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봉감별곡 : 달빛아래 맺은 약속 변치 않아라 ㅣ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5
권순긍 지음 / 나라말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국어시간에 고전읽기'의 책들이 한 권씩 보태지는 걸 기다리는 심정이 꼭 내 아이 마른 몸에 살이 붙는 걸 지켜보는 듯하다. ^^ 나라말 출판사라는 곳도 그렇고, 국어교사 모임이라는 곳도 그렇고, 읽어 온 책이 몇 권씩 보태지면서 믿음이 무한정 깊어지는 곳이다. 이렇게 글과 그림과 중간중간 끼워둔 시대읽기까지 흡족한,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손에 쥐고보면 이런 책을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데 깊은 감사를 느끼게 된다. 열심히 찾아읽고 널리 알리는 것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을 따름이다.

고전읽기 씨리즈로 다섯번째인 <채봉감별곡>은, 1910년대 근대적인 인쇄술이 도입되면서 우리의 고소설이 '구활자본'으로 출판되기 시작한 그때 새롭게 등장한 소설이라고 한다. 내용을 읽으면 조선왕조를 떠올리게 되지만, 소설 말미에 실어둔 해설에 의하면 만들어진 게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라는 게 새롭다. 기껏해야 100여년 전, 1920~30년대에는 이광수, 염상섭, 채만식 같은 소설가들이 현대 소설을 써서 신문에 발표하던 시절이 아닌가. 그런 현대소설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스스로를 키워가고 있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춘향전>, <심청전>간은 고소설이 1920년, 30년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널리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데, 내용과 형식에 따라 신소설, 고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동시대 사람들의 심성을 어루만졌다는 것을 깨닫는 심정이 마치 잃어버린 한쪽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고 아연해지는 그런 마음만 같다.

<채봉감별곡>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시대적 배경은 조선이나 주인공 채봉의 당당하고 진취적인 모습은 지금 보아도 마음 한군데가 시원해진다. 조선 말기, 온갖 부정부패와 타락한 세도정치를 배경으로 부모마저 그 속에서 그릇된 허영심과 권세에 몸을 담그고자 하여 금지옥엽 딸까지 세도가의 첩으로 팔고자 하나, 채봉은 실로 당차게 그런 부패한 윤리와 이념에 저항한다. 소설 전체를 통해 채봉은 여러번 조선시대 여성의 삶을 구속하고 있던 봉건윤리에 직면하게 되지만, 그때마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그것에 맞서게 된다.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 스스로 사랑을 선택하는 것, 벼슬에 눈먼 아버지의 명에 따라 재상가의 첩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도망치는 것, 심지어 곤궁에 처한 아버지를 구하고 자신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기생이 되고 사랑하는 남자를 찾는 것이며,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을 보면서 "멋있다, 채봉! 힘내라 채봉!" 이런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금 보아도 시원한 데가 있는 이 소설을, 그 시대, 이 이야기가 출판되어 읽히던 그 때 사람들은 이걸 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부패한 시대, 뒤떨어진 봉건 윤리에 짓눌려 절망과 좌절과 분노의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 속 채봉과 장필성이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 자신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개척해나가는 모습은 어떻게 다가갔을까? 때로는 달디단 꿈과 같은 오아시스처럼, 때로는 캄캄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나아갈 자리를 짚어주는 이정표가 되어주지는 않았을까? 시대를 건너뛰어 고전을 이해하기란 쉽지않다고 생각해왔는데, 중간중간 또 앞뒤로 고전의 의미를 되새기고 이해를 도와주는 여러 장에 힘입어, 지금 나에게뿐만 아니라 그시대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지를 헤아려보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고전을 만나는 과정에서 당연히 거쳐야 될 일이다 싶지만, 그런 체험을 도와주는 안내자를 따라가는 일 또한, 내용을 만나는 것 만큼이나 자못 즐겁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붉은 돼지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감독 / 대원DVD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어찌어찌하다보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 이젠 많이 길들여지긴 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작품을 볼 때는 또 그 흰 수염 기른 영감님의 가없는 상상력에 하하, 웃음이 난다. 어떤 작품을 해도 말초적인 재미에만 의존하는 법이 없어 작품마다 나름의 깊이를 지니지만, 또 그 말초적인 즐거움을 참 적절히 사용한다 싶다.

