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신오리(신입생오리엔테이션)'때 둘쨋날 쯤이었나. 그 당시 가장 사회적 이슈였던 우루과이 라운드의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할 시간이 주어졌었다. 선배들은우루과이 라운드를 '논술'로만 배운,  뭣도 모르는 '공부기계' 1학년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해 보자고 했다. 이 시간은 신오리랍시고, 다짜고짜 버들골로 데려가 어색해하는 '새내기'들에게 춤과 민중가요를 가르치고, 갑자기 "역사는 쪽수다"와 같은 구호를 외치게 강요하는 것 만큼이나 폭력적이었다. 무슨 유인물 한장씩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 뒤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이 '사안'에 대해 '얘기해 보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 중 소심한 (부르주아) 범생이였던 내 동기 하나가 '별로...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했다가 '공부좀 해라', '사회에 대해 고민좀 해라'라는 소리를 듣고 울고 말았다.

 

그런 핀잔을 한 학번 위인 선배가 대놓고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나 그런 선배 앞에서 '감히'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할 수 있었던 것도 94년이기에 가능했지 않을까? 그 어정쩡함의 시기가 바로 94년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운동권' 선배들이 무서웠고, 더 마음 깊은 곳에서는 싫었던 것 같다. 그들이 자주 언급하는 '진정성'이라는 단어에 한편으로는 부채의식을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론 '정말 너희는 진정성이 있냐?'라는 반발심이 들었었다.

 

그런데 그때의 내 '마음'은 아마도 나 개인의 감정만은 아니었나보다. 87년체제와 97년 체제 사이의 중간쯤인 94년에  내게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건 어쩌면 그게 사회의 마음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 이 책, <마음의 사회학>을 읽고 보니.

 

사회학자(문학사회학 전공)이자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이기도 하다는 저자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 이 책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종교-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심이나, 근대 인식론이 이야기하는 마인드, 그리고 근대 심리학이 육체와는 다른 심적 활동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는 사이키가 아니"라, "뒤르켐의 '집합표상', 베버의 '정신', 푸코의 '에토스', 토크빌의 '습속', 아날학파의 '심성',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정서구조'와 같이 사회학의 방대한 전통 속에 이미 존재하는, '집합적 마음의 구조화된 질서'라는 의미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7)

"'마음의 사회학'은 고전과 현대 사회학의 다양한 이론적 기초들을 아우르면서 문화, 문학, 예술사회학, 사회심리학, 정신분석학, 사회운동론, 사회사를 가로지르는 트랜스적 탐구과제의 새로운 이름으로 이해"(8)해 달라는 것이 저자의 당부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 '마음의 레짐'에서는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중요한 규범적 동력이었던 진정성의 구조, 기원, 소멸을 탐색한다. 진정성은 우리 사회의 지배적 주체 형성 기제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97년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급격하게 약화되어간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마음의 레짐을 나는 스노비즘과 동물화의 경향에서 발견한다. 제2부 '마음의 풍경'에서는 '문화적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특수한 풍경들을 추출하여 이를 분석한다. 나는 풍경과 파상력의 개념을 사회학적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찰성, 멜랑콜리 그리고 카이로스적 시간성을 각각 살핀다. 제3부 '마음의 징후'에서 나는 다양한 문학, 예술 텍스트들을 사회적 마음이 표현하는 징후들로 파악하고, 그런 징후들을 해독함으로써 사회의 마음을 추론하고자 하는 사회학적 비평의 가능성을 타진한다.(이상, 김수영, 미래파, 하루키, 오즈 야스지로 등)"

 

