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 주디스 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
가야트리 스피박 외 지음, 주해연 옮김 / 산책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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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0-32

아렌트가 처음 연방주의를 고민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파시즘에 대항한 동맹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으며, 이후에는 1940년대 중반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에게 주어진 가능성과 관련하여, 그리고 <혁명론>에서 매디슨주의적인 주장(31)을 재고하면서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을 쓸 당시에는 이런 논의가 매우 흐릿합니다. 비록 간헐적이긴 하지만 아렌트가 지속적으로 연방주의에 의지하는 것은 주권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는 흥미롭습니다.

아렌트는 개별주권의 연합에 반대합니다. 대신 개인주의를 넘어서고 주권을 분산시킬 수 있는 사회적 다원성 개념을 제도화하는 방법으로 연방을 사유했습니다. 그녀의 논의는 공동체주의와도 거리가 있는데, 연방이란 여러 집단의 공동작업을 전제하긴 하지만 이 집단들 사이에 필연적인 공통의 소속감을 가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아렌트는 문화적 친밀성을 통치기반으로 요구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야말로 우리가 아렌트의 민족주의 비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아렌트는 유대원 주권이라는 원칙에 의거한 이스라엘 건국에 반대했습(32)니다. 아렌트는 이스라엘 건국 움직임이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고 이스라엘과 영토를 공유하고 있는 정당한 거주자인 비유대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을 영원히 지속시킬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57

버틀러: 아렌트가 대명사를 사용하는 방식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녀는 혁명을 이론화하면서 인간 존재들은 함께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혁명은 '우리'가 함께 행동할 때만 일어날 수 있지요. 즉 어떤 행위가 효과가 있으려면, 그것은 '우리'의 행위여야 합니다. 아렌트는 이 글에서 '나'로부터 '우리'로의 변환을 효과적으로 해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러한 변환 자체가 충분히 실효성 있는 행위라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행동의 필요조건을 구성한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예컨대 아렌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정치적 삶은 우리가 조직을 통해 평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정에 기대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오직 다른 것을 형성하는 사람들과 평등한 관계에 있을 때에만 행동할 수 있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공동의 세상을 건설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58

여기에서 '인간'이란 개개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공통성과 평등의 상황을 가리키며, 공통성과 평등은 변화와 행위를 구축하는 기본 전제입니다. 소위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평등한 존재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행동하고, 변화를 만들어내고, 무엇인가를 구축할 수 있다면, 그의 개인적 행동은 평등의 조건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다른 말로, 그 개인적 행동은 무엇보다 평등을 확립하는 행동이어야 하고, 이를 통해 개인의 행동은 복수의 행동이 되고,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행동이 될 기회를 갖게 됩니다.

 

63-64

아감벤과 아렌트 중 누구도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이 노래(스페인어로 불린 미국 국가-인용자 주)를 충분히 이론화하지 못했으며, 이 노래를 온전히 설명해낼 수 있는 언어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화 작업은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만들어지는 민주주의, 정치적인 영역에서 선명하게 나타나는 미학적인 표현, 그리고 우리가 '공적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과 노래의 관계를 다시 고찰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노래는 거리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데, 이때 거리는 집회의 자유를 얻지 못한 자들이 자유롭게 모이는 모순의 장소입니다.

 

제가 보기에 바로 이러한 수행적 모순이야말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창조의 공간을 열어젖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노래를 부를 장소로 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름으로써 거리가 자유로운 집회 현장으로 재구성된다는 점(64)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자유의 표현이자 권리를 향한 호소입니다. 또한 거리라는 공간의 틀을 다시 짜고, 법적으로 금지된 바로 그 순간에 집회의 자유를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적인 정치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법적인 존재가 되겠다는 주장을 하는 것 자체가 불법인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구하는 행동 자체가 인정을 요구하는 바로 그 법에 반하는 것이라는 모순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75

오늘날 우리는 전지구화 국면에서 민족국가의 쇠퇴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국가의 계보적 힘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일반적으로 민족국가의 쇠퇴는 전지구적 자본의 이해를 위해서 국가를 재구조화한 정치적, 경제적 과정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아렌트는 그 쇠퇴의 이유가 애초에 민족국가라는 형태가 결점투성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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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관련 기사

