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소와 오종의 영화 <이제는 떠날 시간>(영어 제목 Time to Leave, 원제 Le Temps Qui Reste, 2005)>에서 폐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는 청년은 게이이다. 그는 ‘시한부로 생을 마치기’의 한 방법을 보여준다. 그는 연인과 가족들에게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조용히 혼자 죽는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난 뒤에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에 관한 영화와 담론이 많이 나오고 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첫째, ‘악성 신생물’(‘암’의 보건학적 공식 용어)로 의한 죽음이 현대인의 사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떠올랐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렇다.
둘째, 암은 셀 수 없이 그 종류가 많고 양상도 다양하여, 환자가 어린에부터 80대 노인까지 고루 퍼져 있다. 젊은 사람이 (한국에서 전체 사인 2-3위를 차지하는) 뇌졸중ㆍ심근경색 같은 병으론 잘 죽진 않지만, 암으로는 죽는다. 멀지 않은 사이의 젊은 사람이 위암이나 혈액종양, 뇌종양 등에 걸려 죽었다는 부음이 가끔 들려온다.
셋째, 그래서 수잔 손택의 말대로 암은 20세기 후반 이래 가장 강력한 ‘은유’를 지닌 ‘질병’으로서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몇 가지 종류의 암은 많은 완치 사례를 낳고 있지만, 암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하고 ‘치명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거느리고 있다. 그래서 암은 당분간 ‘은유’ 왕의 자리를 다른 병에게 양도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오늘날 이 ‘악성신생물’에 의해 죽어가는 주체의 몸과 그것을 다루는 현대의학 사이의 투쟁(?)이 (1) 현대 의사(醫事, 醫療) 문화 뿐 아니라, (2) ‘죽음 문화’의 핵심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글에서 주목할 점도 이것이다. 암에 걸리면 어떻게 되는가? 어떤 치유 또는 죽음의 과정을 밟는가? ‘수술 - 키모 - 모르핀’ 등으로 구성된 지배적인 서양의학의 매뉴얼화된 방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를 다 믿을 수 없다. 이 과정을 밟는다 해서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보장'은 물론 없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이 과정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대체의학이나 보존치료를 과감히 택할 수도 있고, 돈 있는 사람이라면 수술 및 키모 등의 항암 요법에 대체의학이나 보존치료를 병행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 선택의 폭이 넓은 것은 아니다. 또 '초기'가 아니라면 정답에 가까운 치료법이 있다고도 할 수 없다. 즉, ‘이미 늦었다. 수술이 안 된다’는 경우일 때 문제가 진정으로 시작된다.
암에 걸리면 온갖 기발ㆍ기상천외한 치료법들과 대안들이 주변사람들의 소개로 쏟아진다. 그것들이 가진 엄청난 규모의 생과 육신에 대한 패러다임들 앞에서 우리는 고뇌ㆍ방황하게 된다. ‘내 인생’이 거기 걸리고, 내 몸이 모르모트나 마루타가 된다. 그때, 실로 한국사회의 ‘생-문화’의 최종적 심급과 우리의 인생관 전체가 맞물리게 된다.
가족들은 전문의학서적을 사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병원을 알아보고 명의를 수소문한다. 그러나 정보의 가치를 판단할 능력은 약해진다. 정보는 엄청나게 많아지지만, 귀가 한없이 얇아진다.(가족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특히 한국에서는 양의와 한의가 둘로 갈라져 싸우고 있고, 양자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근거한 서로 다른 처방이 강하게 대립하고 있다. 양자는 실로 패러다임 전쟁이라 할만한 깊은 인식 차이를 드러내는데, 현실의 담론에서는 서로를 사기꾼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환자와 그 가족은 더욱 힘겹다. 돈도 많이 써야 한다.
(소개되는 치료법ㆍ대안 중에는 전혀 신뢰할 수 없거나 심지어 사기성이 농후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암을 이용해서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떼돈을 버는 의사들도 있다. 주로 '한의'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나는 서울 종로구 Y한의원에 대해 약간의 원한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 한의원에 가서 내가 제일 먼저 들었던 말은 '우리 병원은 카드가 안 됩니다'란 것이었다. 물론 약도 효과가 없었다. '산삼침' 요법을 한다는 강남 모 한의원도 국세청이 탈루ㆍ탈세 조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암 환자 자신은 어떨까?
최악의 경우는 암환자 자신이 제 죽을 병을 모르는 경우이다. 아리에스가 <죽음 앞의 인간>의 결론 부분에서 역설했고,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든 인문학ㆍ종교학자가 그렇게 되뇌듯, 오늘날 죽음은 일상적 삶에서 추방해야 할 악ㆍ무례ㆍ비정상으로 간주된다. 그래서인가? 죽음은 은폐된다.
