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부모님은 '안녕'하신가? 한 해가 또 바뀌고, 내 나이가 한 살 더 먹으면서 드는 수많은 걱정 중 하나는, 그만큼 부모님도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게 된 지 몇 년 되면서 나도 조금씩은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냉정'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아마도 따로 떨어져 살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의존하는 것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보다 상실감이 조금은 덜할 것이라, 짐작만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진정한 '준비'같은 건 불가능할 것이다. 여전히 부모님의 건강은 늘 걱정스러운 것이고, 부모님의 '안녕'은 무엇보다도 오래도록 기원하는 일이다. 

 

난 아직 망자(亡者)의 몸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죽음'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하수'인 셈이다. 스스로는 고사하고, 타인의 죽음 앞에도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이런 내가 결국,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될, 사랑하는 사람 혹은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 나갈 수 있을까?

 

<편안한 죽음>은 페미니스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 중 한 명인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쓴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전소설이다. 욕실에서 넘어져 대퇴골 경부골절을 당한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가 우연히 암 말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어 4주간의 투병 끝에 숨을 거두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며 행한 일, 생각한 것, 느낀 감정을 섬세하게 적어내려가고 있다.

 

시몬느는 유명한 작가, 학자라는 점에서 어머니의 자랑거리였지만, 그녀의 사생활이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그녀가 종교를 갖지 않으려 한 점 등 때문에 두 모녀는 그다지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망한 나이는 일흔 일곱이었고, 그때 시몬느의 나이 역시 벌써 쉰 다섯이었다. '살 만큼 산', '죽을 때가 된' 어머니라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었고, 시몬느 역시 '어른' 중에서도 꽤 '지긋한' 연세의 어른인 셈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느에게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죽음과는 다른 그 무언가가 있었다.

 

시몬느는 몇 번의 고비를 넘겨가며 가까스로 생명을 이어 나가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 그렇게 겨우겨우 연장된 4주간의 시간동안 그동안 묵혀 놨던 어머니와 자신 사이의 갈등을 풀고 화해를 요청하며, 어머니의 생애를 '어머니'가 아닌 한 '여자', '사람'으로서 이해해 나간다. 그 4주는, 삶의 연장이기도 하겠지만, 어머니 자신에겐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딸들에게는 그 시간이 유예기간이었고, 어머니에게도 그간 소원해졌던 딸들이 자신 곁에 돌아와 있는 것에 기뻐 행복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대체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거쳐 어머니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시몬느는 실존주의자 답게, 이 과정을 통해 어머니뿐 아니라 인간 전체의 죽음의 문제를 성찰하며 끝을 맺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의학의 폭력성에 대한 서술도 자주 보인다. 의사들의 환자와, 환자보호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의 냉정함, 권위주의가 시몬느와 그녀의 가족들을 종종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의사들의 결정과 권유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무력감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환자(와 환자 보호자들)의 비극적 '숙명'이다. 한번씩이라도 '병원에 반대'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공감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의 대부분에 공감과 동의를 표하게 되지만,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게 하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시몬느 자매가 어머니에게 끝끝내 어머니의 병명과 남아있는 수명에 대해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잘 동의가 되지 않는다. 딸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의 시간이 필요했듯, 어머니가 아무리 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보였다 하더라도, 그녀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끝끝내 딸과 의사들의 거짓말에 속아 부질없는 희망으로 그 고통을 감내해 가며 그저 죽음을 지연시키기만 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단 하루를 살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납득하고, 누리고, 마무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결국 삶과 죽음은 누구도 함께해주지 못하는 철저히 단독적인 일이라는 걸 아는 시몬느가, 왜 함부로(?) 어머니의 삶과 죽음에 '거짓말'로 개입했을까? 그런 점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편안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시몬느 본인 위주의 해석은 아닐까?

 

아래는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구절들-----

 

 35~37쪽) 어머니의 잠옷이 벌어져서 어머니의 우글쭈글하고 잔주름이 많은 배를, 그리고 털이 하나도 없는 치골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였다.(...)/어머니의 성(性)을 본다는 것은 내게 충격이었다./어떤 몸이든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은 없었다. 어릴 때 나는 몸을 좋아했다. 사춘기가 되자 몸에 대해서 나는 일종의 불안한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몸이 혐오감을 주면서 또 성스런 느낌을 주는 이중성, 곧 금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어쨌든 난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인 육체에 대해 이렇게 심한 불쾌감을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어머니의 무관심한 그 태도 때문에 나는 더욱 놀라웠다./어머니는 평생 동안 당신을 억눌러 왔던 금기 사항이나 금지된 것을 버렸다. 나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인정했다. 다만 그런 식으로 포기함으로써 그야말로 갑자기 오로지 육신에 지나지 않는 그 육신은 시체 따위와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어떤 방어도 하지 못한 채, 직업적인 손이 만지고 다루는 그 불쌍한 몸뚱이, 거기에는 이제 단지 무모한 관성만이 생명을 지탱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살아있는 존재였다. 나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언젠가,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어머니의 죽음은 그 탄생처럼 내가 알 수 없는 신비의 시간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혼자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나이라고 중얼거려 본 적도 있지만, 그것은 다른 많은 말들처럼 아주 공허한 말들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어머니 모습에서 이제 곧 다가올지도 모를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다.

 

126)때때로 환자들이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그 주변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데 화가 나서 '나라면 환자를 죽이겠어요'하면서 분개하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그런 일을 겪자 나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사회적 도덕에 굴복한 대신 나 자신의 도덕을 부정했던 것이다. 사르트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지. 당신은 의학 기술에 굴복한 거지. 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사실 그렇다. 전문의사들이 내린 진단과 예측과 결정에 대해 우리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환자는 의사들의 소유물이 되었다.

