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토리노

 

늙어서 무용하고 의미 없는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는 주로 남성들이 가진 것이라 한다. 그들은 ‘고독한 영웅’으로 죽기를 바란다. 조한혜정ㆍ우에노 치즈코의 <경계에서 말한다>에서는 이를 ‘노년의 삶 자체’ 또는 ‘여성’의 입장에서 비판하며, 벽에 X칠하며 사는 것도 ‘다른 인생’이며 가치로운 것이라 말했다.(그런데 한 정신과 의사에게 물으니 치매에 걸려 의식이 퇴화된 노인 스스로가 행복한지 어떤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한다.)

 

노년의 삶을 다르게 긍정하는 이런 여성학자들의 관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남성들의 그같은 바람도 결코 비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고독한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잘’, ‘폐 끼치지 않고’, ‘의미있게’, 그리고 ‘확’ 죽는 것 말이다. <그랜토리노>가 바로 이런 문제를 다룬 영화였다.

 

(<밀리언달러베이비>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랜토리노>도 인생의 궁극점들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용서받지 못한 자> 이래로 죽 이어진) ‘죄의식+구원’에 관한 테마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구원은 어디까지나 ‘자기 구원’이다. 그래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의미가 있다. 구원은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거나 기도 몇 마디가 아니라, 투쟁하고 수행해야 이뤄진다. 그래서 불교는 기독교보다 우월하다.

 

<밀리언달러베이비>에서도 그랬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이 특별한 노인은 제대로 늙고 죽기 위한 몇 가지 근본적 방법론을 사유하고 있다. 노인은 수행하고 있는 인간이자, ‘먼저 살아낸 인간’으로서, 젊은이들이 처한 고난에 진심으로 연민을 느낀다. 그런데 노인은 자기가 살아온 세상 자체가 여전히 비참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음을 절감한다. 그곳은 젊고 맑은 영혼이 살기에 적절하지 않다. 그리고 노인은 무력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노인은 제대로 된 그 연민을 진정한 자기 구원의 한 방편으로 삼는다. 그때 구원은 깊은 자기성찰로부터 뿐 아니라, 과감한 연대의 실천행동에 있는 것이다...

 

<밀리언...>에서처럼 외롭게 사라지지 않고 <그랜토리노>의 영감님은 너무 멋있게 죽는다. 그래서 외려 지나치다는 느낌까지 준다. 하지만, 노인들이 이런 희생과 영웅의 길을 택한다 하면 세상은 다른 곳이 되지 않을 수 없다.(갑자기 강우규의 죽음이 떠오른다.) 경험적으로 관찰해봤을 때, 대부분의 한국 노인은 지혜, 신중, 관용 같은 가치의 담지자가 아니라, 퇴행, 고집, 꼴통, 우익, 신자유주의, 이명박, 특권, 소통불가, 비겁 같은 것들의 수호자들이었다.

 

***

 

그런데, 실제로 아무 쓸 데 없는 늙다리가 되는 일 자체가 주로 남성에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권위적이고 지위가 높아서, 사회적ㆍ사적으로 ‘강한 남성’이었을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다. 제 밥 한끼 스스로 차려 먹을 줄 모르는 그들은 잃어버린 권력과 권위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시대착오’를 범하면서도 절대 성찰하지 않는다.(늙으면 반성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은, 전두엽이 점점 화학적ㆍ물리적으로 굳어서 생기는, ‘세포 수준’의 일이라고 한 의사는 말하기도 했다. 즉, 반성할 줄 모르는 그것이 바로 ‘늙음’이라는 것.) 이럴 때 노인이란 사회의 암종 비슷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노인이 되었다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정말 궁극의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자랑스러운 연세인’ 서정갑 대령은 좋은 사례를 제시한다. 기사를 보니, ‘60년대 학번들’이 그를 ‘자랑스런 연세인’으로 뽑았다 한다. 여기저기서 뒷방 차지가 돼 가고 있는 ‘60년대 학번들’의 딱딱해져가는 뇌세포가 걱정된다. 그리고 기회가 있다면, ‘자랑스런 XX인’ 같은 상 자체를 폐기하는 데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다. 