<붉은 돼지>를 보면서는, 그런 식의 양다리 걸치기도 균형을 이루면 이렇게 성공적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집 토토로> 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과 같은 애니들을 보면 아무래도 어린이의 시선에 촛점을 맞추면서 어른이 봐도 나름 재미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붉은 돼지>를 보면서는 이것, 어른들의 이야기잖아~ 싶었던 거다.  전쟁의 끔찍함과 허망함, 인간의 어리석고도 파괴적인 욕망, 사랑, 물러섬, 기다림... 그리고 다소 초월해버린 것만 같은 관조적인 삶의 방식이라든지,  미국적인 것에 대한 야유와 같은 것들이 어른들에게 먹히는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혼자 보는 게 아니라 초등 4학년 아들과 함께 보면서, 그런 것들이 신경쓰였다. 저녀석, 아직 저런 것까지는 안 먹힐텐데, 재밌어 할까? 이렇게.

그런데, 아들은 시종 진지하게, 또 낄낄거리기도 하면서, 감독의 다른 작품들을 볼 때처럼 참 재미나게도 본다.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 같지도 않게 뻥을 치고, 그리 시끌벅적하지도 않게 유쾌하고, 번쩍번쩍 현란하지도 않은데 신기한 것도 많다. 어른들이 보아도 거북하지 않고 아이들이 보아도 지루하지 않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상상력은 딱 그 적절한 한 줄, 어린이와 어른의 감수성이 공존할 수 있는 그 선을 아슬아슬 기분좋게 오르내리는 것이 아닐까. 가끔은 어린이에 기울고 가끔은 이렇게 어른에 좀더 기울어, 그러면서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 하고싶었던 이야기를 거기에 버무려넣으면서.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자주 '평화'와 '공존', '반전'의 메시지를 읽는다.  일반적인 인간의 그것을 넘어서는 영적인 기운을 믿고있거나 희망하고있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그 메시지가 전달되는 방식은 때로 황당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감동을 준다. 그가 보내는 메시지가 파괴를 넘어선 공존, 평화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희망을 강하게 담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 희망적인 메시지라면, 그게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지 어떤지 깊이 성찰하기도 전에 그저 동화적으로 그만 받아들이고 싶어지니까 말이다. 게다가 애니메이션이니, 어린이의 눈으로 볼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가.... 마음을 활짝 열고 한 편의 판타지를 볼 준비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의 장점을 정말로 최대한 끌어내 쓸 줄 아는 작가가 아닌가 한다. 나야말로 하잘 것 없는 분석(나부랭이)을 하고 있지만, 그는 작품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그의 속내를 드러내며 그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가며, 진지하되 가볍지 않게 적절한 수위로 우리를 위무하는가 말이다. 그는 언제나 대중의 눈높이보다 조금만 높게, 약간 들뜬 마음으로 살짝 넘볼 만한 높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것이야말로 정녕 대중이 원하는 작가의 모습이 아닐런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누도 잇신 감독, 츠마부키 사토시 외 출연 / 마블엔터테인먼트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묘한 영화다.

다 보고 나니, 혼자 있고 싶어졌고, 그저 가만히 있게 되었다. 다른 것과 비교하거나 연상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영화 속 몇 가지 장면들이 다시 떠올랐다. 조개껍데기 침대 속에 앉아있는 조제, 거기 앉아 바다 속 풍경을 바라보는 조제... 츠네오와 나누는 말들.

눈 감아 봐 뭐가 보여?  / 아무 것도, 깜깜해. /  그곳이 내가 옛날에 있던 곳이야. 깊고 깊은 바다 밑바닥.... 난 그곳에서 헤엄쳐 올라온거야.  /  .. 뭐 때문에? /  자기랑 이 세상에서 제일 야한 짓을 하려고. /  그렇구나... 조제는 해저에서 살고 있었구나. /  그곳에는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아. /  외롭겠다. /  그다지 외롭지 않아. 애초부터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단지 아주 천천히 시간이 흘러갈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언젠가 자기가 없어지게 되면 미아가 된 조개 껍데기처럼.... 혼자서 바다 밑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둘 다 쓸쓸하다.

그날 했던 조제의 말대로, '언젠가 츠네오는 조제에게서 없어진다.' 그리고 조제는 미아가 된 조개 껍데기처럼 혼자서 바다 밑을 데굴데굴... 그러나 전동휠체어를 타고 혼자서 장보러 다니며.

츠네오는, 길을 가다 주저앉아 운다. 해저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그는, 조제가 다시 돌아가야 할 해저의 삶이 불안하리라. 조제를 그 깊은 바다에 두고, 혼자 돌아서 가는 그 길이니까.

그들, 생의 쓸쓸함이 내 것인양 생생하다. 절제가 아름다운 영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 읽고나면 전체적인 느낌도 그렇지만, 읽는 중에 마음에 드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서 아찔한 책이다.