 

 169)무엇보다도 우리가 고통스러워 한 것은, 어머니가 겪는 임종의 고통을 보다가, 다시 또 의식을 차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모순된 감정이었다. 고통과 죽음이 경주를 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차라리 죽음이 먼저 와 닿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었다./하지만 어머니가 아무런 의식도 없는 얼굴로 잠이 들면 우리는 하얀 평상복 위에 시선을 늘어뜨리고는 어머니 시계를 매어둔 검은 리본이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마지막 경련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가슴이 딱 멎는 듯 고통스러웠다.

 

173)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살아서, 의식이 있는 상태였지만, 자신이 살아있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전혀 모르고 거기 있었다. 우리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야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 몸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마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배, 부스럼, 흘러내리는 배설물, 푸르스름한 피부색, 살갗에서 흐르는 액체 따위에 대해 어머니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거의 마비가 되다시피 한 두 손으로는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볼 수도 없었고 사람들이 부축해 줄 때면 머리가 뒤로 꺾어졌다. 거울을 달라고 하는 때도 이제 없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모습을 한 자신의 얼굴은 존재하지도 않고 있었다.

 

183)어린애 같은 어머니 목소리를 들으니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어머니는 철저히 혼자였다. 나는 어머니를 만져보고 어머니에게 말을 하지만 어머니의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210)나에게도, 더구나 어머니에게도, 종교가 죽음 뒤에 오는 행복에 대한 희망일 수는 없었다. 영원불멸이라는 것이 천국에서 이루어지든 지상에서 이루어지든, 삶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영원불멸이 죽음에 대한 위로가 될 수는 없다.

 

213)우리에게 소중한 사람 누군가가 사라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계속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고통스런 가책을 수없이 느끼게 된다.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그만의 유일한 단독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는 그가 없음으로 인해 완전한 무(無)가 되기도 하고 그가 있음으로 인해 온전히 존재하기도 하는 세계마냥, 거대한 존재가 된다./우리에게는 그가 우리 삶 속에서 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했어야 했던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그도 다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주는 어지러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도, 심지어는 자신이 처해 있던 한계가 분명하더라도, 자신이 최선을 다할 수는 없기 때문에, 항상 우리 자신에게 많은 비난의 여지가 남아있게 된다. 어머니에 대해서 우리는 죄가 많다. 특히 그 말년에 우리가 어머니를 소홀히 하고 등한시하고 피해왔기에 더욱 그렇다.

 

225)잠깐 동생이 흐느껴 울었다./"한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나도 엄마처럼 저 속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사실이야. 그게 아니라면 너무 말도 안돼."하고 그 아이가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가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장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불행한 사실은 누구나 똑같이 겪게 될 이 일을 우리는 각자 혼자서 겪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자신이 회복되어 가는 줄 알고 있던 그 고통의 시간에 우리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철저히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239)'그 사람도 죽을 나이가 됐지'하는 말. 노인들의 슬픔, 노인들이 쫓겨가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도 죽을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도 어머니에 대해서마저 그런 상투적인 말을 쓴 적이 있다./ 사람들이 일흔이 넘은 자기 부모나 조부모가 숨을 거둔데 대해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쉰 살이나 된 여자가 자기 어머니가 죽었다고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나는 그 여자가 신경과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차피 죽을 운명일 테니까. 여든 살이면 그야말로 죽어도 좋을 만큼 많은 나이가 아닌가....../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람은 태어났기 때문에, 또는 다 살았기 때문에, 늙었기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죽는다.(......)자연사란 없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어떤 일도 결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세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비록 그가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 지라도 그것은 부당한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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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7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8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목이 '제중원'인지라, 내겐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의 설립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그려졌는지가 일차적인 관심사였다. 하지만 사실 이 소설은 제중원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백정출신의 한 남자가 서양근대의학을 익혀 의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에 가까웠다.

 

제중원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나 정도의 '전공자(?)'눈에는 그닥 새로울 게 없는 수준의 피상적인 이야기들 뿐이었다. 흔히 알려져 있듯, 알렌이 갑신정변때 크게 자상을 입은 민영익을 외과수술로 살려내게 되면서 고종의 서양의학에 대한 신뢰가 깊어졌고, 이 일을 계기로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그 이후에 제중원을 거쳐간 원장들에 대한 이야기와 제중원의 번창과 쇠락의 과정 등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가장 궁금한 그들과 전통의학 사이의 '헤게모니' 싸움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미미하다.

 

서양의학은 어떻게 해서 전통의학을 '물리치고' 주도권을 잡게 되었을까? 무엇때문에 이 시기부터 서양의학은 '진리'가 되고, 전통의학은 '찬밥'신세가 되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의학분야만의 문제가 아닌, 근대문명, 서구지식이 조선 사회에 유입되어 뿌리내리는 과정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로 의미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막상 소설에서는 그러한 전통/근대, 조선/서양의 각축의 장이 제대로 형상화되지 못했다.

 