국가, 극복할 것인가 지켜낼 것인가
“민족국가라는 이름으로 이방인 추방”
“세계적 자본주의 횡포에 구성원 보호”
페미니스트 버틀러-스피박의 두 시각
 
 
고명섭 기자
 




 

»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주디스 버틀러·가야트리 스피박 대담, 주해연 옮김/산책자·1만원


주디스 버틀러(사진 위)와 가야트리 스피박(아래)은 페미니즘 이론 영역에서 가장 왕성한 지적 생산력을 보여주는 여성 학자들이다. 버틀러가 동성애자로서 퀴어이론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면, 스피박은 인도 출신으로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대모로 통한다. 두 사람의 학문활동을 관찰하면, 페미니즘 이론의 최전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론적 지반에 다소 차이가 있는 이 두 사람은 페미니즘 담론 내부의 경합적 관계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는 이 출중한 학자들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열다섯 살 아래인 후배 버틀러가 먼저 발제 성격의 문제제기를 한 뒤 두 사람이 토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의 대담은 2006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어바인 캠퍼스의 비교문학과에서 ‘전지구적 국가, 전지구적 상태’를 주제로 삼아 연 학회에서 이루어졌다. 제목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이 대담의 내용은 페미니즘 이론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지구화 시대의 국가’라는 인류적 차원의 문제를 페미니스트적 감성으로 포착하고 있다. 특히 이 대담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흔히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로 번역되는 네이션 스테이트(nation-state) 문제다. 여기서 네이션(국민·민족)이 문제인 것은 어떤 기준에 따라 특정 집단을 네이션으로 포섭하고 그 기준 밖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메커니즘이 이 네이션 체제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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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가 대담의 주제가 된 것은 그 시점에서 벌어진 사태와 관련이 있다. 2006년 4월 미국 전역에서 ‘미등록 이민자’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돕거나 고용하는 사람들까지 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이 법안을 규탄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캘리포니아에서는 수십만명의 라틴계 이민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존재 자체가 불법인 이민자들이 ‘자유롭게’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 더 중요하게는 이들이 미국 국가를 스페인어로 번역해 불렀다는 사실에 버틀러는 주목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자신들에게 추방·배제·박탈을 안겨준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언어로 노래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통상적인 좌파적 관념이라면, 이런 상황을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자발적으로 말려들어간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버틀러는 그런 통념과는 다른 적극적 이해를 모색한다. 네이션 스테이트의 틀에 균열을 냄으로써 그 틀을 극복할 전망을 언뜻 보여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수행적 모순이야말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창조의 공간을 열어젖힙니다.” 버틀러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빌려, 자유는 자유의 요구, 자유의 수행 자체에서 이미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거리가 자유로운 집회 현장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자유의 표현이자 권리를 향한 호소입니다.” 자신들을 추방하는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말로 부름으로써 그 국가의 의미를 바꿔버리는 이 모순적 사태야말로 어떤 전망을 보여준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그 노래는 언어적 다수집단에 대한 비판이고, 언어적 다수집단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이며, 민족을 단일한 개념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다문화주의의 한 방식입니다.”

이때 버틀러가 국가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대담 내내 버틀러는 국가를 곧 ‘네이션 스테이트’로 인식한다. 국가란 근본적으로 국민/비국민을 나누는 배제와 분리를 존재 방식으로 삼고 있다는 발상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그 국가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가 버틀러의 고민이자 질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피박은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낸다. 스피박이 보기에 국가 그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고삐 풀린 발호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하는 장치로 국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시민주의는 어찌 보면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어울리는 이념일 수 있다. “국가는 우리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에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최소한의 추상적 구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재분배의 도구가 돼야 합니다.” 자본주의적 착취·수탈·불평등을 막아내고 교정하는 기능을 국가가 수행할 수 있으며, 그런 기능을 수행하도록 국가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틀러가 국가의 박탈·추방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면, 스피박은 국가의 저항 거점 성격을 강조하는 셈이다. 대담 말미에 버틀러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력으로서 자기창조”에 관해, 다시 말해 혁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만약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고통받았기 때문이고, 비판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서로 뭉쳤기 때문이며, 역사와 분석에 기반해 연대를 구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피박도 이 설명에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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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몸과 탈근대적 증상 나남신서 91
김종갑 지음 / 나남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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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쪽