'첸차는 울면서 마차를 따라가, 티타가 긴긴밤 불면증에 시달리며 떴던 어마어마한 담요를 그녀의 어깨에 간신히 둘러주었다. 담요가 어찌나 크고 무거웠던지 마차 안에 다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티타가 꼭 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에 담요는 길게 드리워진 웨딩드레스 자락처럼 마차 뒤에 끌려갔다. 만화경처럼 알록달록한 무늬에 일 킬로미터나 되는 어마어마한 길이였다. 티타가 색깔에 신경쓰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아무 실이나 가져다 썼기 때문에 완전히 총천연색이었다. 마차가 지나가면서 일으킨 거대한 먼지 구름 사이로 담요는 마술을 부리듯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면서 현란하게 너풀거렸다.'

'불쌍한 헤르트루디스는 물 양동이를 들고 열 번도 넘게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했다. 너무 고된 일이라 가뜩이나 후끈 달아오른 열기가 더 달아올라서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시원하게 샤워할 수 있다는 생각에 참고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몸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 버렸기 때문에 불행히도 헤르트루디스는 샤워를 즐길 수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어찌나 강했던지 나무판자가 뒤틀리면서 불이 붙었다. 헤르트루디스는 불길에 휩싸여서 타 죽을까 봐 너무 두려웠던 나머지,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샤워장에서 뛰쳐 나왔다. 그때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장미 향은 멀리,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이거야말로 판타지.. 라우라 에스키벨식의 천연스런 말법이다. 우리에게는 역시 그리 익숙치 않은 멕시코 작가여서 그런가? 어찌나 신선하고 사랑스러운지, 멕시코 자체가 그만 좋아져버린다. (문학의 힘은 그런 곳에도 있다 ^^) 작가가 함께 살았던 알폰소 아라우가 감독한 영화, 바로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와  또 한 편 더, <구름 속의 산책>에서 멕시코는 그야말로 이 세상을 초월한 어떤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듯 보여진다. 주술적인 아름다움, 마법과 같은 일들을 그저 그렇게 일어날 수 있는 일로 태연하게 말하고있는 작가 때문에, 읽는 나마저 한동안 그 마법같은 대지를 홀린 듯 끌려다녔다. 멕시코, 너에 대해 품은 환상을 한동안 깨지지않게, 품고 있고야 말리! ^^

정말 독특하게도 이 작품 속의 사랑의 매개는 멕시코를 드러내는 요리다. 사랑은 음식을 통해 나타난다. 내용만이 아니고 형식에서도 그렇다. 아예 일 년 열두 달을 나타내는 열 두 개의 장을 설정해서 요리법부터 설명하고, 주인공 티타의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그 속에 녹여낸다.  사랑하는 남자가 언니와 결혼하는 걸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만든 '차벨라 웨딩케이크'를 먹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깊은 슬픔과 회한에 빠져 시름시름 아프고, 그 사랑하는 사람이 오직 자신과 가까이 있기 위해 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행복에 들떠 만든 '장미 꽃잎을 곁들인 메추리 요리'를 먹은 사람들은 또한 사랑의 기쁨에 들떠 어쩔 줄을 모른다. 티타의 슬픔, 기쁨, 외로움, 눈물, 아픔과 소망이 들어간 요리는 그대로 사람들을 전염시킨다. 마음이 담긴 요리에는 그 나름의 치유력이 있다는 등의 얘기를 오래전부터 들어왔지만 그거야 증명하기 어려운 추상의 영역이니 그러려니 하는 법. 그러나 라우라 에스키벨이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그 추상의 영역을 생생하게 구체화하는데 내게는 그게 기가 막히게 아름답게 느껴졌다. 판타스틱!   

 티타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물질이 왜 불에 닿으면 변하는지, 평범한 반죽이 왜 토르티야가 되는지, 불같은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가슴은 왜 아무런 쓸모도 없는 반죽덩어리에 불과한 것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이 책에는 티타와 페드로의 사랑법 뿐 아니라 티타와 존의 사랑법도 등장한다. (물론 그 외에도 헤르트루디스의 사랑법도 있다)  둘다 순탄하지 않은 상황을 거치며 그 속성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생각해보면,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존의 사랑법은 자주 페드로의 사랑법에 밀린다... 너무 많은 '존'들은 또 수많은 '페드로와 티타의 사랑'을 그저 아프게 바라볼 수밖에 없어서 그것이 또 독자인 우리를 실은 가슴 아프게 한다. 우리는 마치 스스로가 존이 된 것처럼 아플 수 밖에 없다. 불처럼 확 타올라 어쩌면 소진되어버리는 사랑에 대한 예찬은 끝이 없어서, 사실 그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물과 같고 공기와 같은 넉넉한 사랑은 문학 작품에서 설 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다. 불과 같은 사랑은 이 책에서 보듯 사실 너무나 매혹적이지만, 어쩌면 그 비현실성으로 하여 이토록 허구에서만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온하지 않고 들끓는 사랑에 대한 독자의 탐심 또한 그러한 현실 불가능성이라는 든든한 토대 위에서 더욱 빛나는 것일지도. 이 책의 제목도 실은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이 아니라 '초콜릿이 끓기 직전의, 부글거리는' 상태를 표현한 말이라지 않는가. 변화, 소멸을 향해 돌진해가는 그 절정의 순간을 말하는 것 같다.