이 소설에서는 서양의술이나 서양인을 두려워하던 무지렁이 조선인 환자들이 '차츰' 그들의 '진심'을 이해하고, 그들이 가진 의학의 힘에 경탄하며 제중원을 찾아오게 된다. 또는 여전히 서양의학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전통적 유교윤리에 속박된 조선인들이 그들에게 받은 치료에서 충격을 받는 모습(심지어 그 치료후 자살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서양의학과 대결(?)하는 존재는 이 소설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조선인 환자'들이다. 그들이 서양의학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로만 소설은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의사-환자의 구도 내에서 환자가 서양의학/전통의학을 선택하는 문제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 같다. 나를 살려준다면, 내 병든 몸을 고쳐준다면, 그때의 선택은 일종의 '절박함'의 문제이고, 그럴 때는 절박함만 강하다면 환자들은 처음의 거부감을 어떻게든 이길 수 있다. 더구나 가난한 환자의 입장에서는 의사가 치료비를 받지 않는다면 더더욱 망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수평적인 것이 아니라 수직적이다.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의사 앞에서 환자는 순종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무리 전통윤리에 젖어 있는 조선인이라도, 환자의 입장에서는 좀더 쉽게 '새로운', '낯선' 이 의학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다른 전통 의학자들은 어떨까? 전통의학의 힘을 믿고 있던 한의원들의 입장에서 갑자기 들어온 이 새로운 지식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또한 서양의학을 배우기로 나선 자들이라도 환자의 입장이 아닌 지식 수용자의 입장에서의 서양의학의 낯선 방식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들에게는 전통/근대 사이에서의 선택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부분을 얼마나 치열하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이 소설 및 드라마는 단순히 소재적 차원에서의 서양의학의 유입과정이나 최초의 서양식 병원의 탄생사가 아닌 '개항', '개화'의 물결 속에 처해 있던 조선 사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러한 부분에 대해선 '괄호'를 치고 만다. 어쩌면 이 경쟁구도 속에서 결국 서양의학이 한의학으로부터 승리를 하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그리는 것이 한의학을 폄하하는 것으로 보일 위험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의학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여주진 않더라도, 서양의학을 배우기 위해 들어온 의학도 내부에서의 갈등이나 망설임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황정이 백정출신으로서 인간의 몸을 째고 꿰매는 일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의학도라면, 성균관 유생출신의 백도양은 서양의학을 배우러 들어왔으나 막상 서양의학의 치료방식이나 교육방식 앞에서 전통적 유교윤리 관념과의 갈등과 번민을 겪는 의학도로 그릴 수 있었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과정에서 차츰 백도양 역시 서양의학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전통/근대의 각축의 장에서 근대적 지식인이 어떻게 만들어져 갔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드라마화되었을때에도, 지금보다 백도양이라는 '안타고니스트'의 역할과 비중도 커지고, 아예 '투톱' 주연식의 드라마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백도양은 아무리 봐도 예전 <허준>의 유도지(유의태의 아들) 캐릭터를 못벗어난 듯 싶다. 백도양이 황정을 뛰어넘을 수 없는 궁극적 이유가 황정에게 있는 휴머니즘을 도양이 갖지 못해서라는 것은 너무 상투적이다. 그저 좋은 배경을 타고났으나 황정에 비해 자질이 부족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유교적 계급사회를 고수하며 이기기 위해서는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는 악역, 조연으로만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매력이 없고, 황정의 '호적수'가 도통 되질 못한다.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막판에 '악역'을 멈추고 황정을 존경하게 되는 계기도 설득력이나 극적인 면이 부족하다.) 그런데 만약 도양이 황정에게 뒤쳐지는 이유가 휴머니즘때문이 아니라 근대적 지식인이 되어가는 과도기에 처한 봉건적 지배계층의 인물로서, 전통적 지식이나 윤리에 대한 완전한 '포기'가 어려워서였다면? 그랬다면 이 소설 및 드라마가 시대의 단면, 전형을 훨씬 흥미롭게 재현해주는 셈이 되었을 것이고, 도양이라는 인물의 설득력과  매력도도 커질 수 있었지 않을까?

 

지금의 소설은 지나치게 황정이라는 특수한 이력의 인물의 영웅화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황정은 백정 출신이었기 때문에 처음 서양의학이 도입될 때 서양의학의 '특장'으로 취급되었던 외과수술에 있어서 천부적 재능을 지닐 수 있는 여건이 미리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 그의 이력은, 서양의학을 받아들이고 뛰어난 의사로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서, 신분상의 제약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큰 '역경'이지만, 의사로서의 자질면에서는 매우 큰 '메리트'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거기다 그는 노력파에 성실하고 온정적인,심지어 독립운동에까지 뛰어드는 인성 면에서의 훌륭함까지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즉, 그는 신분 문제를 제외하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영웅이었다.

 

이러한 점은 이 소설의 약점으로 보인다. 계급사회가 철폐되어가던 중인 개화기라는 시대적 상황상 천민이라는 출신 계급 문제는 그다지 큰 역경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밀도살 문제라거나 아버지 수술 등의 에피소드를 통해 당시에도 여전히 백정 신분은 파리목숨 취급을 받았던 것으로 재현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결국 면천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헤론이라는 제중원 2대원장의 갑작스러운 태도 돌변(그 이전까지의 황정에 대한 반감을 갑자기 철회하고, 그의 면천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이라는 계기도 스토리 흐름상 설득력이 부족하고 갈등해소가 너무 손쉽게 이뤄져 버렸다는 점에서, 역시 신분의 문제는 결정적 역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얘기지만, 나는 오랜 드라마홀릭자이고, 국문학전공자이고, 문학에 나타난 의학이나 여성의 몸 등의 문제를 공부해온 사람이다. 그런 나의 '프로필'상 소설 <제중원>은 안 읽어볼 수 없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을 제목으로 표방하여, 조선땅에의 서양의학의 도입과정을 그리고 있고, 1월에는 드라마로 방영될 예정인데 그 전에 소설로 먼저 출판되었다 한다. 이 소설을 쓴 이기원은 예전에 일본 드라마인 <하얀거탑>을 한국드라마로 각색했던 드라마 작가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니, 문학이라 하기에도, 드라마의 원작으로서도, 의학사적 가치로서도 모두 '미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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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광화문 촬영분이 방영되었다. 호들갑에 비하면 화면은 생각보다 스펙터클하지도 박진감 있지도 않았다.

나는 매일(?) 광화문-삼청동, 또는 광화문-안국동(-재동)을 지나 직장에 다닌다. 그래서 <아이리스> 광화문 촬영이 결코 일개 드라마 촬영을 위한 범상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길에는 실로 많은 함축적인 것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저 기괴한 정치드라마도 광화문에서 클라이막스 씬들을 찍었을 것이다.

  

광화문통은 사람을 늘 조금씩 긴장하게 한다. 그것은 실로 정신건강에 안 좋다. 인간을 ‘정치’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아침의 명상’ 따위는 없다. 효자동ㆍ청운동을 드는 입구가 있고, ‘정부종합청사’가 나오자마자, 이순신과 세종이 지키는 광화문통이 보이고 ‘총독부’라는 별칭으로 불리워 온 미대사관도 있다. 삼청동에는 국무총리 관저가, 재동에는 헌법재판소가 있다.(‘굴욕’의 장소들이다.)