움직이는 정신, 바뀌는 마음들(changes http://blog.naver.com/heutek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 명에 못 죽은 20대 여성들"

 

1/ 경찰청 통계 자료에 의하면 2008년 자살자의 수는 전년에 비해 1,000명 이상 줄어 2000년대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 2005년 이후 경제 불안으로 꾸준히 늘어났던 30~40대와 60대 이상 노년층 자살이 줄어든 덕분”이라 한다.(<제 명에 못 죽은 20대 여성들>, <한겨레> 2009.08.21) 자살과 ‘경기’의 원론적, 통계학적 연관성을 생각할 때, 이는 2008년에 경기가 좋아지거나, 양극화가 완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알다시피 2008년 하반기에 소위 ‘글로벌 경제 위기’가 닥쳐와서 ‘거품’이 여기저기 꺼졌고, 자살의 그야말로 ‘직접’ 원인이 되는 ‘부도’와 ‘해고’가 늘었기 때문이다. 또한 ‘양극화’가 완화되었다는 증거를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우며 정부의 경제 정책은 이와 반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진실, 안재환 자살 사건 등으로 작년에 '자살'은 또 한번 한국사회를 보여주는 키워드가 되었다.

 

따라서 2008년에 자살이 준 것이 사실이라면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실제로는 ‘글로벌 경제 위기’가 한국사회의 하층에까지 미친 영향이 작았다는 것? 아니면 하반기에 주로 경제위기의 효과가 늦게 도달하여, 그 영향이 아직 2008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2009년 상반기에 자살률은 다시 급등할 것인가? 또는 노인복지가 확충되었다는 것?



 

2/ 지난 금요일 <한겨레>와 금주 월요일(8.24) MBC ‘오늘 아침’이라는 프로그램은 20대 여성 자살 문제를 다뤘다. 최근 한국의 20대 여성 자살률이 전체 성별ㆍ연령별 인구에서 가장 빨리 증가하고 있고, 20대는 “‘자살자’ 수가 남성보다 많은 유일한 세대”라는 것.(아래 <한겨레>기사 참조) ‘통계 미비’까지를 고려하면, 20대 여성 자살은 훨씬 실제 수가 많을 것이라는 점. 원래 10-20대 여성은 ‘자살 충동’을 가장 많이 느끼는 층이지만 실제 자살 행위나 자살 ‘성공’으로 이어지는 비율은 매우 낮으나, 이런 일반적 경향이 깨져 있다는 것.

 

<한겨레>의 해당 기사는 현재 20대 여성이 겪는 사회경제적 고난에 대해 잘 말하고 있다.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 계층이 자살 확률이 낮다는 말도 주목할만하다. 전체 논지에 대부분 동의 가능하다. 그러나 “20대 여성의 경우 인생에서 가장 감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 시기이고, 일신상 겪게 되는 굵직한 변화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때여서 우울감 때문에 자살이 많은 것으로 짐작하기 쉽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자살은 심리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반영하는 지표라고 말한다. 20대 여성이 가장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자살을 많이 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이 ‘전문가’는 누군지 몰라도 이런 논지는 자살에 대한 경제환원론이라 할만하다.

 

첫째, 자살이 사회적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반영하는 지표라는 것은 맞지만, 자살은 개인에게 부과된 심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심리적, 기질적, 사회적 요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자살은 일어난다. 물론 각 요인의 작용 범위와 힘은 서로 다르다.