그토록 신선한 소재와 형식, 라우라 에스키벨 만의 독특한 말법으로 하여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책이 되었다. 한동안은 이 책을 생각만 해도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 들었더랬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딸기 2007-02-06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히히 저도 이거 재미있게 읽었어요 >.<

sprout 2007-02-08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반가워요 ^^ 웃음소리가 제 마음에 쏙 듭니다 ㅎㅎ
 
어처구니 이야기 - 2005년 제11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ㅣ 비룡소 창작그림책 28
박연철 글.그림 / 비룡소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와ㅡ

굉장히 저력있는 작가가 탄생한 듯싶다. 비룡소 황금도깨비상을 받으며 척, 나타났으니 분명히 그림책 계에서는 신인이라 하겠는데, 뭐 이리 노련미가 넘치는 작품을 만들었나 말이다. ^^
어처구니, 다른 뜻도 있지만 이 책에서는 궁궐 추녀마루 끝자락에 있는 흙으로 만든 조각물을 일컫는 말이란다. 맞다, 지난번 궁궐답사 갔을 때 날아갈 듯한 추녀마루 위에 뭣이 조로록 앉아있었지. 바로 그게 어처구니란다. 못된 귀신으로부터 궁궐 사람들을 지키려고 만들어졌다는데, 그 이름들도 이 책에 나오는대로 대당사부, 손행자, 저팔계 등등... 바로 그것이고 또 함께 등장하는 '손'이라는 이름의 귀신도 오늘날에도 우리 생활에 '손 없는 날' 등으로 많이 불리는 그것이다. 궁금한 걸 풀어주는데다 귀신이 등장하기까지 하니, 애들은 애들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셈이다.

먼저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를 보아하니.

하늘나라의 말썽꾸러기 어처구니들 때문에 화가 난 임금님이 그들을 잡아들이랍신다. 다섯, 우리 눈에는 그저 특이하고 재미있게 보여서 함박 웃음을 짓게 만드는 꾸러기 캐릭터들이다. 예컨대 거짓말로 하늘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든 죄를 짓고 잡혀온 이구룡은 알고 보니 입이 두개라, " 어디서 거짓말이 나오는지 알 수가 있나" 라고 나름대로 항변을 한다. 사람들의 죽는 날을 똑같이 만들어 큰 말썽을 일으킨 죄를 지은 대당사부는 "누구는 일찍 죽고 누구는 늦게 죽고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 라고 구시렁거려 웃음을 자아낸다.

다섯 꾸러기들은 각각 청 황 적 흑 백, 우리의 전통색인 오방색으로 설정하여 천지간 자연 만물과 인간사의 길흉을 탐구하던 풍수와 음양오행의 조화를 그림책 속에 색채로 재현하고자 한 게 아닌가 싶다. 내용인 즉, 민속신앙에서 날수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다니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귀신인 손과 어처구니들의 한판 싸움이니 말이다. 오행에 근원을 둔 오방색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에서 채색화의 시원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특히 '손'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과 짐승의 모습을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도, 수렵도에서 따왔는데, 아주 적절하고 멋있는 차용이다. 뒤로 한껏 팔을 젖히고 춤을 추는 고구려 사람의 모습이 손을 피해 헐레벌떡 혼비백산 달아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변용되다니, 은근슬쩍 해학적인 박연철 작가. ^^