그래서, 늘, ‘전투’경찰과 진짜 ‘요원’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수와 표정은 일종의 풍향계이다. 90%의 인간 위에 군림한, 1%의 지배세력이 오늘은 과연 무슨 ‘일정’을 치르는가, 어떤 ‘통치 정신’으로 이 지배를 연장하는가에 관한.

이명박정권이 들어서고 난 뒤에, 언제나 그 회색 또는 쥐색 옷을 입은 인간들, 그리고 그들을 태운 차들이 도로를 가득 점거하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체증’의 한 주범이며, ‘불법’의 행사자라는 것을 나는 매일 본다.

  그러나 한미 FTA가 입안ㆍ추진되던 어느 날 밤의 광화문-안국동 풍경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노무현은 그날 청와대 안에서, 민중들에 의해, 그리고 스스로, 포위당했었다. 광화문으로 오는 모든 대로는 경찰병력이 점거했고, 반FTA 시위대는 시청 쪽부터 봉쇄당했었다. 물론 청와대 주변의 모든 작은 길도 차단되었다. 그날 밤 늦게까지 우리는 ‘봉쇄’ 당해 갈 데 없어, 안국동 안에서만 뱅뱅 돌며 술 마시다 노무현을 욕했었다. 그렇게 ‘통치’를 수만의 경찰병력으로 보호받던 그 꼴은 2008년 5-6월의 이명박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스스로 고백했듯이 그게 노무현을 죽게 했다.


** 
 

‘촛불’이 만들었던 여러 풍경도 생생하다. 물론 그 하이라이트는 2008년 6월 10일이었다. 그날 아침 일찍 ‘명박산성’이 세워졌다. 광화문을 오가는 사람들은 체증 때문에 화를 내거나, 권력이 비밀리에 준비한 큰 코미디 덕분에 아침부터 크게 웃었다. 오후가 되자 서울 전역에서 광화문으로 소풍 나온 사람들이 너도 나도 명박산성을 즐겼다. 그 앞에서 디카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V자’를 그렸었다. 그리고 그날 밤, 50만명이 모인 광화문과 ‘시민 토성’. 아무일도 없었다.

‘촛불’ 이후, 광화문의 풍경은 많이 바뀌었다. 그것은 물론 오모가 주도한 것이다. 잘 알다시피 광화문 풍경을 망친 가장 최근의 사건은 세종대왕상의 건립과 이른바 ‘광화문 광장’을 조성한 일이다. 나는 ‘국어국문학과’ 출신이지만, 이 금색 세종대왕상이 전혀 존경스럽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외려 그 금색 세종대왕상이야말로 희대의 졸작이며, ‘한글’과 ‘우리말’에 대한 상상력이 얼마나 메마른 것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생각한다. 그 동상의 크기, 색깔, 표정, 자세, 의상 따위는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까? 이 금박 세종대왕상은 분명 '초딩용' 표상이다. 그 상을 부디 영릉이나 다른 데로 옮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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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들은 집회시위의 허가에 관한 ‘형평성’을 주장하지만, <아이리스> 촬영은 광화문에 관한 이 정권의 상상력, 또는 정치적 무의식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아마 그것은 단지 KBS 드라마국이 건의하고 서울시장에 의해 ‘결재’된 것이 아니다. 그 촬영은 '최고 통치 행위'의 일부이자, '국가 안보'의 문화적 전치다.

현상적으로는 간단하다. 그들은 시민과 민중의 ‘정치’를 광화문에서 추방하고자 한다. 대신 장악당한 TV 프레임 안에서, 이병헌-김태희의 사랑놀음 안에서만, 광화문을 이해하라 강요한다.

심리학적으로도 간단하다. 불에 덴 트라우마를 지우고 싶은 것이다. 광화문 가장 깊숙한 곳을 점거한 그들은 아직도 ‘촛불’의 화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쥐’가 아니라 고양이처럼, 계속 제 살을 핥고 또 핥고 있다. 물론 가끔 독이 올라, '인간'을 할퀴면서. 


움직이는 정신, 바뀌는 마음들(changes http://blog.naver.com/heutek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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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대표 김연아
 

우리의 자랑스런 김연아는 며칠 전에 있었던 그랑프리 5차대회에서도 우승을 했다고 한다. 프리에서 엉덩방아를 찧는 실수를 하고서도 당당히 1등.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그동안의 본인의 기록을 갱신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녀를 보며,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흥분한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국가대표'가 있었나? 물론 박찬호, 박세리도 있었고, 추신수, 박지성도 있고, 또래의 신지애, 박태환도 못지 않다. 그 외에도 그동안 종종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들'은 출몰해왔다. 그러나 그들보다 연아의 '국가대표성'은 안정적이며 자랑스럽다. 왜?
 

김연아는 스포츠선수임에도 연예인 못지 않게 예쁘다. 동양적인 눈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작은 얼굴 크기와 길고 가느다란 팔다리라는 서양적 미적 기준도 충족시켜준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통하고, 세계무대에서도 통하는 미모를 가지고 있다. 

 
또한 벌써 대회 7연승이라는 엄청난 기록, 심사점수에 있어서도 끊임없는 기록갱신, 다른 선수들과의 현격한 실력차이 등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이다. 그냥 예쁘기만 한게 아니라 자기 분야에서 정말 1등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녀는 똑똑하게 (한국)말도 잘하고, 특히나 영어도 잘한다. 외국 기자들 앞에서는 당당하게 영어로 듣고 답하고, 한국말로 할 때 역시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성숙함과 자신감 있는 발언으로, 오히려 기자들을 주도하는 느낌까지 준다. 또 가끔 TV에 나왔을 때 보면, 노래, 춤, 표현력...뭐 하나 빠지는 데가 없다. 엔터테이너로서의 소질 역시 빵빵. 그러니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말 그녀는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최고의 '국가대표'이다.

 
 

2. 전 국민의 국가대표화?

