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0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제3회 EBS 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 프로그램 중에서
내가 본 일곱 편에 대한 짤막한 감상. 7월 1일(월) 하루 휴가여서 세 편을 보았고,
7월 16일(일) 저녁 시간에 네 편을 보았다.
7월 12일(수) 저녁에도 한 편, "라스트 코뮤니스트"를 보려고 했는데,
처음 시작하는 시간을 놓친 데다가 피곤했는지 중간에 자버린 바람에(ㅠ.ㅠ)
봤다고 할 수가 없다. "추방당한 말레이시아 공산당수"의 궤적을 따라가되,
그 궤적에 드러난 시간, 공간과 물질, 사람들을
과거의 당시 모습이 아니라 현재 말레이시아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을 찍어 엮은 점과
손가락 인형, 가면을 이용한 세미 뮤지컬 형식이 꽤 흥미로웠는데, 아쉽다.
5 일간 5 Days

감독 : 요아브 샤미르 Yoav Shamir
제작국가 : 이스라엘 / 제작년도 : 2005
러닝타임 : 94 min / 원작언어 : 히브리어
상영일시 : 06-07-13 19:30
방영일시 : 06-07-10 11:30
시놉시스
2005년 8월 15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영화는 이스라엘 군대와 거주민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5일간의 이 역사적인 철수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프로그램 뒤에 나온 인터뷰 화면에서 감독은 "군대와 정착민 사이에 대화가 부족했던 점(대화를 통해 원만히 해결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그러나 가자에서 이스라엘인들이 나간 것은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화가 났다. 동족인 군대가 자신들을 집에서 쫓아낸다면서 마치 순교자라도 된 듯 울부짖는 저들, 그들을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지 눈물짓는 병사들! 그래, 어쨌거나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에 따라 살던 곳을 떠나야 한다니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적어도 자기 집에 대한 결정권마저 없다는 것은 화날 일이겠다. 하지만 정착촌 자체가 폭력적인 무단 점거였잖아! 감독은 이러한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본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반응도 같이 촬영하려 했다던데, 왜 편집에서 뺐을까? 처음과 끝에 굴착기가 정착촌의 집들을 때려 부수는, 똑같은 장면이 나온다. 끝 장면에는 정착민들이 정부에게, 자기들이 살던 집들을 부수어달라고 압박했다는 해설이 같이 흐른다. 마을 자체를 파괴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집들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활용하는 것조차 보기 싫었던 것이다. 진짜 욕 나온다.
(사이에 "꽃섬Flower Island"이라는 짤막한 영화를 했는데, 이상하게 EIDF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남미 영화였는데, 일본계 농부가 생산하여 판 토마토가 유통 경로를 거쳐
향수 외판원인 여성의 손에 버려지고, 그것이 쓰레기 하치장인 '꽃섬'에서 돼지의 먹이가 되는 과정,
그리고 돼지에게도 못 먹일 것들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주워 가는 모습을 재기발랄하게 표현한 영화였다.
우울한 유머가 가득했는데, 왜 이 영화에 대한 정보가 없을까.)
예멘의 나즈미에 A Stranger in Her Own City


감독 : 카디자 알 살라미 Khadija Al-Salami
제작국가 : 예멘 / 제작년도 : 2005
러닝타임 : 29 min / 원작언어 : 아라비아어
상영일시 :
방영일시 : 06-07-10 13:10
시놉시스
예멘의 한 옛 도시에 유독 눈에 띄는 한 소녀가 있다. 감독은 그녀의 주변을 쫓으며 이 남다른 그녀가 주변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대우 받는지를 살핀다.
나즈미에는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인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차도르를 쓰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며 남자아이들과 거리낌없이 어울려 논다. 그래서 나즈미에의 하루하루는 전쟁이다. 늘 비난과 손가락질과 싸우면서도 언제나 웃음과 활기를 잃지 않는 나즈미에. 나즈미에의 태도에 견주면 도리어 감독이 더 여유가 없어 보였다. 이렇게 특별한 아이의 부모는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남다른 소신이 있는 분인가 보다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즈미에는 부모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고 있었다. 맨 마지막에, 이 영화를 찍고 7개월 뒤 결국 나즈미에가 차도르를 쓰고 학교도 그만두게 되었다는 자막이 나왔을 때,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저 아이는 이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폭동 Pokdong