 

둘째, 여성의 ‘자아’가 처하는 고난도 단지 취업과 경제적 문제만을 아닐 것이다. 한국의 이성애와 ‘젠더’ 상황, 여성 내부의 경쟁, ‘가족’과 ‘결혼’이 처한 여러 형태의 과도기적 양상 속에서, 그들의 자아는 ‘우울’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관계’들 속에서 20대 여성의 자아를 ‘지지(支持)’해주는 힘이 지극히 약화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겠다. 자살은 지지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막연하거나 구체적인 자살 충동을 느낄 때, 혹은 자살행동의 심리적 원인이 되는 ‘고립감’에 휩싸여 있을 때, 그것을 제어하고 ‘위로’해줄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셋째, 위 기사에는 20대 여성이 ‘가장 사회적 약자’라는 말도 나온다. 이전에 여성학자 정희진이 ‘젊고 예쁘면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살은 분명 사회적 약자가 더 많이 하는 것이지만, 20대 여성은 왜 ‘사회적 약자’가 되나?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 때문에, 그리고 이들을 속박하는 ‘도덕’ 때문에, 그들이 가진 젊음과 건강 같은 자원에도 불구하고 약자가 되는 것일 테다. 이를테면 ‘지방 거주-하층-60대-남성’이 엄청나게 많이 자살한다. 이들이야말로 사회적 약자로서의 면모를 다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이런 60대 노인 남자와 20대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 존재하는 양상은 크게 다른 것일 테다. 한편으로는 20대 여성이야말로 가장 열심히 자아를 돌보고 가꾸고 관리하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기 ‘계발’ ‘관리’ ‘돌봄’의 실패와 자살의 문제가 함께 읽혀야 하겠다. (이후 계속) 

작성 : JH.C

움직이는 정신, 바뀌는 마음들(changes http://blog.naver.com/heutekom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년 2009-08-27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살감소는, 위에 언급된 것 외에 이런 이유를 상정해 볼수도 있잖을까 합니다. "외부적 불행과 자살과는 비교적 무관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저개발 국가보다도 부유한 산업국가의 자살률이 더 높으며,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쾌적하고 전문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안락한 중류계층의 사람들의 자살 수치가 더 높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의 경우엔 자살수치가 보통 이상으로 낮았다."(알프레드 알바레즈, <자살의 연구>, 138쪽)그런점에서 우리가 더 살기 어려워지면서, 그 총체적 위기의식이 오히려 자살률을 감소시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이 책에서도 20대 청춘남녀의 자살의 비율은 낮다고 되어있는데, 20대여성의 자살률이 가장 높다는 걸 보면, 참...자살의 원칙이나 논리는 쉽게 파악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08-30 10:0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자살'의 서로 다른 계층별, 국가별, 젠더별 원인을 파악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헌데 저는 대체로 알바레즈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개발 국가보다 .. 부유한 산업국가"를 비교할 경우 알바레즈의 말은 부분적으로(만) 성립할 수 있으나, "가난한 사람들보다 쾌적하고 전문적인 직업..."은 거의 인정하기 어렵습니다.(더구나 나치 수용소를 거론한 것은 좀 무책임한 논지 같습니다.) 현재 한국과 같은 한 국가 내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사회들의 문화적 차이를 고려해야겠지만, 경기 변동과 자살률의 관계는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아주 잘 적용되고 있다고 보입니다.

기인 2009-08-27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자살'에 저도 관심이 아주 많이 생기고 있고, 사실 이번 학기 제 주된 테마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자살'관련 중요한 책들을 리스트로 한번 정리해주시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저는 개화기 소설부터 시작하여, 왜 이리 한국문학사에 '자살'이 빈번히 등장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일본문학의 '자살'예찬 모방이라는 식 외에, 문학적 장치 내부의 의미, 사회적 의미 등등을 따져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ㅎㅎ

통계의 차이 2009-09-06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래 경찰청이랑 통계청의 자살에 대한 통계발표가 좀 다르다고 하는군요. 그 이유에 대한 분석도 오늘자 한겨레에 나왔네요.<엇갈린 자살통계, 왜?>라고..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375264.html 이 주소로 가시거나 '통계의 차이'라고 적힌 이름란을 클릭하면 볼수 있습니다.
 