그런데...요즘 몇몇 '사건'들을 보면서, 이러한 '대표성'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과도한 강박같은걸 느끼게 된다. 아무나, 아무데나 '국가대표'를 강요한다. 그 첫 사건은 2PM의 재범군 논란이다. 난 '재범군'이라고 말할 만큼, 사실 그의 성(姓)도 모른다. 관심도 없었고. 하지만 그때 그가 했다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는 걸 보며,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다 좋은가? 한국인들은 한국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같은 한국인을 비하하거나 우습게 생각하는 일이 한번도 없나? 아니다. '한국인들은 이래서 안돼'같은 말은, 우리가 거의 습관적으로도 많이 하는 말이다. 그럴정도로 우리 내부에도 우리나라 사람에 대한 비하, 멸시의 감정은 꽤 크다.
 

그런데 한 재미교포 출신 젊은 가수가 한국을 비하했다가, 결국 비난과 욕을 못참고 그룹을 탈퇴, '걔네 나라'로 도망쳐버렸다. 그가 한국 국적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래도 그는 이렇게 욕을 먹었으려나? 뭐...어느정도는 그럴지도. 그러나 재미교포이기 때문에 아마도 더 많은 욕을 먹었을 것이다. 그때 그가 한 말은 일종의 '타자'의 시선이고 목소리로 여겨졌기 때문에. 우리끼리 욕하는 건 괜찮아도, 밖에 사람이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는 우리의 과도한 민족주의가 여기서 발동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우리 엄마, 아빠, 동생, 고모, 삼촌을 욕하는 건 괜찮다. 하지만 친구가 내 가족들을 욕하면 발끈하는 게 '가족주의'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쓴다. 하여간 우리/남으로 선이 그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강박적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재범군의 사건도 그 지점이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노했던 것이다. '우리'인 줄 알았던 그 청년이, 알고보니 '남'이었고, '남'인 주제에 '우리'를 욕한 걸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역시 미디어의 힘이다. 그가 방송에 나오는 '공인(?)'이므로, 그는 더더욱 무언가를 '대표'하는 존재로 취급받는다. 그 '대표성'이 정확히 무언지 모르지만, 하여간 대표이다. 그런 대표가 그런 말을 하는 순간, 그건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고, 보편적인 어떤 말로 취급받는다. 이에 더해 이 사적인 발언이 언론을 통해 공식발언처럼 취급되면서 더더욱 우리는 분개했다.

 
그러나 툭까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뒤에선 '나랏님도 욕하'는 법인데, 걔가, 철부지 한 교포 출신이 그런 말 한번 한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걔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국인 전체가 진짜 한심한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란 나라가 OECD국가에서 강퇴당하는 것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재범이가, 한국에 와서 돈을 벌어 가는 외국인의 대표이고, 그가 공식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대해 비하하는 말을 하기라도 한듯 흥분했다. 
 

 

3. 미수다 '루저' 논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가치판단은 아니다. 재범군이 그런 비난을 받고 탈퇴를 해선 안됐다거나 하는 얘기를 하고 싶진 않다. 관심도 없을 뿐더러, 저런 좀 '과도한' 반응도, 어쨌든 그 반응에 따라 인기도가 좌지우지되는 연예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런 점에서 박진영의 탈퇴 결정은 매우 영리하다. 가장 쉽게 논란을 진화하는 길이 그것이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건들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까지 반응해야 하나...쓸데없는 분노, 흥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정신건강에 좋을 게 없으니까. 
 

그러기 위해 그 이후의 두 사건에 대해서도 말해보려는 것이다. 하나는 <미녀들의 수다>에 나온 미녀 여대생들의 180센티미터 이하의 남성은 루저라는 발언이고, 하나는 <무한도전>이 식객 특집으로 뉴욕에 가서 뉴욕의 길거리 인터뷰를 한 문제이다.
 

먼저 <미수다>의 '루저' 논란도 나는 역시 이상했다. 거기서 발언을 했던 여대생들은 아무런 대표성도 없다. 한국의 모든 여성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여대생, 그녀들처럼 170이 넘는 키의 미녀 여대생들 내부에서도 합의될 리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몇명의 출연자들의 발언 때문에 갑자기 남자들은 자신들이 '루저'가 됐다며 분개한다. 
  

참고 미수다 동영상)  http://blog.naver.com/coolya112/40094866802

그들의 이야기를 찬찬히 보자. 먼저, 키큰 남자가 키 작은 남자보다 좋다? 그건 못생긴 여자보다 예쁜 여자가 좋다거나 뚱뚱한 여자보다 날씬한 여자가 좋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그냥 그런 말이다. 남성들은 그걸 몰랐나?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키 작은 남자들은 그래서 많이들 컴플렉스를 갖고 산다. 못생기거나 뚱뚱한 여성들이 열등감을 갖고 사는 것처럼. 따라서 새로울 것 없는 얘기이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발언한 게 이렇게까지 논란이 되는가? 마치 그런 줄 몰랐다는 듯이. 몰랐다는 '순진한' 포즈를 취하는 남성들이 있다면, 그냥 이 참에 그런 '현실'을 알아두라고, 대체로 여자들은 키 큰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면, 너무 새삼스럽게 과잉반응 하는게 아니냐고 묻고 싶다. 루키즘이 어제오늘 일인가? 외모가 경쟁력이란 거, 살다보면 수시로 뼈저리게 느끼는 사실 아닌가?

 
두번째로 180센티미터 이하는 '루저'라는 발언. 이건 그냥 콧방귀를 뀌고 웃으며 넘어가야 하는 '마구 주어삼킨 말'일 뿐이다. 그 말을 한 여성이 그냥 그렇다는 거다. 그녀의 입장에서나 그렇지, 실제 그럴 리가 있나? 우리나라 남성들 중 180센티미터를 넘는 남성의 비율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180센티미터를 넘기만 하면 그들은 모두 '위너'인가?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할 것이다. 그러니 진리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고, 보편적이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말이다. 그냥 그 말을, 그 여성이 (자의에서건 대본에 의해서건) 한번 해본 말이다. 