3부의 경우는 개별 텍스트에 대한 비평의 글이어서 일단 패스하고, 1, 2부만 먼저 읽어보았는데, 재미있다.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는데, 번역투가 거의 없고, 시인이라 그런지 문장이 깔끔하면서도 명확하다. 그래서 다양한 이론가들이 등장하고 여러가지 복잡한 개념들에 대한 설명임에도 불구하고 술술 잘 읽힌다. 특히 1부의 경우에는 우리 사회의 현 시점의 문제들, 피부에 깊숙히 와닿는 '우리'의 이야기들과 사회학의 이론이 절묘하게 만나고 있어 돋보인다. 2부는 1부에 비해 다소 어렵다. 이론중심적인 부분으로, '문화적 모더니티'라는 개념(사회적 모더니티의 지배적 가치들에 저항하는 미적 기획:215)을 중심으로 (지식)사회학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이 책에는 이 시대의 사회, 문화, 문학을 바라볼  매우 유용하고도 예리한 개념 도구들을 다수 제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진정성/포스트-진정성, 마음의 레짐,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 미국적 동물/일본적 속물, 스놉, 스노보크라시, 모럴/윤리, 풍경, 파상력, 사회적 모더니티/문화적 모더니티, 멜랑콜리의 전략, 세계관/세계상/세계감, 진보의 역사철학/순간의 역사시학 등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지금-여기를 설명하는 진정성 체제와 포스트-진정성 체제에 대한 것. 그 '마음의 레짐'의 이행기에 일어나는 변화들에 대해 이미 몇몇 학자들이 잘 말한 바 있지만, 김홍중의 분석방식 역시 흥미롭다. 코제브의 개념을 가져와서 미국적 동물과 일본적 속물 속에 들어 있는 '타인지향성'을 설명한 것이나(75) '포스트 진정성 체제'의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 방식에 대해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경제적 생존'(경제 행위의 건강성이 상실된 상태에서 불안을 동력으로 추진되는 병든 노동, 가령 '일중독'),'사회적 생존'(무차별적 과시가 지배하는 왜곡된 인정투쟁 공간에서의 성공지상주의, 입신출세주의, 속물주의)'생물학적 생존'(건강하고 장수하는 삶을 신성화하고 상품화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오직 육체적 조건으로 환원시키는 '무차별 건강주의')(66)로 논하는 부분 등에서는 내 연구에 필요한 중요한 영감도 얻었다.

 

또한 사회학자이면서 문학평론가인 저자 답게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론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한 부분도 흥미롭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선 어딘가 찜찜하기도 했다. 근대문학이 끝났다...고 한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비판하고, "가라타니의 논의는 이 시대의 근본적 모순에 대한 ‘해답’이 아닌 ‘질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의 종언론은 문학과의 결별을 촉구하는 언명이 아니라 ‘문학이 불가능한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문학의 정신과 윤리와 열정을 갱신하고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 질문을 통해서 문학의 운명은 이제 문학의 영역을 벗어나 비판적 관심과 지향을 갖고 있는 다양한 담론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문학과 비판적 지식체계는 운명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운명 공동체의 한 성원이 사회학이다.(133)"라고 진술한 부분은, 과연 가라타니의 의견과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잘 이해가 안간다. 가라타니 고진 역시 문학에 대한 기대는 접었으나 문학 외부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운동과 실천은 지속될 수 있다고 보았(110)지 않은가? 나의 해독력의 문제인가?

 

그리고 파상력 개념(부재하는 대상을 현존시키는 힘인 상상력과는 반대로, 현존하는 대상의 비실체성 혹은 환각성을 깨닫는 힘. 파괴적 성격’의 소유자는 과거의 모든 사물, 가치, 장애물, 유습 등을 파괴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자(벤야민)(180-181) 벤야민적 사유의 저류를 구성하는 파상력은, 근대의 사회, 경제, 문화적 차원을 공통적으로 관류하던 일종의 파괴적 역동성을 그 모태로 한 것.(207) 파상력의 어머니는 바로 근대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근대는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듦으로써, 모든 환(幻)을 멸(滅)함으로써 그리고 성스러운 것들의 초월적 후광을 제거하고 신비의 베일을 벗겨냄으로써, 파상의 실제 공간을 창출하기 때문이다.(208))이나 멜랑콜리의 전략(237)은 20세기 초의 문화와 담론 설명에 유용할 개념인 듯 하다. 

 

한편 사회적 모더니티와 문화적 모더니티 개념-"근대가 창출한 사회적 모더니티가 국민-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시민사회를 축으로 하는 공적 제도의 영역에서,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 없는 전문가’와 ‘가슴 없는 향락자’들을 양산했다면, 사회적 모더니티의 지배적 가치들에 저항하는 미적 기획에 다름 아닌 ‘문화적 모더니티’는 진보하는 부르주아의 공적 세계가 엄폐한 사적 공간에서 되살아난 우울의 신 사투르누스의 힘에 복속된 ‘토성의 아이들’을 탄생시켰다. 사회적 모더니티는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외적 자연을 탈마법화시키고, 열정을 이해로 변신시킴으로써 인간의 내적 자연마저 정념의 마성으로부터 해방시켰으나, 문화적 모더니티는 이러한 해방의 아이러니한 결과에 다름 아닌 환멸감 속에서 죽은 고대의 신에 다시 사로잡힌다. 역사적이고 집합적인 파토스의 차원에서 보자면, 근대인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우울자들을 비호하는 사투르누스였다...멜랑콜리는 문화적 모더니티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적 코드이며, 대다수의 문화적 산물들의 심정적 배경을 구성하는 문화해석학적 열쇠이다.(215-216) 문화적 모더니티와 사회적 모더니티의 구분은 문화와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시차에 근거하고 있다."(244)