프랑소와 오종의 영화 <이제는 떠날 시간>(영어 제목 Time to Leave, 원제 Le Temps Qui Reste, 2005)>에서 폐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는 청년은 게이이다. 그는 ‘시한부로 생을 마치기’의 한 방법을 보여준다. 그는 연인과 가족들에게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조용히 혼자 죽는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난 뒤에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에 관한 영화와 담론이 많이 나오고 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첫째, ‘악성 신생물’(‘암’의 보건학적 공식 용어)로 의한 죽음이 현대인의 사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떠올랐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렇다.

 

둘째, 암은 셀 수 없이 그 종류가 많고 양상도 다양하여, 환자가 어린에부터 80대 노인까지 고루 퍼져 있다. 젊은 사람이 (한국에서 전체 사인 2-3위를 차지하는) 뇌졸중ㆍ심근경색 같은 병으론 잘 죽진 않지만, 암으로는 죽는다. 멀지 않은 사이의 젊은 사람이 위암이나 혈액종양, 뇌종양 등에 걸려 죽었다는 부음이 가끔 들려온다.

 

셋째, 그래서 수잔 손택의 말대로 암은 20세기 후반 이래 가장 강력한 ‘은유’를 지닌 ‘질병’으로서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몇 가지 종류의 암은 많은 완치 사례를 낳고 있지만, 암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하고 ‘치명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거느리고 있다. 그래서 암은 당분간 ‘은유’ 왕의 자리를 다른 병에게 양도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오늘날 이 ‘악성신생물’에 의해 죽어가는 주체의 몸과 그것을 다루는 현대의학 사이의 투쟁(?)이 (1) 현대 의사(醫事, 醫療) 문화 뿐 아니라, (2) ‘죽음 문화’의 핵심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글에서 주목할 점도 이것이다. 암에 걸리면 어떻게 되는가? 어떤 치유 또는 죽음의 과정을 밟는가? ‘수술 - 키모 - 모르핀’ 등으로 구성된 지배적인 서양의학의 매뉴얼화된 방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를 다 믿을 수 없다. 이 과정을 밟는다 해서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보장'은 물론 없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이 과정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대체의학이나 보존치료를 과감히 택할 수도 있고, 돈 있는 사람이라면 수술 및 키모 등의 항암 요법에 대체의학이나 보존치료를 병행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 선택의 폭이 넓은 것은 아니다. 또 '초기'가 아니라면 정답에 가까운 치료법이 있다고도 할 수 없다. 즉, ‘이미 늦었다. 수술이 안 된다’는 경우일 때 문제가 진정으로 시작된다.



암에 걸리면 온갖 기발ㆍ기상천외한 치료법들과 대안들이 주변사람들의 소개로 쏟아진다. 그것들이 가진 엄청난 규모의 생과 육신에 대한 패러다임들 앞에서 우리는 고뇌ㆍ방황하게 된다. ‘내 인생’이 거기 걸리고, 내 몸이 모르모트나 마루타가 된다. 그때, 실로 한국사회의 ‘생-문화’의 최종적 심급과 우리의 인생관 전체가 맞물리게 된다.

 

가족들은 전문의학서적을 사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병원을 알아보고 명의를 수소문한다. 그러나 정보의 가치를 판단할 능력은 약해진다.  정보는 엄청나게 많아지지만, 귀가 한없이 얇아진다.(가족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히 한국에서는 양의와 한의가 둘로 갈라져 싸우고 있고, 양자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근거한 서로 다른 처방이 강하게 대립하고 있다. 양자는 실로 패러다임 전쟁이라 할만한 깊은 인식 차이를 드러내는데, 현실의 담론에서는 서로를 사기꾼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환자와 그 가족은 더욱 힘겹다. 돈도 많이 써야 한다.


