라 그 모든 일련의 과정에 깊이 관여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나는 셜록 홈즈가 될 수 없지만 셜록 홈즈는 이 사건들을 해결해 줄 거라 믿었기에 맘 편하게 사건들과 마주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믿음을 깔고 사건에 뛰어드는 것과 믿음 없이 사건 속으로 뛰어드는 건 확연한 차이가 난다. 책이 두툼해도 지루할 틈 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이고 셜록 홈즈가 어떤 부분에서 힌트를 얻어 사건을 해결해 나갈지 추측해 보는 여유도 무시할 수 없다. 자꾸 <셜록>의 배우와 책 속의 셜록 홈즈가 충돌해 혼란을 주기도 했지만 나의 게으른 독서 때문에 아직도 만나야 할 셜록 홈즈 시리즈가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진다.

 

  지금의 이 짜릿한 기쁨도, 읽어야 할 시리즈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도 끝에 다다름에 따라 곧 사그라질 것임을 익히 알고 있다. 그렇더라도 책을 읽고 영상으로 제작된 이야기를 다시 만나는 일은 삶의 소소한 기쁨으로까지 여겨진다. 이 책을 다시 꺼내게 해 준 게 드라마 <셜록>이기에 드라마 이야기가 더 많았지만 이렇게 비교하면서 셜록 시리즈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즐겁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