--은 도식적이어서 명징하기는 하나 과연 이러한 구분이 가능한 것인지, 문화적 모더니티를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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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부모님은 '안녕'하신가? 한 해가 또 바뀌고, 내 나이가 한 살 더 먹으면서 드는 수많은 걱정 중 하나는, 그만큼 부모님도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게 된 지 몇 년 되면서 나도 조금씩은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냉정'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아마도 따로 떨어져 살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의존하는 것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보다 상실감이 조금은 덜할 것이라, 짐작만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진정한 '준비'같은 건 불가능할 것이다. 여전히 부모님의 건강은 늘 걱정스러운 것이고, 부모님의 '안녕'은 무엇보다도 오래도록 기원하는 일이다. 

 

난 아직 망자(亡者)의 몸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죽음'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하수'인 셈이다. 스스로는 고사하고, 타인의 죽음 앞에도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이런 내가 결국,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될, 사랑하는 사람 혹은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 나갈 수 있을까?

 

<편안한 죽음>은 페미니스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 중 한 명인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쓴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전소설이다. 욕실에서 넘어져 대퇴골 경부골절을 당한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가 우연히 암 말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어 4주간의 투병 끝에 숨을 거두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며 행한 일, 생각한 것, 느낀 감정을 섬세하게 적어내려가고 있다.

 

시몬느는 유명한 작가, 학자라는 점에서 어머니의 자랑거리였지만, 그녀의 사생활이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그녀가 종교를 갖지 않으려 한 점 등 때문에 두 모녀는 그다지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망한 나이는 일흔 일곱이었고, 그때 시몬느의 나이 역시 벌써 쉰 다섯이었다. '살 만큼 산', '죽을 때가 된' 어머니라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었고, 시몬느 역시 '어른' 중에서도 꽤 '지긋한' 연세의 어른인 셈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느에게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죽음과는 다른 그 무언가가 있었다.

 

시몬느는 몇 번의 고비를 넘겨가며 가까스로 생명을 이어 나가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 그렇게 겨우겨우 연장된 4주간의 시간동안 그동안 묵혀 놨던 어머니와 자신 사이의 갈등을 풀고 화해를 요청하며, 어머니의 생애를 '어머니'가 아닌 한 '여자', '사람'으로서 이해해 나간다. 그 4주는, 삶의 연장이기도 하겠지만, 어머니 자신에겐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딸들에게는 그 시간이 유예기간이었고, 어머니에게도 그간 소원해졌던 딸들이 자신 곁에 돌아와 있는 것에 기뻐 행복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대체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거쳐 어머니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시몬느는 실존주의자 답게, 이 과정을 통해 어머니뿐 아니라 인간 전체의 죽음의 문제를 성찰하며 끝을 맺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의학의 폭력성에 대한 서술도 자주 보인다. 의사들의 환자와, 환자보호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의 냉정함, 권위주의가 시몬느와 그녀의 가족들을 종종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의사들의 결정과 권유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무력감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환자(와 환자 보호자들)의 비극적 '숙명'이다. 한번씩이라도 '병원에 반대'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공감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의 대부분에 공감과 동의를 표하게 되지만,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게 하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시몬느 자매가 어머니에게 끝끝내 어머니의 병명과 남아있는 수명에 대해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잘 동의가 되지 않는다. 딸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의 시간이 필요했듯, 어머니가 아무리 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보였다 하더라도, 그녀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끝끝내 딸과 의사들의 거짓말에 속아 부질없는 희망으로 그 고통을 감내해 가며 그저 죽음을 지연시키기만 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단 하루를 살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납득하고, 누리고, 마무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결국 삶과 죽음은 누구도 함께해주지 못하는 철저히 단독적인 일이라는 걸 아는 시몬느가, 왜 함부로(?) 어머니의 삶과 죽음에 '거짓말'로 개입했을까? 그런 점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편안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시몬느 본인 위주의 해석은 아닐까?

