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리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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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전 문학에 관심이 생겨 충동적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구입하고 이 책을 처음 읽는 순간, 역시 고전의 향기는 이런 것인가 하며 감탄했다. 몇 장만 읽어도 문체의 담백함이 느껴지는 게 일본현대문학에서는 만나지 못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저자의 다른 작품들도 순식간에 탐독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 무렵, 조금씩 문장들이 어긋났다. 문장이 어긋났다는 표현 보다는 묘사나 ‘일본의 감성’이 낯설게 느껴졌다. 2대가 함께 살고 있으며 주인공인 싱고는 노인이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 며느리,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딸과 손주들이 있지만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드러난 일반 정서들이 외국독자인 내가 읽기에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기억력이 감퇴하고 자신의 몸과 정신이 늙어감을 깨닫고, 죽음이 자신에게도 곧 닥쳐올 거란 두려움이 있지만 그런 두려움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문득문득 일상에서 떠오르는 불안감과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씩 떠나가는 상황들로 희화된 그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유머러스하다. 전쟁직후의 피폐한 일본의 삶을 경제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건, 주인공 싱고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아들과 딸, 사위의 올바르지 못한 삶의 모습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쟁에 참가한 아들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힘들다는 듯 전쟁미망인과 바람을 피우고, 사위는 술독에 빠져 살다 마약중독자가 되어 자살소동까지 벌인다. 그런 사위의 망가져가는 삶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는지 회의감이 들게 만드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을 잘 못 살았다는 회한을 드러내는 것으로 당시 일본의 배경을 절실하게 밝히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모습도 그려내고 있지만 싱고의 내면에는 사랑했던 여인, 현재 부인의 언니를 동경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한다. 동경했던 여인이 시집가서 일찍 죽자 마음에도 없는 동생과 결혼하고 혹여 자신의 딸이 처형을 닮길 바라는 마음을 가져보지만 오히려 더 외모가 형편없음을 알고 데면데면하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 결혼자체가 잘못 됐음을 알게 되었다. 처형에 대한 그리움과 풀어내지 못한 욕망을 며느리에게 쏟아내는 것을 보며 이상야릇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지만 옮긴이의 말마따나 이 소설세계의 페어(쌍)는 싱고와 며느리 기쿠코임에 틀림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싱고의 가정에서도 친 딸이 질투하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자신과 며느리 사이가 가장 애틋했으며 아들의 바람기 때문에 상처받고 복수를 위해 낙태까지 한 며느리를 위로해 준 것도 싱고였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답답하고 짜증이 났던 건 외국 독자로써 이해하지 못한 ‘일본의 감성’과 상식은 차치하더라도 그런 아들과 딸에게 똑 부러진 훈계와 아버지로써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들이 바람을 피우고 며느리도 그 사실을 알고 복수로 낙태하며 바람을 피운 상대가 임신을 한 상황에서도 아들을 불러다 뭐라 하지 않는 모습이 답답했다. 혼외 손주일지 모를 아이를 품고 있는 여인에게 모욕을 당하고 위자료를 건네주면서도 아들과 그 문제를 가지고 정면으로 나서지 못한 모습. 사위가 잘못 된 길을 가고 있음에도 그 사위를 불러서 어떠한 훈계도 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모든 것을 혼자서 끌고 가야 했던 상황들이 때때로 싱고가 마주하는 기억력 감퇴와 나이듦에 대한 회한처럼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 싱고는 기력도 능력도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애잔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가 자꾸만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고 현실에서 풀어내지 못한 욕망과 생각들을 꿈속에서 드러내는 것을 보며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나야 할 평범한 노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직장과 가정을 오가며 늘 되풀이되는 일상을 꿋꿋이 살아가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문제들 한가운데 서 있는 싱고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단 생각에 기운이 빠져버렸다. 늙음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신의 삶은 물론 자신이 이룬 가정과 하물며 자식의 삶이 맘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언가 평탄하지 않다는 이유로 싱고를 탓할 수도 어떠한 문제가 불거지게 만든 당사자를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어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이라고 생각하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답답함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하다. 그렇기에 저자가 풀어낸 담백하면서도 짜증스럽기도 했던 이 이야기를 끝으로 저자와의 만남을 단절시키고 싶지 않다. 다른 작품을 더 읽어보며 저자의 문학세계의 변화를 더 느껴보고 싶은 게 이 책을 읽고 난 후 허무함 뒤로 찾아온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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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2-04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까지나 남의 얘기니까..짜증도 나고
감정도 내보일 수있는 거라고..욕하며 본다는 막장 드라마처럼...브라운관의 이쪽 편이 되서 욕은 할수있는데 정작 자신의 집안 일엔 무감각한 ..사람들 처럼요... 그게 죽도 밥도 아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함..이 아닐까...생각한다고..답답하고 화는 나지만..
 