임금님이 궁리끝에 다섯 어처구니들에게 골칫거리 손을 잡으면 죄를 용서해주마고 타협안을 제시하고, 대장 격인 대당사부를 중심으로 어처구니들은 손을 잡을 작전을 짠다. 나름대로 각자의 장점과 특성을 잘 살린 방법이어서 읽는 이들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어디, 으레 그렇듯 일이란 게 작전대로 풀리기만 하던가. 반드시 뒷탈을 일으키는 녀석이 있어야 옛날 이야기도 이야기로 맛이 나는 법이라  까불까불 손행자란 녀석은 결국 저지래를 친다. 손재주가 좋으니 구백아흔아홉 자의 긴 밧줄을 만들되 꼭 귀신을 쫓는다는 엄나무로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는데, 아니나다를까, 구백아흔아홉 자가 되기에는 엄나무 껍질이 딱~ 조금 모자란다. "에이, 귀찮아!" 하면서 손행자는 고만 옆에 있는 생김새도 비슷한 두릅나무로 나머지 밧줄을 엮고 마는데 그게 역시나 화근이었다. 이어 '손'을 잡는 작전을 수행하는데 모두들 한 몫을 당당히 하여 차질없이 나가고 있었건만 마지막에 덜컥, 밧줄 끝이 툭 하고 끊어지며 손은 달아나 버리고... 결국 손을 놓쳐버린 어처구니들은 손행자를 타박하며 꼭꼭 숨어버렸다는 것. 결국은 하늘나라 임금님께 모두 잡혀서 벌을 받는데,

그 벌이 바로 궁궐 추녀마루 끝에 올라가서 손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게 하는 것이란다. 

임금과 손, 다섯 어처구니들이 풀어가는 이야기는 우선 재미있고 궁금함을 유발하는 소재인데다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로 연결되니 더 흥미롭다. 게다가 옛이야기의 특징인 반복되는 구조가 있고, 뭔가 하나를 대충 하는바람에 고만 아쉽게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벌을 받게 되는 교훈성이 있는데 그것도 익살스럽게 풀어가서 한결 넉넉하다. 그렇게 달아나버린 손이 지금도 우리 곁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니 그 또한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여러가지 이야기적인 즐거움이 듬뿍 주어져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가 참, 여간 아니다.

글과 그림을 함께 한 역량있는 작가인데, 이거야 원, 그림에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판화 기법으로 한껏 고풍스럽게, 꼴라쥬와 만화적인 방법으로 한껏 신선하게, 앞서도 말했듯 고구려 벽화를 멋드러지게 차용하여 익살맞게,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오방색과 황토의 느낌이 나는 바탕색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커다란 전통의 바탕천에다 온갖 다채로운 놀이판을 벌여보았는데 그게 너무 튀지도 않고 너무 칙칙하지도 않고 딱 유쾌하고 솔깃하다. 몇 번을 읽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새로 발견하는 숨은 장치들이 있어서 작가가 얼마나 세심하게 구상하고 적절히 배치하였는지를 기분좋게 느낄 수 있다.

대저 아이들이 한껏 즐겨 읽어도 어른의 눈으로는 미흡해보이거나, 어른은 찬탄해 마지않는데 아이들은 시큰둥한 그림책들도 많이 있어서 그 간극을 느끼며 때로 아쉽기도 하다. 그런 중에 이제 그림책 한 권을 앞에 놓고 아이나 어른이나 그저 유쾌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 한 권 더 보태져서 무척 반갑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글샘 2007-01-27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오랜만이죠? 이주의 리뷰에서 뵙고 반가운 김에 몇자 남깁니다.
아직도 아이들 책 열심히 읽으시나봐요^^ 추운 겨울 건강히 잘 보내시길...
아이들도 잘 자라죠? 아드님이던가? 만화로 읽은 기억이...^^

sprout 2007-02-0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정말 반갑습니다. 저같은 얼치기 서재꾼을 지금까지 기억해주시다니 순간 찡합니다.. ^^ 가끔이지만 님의 서재에 들어가보면 언제나 열심이신 모습... 얼마전 부산에서 오프라인 모임도 계획하시는 듯하던데 잘 되었나요?

프레이야 2007-01-31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프라우트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정말 오랜만에 님의 멋진 리뷰를 보게 되네요.
어처구니 이야기, 보고 싶어지는 우리 그림책입니다. 박연철,, 이름 새기고 갑니다.

몽당연필 2007-02-01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아들도 무척 좋아하는 그림책이랍니다. 좋은 서평 잘 봤습니다.

sprout 2007-02-0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축하 넘 고맙고요, 여기서 다시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혜경님은 꼭 알라딘 쥔장 같으세요. 언제나 꾸준하신데다가, 1호이신데다가, 오랜만에 들어오면 인사도 건네주시고.. 혜경님 인사를 받으니 제가 꼭 손님같이 생각됩니다. 그저.. 든든합니다 ^^

sprout 2007-02-02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당연필님, 좋은 그림책은 어른이나 아이 모두에게 공감을 주나봐요. 책 보고 좋은 느낌을 나눈다는 것, 서로에게 참 기분좋은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