(소개되는 치료법ㆍ대안 중에는 전혀 신뢰할 수 없거나 심지어 사기성이 농후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암을 이용해서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떼돈을 버는 의사들도 있다. 주로 '한의'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나는 서울 종로구 Y한의원에 대해 약간의 원한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 한의원에 가서 내가 제일 먼저 들었던 말은 '우리 병원은 카드가 안 됩니다'란 것이었다.  물론 약도 효과가 없었다. '산삼침' 요법을 한다는 강남 모 한의원도 국세청이 탈루ㆍ탈세 조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암 환자 자신은 어떨까?

최악의 경우는 암환자 자신이 제 죽을 병을 모르는 경우이다. 아리에스가 <죽음 앞의 인간>의 결론 부분에서 역설했고,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든 인문학ㆍ종교학자가 그렇게 되뇌듯, 오늘날 죽음은 일상적 삶에서 추방해야 할 악ㆍ무례ㆍ비정상으로 간주된다. 그래서인가? 죽음은 은폐된다.

 

암 환자는 제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멍청한 상태에 있으면서, 점점 쇠약해진다. 그래서 자라난 암세포가 이성을 잃게 할 만큼 커져서 자기 생을 정리해야 하는 스스로의 의무(맞나?)를 수행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무방비 상태로 있는다.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의사나 가족이 맡아야 할 일인데, 가족은 대부분 마음이 약하거나 아파서 그렇다치고...(물론 그 책임을 면제시키는 것은 아니다.) 의사는.. 의사는.. 뭔가? 이 사람들은? 의사는 가족의 일이라 미루는 건가?

(일부 못된 '한의'가 암을 이용해 탈세를 자행하며 돈벌이에 급급하다면, 몇몇 ‘양의’는 암 앞에 그리고 암에 걸린 환자 앞에서 한 마디로 무기력하고 무지하다. 그들 중 일부는 병증에 대해서 잘 알지 모르나 (인간 몸에 닥치는 위기의 총체로서의) ‘병’과 인간에 대해서는 참으로 무지한 게 아닌가? 나는 지금도 서울 S병원 S과 과장을 비롯한 의사들이 의사로서 한심한 2류라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말기 암환자와의 소통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듯하다.)

 

또는 암에 관한 현대의학의 메커니즘 자체가 그러할지 모른다. ‘수술이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그 순간, 지배적 현대의학은 암에 대해 무기력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치료법은 우리 생의 적일 수도 있다. (예컨대 <일요일 일요일 밤에> 8월 9일 방영분을 보라. 왜 말기암에 걸린 환자 중에, 전혀 의학에 무지한 자가, 혼자 ‘치유법’을 찾아 ‘자연’으로 떠나겠는가? 그리고 가끔 기적(?)을 만들기도 하겠는가?


(그런데 ‘수술이 안 되는’ 상태의 가난한 환자들은 어떻게 죽어가는가? 보험을 들어놓지 못했거나 다 썼다면? 그냥 6인실에서 고통 받다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내 병을 안다면 어떻게 할까? 객관적으로(물론 이는 양의가 ‘확률’로 판단해준다.) 몇 개월 안 남았다면? (다 열거하기에는 너무 손가락이 아프고)


‘시골의사’ 박경철 씨의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외과전문의인 그는 작년에 췌장에서 자란 지방덩어리를 말기 췌장암으로 스스로 오진하고 생애를 정리(?)할 계획을 세웠다 한다. 그의 계획이란 가족을 비롯한 가장 가까운 타인 아무에게도 자기 병을 알리지 않고, 당장 해 줘야 하는 원고 마감 따위의 일을 해주고 난 뒤에는 어디론가 휙 사라져서 몰래(?) 죽는 것. 

 

러니까 <타임 투 리브>와 비슷한 방식이고, 이해가 된다. <타임 투 리브>의 게이 청년도 애인과 부모ㆍ동생한테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물론 몇 가지 ‘감정’ 정리는 한다.) 하지만, 할머니한테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불임부부와의 ‘3SOME'을 통해서 제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고 난 뒤에 바닷가의 석양을 보면서 죽어간다. 그가 게이란 것은 이런 저런 일련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를 생각해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게이는 특별한 인간이 아니니까.