반딧불 강
미야모토 테루 지음, 허호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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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을 읽고 저자의 다른 작품도 무척 궁금해졌다. 두 번째 작품으로 선택한반딧불 강』도 역시나 순식간에 읽어버릴 만큼 흡인력이 강했고 이 작가에 대해 계속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 절판이라 중고로 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권씩 읽어 나갈 때마다 다음에 읽을 책을 구입하고 그의 작품을 탐독하는 일이 즐거우면서도 소설의 색깔이 달라짐을 알아감에 따라 점점 느낌을 남기는 게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 책에 실린흙탕물 강」은 다자이 오사무 상을반딧불 강」은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작품이다. 일 년 간격으로 쓴 작품들이 이런 상을 받을 정도니 저자의 저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작가가 된 것도 비를 피하기 위해 들른 서점에서 읽은 단편이 너무 재미있어서라고 하니 그런 계기만큼이나 저자의 능력에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을 읽기 좋아하는 것과 직접 쓰는 건 엄연한 능력의 차이가 있다는 걸 알기에 독자에서 작가로 신분이 전환된 저자의 글을 더 주의 깊게 읽게 되는 지도 몰랐다.

  두 편의 단편 모두 강이 배경인 만큼 강과 함께 드러나는 이야기가 무척 인상 깊었다. 개인적으로 좀 더 강렬했던 건흙탕물 강」이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고 있는 여덟 살 노부오의 눈으로 보는 어른들의 세계와 집 앞에 흐르고 있는 강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늘 식당에 와서 밥을 먹던 짐수레를 몰던 아저씨의 죽음으로 포문을 열고 이어 배에서 생활하는 노부오 또래의 소년이 등장한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배 위에서 살아가는 소년과 함께 흙탕물 강에서 귀신잉어를 보기도 하고 소년의 누나에게 호기심을 품기도 하며 몸이 불편한 소년의 엄마가 무슨 일을 하며 남매를 키우는지 알기도 한다. 식당을 하는 평범한 자신의 가족을 부러워하는 소년을 보며 노부오는 배 위의 생활과 앞으로 그 가족에게 닥칠 앞날에 대해 짐작할 수도 없지만 자신의 가족 또한 엄마의 건강과 아빠의 사업을 위해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였다.


  남매의 엄마가 몸을 팔아서 생활을 이어가고, 제대로 된 집도 없이 배 위에서 강을 따라 이리저리로 이동하며 살아가며, 전쟁터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사고로 목숨을 잃어버린 짐수레를 몰던 아저씨의 죽음 등이 혼탁한 강물처럼 내 마음까지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그들이 본 귀신잉어처럼 마치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강 위에서 생활하는 소년의 가족과 노부오의 추억도 순식간에 흙탕물 속으로 잠식해 버리는 것 같았다.

