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리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 고전 문학에 관심이 생겨 충동적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구입하고 이 책을 처음 읽는 순간, 역시 고전의 향기는 이런 것인가 하며 감탄했다. 몇 장만 읽어도 문체의 담백함이 느껴지는 게 일본현대문학에서는 만나지 못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저자의 다른 작품들도 순식간에 탐독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 무렵, 조금씩 문장들이 어긋났다. 문장이 어긋났다는 표현 보다는 묘사나 ‘일본의 감성’이 낯설게 느껴졌다. 2대가 함께 살고 있으며 주인공인 싱고는 노인이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 며느리,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딸과 손주들이 있지만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드러난 일반 정서들이 외국독자인 내가 읽기에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기억력이 감퇴하고 자신의 몸과 정신이 늙어감을 깨닫고, 죽음이 자신에게도 곧 닥쳐올 거란 두려움이 있지만 그런 두려움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문득문득 일상에서 떠오르는 불안감과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씩 떠나가는 상황들로 희화된 그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유머러스하다. 전쟁직후의 피폐한 일본의 삶을 경제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건, 주인공 싱고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아들과 딸, 사위의 올바르지 못한 삶의 모습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쟁에 참가한 아들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힘들다는 듯 전쟁미망인과 바람을 피우고, 사위는 술독에 빠져 살다 마약중독자가 되어 자살소동까지 벌인다. 그런 사위의 망가져가는 삶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는지 회의감이 들게 만드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을 잘 못 살았다는 회한을 드러내는 것으로 당시 일본의 배경을 절실하게 밝히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모습도 그려내고 있지만 싱고의 내면에는 사랑했던 여인, 현재 부인의 언니를 동경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한다. 동경했던 여인이 시집가서 일찍 죽자 마음에도 없는 동생과 결혼하고 혹여 자신의 딸이 처형을 닮길 바라는 마음을 가져보지만 오히려 더 외모가 형편없음을 알고 데면데면하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 결혼자체가 잘못 됐음을 알게 되었다. 처형에 대한 그리움과 풀어내지 못한 욕망을 며느리에게 쏟아내는 것을 보며 이상야릇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지만 옮긴이의 말마따나 이 소설세계의 페어(쌍)는 싱고와 며느리 기쿠코임에 틀림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싱고의 가정에서도 친 딸이 질투하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자신과 며느리 사이가 가장 애틋했으며 아들의 바람기 때문에 상처받고 복수를 위해 낙태까지 한 며느리를 위로해 준 것도 싱고였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답답하고 짜증이 났던 건 외국 독자로써 이해하지 못한 ‘일본의 감성’과 상식은 차치하더라도 그런 아들과 딸에게 똑 부러진 훈계와 아버지로써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들이 바람을 피우고 며느리도 그 사실을 알고 복수로 낙태하며 바람을 피운 상대가 임신을 한 상황에서도 아들을 불러다 뭐라 하지 않는 모습이 답답했다. 혼외 손주일지 모를 아이를 품고 있는 여인에게 모욕을 당하고 위자료를 건네주면서도 아들과 그 문제를 가지고 정면으로 나서지 못한 모습. 사위가 잘못 된 길을 가고 있음에도 그 사위를 불러서 어떠한 훈계도 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모든 것을 혼자서 끌고 가야 했던 상황들이 때때로 싱고가 마주하는 기억력 감퇴와 나이듦에 대한 회한처럼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 싱고는 기력도 능력도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애잔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가 자꾸만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고 현실에서 풀어내지 못한 욕망과 생각들을 꿈속에서 드러내는 것을 보며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나야 할 평범한 노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직장과 가정을 오가며 늘 되풀이되는 일상을 꿋꿋이 살아가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문제들 한가운데 서 있는 싱고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단 생각에 기운이 빠져버렸다. 늙음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신의 삶은 물론 자신이 이룬 가정과 하물며 자식의 삶이 맘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언가 평탄하지 않다는 이유로 싱고를 탓할 수도 어떠한 문제가 불거지게 만든 당사자를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어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이라고 생각하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답답함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하다. 그렇기에 저자가 풀어낸 담백하면서도 짜증스럽기도 했던 이 이야기를 끝으로 저자와의 만남을 단절시키고 싶지 않다. 다른 작품을 더 읽어보며 저자의 문학세계의 변화를 더 느껴보고 싶은 게 이 책을 읽고 난 후 허무함 뒤로 찾아온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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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2-04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까지나 남의 얘기니까..짜증도 나고
감정도 내보일 수있는 거라고..욕하며 본다는 막장 드라마처럼...브라운관의 이쪽 편이 되서 욕은 할수있는데 정작 자신의 집안 일엔 무감각한 ..사람들 처럼요... 그게 죽도 밥도 아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함..이 아닐까...생각한다고..답답하고 화는 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