 

왜 그들은 자기 병을 알리지 않았을까? 타인들이 질 마음의 짐 때문에? 죽음을 은폐하는 문화에 감염됐기 때문에? 다가오는 죽음이 나를 뭔가 우울증 상태와 같은 데로 빠뜨리기 때문에?

 

**

 

일단 오늘 이야기의 결론을 내려보자; 내가 ‘말기 암’ 환자라면ㅡ 이를테면, 내일 갑자기 길을 가다 쓰러진 후 병원에서, ‘폐암 4기입니다’ ‘췌장암 말기입니다’라든가, '급성 백혈병(혈액암)입니다.' ‘앞으로 길면 9개월, 짧으면 3개월 밖에 못 사십니다’는 따위의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를 여러 번 생각해봤으나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물론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죽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심지어 위법(제기랄)일 수도 있고, 암 환자에게는 (빌어먹을) 내 의지대로 되지 않을 국면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나는 가족 때문에, 또는 친구 때문에, 그리고 정신과 육체가 약해져 판단력이 흐릿해질 나 자신 때문에... 받아야할 치료를 못(안) 받거나, 전혀 쓸데없는 치료를 받을 가능성도 높다, 아마도.



그래도 어떤 길을 명확히 선택하고 잘 정리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또한 그런 선고를 받는 순간, 새로운 의미를 지닌 삶이 새로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공포와 상실감,  그리고 고통이 엄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는 연습이 필요하다.


의사들의 통계학이 선언해주는 ‘3개월’, '6개월'이라는 시간은, 죽어 가기에는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시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랑소와 오종 영화의 프랑스어 원제도 '떠날 시간'이 아니라 '남은 시간'이다. 




작성 : JH.C

움직이는 정신, 바뀌는 마음들(changes http://blog.naver.com/heutek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번째 책을 낸 2005년 한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낯선 여성에게서 전화가 왔다. 책을 재밌게 읽었고, 궁금한 것이 많고, 그래서 만나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고 교육사에 관한 논문을 쓰려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 만났을 때, 내 첫인상은 무뚝뚝하고 불친절했다 한다. 햇볕이 뜨거운 여름 낮이었고 썬글라스도 끼고 있었다. 전화 목소리도 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그런 거 아닌가?  


그녀는 책에 꽤 많은 포스트잇을 붙여와서 는 여러가지 질문을 했다. ... 이 자료는 어디서 볼 수 있나요? 이건 무슨 뜻인가요?... 초면에 만난 낯선 사람에게, 전철역 바로 옆에 있는 소란스런 커피숍이었지만, 실로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녀는 당돌하고 날씬한 미인이었다. 
 

 

어떤 상황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두 번째 만남을 갖게 됐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곧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됐다. 중학생 때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갔었고, 두 아이의 엄마였다. 장학금 덕에 가족들과 한국에 왔다 한다.    


좋은 인생이었다. 곱게 자란 똑똑한 여성, 똑 부러지는 언행과 ‘경우 바름’을 고루 갖춘. 그늘이나 찌든 콤플렉스 같은 게 잘 눈에 띄지 않는. 또래들과 영어 공부 팀을 하기로 하여 그녀의 집에 몇 번 갔을 때 외려, 보여준 ‘아줌마다운’ 친절과 따뜻함은 낯설 정도였다. 영어 아니라도 주고받을 이야기는 많았다. 연구 주제와 우리 20대의 날들에 대해서.  


그러던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녀가 왜 그런 ‘고백’을 하게 됐는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아마 그 모임을 이제 접어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또 우리가 짐작하지 못할 절실한 몸과 마음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4세였던 그녀가 제 눈을 적셔가며 말하기를, 나는 희귀암 환자이며 몇 개월째 ‘키모’를 받고 있다, 그래서 사실 힘들다...  