  「반딧불 강」은 열네 살 다쓰오의 성장기를 다룬 소설이다. 소꿉친구 히데코를 좋아하기도 하고, 히데코를 좋아하는 동성친구와 미묘한 감정을 나누다가도 그 친구의 죽음을 목도하고 충격에 빠지기도 한다. 사월에 큰 눈이 내리면 엄청난 반딧불을 볼 수 있다는 긴조 할아버지의 말 때문에 눈이 오는 날 다쓰오는 반딧불을 볼 요량으로 흥분하곤 하는 천진난만한 사춘기 소년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 가운데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고 아버지가 쓰러지고 고등학교 진학 여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꿋꿋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반딧불을 향해 가는 모습에서 잔잔함을 느꼈다. 히데코와 함께 가기 위해 엄마를 끌어들이는 어설픔 속에서도 긴조 할아버지가 말했던 반딧불의 향연을 가늠조차 할 수 없기에 설레는 맘으로 함께 그들을 따라갔는지도 몰랐다. 반딧불을 보는 광경은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움 그 자체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환상의 빛』단편이 묘사가 너무 뛰어나서 다른 소설은 어떤 느낌일지 무척 궁금했었다.「반딧불 강」『환상의 빛』만큼의 묘사는 아니지만 잔잔함과 함께 저자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어 주었다. 단 두 편의 작품을 읽은 터라 뭐라 똑 부러지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무언가가 저자의 다른 작품도 계속 찾아보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문체의 막힘없음이 점점 더 저자의 매력 속으로 빠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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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쿠스틱 라이프 4 어쿠스틱 라이프 4
난다 글 그림 / 애니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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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에 있는 어쿠스틱 라이프 시리즈는 모두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4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7권을 읽은 뒤라 순서가 좀 어긋났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꺼내들었다. 7권이 기대에 못 미쳐서 4권도 큰 기대 없이 펼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내 이 시리즈의 첫 권을 읽었던 때로 돌아간 듯 나름 즐겁게 읽어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이 시리즈의 즐거움이라면 소소한 일상을 저자의 특유의 시선으로 재밌게 그려낸 점이다. 내가 소소한 나의 일상을 말하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기 쉬운데 저자의 만화를 보고 있으면 평범한 일상도 특별하게 보이는 것 같아 신기하다.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부분이 많고, 일러스트인 저자와 게임 마니아인 남편,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남동생의 이야기까지 조금은 익숙해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처음 이 시리즈를 읽고 킥킥 거리며 웃었던 때로 돌아간 듯 해서 혼자서 과자를 먹으며 즐겁게 읽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면 꼭 봄을 기다리게 된다. 12월에 이어 1월도 여전히 추운 날씨의 연속이지만 괜히 기분 상 12월은 춥고, 1월은 덜 추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봄과 더 가까워졌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는 몰라도 봄을 기다리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저자의 모습을 보고 있어서 더 그러 기분이 들었나보다. 만약 내가 이 부분을 타지에서 읽고 있었다면 엄마가 보고 싶다고 징징대며 전화했을지도 모른다. 내일 시골에 계신 엄마한테 가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임신까지 하니 엄마와 고향이 몹시 그리워 고향으로 돌아와 버린 나. 남편이 따라와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타지에서 일하고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괜히 나도 모르게 아찔해진다.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타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가도 공감대를 형성하는 부분도 만날 수 있어서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곤 했다. 허세 부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스스로 말하는 저자처럼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책을 보는 걸 좋아하는 터라 틈틈이 아이를 맡기고 집 앞 카페에 달려가는 내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다. 기껏해야 책 조금 읽고 오거나 리뷰를 한 편 쓰고 오는 정도지만 그런 허세를 만끽할 때 육아의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날려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부부간에 그런 성향을 존중해주며 때론 하기 싫어도 맞춰주는 것. 그게 가정의 평화(?)를 이끌어가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렇게 일상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나의 일상도 평범하지만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기도 했다. 무의미하게 흘려버리는 것 같아도 이 시간들이 모이면 저자가 기록한 일상처럼 특별하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뭔가 의미 있을 것 같은 기분. 그런 능력이 나에게는 없지만 종종 리뷰에 쏟아내는 개인적이 이야기들. 블로그에 수다 떨듯이 털어내는 가정사 및 일상들이 헛된 행위가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타인의 삶을 보며 공감하는 것도 힘들고 변화는 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로 인해 살아갈 용기를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는 건 참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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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안녕, 소르시에 1~2 - 전2권
호즈미 지음, 조은하 옮김 / 애니북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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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이름에 고흐를 넣을 정도로 고흐를 좋아하기에 고흐에 관련 된 책이라면 일단 시선이 간다. 책장에 고흐에 관한 책이 가득하지만 대부분 미술서들이다. 그런데 만화에서 다루는 고흐라니! 그것부터가 독특해서 이 책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고흐를 그대로 그려내는 만화도 아닌 고흐가 전혀 연상되지 않는 표지의 만화에서는 과연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궁금증에 순식간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조금은 아쉬운 감이 든다.

