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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돼지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감독 / 대원DVD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어찌어찌하다보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 이젠 많이 길들여지긴 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작품을 볼 때는 또 그 흰 수염 기른 영감님의 가없는 상상력에 하하, 웃음이 난다. 어떤 작품을 해도 말초적인 재미에만 의존하는 법이 없어 작품마다 나름의 깊이를 지니지만, 또 그 말초적인 즐거움을 참 적절히 사용한다 싶다.
<붉은 돼지>를 보면서는, 그런 식의 양다리 걸치기도 균형을 이루면 이렇게 성공적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집 토토로> 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과 같은 애니들을 보면 아무래도 어린이의 시선에 촛점을 맞추면서 어른이 봐도 나름 재미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붉은 돼지>를 보면서는 이것, 어른들의 이야기잖아~ 싶었던 거다. 전쟁의 끔찍함과 허망함, 인간의 어리석고도 파괴적인 욕망, 사랑, 물러섬, 기다림... 그리고 다소 초월해버린 것만 같은 관조적인 삶의 방식이라든지, 미국적인 것에 대한 야유와 같은 것들이 어른들에게 먹히는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혼자 보는 게 아니라 초등 4학년 아들과 함께 보면서, 그런 것들이 신경쓰였다. 저녀석, 아직 저런 것까지는 안 먹힐텐데, 재밌어 할까? 이렇게.
그런데, 아들은 시종 진지하게, 또 낄낄거리기도 하면서, 감독의 다른 작품들을 볼 때처럼 참 재미나게도 본다.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 같지도 않게 뻥을 치고, 그리 시끌벅적하지도 않게 유쾌하고, 번쩍번쩍 현란하지도 않은데 신기한 것도 많다. 어른들이 보아도 거북하지 않고 아이들이 보아도 지루하지 않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상상력은 딱 그 적절한 한 줄, 어린이와 어른의 감수성이 공존할 수 있는 그 선을 아슬아슬 기분좋게 오르내리는 것이 아닐까. 가끔은 어린이에 기울고 가끔은 이렇게 어른에 좀더 기울어, 그러면서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 하고싶었던 이야기를 거기에 버무려넣으면서.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자주 '평화'와 '공존', '반전'의 메시지를 읽는다. 일반적인 인간의 그것을 넘어서는 영적인 기운을 믿고있거나 희망하고있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그 메시지가 전달되는 방식은 때로 황당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감동을 준다. 그가 보내는 메시지가 파괴를 넘어선 공존, 평화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희망을 강하게 담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 희망적인 메시지라면, 그게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지 어떤지 깊이 성찰하기도 전에 그저 동화적으로 그만 받아들이고 싶어지니까 말이다. 게다가 애니메이션이니, 어린이의 눈으로 볼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가.... 마음을 활짝 열고 한 편의 판타지를 볼 준비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의 장점을 정말로 최대한 끌어내 쓸 줄 아는 작가가 아닌가 한다. 나야말로 하잘 것 없는 분석(나부랭이)을 하고 있지만, 그는 작품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그의 속내를 드러내며 그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가며, 진지하되 가볍지 않게 적절한 수위로 우리를 위무하는가 말이다. 그는 언제나 대중의 눈높이보다 조금만 높게, 약간 들뜬 마음으로 살짝 넘볼 만한 높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것이야말로 정녕 대중이 원하는 작가의 모습이 아닐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