 
이 말을 갖고 농담을 할 수는 있다. 새로운 유행어도 될 수 있고, 시시덕거릴 소재거리정도로는 딱이다. 손석희씨가 자신의 라디오프로그램에서 '나도 루저'라고 한 말의 수준이 딱 그거다. 그가 자신이 '루저'라고 열폭했는가? 그냥 이슈가 되었으니, 한번 던져보는 농담같은 소리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다 그 정도 하고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 

 
비슷하게 여성들에겐 '168센티미터에 45킬로그램'이 최고의 완벽한 몸매라는 '환상'이 있어 왔다. 물론 남성들이 만들어 낸 신화이다. 나는 이 점에서도 김연아의 역할이 꽤 중요했다고 생각하는데, 김연아처럼 늘씬하고 마른 편의 몸매도, 경기 시작전에 나오는 체위 설명에서 '164 센티미터에 51킬로그램'이라고 나오는 걸 봤다. 그런 게 진실이다. 160센티미터만 넘어도 40킬로그램대의 몸무게를 갖는 것은 여성들로서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누가 김연아의 몸을 보고 살이 쪘다고 하겠는가? 오히려 너무 마른 편에 가깝다. 
 

그런데도 '168-45'의 신화는, 연예인들의 '거짓' 프로필 속에서 오랫동안 재생산되어 왔고, 이때문에 일반 여성들까지도 그러한 체위가 되지 않으면 항상 '열등'하다는 마음을 품고 살아왔다. 그래서 체중계에 오르는 일은 보기에 너무도 늘씬한 연예인들조차 언제나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일이 되어 왔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45킬로그램의 여성은 많지 않으니까. 그 기준에 따르면 대부분이 '루저'이므로.

 
남성의 180센티미터나 여성의 45킬로그램의 신화는 그냥 사라지면 되는 것이고, 무시하면 되는 것이다. 그게 맞는 길이지, 그런 말을 한 사람을 (한심해 하거나 상대를 안할 순 있어도)사회적으로 매장까지 시킬 이유가 없다. 그 기준에 안맞는 대다수의 '루저'들은 그런 걸 '공표'하는 사람과, 그냥 안 사귀면 된다. 아마 <미수다>도 비슷한 발상이었던 게 아닌가 한다.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녀들이 그런 말을 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연예인 남성들은 모두 '루저'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들의 말을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듣다가 '나도 싫어요'라고 반응했다. 제작진들은 시청자들도 딱 그러고 넘어갈 줄 알았을 거다. TV를 통해 발언을 했으니, 농담용으로 가끔 입에 오르내리며 사용해볼 순 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순식간에 그 말이 공중의 분노를 샀을까? 내가 보기엔, 이 동영상에서 두 가지 정도의 지점이 포착됐는데, 하나는, '설문조사'의 결과를 들먹인 것이다. 설문조사를 어디서 봤는데, '때리는 남자보다 키작은 남자가 더 싫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마치 키 작은 남자에 대한 여성들의 '혐오'감의 수준이 매우 심각하고도 보편적인 것인듯 취급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설문조사는 어디서 한 것인지,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표본오차는 얼마나 되는지, 이 설문의 종속변인은 무엇이었는지 등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한마디로 개인적인 발언 수준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그냥 해본 말'이다. 그런데도 '설문조사'라는 말때문에, 그들의 말은 '대표성'을 갖게 됐다. 
 

더구나 여러 명의 여대생들이 한 말인데, 그 말들이 하나로 엮어지면서 이런 꼴이 됐다.

 "180센티미터가 안되는 '루저'들보다는 차라리 때리는 남자를 만나겠다는 것이 한국의 대부분의 여성들의 생각이다"
 

저렇게 된다면 분개할 만 하다. 저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럴리가 있는가? 굳이 뭔가 증거를 찾으려 하지 않아도 한귀로 듣고 흘릴 수 있는 말도 안되는 말일 뿐이다. 그럼에도 '설문조사'운운과 그 출연진 대다수가 비슷한 논조로 말했다는 이유로 저런 말이었다는 듯이 확대해석되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이게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인데, 그녀들이 마치 한국을 '대표'하고 있는 듯이 여겨질 수 있었던, 프로그램상의 구도 때문이다. <미수다>는 외국인 여성들을 앉혀놓고, 그들이 겪은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컨셉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 프로그램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가, 이번 논란 부분만 살짝 봤다. 그런데 이걸 보면, 외국인 '미녀'들과 미녀 '한국인'들을 대비적인 구도로 만들어 놓고 있다. 저런 발언들을 주어삼킨 여대생들의 맞은 편에 외국여성들이 앉아서, 그녀들의 생각에 쉽게 동의를 못하겠다는 듯 반박을 하거나 고개를 젓는 장면들이 노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랑보다는 조건이 결혼에 더 중요하다는 한국 여대생들의 발언에 대해, 외국 백인 여성이 "그래선 안된다,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는 장면도 보인다. 그러나 사실 결혼에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도 오늘날에 와서는 서구의 근대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낸 '낭만적 사랑'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만큼, 그 백인 여성의 말도 '참'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의 말은 '참'인 것으로, 조건만을 '밝히는' 한국 여대생들은 '속물'로 취급받는 건, 오히려 같은 한국 여성으로서 불쾌했다. 너무 '현실적'이 되어가는 요즘의 세태가 조금은 '향수어린 낭만주의'적 생각에 의해 각박하다고 여겨질 수는 있어도, 그게 꼭 틀린 건가?  계급에 따른 결혼, 그게 더 현명할 수도 있다.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각자의 선택이지.
 