 

아래는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구절들-----

 

 35~37쪽) 어머니의 잠옷이 벌어져서 어머니의 우글쭈글하고 잔주름이 많은 배를, 그리고 털이 하나도 없는 치골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였다.(...)/어머니의 성(性)을 본다는 것은 내게 충격이었다./어떤 몸이든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은 없었다. 어릴 때 나는 몸을 좋아했다. 사춘기가 되자 몸에 대해서 나는 일종의 불안한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몸이 혐오감을 주면서 또 성스런 느낌을 주는 이중성, 곧 금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어쨌든 난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인 육체에 대해 이렇게 심한 불쾌감을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어머니의 무관심한 그 태도 때문에 나는 더욱 놀라웠다./어머니는 평생 동안 당신을 억눌러 왔던 금기 사항이나 금지된 것을 버렸다. 나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인정했다. 다만 그런 식으로 포기함으로써 그야말로 갑자기 오로지 육신에 지나지 않는 그 육신은 시체 따위와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어떤 방어도 하지 못한 채, 직업적인 손이 만지고 다루는 그 불쌍한 몸뚱이, 거기에는 이제 단지 무모한 관성만이 생명을 지탱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살아있는 존재였다. 나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언젠가,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어머니의 죽음은 그 탄생처럼 내가 알 수 없는 신비의 시간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혼자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나이라고 중얼거려 본 적도 있지만, 그것은 다른 많은 말들처럼 아주 공허한 말들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어머니 모습에서 이제 곧 다가올지도 모를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다.

 

126)때때로 환자들이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그 주변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데 화가 나서 '나라면 환자를 죽이겠어요'하면서 분개하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그런 일을 겪자 나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사회적 도덕에 굴복한 대신 나 자신의 도덕을 부정했던 것이다. 사르트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지. 당신은 의학 기술에 굴복한 거지. 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사실 그렇다. 전문의사들이 내린 진단과 예측과 결정에 대해 우리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환자는 의사들의 소유물이 되었다.

 

 169)무엇보다도 우리가 고통스러워 한 것은, 어머니가 겪는 임종의 고통을 보다가, 다시 또 의식을 차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모순된 감정이었다. 고통과 죽음이 경주를 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차라리 죽음이 먼저 와 닿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었다./하지만 어머니가 아무런 의식도 없는 얼굴로 잠이 들면 우리는 하얀 평상복 위에 시선을 늘어뜨리고는 어머니 시계를 매어둔 검은 리본이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마지막 경련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가슴이 딱 멎는 듯 고통스러웠다.

 

173)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살아서, 의식이 있는 상태였지만, 자신이 살아있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전혀 모르고 거기 있었다. 우리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야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 몸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마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배, 부스럼, 흘러내리는 배설물, 푸르스름한 피부색, 살갗에서 흐르는 액체 따위에 대해 어머니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거의 마비가 되다시피 한 두 손으로는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볼 수도 없었고 사람들이 부축해 줄 때면 머리가 뒤로 꺾어졌다. 거울을 달라고 하는 때도 이제 없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모습을 한 자신의 얼굴은 존재하지도 않고 있었다.

 

183)어린애 같은 어머니 목소리를 들으니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어머니는 철저히 혼자였다. 나는 어머니를 만져보고 어머니에게 말을 하지만 어머니의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210)나에게도, 더구나 어머니에게도, 종교가 죽음 뒤에 오는 행복에 대한 희망일 수는 없었다. 영원불멸이라는 것이 천국에서 이루어지든 지상에서 이루어지든, 삶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영원불멸이 죽음에 대한 위로가 될 수는 없다.

 

213)우리에게 소중한 사람 누군가가 사라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계속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고통스런 가책을 수없이 느끼게 된다.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그만의 유일한 단독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는 그가 없음으로 인해 완전한 무(無)가 되기도 하고 그가 있음으로 인해 온전히 존재하기도 하는 세계마냥, 거대한 존재가 된다./우리에게는 그가 우리 삶 속에서 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했어야 했던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그도 다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주는 어지러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도, 심지어는 자신이 처해 있던 한계가 분명하더라도, 자신이 최선을 다할 수는 없기 때문에, 항상 우리 자신에게 많은 비난의 여지가 남아있게 된다. 어머니에 대해서 우리는 죄가 많다. 특히 그 말년에 우리가 어머니를 소홀히 하고 등한시하고 피해왔기에 더욱 그렇다.

