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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들은 무수히 쏟아지는 주변의 '언어'들을 들으며 나름대로 자신의 언어를 생성해 나간다. 

비분절화된 웅얼거림의 단계를 지나 소위 말문이 트이고 한마디 한마디 인간의 언어를 따라 배울 때는, 전적으로 청각영상의 모방에 따라 언어 습득이 이루어지는 듯 보인다.

어른들의 언어를 유사하게 모방하는 단계는 필수적이다. 자신의 귀에 들린대로 그들이 반응하는 것은 분명하다. 의미에 대한 자각이 전무하지만 그들은 그저 흉내내기를 통해 언어에 다가간다. 

 동요를 배울 때 이러한 무자각적 모방은 분명해 보이는데, 예를 들어 '달달 무슨달'을 '달달 무은달'로, '어디어디 떴나'를 '으디으디 엇나' 이런 식으로 그저 흉내만 내다가 점차 분명한 발음을 훈련하게 된다. 역시 의미와는 상관없는 단계가 오래 지속된다.

그런데 두돌이 지나고 이제 단어 차원의 모방을 넘어 sentence의 단계로 넘어가면서 아주 흥미로운 현상을 관찰하게 된다. 

 짱아가 가장 처음 구사할 수 있게 된 문장은 '물 더 줘'였다. 물론 '물, 또조' 이런 식으로 들린다. 아기에게 '또조'라는 말은 단지 물을 더 먹고싶을 때 써먹을 수 있는 하나의 음성기호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짱아뿐만 아니라 주변 아이들이 가장 먼저 인식하게 된 문장 성분은 주어인 듯 보였는데, 이를테면 뭘 할라치면 늘 '엄마가', '아빠가' 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엄마가 (해)(줘)', 아빠가 (해)(줘)'의 의미임은 분명하다. '누가?' 또는 '누가 그랬어?'라는 질문에서도 그 '누가'의 자리에 '엄마가', '아빠가', '훈이가'가 올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는 것 같다. 

 여기서 '가'는 문법적인 형태소로서의 주격조사에 대한 인식과는 전혀 무관하게 '누가'에서의 '가'를 단순히 덧붙인 것일 수도 있고, 어른들에게서 한단어로 발화되는 주어 즉 '엄마가 줄게', '훈이가 해봐'와 같은 문장 형태에서 빌려온 단순한 모방일 수도 있겠다.

 
문법은 교육을 통해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연발생적인 또는 학습자의 내재적인 언어습득체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가설에 힘을 실어주는 현상을 또 발견할 수 있다. 

 두돌 무렵부터 짱아가 많이 쓴 말은 '아저씨 이사 갔어'라는 문장이었다. 3월이 되어 동네에 이삿짐 나르는 사다리차 소리가 아침마다 요란하자 아이가 창밖으로 자꾸 손짓을 하면서 그 소리의 정체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때마다 '누가 이사가나봐' 또는 '누가 이사갔어?' 이렇게 재미삼아 물었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맨날 아파트 앞에서 만나는 경비 아저씨와 '이사갔어'라는 말을 결합시켜 '아저씨 이사 갔어'라는 문장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고 놀라운 것은 그 뒤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아빠 이사 갔어'(아빠, 이다 가또), '엄마, 이사 갔어', '훈이, 이사 갔어' 이런 문장들을 저절로 구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사갔다'가 어떤 행위나 상태에 대한 설명임을 지각한 뒤 그것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계열체들을 나름대로 교체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현상은 또 다른 무척 흥미로운 현상들과 결합한다.

'이사갔어?'라는 말꼬리를 올리는 의문형식의 발화를 아이는 '이사갔어'라는 말꼬리를 내리는 종결형 발화로 바꾸어놓을 수 있었다.

또한 '이사갔다'라는 기호의 의미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각이 싹텄음도 엿볼 수 있다. 즉 moving의 개념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아이는 이 말을 '현재 여기 없음', '보이지 않음', '부재함'의 기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빠가 회사를 가고 나서 집에 없을 때 아이는 '아빠, 이사 갔어'라고 말을 했으며, 엄마가 출장으로 며칠 집에 없었을 때 '엄마, 이사 갔어' 하고 화를 냈다.

매일 아침 이삿짐을 옮기는 사다리차는 눈에 보이지 않은 채 소리로서만 존재했으므로 아이에게 그것이 '사다리차 소리=>이사갔어=>부재함'으로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아이는 매일매일 배운 말들과 이를 통해 자기 내부에서 생성된 말들을 내뱉고 연습하고 강화하면서 흥미로운 언어의 폭발을 보이고 있다. 

 언어와 언어 습득이란 생각하면 할수록 참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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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아는 왼손잡이다. 아니 왼손잡이인 것 같다.

이제 두 돌 무렵이라 단언하긴 어렵지만 지금까지의 활동 양상을 보면 그렇다.

