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신오리(신입생오리엔테이션)'때 둘쨋날 쯤이었나. 그 당시 가장 사회적 이슈였던 우루과이 라운드의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할 시간이 주어졌었다. 선배들은우루과이 라운드를 '논술'로만 배운, 뭣도 모르는 '공부기계' 1학년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해 보자고 했다. 이 시간은 신오리랍시고, 다짜고짜 버들골로 데려가 어색해하는 '새내기'들에게 춤과 민중가요를 가르치고, 갑자기 "역사는 쪽수다"와 같은 구호를 외치게 강요하는 것 만큼이나 폭력적이었다. 무슨 유인물 한장씩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 뒤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이 '사안'에 대해 '얘기해 보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 중 소심한 (부르주아) 범생이였던 내 동기 하나가 '별로...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했다가 '공부좀 해라', '사회에 대해 고민좀 해라'라는 소리를 듣고 울고 말았다.
그런 핀잔을 한 학번 위인 선배가 대놓고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나 그런 선배 앞에서 '감히'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할 수 있었던 것도 94년이기에 가능했지 않을까? 그 어정쩡함의 시기가 바로 94년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운동권' 선배들이 무서웠고, 더 마음 깊은 곳에서는 싫었던 것 같다. 그들이 자주 언급하는 '진정성'이라는 단어에 한편으로는 부채의식을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론 '정말 너희는 진정성이 있냐?'라는 반발심이 들었었다.
그런데 그때의 내 '마음'은 아마도 나 개인의 감정만은 아니었나보다. 87년체제와 97년 체제 사이의 중간쯤인 94년에 내게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건 어쩌면 그게 사회의 마음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 이 책, <마음의 사회학>을 읽고 보니.
사회학자(문학사회학 전공)이자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이기도 하다는 저자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 이 책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종교-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심이나, 근대 인식론이 이야기하는 마인드, 그리고 근대 심리학이 육체와는 다른 심적 활동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는 사이키가 아니"라, "뒤르켐의 '집합표상', 베버의 '정신', 푸코의 '에토스', 토크빌의 '습속', 아날학파의 '심성',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정서구조'와 같이 사회학의 방대한 전통 속에 이미 존재하는, '집합적 마음의 구조화된 질서'라는 의미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7)
"'마음의 사회학'은 고전과 현대 사회학의 다양한 이론적 기초들을 아우르면서 문화, 문학, 예술사회학, 사회심리학, 정신분석학, 사회운동론, 사회사를 가로지르는 트랜스적 탐구과제의 새로운 이름으로 이해"(8)해 달라는 것이 저자의 당부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 '마음의 레짐'에서는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중요한 규범적 동력이었던 진정성의 구조, 기원, 소멸을 탐색한다. 진정성은 우리 사회의 지배적 주체 형성 기제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97년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급격하게 약화되어간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마음의 레짐을 나는 스노비즘과 동물화의 경향에서 발견한다. 제2부 '마음의 풍경'에서는 '문화적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특수한 풍경들을 추출하여 이를 분석한다. 나는 풍경과 파상력의 개념을 사회학적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찰성, 멜랑콜리 그리고 카이로스적 시간성을 각각 살핀다. 제3부 '마음의 징후'에서 나는 다양한 문학, 예술 텍스트들을 사회적 마음이 표현하는 징후들로 파악하고, 그런 징후들을 해독함으로써 사회의 마음을 추론하고자 하는 사회학적 비평의 가능성을 타진한다.(이상, 김수영, 미래파, 하루키, 오즈 야스지로 등)"
3부의 경우는 개별 텍스트에 대한 비평의 글이어서 일단 패스하고, 1, 2부만 먼저 읽어보았는데, 재미있다.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는데, 번역투가 거의 없고, 시인이라 그런지 문장이 깔끔하면서도 명확하다. 그래서 다양한 이론가들이 등장하고 여러가지 복잡한 개념들에 대한 설명임에도 불구하고 술술 잘 읽힌다. 특히 1부의 경우에는 우리 사회의 현 시점의 문제들, 피부에 깊숙히 와닿는 '우리'의 이야기들과 사회학의 이론이 절묘하게 만나고 있어 돋보인다. 2부는 1부에 비해 다소 어렵다. 이론중심적인 부분으로, '문화적 모더니티'라는 개념(사회적 모더니티의 지배적 가치들에 저항하는 미적 기획:215)을 중심으로 (지식)사회학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이 책에는 이 시대의 사회, 문화, 문학을 바라볼 매우 유용하고도 예리한 개념 도구들을 다수 제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진정성/포스트-진정성, 마음의 레짐,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 미국적 동물/일본적 속물, 스놉, 스노보크라시, 모럴/윤리, 풍경, 파상력, 사회적 모더니티/문화적 모더니티, 멜랑콜리의 전략, 세계관/세계상/세계감, 진보의 역사철학/순간의 역사시학 등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지금-여기를 설명하는 진정성 체제와 포스트-진정성 체제에 대한 것. 그 '마음의 레짐'의 이행기에 일어나는 변화들에 대해 이미 몇몇 학자들이 잘 말한 바 있지만, 김홍중의 분석방식 역시 흥미롭다. 코제브의 개념을 가져와서 미국적 동물과 일본적 속물 속에 들어 있는 '타인지향성'을 설명한 것이나(75) '포스트 진정성 체제'의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 방식에 대해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경제적 생존'(경제 행위의 건강성이 상실된 상태에서 불안을 동력으로 추진되는 병든 노동, 가령 '일중독'),'사회적 생존'(무차별적 과시가 지배하는 왜곡된 인정투쟁 공간에서의 성공지상주의, 입신출세주의, 속물주의)'생물학적 생존'(건강하고 장수하는 삶을 신성화하고 상품화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오직 육체적 조건으로 환원시키는 '무차별 건강주의')(66)로 논하는 부분 등에서는 내 연구에 필요한 중요한 영감도 얻었다.