이처럼 <미수다>는 마치 외국여성들이 외국을 대표하고, 출연한 여대생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듯한 대립구도를 '과도하게' 의도적으로 연출하여, 뭔가 '논쟁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그걸로 어떤 '재미', '흥미'를 유발하고자 한 듯 하다. 이 때문에 출연한 여대생들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근거 없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발언이 한국 여대생, 또는 한국의 여성들의 '대표'발언으로 오해된 것이다. 그러나 그게 '대표'가 될 리 있겠나? 당근 없다. 사람들도 그 사실을 금세 깨닫는다. 그러니 어떤 반응을? 그렇다, 그런 말을 한 특정 출연진들에게 '테러'를 감행하는 것이다. "넌 마치 한국 여성들을 대표하는 듯이 나서서 한국 남성들의 대다수를 루저로 만들었어! 네가 뭔데?"라면서. 

 
이러한 이중성때문에 문제들이 심각해지는 것 같다. 대표가 아닌데 대표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분개한 뒤에는 다시 전체가 아닌 특정인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4. <무한도전> 뉴욕편

마지막으로 <무한도전>의 뉴욕편에 대한 과민반응도 비슷한 방식으로 보인다. 모 가수의 형이 했다는 발언때문에 새삼 논란이 되었는데, 세계의 중심이라는 뉴욕에 가서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채 바보짓이나 하고 왔다, 쪽팔린다...는 게 요지이다.

 
그런데, 정말 쪽팔릴 일인가? 뭐가 그렇게 쪽팔린가? 왜 쪽팔린가? 영어를 못하면 안되는가? 물론, 나도 기왕 '목적'이 그곳 사람들의 식생활에 대한 조사를 위한 인터뷰였다면, 적어도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물어볼 말 "당신은 어떤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나요?", "한국 음식에 대해서 아나요?" 정도의 질문에 대해선 미리 연습하고, 딱 두 문장만 달달 외우고 나가는 정도의 컨셉은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게 조사를 나간 목적 달성에 필요하니까. 나머지 말은 콩글리쉬든 바디랭귀지든 못하면 좀 어떤가? 거기에서 유재석팀이 만난 여성들이 한 말이 정답 아닌가? 영어를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유재석과 정준하한테 그녀들이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도 한국말 못하는데요"

 
그런 거지 뭐. 영어 못하면 미국, 뉴욕 가면 안되나? 영어못하면 미국사람한테 말 걸면 안되나? 만약 그들이 미국이 아니라 베트남에 가서 베트남 말을 못해 헤매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때도 똑같이 '쪽팔린다'고 반응했을까? 설마...

 
그런 점에서 그 모 가수의 형의 발언은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다. 물론...자신이 미국에서 살면서 체감한 서양인들의 동양인에 대한 경멸을 의식하면서 방송을 봤기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들이 경멸했을지도 모른다, 바보같은 무한도전 팀 사람들을. 그러나, 그렇다고 그게 무한도전 팀의 잘못인가? 그건 경멸한 그들이 잘못된 거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도 내가 보기엔 과도하게 '국가대표'의 멍에를 씌운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한국의 대표 외교사절단이라도 되나? 그냥 코미디언일 뿐이다. 뉴요커들이 그들을 비웃었건, 실제로 재미있어했건, 그들은 한국에서 안방에 앉아 그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한국에서 찍을 때와 다름없이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들이 영어를 못하고 버벅거렸다고, 한국의 위상이 떨어지나? 그들이 살인이나 강도짓을 한 것도 아닌데?(심지어 한국인이 범죄를 일으켰다고 해도 그걸 가지고 한국인 전체를 싸잡아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도, 그들이 잘못된 거잖나?)

 
 

5. 국가대표 얘기 그만하자.

그러나, 사실 더 문제는, 그 모 가수의 형의 발언 역시 대표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미니홈피에서 그런 말을 한 걸 가지고 언론화하는 것, 그게 더 웃긴 거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미국에서 살았던 한국인의 입장에선 말이다. 그러나 그런만큼 그건 그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특수한 반응일 뿐 모두의 생각은 아닌 것이다. 그거에 다시 무한도전 팬들이 분개하는 것도 불필요한 일이다. 언제나 문제를 키우는 건 대표성이 없는 일을 기사화하고 공론화해서 말도 안되는 대표성을 부과하는 언론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악의 축'이다. 

 
우리끼리, 그 '악의 축'의 놀음에 놀아나선 안된다. 전달이 제대로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거다. 그 악의 축 때문에, 우리가 분개하는 거야 말로 진짜 기분 나빠해야 할 일이 아니냐는 것. 이런 논란을 보고 즉각적으로 화가 날 수도 있겠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아무 일도 아니고, 별 일도 아니고, 아무런 대표성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서,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려주자는 것. 정치판에 대해서만 언론이 우리를 '선동'하고 있는 게 아니다. 언론은 여러모로, 우리를 갖고 놀려 든다. 그들에 휘둘리지 말고 사는 게 우리의 정신건강에 이롭다.

 
또 김연아 얘기를 하자면, 그녀의 매력적인 점 중 또 하나는, 그녀는 '국가대표'로 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응원해주는 한국인들에게 고마워하지만, 국가를 대표하기 위해 뛰지 않는다. 그냥 자기 자신을 위해 뛴다. 한번도 그녀가 과장되게 민족주의적 발언을 내세우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더 좋다. 어쩌다보니 국가대표이고, 같은 나라 사람으로서 그녀가 그렇게 잘해주는 것이 무척 기쁘고 자랑스럽지만, 딱 거기까지만이다. 그녀는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살지 말고, 그냥 김연아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녀가 국가대표라서 좋아하긴 하지만, 그녀에게 국가대표로서만 살라고 해선 안된다.  혹시 그녀가 내일 갑자기 은퇴를 하든, 국적을 바꾸든 말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민족주의가 언제나 나쁘게 작동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덕에 잘된, 효율적인, 아름다운 역사의 장면들도 물론 많이 있다. 나 조차도 대한민국 국가대표들이 승리했을때 벅차오르는 본능적인 마음을 쉽게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진정한 국가대표같은 건 없다. 그리고 없어야 한다. 누가 누구를 대표하는 일이란 얼마나 위험한가?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건 팔할이 파시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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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1-25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두 단락에 특히 공감하고 감탄하고 감동 받았어요. 글 자주 세워주세요!!(>_<)

somun 2009-11-25 19:34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감사합니당~쓰고보니 넘 길어져서 썩 맘에 들진 않는 글인데 끝까지 읽어주셨다니 영광이네요. 네..자주 쓰고싶은데 학기중엔 영 그렇네요...방학하면 자주 세울께욤^____^
 

 최근 적지 않은 수의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시술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모임'(진오비) 회원들로 680여 명의 산부인과 의사가 모였다고 한다. 산부인과 의사(개원의만인지 전체인지는 불분명)가 3000~4000명이라 하니 대다수는 아니어도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이다.  