밥도 꼭 왼손으로 먹으려고 하고, 크레용도 왼손으로 잡으며, 공도 왼손으로 던진다.

세 살까지는 알 수 없다는 말도 있고, 아기들은 왼손 쓰는 걸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런데 이게 무슨 문제냐고? 물론 나도 머리로는 아무 문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근래 왼손잡이에 대한 재해석(?) 또는 재발견(?)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다.

  

아이가 왼손잡이 성향을 드러내면 대부분의 어른들은 걱정을 시작한다.

한마디라도 걱정을 거들지 않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얘가 왼손 잡이가 되려나보네, 왼손잡이라 어떡하냐, 오른손 쓰도록 차차 가르쳐야지 등등. 대체로는 '아이 돈 케케케케케케어~' 이러고 넘어가지만 내 마음속에도 아주 작게나마 파문이 이는 것이 사실이다.  

 

가끔씩 왼손에 쥔 숟가락을 뺏어 오른손에 다시 쥐어준다. 크레파스를 줄 때 일부러 오른손에다 준다. 어쩌다 오른손으로 뭘 하고 있으면 내심 반색한다.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도 자동반사적으로 아이는 왼손으로 왼손으로 다시 고쳐 잡으며 자기 성향을 고집스레 발휘한다.

 

왼손잡이에 대한 엄마의 걱정은 다른 무엇보다도 왼손잡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 또는 왼손잡이들의 삶의 고달픔 순전히 이런 것 때문이다. 왼손잡이는 소수이다. 많이 잡으면 15%라는 통계도 있지만 실상 우리 사회에서 왼손잡이는 매우 드문 존재이다. 원체 수가 적기도 하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왼손잡이를 '교정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왼손잡이였다가 교정받고 오른손잡이가 되었다거나 양손잡이가 되었다는 고백을 심심찮게 듣게 되는 건 아마 한국적 특성일 것이다.

 

왼손잡이들은 오른손잡이 편의로 된 세상에서 매사에 어려움을 겪는 데다 그것도 모자라, 뭘 하든 서툴다는 인상으로 각인되기 마련이다. 왼손으로 글씨를 어떻게 쓰냐, 왼손으로 칼질하면 금방 벨 것 같다 등등. 이래서 왼손잡이들은 오른손잡이들보다 스트레스를 훨씬 많이 받고 살고 수명도 짧다는 보고도 본 적이 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아이 키우는 것은 매사에 선택으로 이루어지고, 순간적인 선택이 많은 것을 좌우하기도 한다. 분유를 먹일까 말까, 예방접종을 맞힐까 말까, 아플 때 병원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부터 나중에는 사교육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등등 지긋지긋한 선택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왼손잡이인 아이를 놓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냥 내버려두거나, 양손을 다 쓰게 만들거나, 오른손잡이로 기어이 만들거나 이런 선택들이 있다.

 

양손잡이가 양쪽 두뇌를 골고루 써서 훨씬 바람직하다는 둥 말도 있지만, 사실 양손잡이들 가운데는 왼쪽 오른쪽이 헛갈리는 순간이 있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들은 오른쪽 깜박이를 넣어햐 하는데 왼쪽 깜박이를 넣는다든가 하는 실수를 소소하게 저지르고 산다. 좌회전으로 핸들을 돌려야 하는데 우회전으로 돌리는 큰 실수도 하지 말란 법은 없다. 이런 사람들은 백이면 백 강제로 교정된 왼손잡이들이다.

 

왼손잡일 가능성이 높은 내 아이를 나는 무리하게 오른손잡이로 교정할 생각은 없다. 그저 오른손이 퇴화하지 않게 조금씩 연습은 시켜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안되면 할 수 없고 되면 좋고 하는 마음으로. 

 

지금으로서 바람은, 적어도 초등학교 들어가서 선생님이 '글씨는 오른손으로 써야 해' 이렇게 강제하지만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더 두려운 것은, 훗날 나 자신 아이에게 '글씨는 오른손으로'를 외치는 엄마가 되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걸 경계하기 위해 포스팅 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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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왼손잡이였다가 오른손잡이로 개조되었는데 어린 시절에는 남들보다 왼손이 힘도 세고 더 잘 쓸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동안 잊고 있고 있었는데 가위질이며 운전이며 모든 것이 오른손잡이 위주로 되어 있다는 왼손잡이 학생의 발표를 듣고 왼손잡이로 사는 것이 정말 많은 일상적인 귀찮음을 동반하는 것이구나 깨달았지요. 불편하겠지만 나름 희귀하다는 이유로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하니까 넘 걱정마세요.

글쓴이 2010-02-09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그대가 왼손잡이였구려~ 왼손잡이였다가 오른손잡이로 개조당하지 않은 사람은 정말 찾기 어려운 듯 하구려..
 

