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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의 이 책, <불안>을 산 건 인터넷 서점의 '반값할인'때문이었다.
나는 사랑에 고민중이던 친구들에게서 종종 알랭 드 보통의 다른 책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가 아무리 '촌철살인'하는 사랑에 대한 소설이나 에세이를 쓴다고 해도, 아니 그럴수록 전혀 궁금치 않았다.
그래서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 <불안>은 사랑과는 관련이 없는, 인간의 욕망, 특히 지위에 관한 욕망과 공포를 다룬 에세이라길래
그동안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의 '말발'이 궁금해서 사봤다.
책은 뭐...좀 뻔하고 흔한 이야기도 많아 대충대충 읽게 됐지만 대중적 교양서로서 나름 괜찮다고 생각된다.
('해법'의 하나로 '정치'를 들고 있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뭐든 '내탓이요'하라는 '자기치유서'류는 아니다.)
인간이 왜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발버둥치는지, 인정투쟁의 문제 등에 대한 원인분석과
이 과정에서 생겨난 인간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해결책이 가능한지를
자신의 박학한 상식들과 다양한 전거들을 들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문장 편안하고, 글이 친절하다.
다음은 그 중 눈에 띄는 구절들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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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쪽 '속물근성snobbery'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20년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많은 대학의 시험 명단에서 일반 학생을 귀족 자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옆에 sine nobilitate(이것을 줄인 말이 's.nob.'이다), 즉 작위가 없다고 적어놓는 관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곧 근대적인 의미, 즉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을 속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경멸하려는 의도를 가진다는 것, 즉 그 사람의 조롱받아 마땅한 매우 유감스러운 차별행위를 묘사하기 위해 그 말을 사용한다는 것 또한 분명해졌다. 이 문제에 대한 선구적인 작업인 <속물에 관한 책 Book of Snobs>(1848)에서 윌리엄 새커리는 25년간 속물이 "영국에 철도처럼 퍼져나갔으며, 이제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어디를 가나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말 새로웠던 것은 속물근성이 아니라, 속물들의 그런 전통적인 차별행위를 이제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적어도 새커리 같은 사람들에게는--평등 정신이었다.
29쪽 그 이후 노골적으로 사회적 또는 문화적 편견을 드러내는 모든 사람, 즉 어떤 한 종류의 사람이나 음악이나 와인이 다른 것보다 분명하게 낫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을 속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자면, 속물이란 하나의 가치 척도를 지나치게 떠벌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35쪽 이 문제를 이해하려다 보면 결국은 두려움이 모든 일의 근원이라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59쪽 데이비드 흄은 <인성론 A Treatise on Human Nature>(에든버러, 1739)에서 이렇게 말했다.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 상태다. 일반 병사는 상사나 상병에게 느끼는 것과 비교하면 장군에게는 질투심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뛰어난 작가 역시 평범한 삼류작가보다는 자신에게 좀더 접근한 작가들로부터 질투를 더 받는다. 불균형이 심하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서 먼 것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거나 그런 비교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281쪽 그러나 울프는 쉽게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녀는 전형적인 정치적 전술을 구사하여, "도서관에 입장이 허용되지 않다니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하고 묻는 대신 "나를 들여보내지 않다니 도서관 문지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하고 물었다. 관념이나 제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은 당사자에게 묻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아니라 관념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수치감에 싸여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여자라는 것일까/피부색이 검다는 것일까/돈이 없다는 것일까]?"하고 묻는 대신 "나른 비난하다니 다른 사람들이 틀렸거나, 부당하거나, 비논리적인 것이 아닐까?" 하고 묻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무죄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질문이 아니라, 자연주의적인 관점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제도, 관념, 법은 어리석고 편파적이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