그냥 말문이 막히지만은 않았다.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고 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두 번째 책도 어머니가 가시고 난 뒤에, 경험한 상실감 공허감 덕분에 외려 빨리 씌어진 책이었었다.  


또한, 울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강해보였기 때문이었겠다. 두어 번인가 함께 죽음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녀는 말하기를, 내가 이런 삶을 계속 사는 게 옳은 일인지 판단이 안 선다고 했다.  


벌써 그녀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을 것이다. 죽음을 체험한다는 것은, 연속되는 삶의 가치들을 완전히 상대화할 계기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성찰을 다루는 방법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일상의 권력은 대단히 크다. 죽음을 선고받는다, 죽음이 눈앞에 있다, 그 언어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해도, 그것을 우리는 몸으로 수행할 수가 없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였던 그 생이 다 달라 보였다. 귀여운 두 아이와 좋은 남편, 그외 세속의 모든 것. 무엇보다 당당한 마음씨와 말씨. 그 스스로도 당혹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결정적인, 예상 밖의 위기가 갑자기 삶을 덮치며 끝장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 생이란 무엇인가, 생은 평등한 것인가?  

 


그 겨울에 그녀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 사이에는 연락이 아예 끊어졌다. 혹 잘못 되지는 않았는가... 전화가 닿지 않을 때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러 개월이 지난 뒤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수술이 잘 됐다는 것이다. 많이 여위어 있었고 빠진 머리를 감추느라 모자를 썼다. 창백했으나 여전히 아름다웠다.

 

짧게 친해졌던 사람들과 함께 환송모임을 하고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잊고 지냈다. 그러다 어느 역사학 연구자가 LA에 갔다가 그녀를 만난 소식을 전했다. 그녀가 당신 이야기를 하더라고. 반가운 마음에 이메일을 썼다. 2008년 3월이었다.  


곧 답장이 왔다. 이번에는 말문이 막혔다. 건강이 회복되어 잘 살아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전혀 그게 아니었다. “의욕상실”이며 “수술을 3개월 전에 다시 받았는데 또 해야 된다”고 했다. 세상의 의욕을 꿈꾸지만 제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했다. 뭐라 위로해야 될지 몰랐다. 답장을 못 쓸 것 같았다. 그녀는 약해져 있었다. 그녀는 건강한 다른 사람들이 부럽다면서도 이메일 말미에 이렇게 썼다.  



“저도 나중에 이런 일들을 돌아보고 웃을 날이 있겠지요? 건강하세요.”

** 

  

 

며칠 전 어느 후배가 전했다. ‘그녀가 미국에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고, 벌써 작년 가을이었다고.    


삽십대인 그녀가 어떻게 그 육신과 육친을 두고 떠났는지 전혀 모른다. 그래서 ‘명복을 빈다’는 따위의 말을 감히 하지 못한다. 죽음은 평등한가? 아닌가?  

 

 

먼 타인이라도 ‘요절’은 사람을 황망에 빠뜨린다. ‘나중에 돌아보고 웃을 날’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중’이 오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절도 연속만큼 깊고 강하다. 결국 둘 다 강하다. 둘 사이에서 어찌할지 여전히 잘 모른다는 것. 그럼에도, 운명은 있다는 것.  


                     작성 : JH.C

움직이는 정신, 바뀌는 마음들(changes http://blog.naver.com/heutekom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훈짱녜 2009-08-22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그분이 가셨군요.. 몇년 전 우연히 단 한번 뵜을 뿐이지만 참 인상깊었던 그분.. 글에 쓰셨듯이 참 미인이셨고, 많은 걸 가진 듯 보였으며, 무척 활달 당당해 보였던.. 보이는 것이 결코 전부가 아님을 새삼 느끼게 되네요. 저로서는 감히 명복을 빈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이 떠오르질 않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