또한 사회학자이면서 문학평론가인 저자 답게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론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한 부분도 흥미롭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선 어딘가 찜찜하기도 했다. 근대문학이 끝났다...고 한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비판하고, "가라타니의 논의는 이 시대의 근본적 모순에 대한 ‘해답’이 아닌 ‘질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의 종언론은 문학과의 결별을 촉구하는 언명이 아니라 ‘문학이 불가능한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문학의 정신과 윤리와 열정을 갱신하고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 질문을 통해서 문학의 운명은 이제 문학의 영역을 벗어나 비판적 관심과 지향을 갖고 있는 다양한 담론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문학과 비판적 지식체계는 운명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운명 공동체의 한 성원이 사회학이다.(133)"라고 진술한 부분은, 과연 가라타니의 의견과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잘 이해가 안간다. 가라타니 고진 역시 문학에 대한 기대는 접었으나 문학 외부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운동과 실천은 지속될 수 있다고 보았(110)지 않은가? 나의 해독력의 문제인가?
그리고 파상력 개념(부재하는 대상을 현존시키는 힘인 상상력과는 반대로, 현존하는 대상의 비실체성 혹은 환각성을 깨닫는 힘. 파괴적 성격’의 소유자는 과거의 모든 사물, 가치, 장애물, 유습 등을 파괴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자(벤야민)(180-181) 벤야민적 사유의 저류를 구성하는 파상력은, 근대의 사회, 경제, 문화적 차원을 공통적으로 관류하던 일종의 파괴적 역동성을 그 모태로 한 것.(207) 파상력의 어머니는 바로 근대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근대는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듦으로써, 모든 환(幻)을 멸(滅)함으로써 그리고 성스러운 것들의 초월적 후광을 제거하고 신비의 베일을 벗겨냄으로써, 파상의 실제 공간을 창출하기 때문이다.(208))이나 멜랑콜리의 전략(237)은 20세기 초의 문화와 담론 설명에 유용할 개념인 듯 하다.
한편 사회적 모더니티와 문화적 모더니티 개념-"근대가 창출한 사회적 모더니티가 국민-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시민사회를 축으로 하는 공적 제도의 영역에서,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 없는 전문가’와 ‘가슴 없는 향락자’들을 양산했다면, 사회적 모더니티의 지배적 가치들에 저항하는 미적 기획에 다름 아닌 ‘문화적 모더니티’는 진보하는 부르주아의 공적 세계가 엄폐한 사적 공간에서 되살아난 우울의 신 사투르누스의 힘에 복속된 ‘토성의 아이들’을 탄생시켰다. 사회적 모더니티는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외적 자연을 탈마법화시키고, 열정을 이해로 변신시킴으로써 인간의 내적 자연마저 정념의 마성으로부터 해방시켰으나, 문화적 모더니티는 이러한 해방의 아이러니한 결과에 다름 아닌 환멸감 속에서 죽은 고대의 신에 다시 사로잡힌다. 역사적이고 집합적인 파토스의 차원에서 보자면, 근대인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우울자들을 비호하는 사투르누스였다...멜랑콜리는 문화적 모더니티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적 코드이며, 대다수의 문화적 산물들의 심정적 배경을 구성하는 문화해석학적 열쇠이다.(215-216) 문화적 모더니티와 사회적 모더니티의 구분은 문화와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시차에 근거하고 있다."(244)
--은 도식적이어서 명징하기는 하나 과연 이러한 구분이 가능한 것인지, 문화적 모더니티를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