  고흐를 좋아하고 그에 관련된 책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이 더 많다. 또한 무언가에 열광하면 세세한 뒷조사와 지식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편의대로 띄엄띄엄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그렇다보니 고흐에 대해서 얘기해보라고 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가 남긴 수많은 그림에 대한 배경적인 지식도 고흐 자체에 대한 지식도 내세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만화를 읽으면서도 어디까지가 실화를 참조했는지 명확하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고흐와 테오를 실제 모습과 비슷하게 그려낸다는 것도 좀 우습지만 조금은 오글거리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고흐와 테오의 모습에 먼저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흐의 삶과 죽음까지가 모두 이 만화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감추려 할 때 드러난다는 사실 또한 낯선 감이 없지 않았다.

  고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겨우 그림이라는 안식처를 발견하긴 했지만 그 길 또한 평탄하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다. 구필화랑에서 일했던 테오가 아니었다면 고흐가 남긴 수많은 그림들이 과연 탄생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테오를 중심으로 당시의 파리의 예술 세계의 화려함과 그 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면서 서서히 고흐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두 권의 만화를 읽는 동안 분명 고흐가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테오가 더 주인공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그러했던 것처럼 고흐는 테오에게 많은 의지를 하고 있었고 오로지 그림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런 고흐는 어수룩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명작을 남긴 화가로 보이지는 않는다. 수많은 책에서도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정열을 쏟아낸 화가로 드러나기에 뭔가 두루뭉술하게 고흐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무엇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고흐의 죽음(허구이긴 하지만) 뒤에 펼쳐진 꾸며진 삶의 모습이 진짜 고흐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틈틈이 등장하는 고흐의 실제 작품들, 고흐와 테오의 형제애(실제인지 허구인지 분간할 능력이 내겐 없다.) 등의 요소들의 고흐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그의 삶을 독특하게 그려낸다는 사실이 흥미롭긴 했다. 하지만 완벽한 분석 뒤에 나타난 뒤집음도 아닌, 해학적으로 그려낸 것도 아닌, 상상력으로 점철된 특이한 구성의 작품이라는 사실보다는 좀 어정쩡한 느낌이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고흐의 팬으로써 이런 구성의 작품을 보는 재미도 좀 쏠쏠하긴 해도 고흐에 대해 알기 위해 이 책을 첫 책으로 택한다면 그건 좀 위험할 것 같다. 고흐의 삶과 그의 작품을 충분히 즐긴 후에 이 책을 읽으면 좀 독특한 느낌과 함께 신선 혹은 의문의 느낌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고흐에 대해 다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에 진열된 수많은 고흐 책들 가운데 한 권을 꺼내 읽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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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02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 표지만 봐서는 제가 아는 고흐의 어두운 삶과 상반되는 약간 밝은 분위기일 것 같습니다. 고흐의 진짜 목소리를 알려면 그가 테오에게 쓴 편지를 읽는 것이 좋습니다. ^^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십이국기 2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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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1권을 읽고 난 뒤 2권의 이야기도 무척 궁금했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 요코의 향방 때문이었다. 당연히 요코의 이야기가 함께 이어질 거라 생각하고 2권을 펼쳤으나 요코는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숙명인 왕을 찾아 나서는 ‘기린’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요코를 찾아 나섰던 게이키가 재등장하긴 하지만 기린인 게이키의 이야기보다 다른 기린 다이키의 이야기가 등장했다. 다이키는 기린중에서도 독특한 인물이었는데 인간 세계에서 십 년을 보내다 그를 찾아 헤맨 인물들에 의해 원래 기린이 성장하는 봉래로 돌아온 것이다.