 

225)잠깐 동생이 흐느껴 울었다./"한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나도 엄마처럼 저 속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사실이야. 그게 아니라면 너무 말도 안돼."하고 그 아이가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가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장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불행한 사실은 누구나 똑같이 겪게 될 이 일을 우리는 각자 혼자서 겪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자신이 회복되어 가는 줄 알고 있던 그 고통의 시간에 우리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철저히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239)'그 사람도 죽을 나이가 됐지'하는 말. 노인들의 슬픔, 노인들이 쫓겨가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도 죽을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도 어머니에 대해서마저 그런 상투적인 말을 쓴 적이 있다./ 사람들이 일흔이 넘은 자기 부모나 조부모가 숨을 거둔데 대해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쉰 살이나 된 여자가 자기 어머니가 죽었다고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나는 그 여자가 신경과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차피 죽을 운명일 테니까. 여든 살이면 그야말로 죽어도 좋을 만큼 많은 나이가 아닌가....../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람은 태어났기 때문에, 또는 다 살았기 때문에, 늙었기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죽는다.(......)자연사란 없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어떤 일도 결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세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비록 그가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 지라도 그것은 부당한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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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7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8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목이 '제중원'인지라, 내겐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의 설립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그려졌는지가 일차적인 관심사였다. 하지만 사실 이 소설은 제중원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백정출신의 한 남자가 서양근대의학을 익혀 의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에 가까웠다.

 

제중원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나 정도의 '전공자(?)'눈에는 그닥 새로울 게 없는 수준의 피상적인 이야기들 뿐이었다. 흔히 알려져 있듯, 알렌이 갑신정변때 크게 자상을 입은 민영익을 외과수술로 살려내게 되면서 고종의 서양의학에 대한 신뢰가 깊어졌고, 이 일을 계기로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그 이후에 제중원을 거쳐간 원장들에 대한 이야기와 제중원의 번창과 쇠락의 과정 등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가장 궁금한 그들과 전통의학 사이의 '헤게모니' 싸움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미미하다.

 

서양의학은 어떻게 해서 전통의학을 '물리치고' 주도권을 잡게 되었을까? 무엇때문에 이 시기부터 서양의학은 '진리'가 되고, 전통의학은 '찬밥'신세가 되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의학분야만의 문제가 아닌, 근대문명, 서구지식이 조선 사회에 유입되어 뿌리내리는 과정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로 의미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막상 소설에서는 그러한 전통/근대, 조선/서양의 각축의 장이 제대로 형상화되지 못했다.

 