현대인에게 몸은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나 자율적 통일체로 주어지지 않는다. 타고 태어난 운명은 더욱이나 아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옛말만큼 우리에게 낯설고 이물스런 개념도 없을 것이다. 기원적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은 리콜이나 애프터서비스처럼 성형외과나 바디클리닉 등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관리되고 집중적으로 교정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앤서니 기든스의 주장처럼 이제 몸은 하나의 "프로젝트",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리면 "가장 아름다운 소비대상"이다. 프로젝트나 상품으로 간주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는 몸의 파편화이다. 만약 몸을 하나의 온전한 유기적 전체로서 받아들인다면 몸의 한 부위에 성형의 칼을 들이대는 순간 몸 전체가 새로운 이물질의 침입에 적응하기 위해 방어 체계를 형성하고, 그러면서 미세하게나마 총체적으로 유기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렇다면 예측할 수 없는 몸의 반작용이나 부작용이 두려워서 감히 성형의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아무도 지방흡입수술이나 박피수술, 성형수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133쪽

몸은 한꺼번에 하나로서 주어진 총체가 아니라 분해되고 재결합될 수 있는 부분들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싫증이 나면 자유롭게 부분을 떼어내고 새롭게 장식을 할 수 있다.

 

134쪽

몸의 파편화는 외계인의 침입이나 신종 바이러스처럼 현대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류가 문명화의 길을 걸으면서 몸도 점차 파편화되기 시작하였다. 만약 몸을 부분들의 기계적 결합으로 볼 수 없었다면 서양의학, 특히 해부학은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시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처럼 주어진 유기적 전체를 부분으로 분해하고 계, 기관, 조직 등으로 분류한 다음 다시 하나의 몸으로 봉합하는 과정, 우리의 몸을 해부대 위에 놓인 개구리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과정이 의술의 발달에 선행되었다.

 

135쪽

몸의 재현과 관련해서 발생했던 몸의 파편화, 몸의 수학적 건축술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데카르트도 그러한 육체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화가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가 몸을 물리적인 현상으로 접근하였다는 점이다. 몸이란 무엇인가?

136쪽

칼로 자르면 두 동강이 난다는 점에서 몸은--잘라지지 않는--정신과 다르다. 몸은 자르면 최소 단위를 향해서 계속 분절되는 것이다.

육체는 계속해서 분할 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명한 진리이다. 그러나 바로 이 자명한 진리로서 육체의 무한 분할 가능성 명제에서 딜레마가 탄생한다. 그리고 바로 이 딜레마를 중심으로 현대의 육체는 전통적 육체로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원칙적으로 무한하게 분할할 수 있는 듯이 보이지만 분할이 반복되다 보면 소실점처럼 어느 순간에 더 이상 분할 될 수 없는 지점에서 분할의 대상 자체가 소멸해버린다. 이론적으로 지속되어야 하는 존재가 실제적으로는 갑자기 무로 사라지는 것이다. 양의 변화가 질적 변화를 초래하고, 그러면서 생명은 죽음으로, 유기체는 무기체로 바뀌어버린다.

 

146쪽

빅토리아 베컴의 사진은 그러한 새로운 논리와 질서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 주목되어야 하는 증상은 육체의 파편화이다. 두세 배 크게 확대되는 순간 육체는 자신이 지금껏 속해있던 세계와 균형 잡히 관계로부터 일탈하면서 부분들로 파편화된다. 가령 빅토리아는 그녀의 가슴, 어깨, 어깨 아래 살, 허리, 뱃살, 주름 등의 부위로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다.

우리가 몸을 경험하는 방식은 확대하고 축소하며 파편화하는 카메라의 시

147쪽

선을 반영하고 있다. 어쩌면 거꾸로 카메라의 시선은 확대하고 축소하며 파편화하는 우리의 시선을 모방하고 있다고 말해야 옳은지 모른다. 양자의 관계는 일방적이라기보다 쌍방적이다.

