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 - 인문학자 이택광, 이상을 찾아 떠난 두 화가의 빛과 어둠을 말하다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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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고 꼭 12년 전에 읽은『반 고흐, 영혼의 편지』을 다시 구입했다. 있는 책을 다시 읽으면 되겠지만 그 사이 표지가 바뀌어 그 책도 함께 보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12년 전에 그 책을 읽고 고흐에 흠뻑 빠져 지금껏 좋아하고 있지만 지금 다시 읽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다시 읽어 볼 생각을 하지 못하던 나였는데 이 책을 읽고 나자 그 책이 다시 읽고 싶은 당김이 있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책에서는 고갱과 고흐가 아를에서 함께 지냈던 그 시간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술사에 길이 남을 법한 강렬한 만남. 아를의 노란집에서 고갱과 고흐가 함께 지내며 당시에 그렸던 그림들도 소개하고 그곳에서 고갱과 고흐에게 한껏 다가가고 있다. 고갱과 고흐가 아를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하면 고흐가 귀를 자른 이야기밖에 떠오르지 않았는데 이 책을 통해 좀 더 가까이에서 그들의 상황을 지켜본 것 같았다. 마치 당시의 두 화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제 3자가 되어 그 모든 정황을 지켜본 듯 세밀했다.

  그렇다고 고증을 뒷받침하는 글도 아니고 둘의 짧은 동거 기간 동안에 의미부여를 통해 독자에게 메시지를 심어주려는 글도 아니다. 고갱 없는 반 고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는 가설을 세워 그 당시의 모든 정황을 유추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빈약할 수 있는 기록에 저자 나름대로 살을 붙이고 최대한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제 3자의 입장에서 고흐과 고갱을 지켜본다는 느낌이 강했고, 편지와 당시에 그려진 그림, 그리고 여러 증언들이 드러나 있었음에도 새롭게 접근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시간을 정지해 놓고 두 사람의 내면과 외부를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것 같았다.

  고갱과 고흐가 노란집에서 머물렀던 사건(미술사에서 정말 흔치 않은 일이기에)은 행복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저자의 글을 읽다 보니 불행과 행복이 모두 공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행이라면 고흐가 고갱을 노란집으로 불러들인 순수한 의도가 고갱에게 맞지 않았다는 사실이고, 외롭고 내면으로 불안한 고흐에겐 고갱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고갱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아를로 내려와 고흐와 함께 지내게 되어 고흐만큼 행복감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 짧은 만남이 고갱에게도 충분한 자극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자극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갱 또한 자신에게 집착하고 뜻도 화풍도 맞지 않았던 고흐와의 만남을 결코 잊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아를을 떠난 뒤 고흐를 다신 만나고 싶지 않았을 정도로 강렬했으니까.

  당시의 고갱과 고흐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지 않았기에 고흐가 귀를 자르고 결국엔 자신에게 총을 쏘고 죽음을 맞이한 사실을 보고 고갱을 원망했던 것도 사실이다. 좀 더 고흐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더라면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흐가 꼭 고갱 때문에 귀를 잘랐다는 정확한 이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당시의 고흐 같은 사람을 감당하기엔 고갱 뿐만 아니라 누구나 힘들었을 거라는 사실이 고흐를 더 안쓰럽게 했다. 늘 술에 절어있고 그림 그릴 때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며 매음굴에도 드나들며 불규칙적이고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사람과 동고동락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둘의 이상적인 목적이 맞지도 않았지만 그런 사람과 한 곳을 보며 나아간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내 곁에 그런 고흐가 있었더라면 나라도 그곳을 떠나고 싶어졌을 것이다.

  이렇듯 가설도 있고 추측도 있고 사실과 정황도 모두 드러나 있다. 그렇게 세세하게 당시의 모습을 재연한 것 같은 글을 읽고 있으면서도 뭔가 메마른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 상황을 바라보며 이 글을 써내려간 저자의 안쓰러운 마음과 애정이 느껴지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흐름이 인간미를 떨어뜨린 것 같다는 아이러니한 기분을 느꼈다. 지극히 감정적인 나와는 달리 중심을 잡고 써내려간 글임에도 오히려 그 중심이 조금은 서운하게 느껴졌었다. 어느 한쪽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당시의 둘을 바라보는 시선에 추측보다 저자의 감정이 더 실려 있었다면 조금 중심에서 벗어났더라도 더 가까이 다가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갱과 고흐가 함께 머문 그 시기를 되짚어보는 시선은 독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결국 둘의 유토피아는 없었지만 각자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던 의의를 그림에 가득 실었다. 화가로써의 짧은 생을 마감한 고흐보다 타히티로 건너가 원시의 세계를 찾아내려 했던 고갱이 좀 더 뜻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고흐나 고갱이나 어느 누가 더 그럴듯한 결과물을 냈느냐고 단정 지을 순 없다. 그들의 삶과 이상향이 녹아 있는 작품을 바라보는 갤러리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 의미 찾기는 당시의 그들이 염두에 두지 않았던 현재의 우리, 그리고 우리도 알 수 없는 미래의 누군가에게도 계속 이어질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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