 숫자도 숫자지만, 분만실을 운영하지 않는 대부분의 산부인과가 불법낙태시술 수입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 비춰볼 때, 이런 '운동' 자체가 매우 충격적인 일임은 분명하다. 정부나 보건 당국에서도 모른 채하며 묵인하고 있는 마당에, 간단하게 큰 돈을 벌 수 있는 마당에, 괜히 나섰다가 산부인과 문을 닫아야 할 판에, 그들이 왜 그랬을까? 쉽게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그래서 우습게도 카톨릭교 배후설이나 정부 배후설(출산율 제고)까지 나오는 모양이다.  

 미리 밝히자면, 나는 낙태 찬성론자이다. 물론 이 선언에는 단순히 찬성론자/반대론자를 따지기에는 좀 복잡하고 모순적인 속내가 있다. 나 자신은 앞으로 결코 낙태를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는 나의 자기선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출산이든 낙태든 그 선택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으로서 보장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다시 말해 내가 하든  하지 않든 무관하게 누군가가 그것을 행할 권리는 보장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낙태가 야매로 또 음성적으로 행해져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보면 낙태 찬성의 입장은 산부인과의 의료기술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여성의 주권 행사를 위해 산부인과의 과잉진료와 폭력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한편, 또한 낙태가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의 행사'라는 원칙을 고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역시 의술과 의료행위에 대한 자기의 주권 행사라는 점에서 결국 일맥상통하다고 보는 것인데, 나는 내 몸의 주인이기 위해 의술을 거부할 권리도 그것을 이용할 권리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산부인과 의사들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들은 이 사회의 암묵적 승인과, 많은 '당사자들'의 요구에 편승해 낙태를 오랫동안 시행해 왔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고 불법이라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어떤 이들이 스스로 나섰다. 병원 입구에 "낙태수술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팻말을 걸고, 진정으로 사활을 건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필사의 선택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정말로 그들(병원)은 망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평균 20건 씩 낙태수술을 해왔다는 의사들의 증언이 나오고, 일 년에 행해지는 낙태 건수가 30만 건이 넘는다는 통계도 제시된 터이다. 

그들의 선언은 그저 '나는 더이상 안(못) 하겠다'라는 자기 죄의식 해결 차원도, 단순한 양심선언도 아니다. 낙태에 대해 공론화시키고 수면 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자는 것이 그들의 취지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낙태찬성론자인 나는 그들의 낙태거부운동에 동의한다. 그들의 '선언'을 단순히 종교적 교리나 '태아살인론(낙태가 살인이라는 입장)'에 입각한 단순한 낙태반대론에 묶어두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오비의 '선언'을 둘러싼 이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낙태가 그르냐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임신과 출산의 전 과정 즉 섹스, 피임, 낙태에 비혼부모 문제까지 모두 포함하여 자기 몸과 자기 행동에 책임과 주체성을 확보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낙태율을 줄이는 문제조차도(그것이 목적이라면) 낙태를 불법화하거나 찬성론을 탄압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저 일군의 산부인과 의사들의 선언에서 내가 읽고자 하는 것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자기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그리고 자기 몸에 대한 주권 행사가 가능한 조건 속에서 낙태에 대한 선택도 출산에 대한 선택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재미있는 것은 낙태가 엄연히 '불법'인 즉 명목상 낙태가 이루어질 수 없는(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현실에서 '낙태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무얼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이름뿐인 명목 법률에 대한 조롱을 포함한다. 이는 이미 한국은 낙태금지국가가 아니며, 합법화만 아닐 뿐 낙태 만연국가라는 점을 공적으로 환기하고 있다. 어찌 보면 불법화해놓고 묵인하고 또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보건당국에 대한 우회적 공격일 수도 있다. 

그러면 계속 불법으로 묶어둘 것인가? 아니면 아예 이참에 낙태를 합법화할 것인가? 이번 일은 쉬쉬해 왔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차라리 합법화하여 의료보험에 적용시키는 것이 더 현실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낙태 시술 비용은 30~50만원이고 의사에게 이 수입은 탈세의 대상이다. (한 해 낙태 건수가 30만건이라고 잡았을 때 30만원씩 치면 총액 9백억원에 이른다.) 낙태가 합법화된다면 오히려 불법이라 몰래 쉬쉬하며 할 때보다, 대놓고 시술하고 대놓고 낙태를 할 확률이 줄어들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합법화되면 훨씬 낙태율이 높아질 거라는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한 역시 근거 없는 반박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임신을 한, 비슷한 조건의 여성들 있다. 낙태와 관련해서 가장 많은 건수를 차지하고 가장 문제가 되는 경우들이 바로 이 케이스일 것이다. 이들 중 누구는 낙태를 선택하고 누구는 출산을 선택한다. 이 두 선택을 똑같이 지지하고 도와줄 수 있는 보장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다. 개인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과는 별개로, 두 선택 모두 열려 있으며 이후 그들의 삶이 불행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하는 임무가 공동체에 있다.  

 의사들의 '낙태 거부 선언'이 환기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낙태 찬반론을 넘어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시작되기를 바란다. 종교적 이유로, 또는 태아도 사람이라는 논리로 접근하는 이상론은 여기서 도움이 안된다. 앞에서 말했듯 나는 낙태를 안 할 것이며, 태아가 사람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입장은 현재의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논의는 낙태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만연해 있는 지금의 현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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