 

 

212쪽

아름다움의 경험에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판단, 자유로운 상상력의 활동이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다른 타자가 아닌 주체의 고유한 미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스코리아 심사처럼 정해진 기준표의 요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판단은 주체 자신의 판단이라기보다는 기준표의 판단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한 판단의 주체는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가 아니다. 그는 기준표-주인의 명령에 굴복하고 복종하면서 후보들의 매력을 판단하는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후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발적으로 자유로운 명령(로고스)에 따라서 몸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기준표라는 목적에 가까워지도록 자신의 몸매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를 창조하는 현대의 미학적 인간의 이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213쪽

몸매 만들기는 몸의 예술화가 아니라 몸의 종속화이며, 자유로운 자기 창조가 아니라 강요된 노예적 노동의 또 다른 형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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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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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의 이 책, <불안>을 산 건 인터넷 서점의 '반값할인'때문이었다.

나는 사랑에 고민중이던 친구들에게서 종종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책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가 아무리 '촌철살인'하는 사랑에 대한 소설이나 에세이를 쓴다고 해도, 아니 그럴수록 전혀 궁금치 않았다.

그래서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 <불안>은 사랑과는 관련이 없는, 인간의 욕망, 특히 지위에 관한 욕망과 공포를 다룬 에세이라길래

그동안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의 '말발'이 궁금해서 사봤다.

 

책은 뭐...좀 뻔하고 흔한 이야기도 많아 대충대충 읽게 됐지만 대중적 교양서로서 나름 괜찮다고 생각된다.

('해법'의 하나로 '정치'를 들고 있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뭐든 '내탓이요'하라는 '자기치유서'류는 아니다.)

인간이 왜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발버둥치는지, 인정투쟁의 문제 등에 대한 원인분석과

이 과정에서 생겨난 인간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해결책이 가능한지를

자신의 박학한 상식들과 다양한 전거들을 들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문장 편안하고, 글이 친절하다.

 

다음은 그 중 눈에 띄는 구절들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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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쪽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옆에 sine nobilitate(이것을 줄인 말이 's.nob.'이다), 즉 작위가 없다고 적어놓는 관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곧 근대적인 의미, 즉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을 속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경멸하려는 의도를 가진다는 것, 즉 그 사람의 조롱받아 마땅한 매우 유감스러운 차별행위를 묘사하기 위해 그 말을 사용한다는 것 또한 분명해졌다. 이 문제에 대한 선구적인 작업인 <속물에 관한 책 Book of Snobs>(1848)에서 윌리엄 새커리는 25년간 속물이 "영국에 철도처럼 퍼져나갔으며, 이제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어디를 가나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말 새로웠던 것은 속물근성이 아니라, 속물들의 그런 전통적인 차별행위를 이제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적어도 새커리 같은 사람들에게는--평등 정신이었다.

29쪽 그 이후 노골적으로 사회적 또는 문화적 편견을 드러내는 모든 사람, 즉 어떤 한 종류의 사람이나 음악이나 와인이 다른 것보다 분명하게 낫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을 속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자면, 속물이란 하나의 가치 척도를 지나치게 떠벌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35쪽 이 문제를 이해하려다 보면 결국은 두려움이 모든 일의 근원이라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59쪽 데이비드 흄은 <인성론 A Treatise on Human Nature>(에든버러, 1739)에서 이렇게 말했다.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 상태다. 일반 병사는 상사나 상병에게 느끼는 것과 비교하면 장군에게는 질투심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뛰어난 작가 역시 평범한 삼류작가보다는 자신에게 좀더 접근한 작가들로부터 질투를 더 받는다. 불균형이 심하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서 먼 것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거나 그런 비교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281쪽 그러나 울프는 쉽게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녀는 전형적인 정치적 전술을 구사하여, "도서관에 입장이 허용되지 않다니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하고 묻는 대신 "나를 들여보내지 않다니 도서관 문지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하고 물었다. 관념이나 제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은 당사자에게 묻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아니라 관념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수치감에 싸여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여자라는 것일까/피부색이 검다는 것일까/돈이 없다는 것일까]?"하고 묻는 대신 "나른 비난하다니 다른 사람들이 틀렸거나, 부당하거나, 비논리적인 것이 아닐까?" 하고 묻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무죄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질문이 아니라, 자연주의적인 관점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제도, 관념, 법은 어리석고 편파적이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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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9-09-17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이건 창작블로그 연재에는 안 올려진 것 같은데요; 어쨌든 좋은글 추천하고 갑니다 ㅎㅎ