  다이키는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지만 그 세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늘 할머니와 아버지의 꾸중을 들으며, 그런 자신을 감싸는 엄마는 항상 울었다. 자신은 왜 그런지 늘 알 수 없는 가운데 자신이 원래 인간 세계의 아이가 아니었음을, 자신에게는 왕을 선택하고 모시는 운명이 정해진 기린이란 사실을 십이국기 세계로 들어오면서 그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요코처럼 다이키도 갑자기 자신의 운명과 마주해야 했다. 당황할 법도 한데 인간 세계에서 워낙 다른 존재로 여김 받았기에 금세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다이키에겐 큰 문제가 있었다. 봉래에서 여선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야 할 십 년의 세월을 다른 세계에서 보내버렸으니 모든 게 혼란스럽고 자신 앞에 주어진 왕을 선택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압박감처럼 다가왔다. 기린은 원래 사람과 기린의 모습으로 오가는 전변(轉變)을 해야 하는데 방법도, 자신의 내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초조해한다. 여선들은 친절하고 자신처럼 기린인 게이키의 도움을 받을 기회도 만들지만 게이키는 무뚝뚝하기만 하다.

 

  거기다 오랫동안 봉래를 떠나 있었으니 그곳의 생활과 규칙, 그리고 기린으로써 받아들여야 할 봉래의 이야기들과 앞으로 왕을 모시게 되면 갖춰야 할 일들이 모두 혼란스럽기만 했다. 다이키의 혼란은 그대로 독자인 나에게도 스며들어 그가 왕을 선택해야 하는 부분에서는 최고조에 다랐다. 기린이 왕을 선택할 땐 그 사람을 보면 왕기가 느껴지고 천계가 온다고 하는데 왕이 되고 싶어 봉래에 오른 자들을 수없이 만났으면서도 그런 느낌이 전혀 오질 않았다. 오히려 그런 느낌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몰랐기 때문에 다이키는 헤어지기 싫다는 이유로 교소란 인물을 왕으로 모시고 만다. 어떠한 천계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다이키는 자신이 엄청난 죄를 지었다며 자책하게 된다.

  다이키가 교소란 인물을 왕으로 모실 때 나 또한 걱정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왕기가 느껴지지 않고 천계가 없었던 인물을 왕으로 모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가늠이 되지 않았으며 진짜 왕기가 느껴지는 사람을 만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이키가 왕을 선택하고 그를 왕으로 모셔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과정들에서 덮쳐오는 괴로움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스스로 죄인이라 옥죄며 자신의 운명까지 탓하는 다이키를 보면서 기린의 운명이란 것도 참 복잡다단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런 다이키가 자신의 괴로움을 게이키에게 털어놓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평생 괴로움 속에서 살며 왕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음은 자명했다. 하지만 천계에 대해 게이키에게 다시 설명을 듣고 나서 그의 선택이 틀린 게 아니었음을 알고 되레 내가 안심하게 됐다. 일단은 잘못 선택했다는 무거운 마음을 가지지 않아도 되니 앞으로 다이키와 그가 모시게 될 왕, 그리고 그들이 다스리게 될 나라의 운명이 그제야 궁금해졌다.

  『십이국기』란 제목처럼 12개의 나라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데 그 안에서 굉장히 다양하고 신비한 이야기를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한 나라를 구성하는 인물들이 복잡하기도 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틀을 놓고 볼 때 이 이야기들이 궁금하고 흥미로워지는 건 사실이다. 이제 2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고 1, 2권에서 만났던 인물들이 다른 이야기에서 또 어떻게 얽혀 들어갈지의 여부도 궁금하다. 오랜만에 만난 장편 장르소설. 어서 다음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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