암 환자는 제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멍청한 상태에 있으면서, 점점 쇠약해진다. 그래서 자라난 암세포가 이성을 잃게 할 만큼 커져서 자기 생을 정리해야 하는 스스로의 의무(맞나?)를 수행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무방비 상태로 있는다.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의사나 가족이 맡아야 할 일인데, 가족은 대부분 마음이 약하거나 아파서 그렇다치고...(물론 그 책임을 면제시키는 것은 아니다.) 의사는.. 의사는.. 뭔가? 이 사람들은? 의사는 가족의 일이라 미루는 건가?
(일부 못된 '한의'가 암을 이용해 탈세를 자행하며 돈벌이에 급급하다면, 몇몇 ‘양의’는 암 앞에 그리고 암에 걸린 환자 앞에서 한 마디로 무기력하고 무지하다. 그들 중 일부는 병증에 대해서 잘 알지 모르나 (인간 몸에 닥치는 위기의 총체로서의) ‘병’과 인간에 대해서는 참으로 무지한 게 아닌가? 나는 지금도 서울 S병원 S과 과장을 비롯한 의사들이 의사로서 한심한 2류라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말기 암환자와의 소통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듯하다.)
또는 암에 관한 현대의학의 메커니즘 자체가 그러할지 모른다. ‘수술이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그 순간, 지배적 현대의학은 암에 대해 무기력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치료법은 우리 생의 적일 수도 있다. (예컨대 <일요일 일요일 밤에> 8월 9일 방영분을 보라. 왜 말기암에 걸린 환자 중에, 전혀 의학에 무지한 자가, 혼자 ‘치유법’을 찾아 ‘자연’으로 떠나겠는가? 그리고 가끔 기적(?)을 만들기도 하겠는가?
(그런데 ‘수술이 안 되는’ 상태의 가난한 환자들은 어떻게 죽어가는가? 보험을 들어놓지 못했거나 다 썼다면? 그냥 6인실에서 고통 받다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내 병을 안다면 어떻게 할까? 객관적으로(물론 이는 양의가 ‘확률’로 판단해준다.) 몇 개월 안 남았다면? (다 열거하기에는 너무 손가락이 아프고)
‘시골의사’ 박경철 씨의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외과전문의인 그는 작년에 췌장에서 자란 지방덩어리를 말기 췌장암으로 스스로 오진하고 생애를 정리(?)할 계획을 세웠다 한다. 그의 계획이란 가족을 비롯한 가장 가까운 타인 아무에게도 자기 병을 알리지 않고, 당장 해 줘야 하는 원고 마감 따위의 일을 해주고 난 뒤에는 어디론가 휙 사라져서 몰래(?) 죽는 것.
러니까 <타임 투 리브>와 비슷한 방식이고, 이해가 된다. <타임 투 리브>의 게이 청년도 애인과 부모ㆍ동생한테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물론 몇 가지 ‘감정’ 정리는 한다.) 하지만, 할머니한테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불임부부와의 ‘3SOME'을 통해서 제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고 난 뒤에 바닷가의 석양을 보면서 죽어간다. 그가 게이란 것은 이런 저런 일련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를 생각해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게이는 특별한 인간이 아니니까.
왜 그들은 자기 병을 알리지 않았을까? 타인들이 질 마음의 짐 때문에? 죽음을 은폐하는 문화에 감염됐기 때문에? 다가오는 죽음이 나를 뭔가 우울증 상태와 같은 데로 빠뜨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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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오늘 이야기의 결론을 내려보자; 내가 ‘말기 암’ 환자라면ㅡ 이를테면, 내일 갑자기 길을 가다 쓰러진 후 병원에서, ‘폐암 4기입니다’ ‘췌장암 말기입니다’라든가, '급성 백혈병(혈액암)입니다.' ‘앞으로 길면 9개월, 짧으면 3개월 밖에 못 사십니다’는 따위의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를 여러 번 생각해봤으나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물론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죽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심지어 위법(제기랄)일 수도 있고, 암 환자에게는 (빌어먹을) 내 의지대로 되지 않을 국면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나는 가족 때문에, 또는 친구 때문에, 그리고 정신과 육체가 약해져 판단력이 흐릿해질 나 자신 때문에... 받아야할 치료를 못(안) 받거나, 전혀 쓸데없는 치료를 받을 가능성도 높다, 아마도.
그래도 어떤 길을 명확히 선택하고 잘 정리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또한 그런 선고를 받는 순간, 새로운 의미를 지닌 삶이 새로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공포와 상실감, 그리고 고통이 엄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는 연습이 필요하다.
의사들의 통계학이 선언해주는 ‘3개월’, '6개월'이라는 시간은, 죽어 가기에는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시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랑소와 오종 영화의 프랑스어 원제도 '떠날 시간'이 아니라 '남은 시간'이다.
작성 : J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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