somun 2009-09-18 07:45   좋아요 0 | URL
땡큐..왠지 창작블로그에 올릴만큼 완결된 글은 아니라서리...이런건 그냥 서재지수를 위해 올릴라고(새롭게 알게 된 사실인데, 창작블로그에 올리는 글은 <마이리뷰>에서는 작성이 불가능하네. 창작블로그에 올리려면 <마이페이퍼>에서만 써야함...)
 
씩씩한 남자 만들기 -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
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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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씩씩한 남자가 된다?

‘몸짱’, ‘근육맨’으로 유명한 한 남자 가수가 공익근무요원으로 병역을 마치고 복귀한 뒤 끊임없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와 관련된 기사 밑에는 언제나 ‘군대나 다시 제대로 다녀와라’라는 내용의 ‘악플’이 달리곤 한다. 다부진 몸, 일반인에 비해 뛰어난 체력과 운동신경은 그가 입대를 하기 전까지 그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건전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었었다. 그런 그가 허리디스크로 현역이 아닌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입대를 하자 사람들은 ‘그가 우리를 속였다’, ‘그에 대한 병역판정이 불공정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이 사건은 다른 몇몇 ‘몸짱’ 연예인들의 병역 문제와 관련지어 보면 매우 흥미롭다. 2001년 말에는 또 다른 ‘몸짱’ 가수가 미국 시민권 획득을 통해 병역을 회피하면서 연예계에서 사실상 퇴출당했었다. 그도 건강하고 건전한 청년 이미지를 자신의 근육질 몸을 통해 구현해 내고 있었다. 그 이미지에 걸맞게 미국 이민자였음에도 자신은 ‘대한의 남아로서 군대에 꼭 가겠다’고 여러 차례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입대를 해야 할 시기가 되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함으로써 병역 면제 처분을 받아버렸다.일은 ‘국민적 분노’를 자아냈다. 덕분에 그는 아직까지도 연예활동은 물론 한국에 입국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반면, 역시 근육질의 몸매로 유명했던 모 탤런트는 브로커를 통해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약물을 복용하고 면제판정을 받았다가 결국 재검을 받고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왔다. 그는 입대 전까지는 무수한 비난과 지탄에 시달렸다. 그러나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예전 못지않은 인기와 명성을 얻어 작년 연말에는 모 방송사에서 연기상 대상을 받는 쾌거를 거두며 화려한 복귀에 성공했다.

이 세 명의 사례는 우리나라에서 남성들의 군 입대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군대를 ‘빼는’ 남자들에 대해선 그야말로 ‘마녀사냥’을 하듯 비난을 쏟아 붓지만, 군대만 ‘제대로’ 다녀오면 그 전의 행동들은 모두 용서가 된다. 이 한국 땅에서는 평생 ‘병역 기피자’, ‘공익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대중적․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사느니, 정말 지금이라도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오는 편이 연예인들로서는 훨씬 편한 길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병역 문제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왜 그럴까? 물론 ‘평등’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돈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것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불평등한 사회를 사람들은 참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힘은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진짜 남자가 된다”는 우리 사회의 암묵적 합의다. 즉 대한민국의 이상적 남성상을 ‘군대를 다녀 온’ ‘씩씩한 남자’라고 여기는 풍조가 여전히 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씩씩한 남자’처럼 보이는 몸짱 연예인이 군대에 가지 않는 ‘괴리’를 잘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씩씩한 남자 만들기》,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을 탐색하다