이 소설에서는 서양의술이나 서양인을 두려워하던 무지렁이 조선인 환자들이 '차츰' 그들의 '진심'을 이해하고, 그들이 가진 의학의 힘에 경탄하며 제중원을 찾아오게 된다. 또는 여전히 서양의학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전통적 유교윤리에 속박된 조선인들이 그들에게 받은 치료에서 충격을 받는 모습(심지어 그 치료후 자살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서양의학과 대결(?)하는 존재는 이 소설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조선인 환자'들이다. 그들이 서양의학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로만 소설은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의사-환자의 구도 내에서 환자가 서양의학/전통의학을 선택하는 문제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 같다. 나를 살려준다면, 내 병든 몸을 고쳐준다면, 그때의 선택은 일종의 '절박함'의 문제이고, 그럴 때는 절박함만 강하다면 환자들은 처음의 거부감을 어떻게든 이길 수 있다. 더구나 가난한 환자의 입장에서는 의사가 치료비를 받지 않는다면 더더욱 망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수평적인 것이 아니라 수직적이다.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의사 앞에서 환자는 순종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무리 전통윤리에 젖어 있는 조선인이라도, 환자의 입장에서는 좀더 쉽게 '새로운', '낯선' 이 의학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다른 전통 의학자들은 어떨까? 전통의학의 힘을 믿고 있던 한의원들의 입장에서 갑자기 들어온 이 새로운 지식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또한 서양의학을 배우기로 나선 자들이라도 환자의 입장이 아닌 지식 수용자의 입장에서의 서양의학의 낯선 방식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들에게는 전통/근대 사이에서의 선택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부분을 얼마나 치열하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이 소설 및 드라마는 단순히 소재적 차원에서의 서양의학의 유입과정이나 최초의 서양식 병원의 탄생사가 아닌 '개항', '개화'의 물결 속에 처해 있던 조선 사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러한 부분에 대해선 '괄호'를 치고 만다. 어쩌면 이 경쟁구도 속에서 결국 서양의학이 한의학으로부터 승리를 하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그리는 것이 한의학을 폄하하는 것으로 보일 위험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의학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여주진 않더라도, 서양의학을 배우기 위해 들어온 의학도 내부에서의 갈등이나 망설임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황정이 백정출신으로서 인간의 몸을 째고 꿰매는 일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의학도라면, 성균관 유생출신의 백도양은 서양의학을 배우러 들어왔으나 막상 서양의학의 치료방식이나 교육방식 앞에서 전통적 유교윤리 관념과의 갈등과 번민을 겪는 의학도로 그릴 수 있었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과정에서 차츰 백도양 역시 서양의학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전통/근대의 각축의 장에서 근대적 지식인이 어떻게 만들어져 갔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드라마화되었을때에도, 지금보다 백도양이라는 '안타고니스트'의 역할과 비중도 커지고, 아예 '투톱' 주연식의 드라마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백도양은 아무리 봐도 예전 <허준>의 유도지(유의태의 아들) 캐릭터를 못벗어난 듯 싶다. 백도양이 황정을 뛰어넘을 수 없는 궁극적 이유가 황정에게 있는 휴머니즘을 도양이 갖지 못해서라는 것은 너무 상투적이다. 그저 좋은 배경을 타고났으나 황정에 비해 자질이 부족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유교적 계급사회를 고수하며 이기기 위해서는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는 악역, 조연으로만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매력이 없고, 황정의 '호적수'가 도통 되질 못한다.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막판에 '악역'을 멈추고 황정을 존경하게 되는 계기도 설득력이나 극적인 면이 부족하다.) 그런데 만약 도양이 황정에게 뒤쳐지는 이유가 휴머니즘때문이 아니라 근대적 지식인이 되어가는 과도기에 처한 봉건적 지배계층의 인물로서, 전통적 지식이나 윤리에 대한 완전한 '포기'가 어려워서였다면? 그랬다면 이 소설 및 드라마가 시대의 단면, 전형을 훨씬 흥미롭게 재현해주는 셈이 되었을 것이고, 도양이라는 인물의 설득력과  매력도도 커질 수 있었지 않을까?

 

지금의 소설은 지나치게 황정이라는 특수한 이력의 인물의 영웅화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황정은 백정 출신이었기 때문에 처음 서양의학이 도입될 때 서양의학의 '특장'으로 취급되었던 외과수술에 있어서 천부적 재능을 지닐 수 있는 여건이 미리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 그의 이력은, 서양의학을 받아들이고 뛰어난 의사로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서, 신분상의 제약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큰 '역경'이지만, 의사로서의 자질면에서는 매우 큰 '메리트'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거기다 그는 노력파에 성실하고 온정적인,심지어 독립운동에까지 뛰어드는 인성 면에서의 훌륭함까지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즉, 그는 신분 문제를 제외하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영웅이었다.

 

이러한 점은 이 소설의 약점으로 보인다. 계급사회가 철폐되어가던 중인 개화기라는 시대적 상황상 천민이라는 출신 계급 문제는 그다지 큰 역경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밀도살 문제라거나 아버지 수술 등의 에피소드를 통해 당시에도 여전히 백정 신분은 파리목숨 취급을 받았던 것으로 재현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결국 면천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헤론이라는 제중원 2대원장의 갑작스러운 태도 돌변(그 이전까지의 황정에 대한 반감을 갑자기 철회하고, 그의 면천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이라는 계기도 스토리 흐름상 설득력이 부족하고 갈등해소가 너무 손쉽게 이뤄져 버렸다는 점에서, 역시 신분의 문제는 결정적 역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얘기지만, 나는 오랜 드라마홀릭자이고, 국문학전공자이고, 문학에 나타난 의학이나 여성의 몸 등의 문제를 공부해온 사람이다. 그런 나의 '프로필'상 소설 <제중원>은 안 읽어볼 수 없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을 제목으로 표방하여, 조선땅에의 서양의학의 도입과정을 그리고 있고, 1월에는 드라마로 방영될 예정인데 그 전에 소설로 먼저 출판되었다 한다. 이 소설을 쓴 이기원은 예전에 일본 드라마인 <하얀거탑>을 한국드라마로 각색했던 드라마 작가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니, 문학이라 하기에도, 드라마의 원작으로서도, 의학사적 가치로서도 모두 '미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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