감독 : 알랙스 동 코 Alex Dong Ko
제작국가 : 미국 / 제작년도 : 2006
러닝타임 : 25 min / 원작언어 : 한국어, 영어
상영일시 :
방영일시 : 06-07-16 19:50
시놉시스
1992년 로스엔젤레스 폭동으로 인해 상처 받은 한 한인 가족의 삶을 그린 영화. 감독은 이 폭력적 반란이 근면한 가족에 미친 영향과 그에 따른 절절한 이야기를 당시 직접 피해자였던 그의 가족들의 입을 통해 생생한 영상으로 그려낸다.
바로 감독의 가족 이야기다. 그래, 매우 힘든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다는 자부심, 가족간의 유대감. 그런데... 더 이야기할 것이 없었을까? 감독 자신에게는 부모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겠지만. 좀더 넓게 볼 수 없었을까?
크리스 인 코리아 Chris In Korea

감독 : 김새노 Saino Kim
제작국가 : 한국 / 제작년도 : 2006
러닝타임 : 46 min / 원작언어 : 한국어, 영어, 불어
상영일시 : 06-07-12 18:30
방영일시 : 06-07-16 20:25
시놉시스
“나는 그의 첫인상을 알리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 작품은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러나 이방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한 외국인을 소개한다. 크리스는 한국에서 영화공부를 하거나 직접 영화를 제작해보려고 3년째 머무르고 있다. 감독은 정서적인 전달을 위해 그의 행동과 말들을 제약 없이 기록했다.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혼자 있는 크리스의 모습에서, 그가 만들어 낸 음악들에서 그가 풍기는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그래,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항상 무거운 마음만을 남길 필요는 없겠지. 그러나 한국에서 그가 이렇게 산뜻한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것은, 그가 유럽계 백인 남성이면서 학생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계. 백인. 남성. 학생.
누구의 노래인가? Whose Is This Song?


감독 : 아델라 피바 Adela Peeva
제작국가 : 불가리아 / 제작년도 : 2003
러닝타임 : 70 min / 원작언어 : 불가리아어 외
상영일시 :
방영일시 : 06-07-16 21:10
시놉시스
노래에 관한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 영화는 터키, 그리스.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그리고 불가리아를 넘나들며 때론 사랑노래로 때론 찬송가로, 그리고 전쟁노래로 변신하는 노래의 흥미진진한 여정을 쫓는다.
정말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도입부를 놓쳤다. 어떤 노래가 있다. 그런데 그 노래를 터키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불가리아인들이 각자 자기네 전통 노래라고 주장한다. 감독이 이 노래를 따라 터키, 그리스, 알바니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를 가보니, 가락은 똑같은데 지역과 민족에 따라 완전히 다른 노래말로 불리고 있었다. 사라예보에서는 사랑 노래였는데, 마케도니아에서는 이슬람 신앙을 다짐하는 군대 노래가 되고, 불가리아에서는 오스만 터키에 대항해 싸우던 옛 군대의 노래였다. 감독은 이 노래를 통해 발칸 반도 여러 민족 간에 화해를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다. 세르비아인들에게 보스니아 노래라며 이 노래를 들려주자 모두 격분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고, 불가리아에서 "이 노래가 터키 노래라던데요?"라고 하자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목을 매달아버리겠다고들 한다. 같은 노래를 각각 자기네 전통 민요로 알고 있다는 건, 옛날에는 그만큼 가깝게 문화를 서로 나누던 사이라는 뜻 아닌가.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모로 인상 깊은 영화였다. 그런데 정말, 애초에 그 노래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터치 더 사운드 Touch the Sound

감독 : 토마스 리델샤이머 Thomas Riedelsheimer
제작국가 : 독일, 영국 / 제작년도 : 2004
러닝타임 : 99 min / 원작언어 : 영어
상영일시 : 06-07-14 21:00
방영일시 : 06-07-16 22:25
시놉시스
정말 소리를 만져 볼 수 있을까? 청각장애인 타악기 연주자에게 소리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연주를 해온 주인공은 장애라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큰 산을 넘어 세상 사람들에게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의 선율을 들려주고 있다.
소리의 향연.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