박노자 교수의 새 책 《씩씩한 남자 만들기》는 한국에서 언제부터, 어떻게 바로 이러한 ‘씩씩한 남자’를 이상적 남성상으로 여기게 되었는지 그 연원과 과정을 탐색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에는 근육질의 군사화된 몸을 가진 남성보다 훌륭한 학력 자본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더 인기 있다. 그런 점에서 ‘씩씩한 남자 만들기’ 프로젝트는 이미 낡은 구호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한 남자 만들기’에 대한 환상과 담론은 위의 사례들에서 보이듯 여전히 대중적으로 유효하다. 이는 구미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특히 뚜렷하다. 이 책은 이 같은 관점 하에 한국에서 군사적 요소가 강한 육체적 훈련에 익숙하게 된 과정, ‘마음 닦는’ 방법으로 체육이 채택되게 된 배경, 근대 체육이 도입된 이래 오늘날까지 ‘스포츠 붐’이 이어져 온 사정에 대해 1890~1900년대 이전과 이후, 지배층과 피지배층, 이념과 실제, 유럽과 동아시아 등을 광범위하게 넘나들며 해명해 나간다. (하략, <씩씩한 남자 만들기> 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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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평류의 글을 쓰는 데에 적합한 인간형이 못된다. 가장 큰 이유는 '요약'능력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세미나를 같이하는 사람들은 원책 못지 않게 긴 나의 발제문을 두려워 한다.^^

이는 두 차원에서의 지나친 '친절'과 '강박'의 발로인데, 하나는 원책의 저자가 말하고자 한 것의 논리적 흐름에서 뭐라도 빠트리면 왜곡, 은폐가 될 거란 생각, 다른 하나는 그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그 사람들이 이해 못할 정도로 생략하면 예의가 아닐 거란 생각을 좀처럼 떨쳐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다른 사람의, 그것도 저명한 학자의 책에 대한 '발문'을 쓴다는 건 엄청난 부담이고 모험이었다. 어찌어찌 분량에 맞춰 발문을 썼지만, 그 책이 며칠 전에 나왔길래 새삼 내 발문을 다시 읽어보니 참 못마땅하다. 그의 책의 포인트들을 제대로 짚어주지 못한 것 같고, 책의 의의를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 같다. 매우 아쉽다.

 

몇번 만난 박노자교수의 한국에 대한 관심, 학문에 대한 열정은 나같은 범인의 '야코'를 팍 죽이는 면이 있다. 그의 종횡무진하는 지식의 스펙트럼 앞에서 나는 거의 반쯤 알아듣고 반쯤 그저 고개 끄덕이며 경청할 뿐이다. 그런 그가, 국내 한국학 학자들에게는 너무나 쉬운, 1910년대 잡지 영인본을 구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란! 그렇게...그는 이역만리의 대학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며 한국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황스러움은 그래서 부끄러움, 열등감으로 순식간에 전화되었다. 한국학 연구자라면, 한국학계가 이런 학자를 갖고 있는 점에 대해 행운이라 여기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의 이번 책도 좋은 반응이 있었으면 좋겠다.

 

발문에도 적었지만, 이 책에 대해서는 비슷한 연구주제를 가진 사람으로서, 좋은 참고서를 제공해주었다는 점, 또 그만이 할 수 있는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사료제시에 대해 고마움과 흥미로움을 느낀다. 특히 '남자'를 잘 모르는(ㅎ)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역시 그도 '여자'는 잘 모르는 것(ㅎㅎ)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가 내 몫이 아니듯, '여자'는 그에게 미룰 일은 아니다.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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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9-09-17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좋네요. 오 누나의 발제문의 길이 속에 그런 깊은 뜻이! 쿄쿄
그리고, 저 선착순 2명 안에 들었던 것 기억하시죵? ㅋㅋ

somun 2009-09-18 07:43   좋아요 0 | URL
물롱이지.ㅎㅎ

LKH 2009-09-17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쁜 여자 만들기'도 아주아주 기대 만땅입니다. 남자가 꼭 남자를 상대화할 수 있고 여자가 꼭 여자를 상대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한국사회의 의미있는 젠더론이 탄생할 것 같아 벌써부터 흥분됩니다. 좋은 작업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somun 2009-09-18 07:43   좋아요 0 | URL
앗, 누구시길래...그 '대외비'를 알고 계시는 건지 궁금하네요.^^기대해 주시니 감사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