우리 아이는 이제 돌이 막 지났다, 하지만  아이의 현재 연령과 상관없이 내 마음 속의 아이는 때로는 초등학생이 때로는 내 또래가 때로는 두살짜리가 되기도 한다.  그냥 내 마음대로 미래를 그려보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하면서 대비하는 것이다.   

집을 장만할 때 다소 조급하고 낭만적으로 구했던 터라, 거주하면서 이런 저런 문제들이 발생했다. 하지만 아이와 관련하여 이 집을 정말 잘 골랐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는, 일층이라는 점과 초등학교로부터 불과 2분거리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가끔 상상 속에서 아이는 늦잠자다 일어나다 학교에 달려가도 크게 늦지 않을 거리. 매일 지각과 싸워야 했던 나로서는 정말 흐뭇해지는 상상이다.  

하지만 요즘 뉴스를 보면 그 짧은 거리에도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매일 매일 그 길을 갈 것이고, 그 길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싹한 공포를 느낀다.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정겨운 것이 아니라, 공포의 원인이 된다는 건 정말 씁쓸한 일이다.    

나영이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후배가 말했다. "왜 요즘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걸까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이건 '요즘'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나영이 사건에 달린 수많은 댓글에 쏟아지는 고백들, 수많은 나영이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묻어뒀던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보여줬고, 네티즌들은 공감과 격려의 리플을 달았다.  그들은 예전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나 역시 묻어뒀던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나영이보다는 동네 노인을 250만원의 벌금형에 처하게 만든 초등학생 소녀의 것과 같은 종류의 기억이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싫지만 참았던 손길들, 말들, 눈길과 숨결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폭력인지도 몰랐고, 알았을 때에도 그 이야기를 듣고 고소해줄 엄마가 없었다. 엄마도 몰랐고, 모르는 게 약이었으니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유정이 분노했던 대상은, 성폭행 자체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들어주지 않았던 엄마였다. 하지만 그 엄마는 특정화된 개인이 아니라, 그 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성폭행의 상처들이 피해자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말해주고  싸워줄 이가 없었다. 

 

 나영이 사건을 이슈화하는 언론을 보면서,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비슷한 사건들을 발굴하여 보도하는 기사를 보면서, 나는 이제서야 눈 뜨는 사회가 너무 속상하고 그 개안이 한시적인 것일까봐 걱정스럽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성폭행의 피해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위험과 피해자이면서 침묵을 강요당해야 하는 억압을 감내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많은 나영이들이 이야기할 수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해줄 상시적인 창구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성추행은 새치기를 당하거나 누군가의 발에 밟히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고, 피해자들은 그런 일들의 피해자처럼  '그냥'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나영이들이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사회는, 더 많은 나영이가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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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5년간 버려진 성폭행 법의 참담한 실체 공개 - 2부
    from 낯선이름의 시선 2009-10-04 16:12 
    형법 제32장 강간과 추행의 죄 ------------------------------------------- 제297조 : (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제298조 : (강제추행)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299조 : (준강간, 준강제추행)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
 
 
 

나영이 사건이라는 검색어가 계속 인기검색어로 뜨길래  

나역시 봤고, 그 끔찍한 사실에 경악하며, 청원에도 서명했다.   

아직 아이와 함께 살지 않는 나지만, 너무나 공포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이 사건을 남일처럼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이라든가 <밀양> 때문에라도 

한동안 가장 극악한 범죄행위의 하나로 꼽혔던 것이 아동유괴와 살해였는데 

그 못지않은, 어쩌면 그보다 더 끔찍한 범죄가 아동성폭행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다.

 

네티즌들도 분노하고 있다고 한다.  

그덕에 뉴스에도 헤드라인으로 계속 뜨는 엄청난 이슈가 되어버렸다. 

 

그런데...그런데 말이다. 

그 사실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사명감의 네티즌들, 참 고맙긴 한데 

왜 그 퍼다 나르는 글이 죄다 그 성폭행자의 성폭행 과정, 내용에 대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치명적인 장애를 얻게 되었는지만을 알려도 될 것 같은데 

아이를 붙들어다 어떤 행위로, 어떤 과정으로 아이의 장기가 손상되었는지를 

너무나도 선정적인 묘사로 퍼나르고 있다.  

그 내용이 너무도 끔찍해서 몇줄 읽다 저절로 눈이 감겨버렸다.

 

이건..정말 그 아이를 위해서, 그 아이를 성폭행한 그 남자에게 분노해서 그런 건가? 

그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가 그 글들을 볼 때 고마워할까?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신고를 잘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떠올리기도 싫은 성폭행 당시의 상황을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진술하게 한다는 데 있다고 들었다. 

그 죄를 지은 자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그걸 다시 자기 입으로 하고, 상기하는 일은 

엄청난 수치심과 공포를 동반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조사하는 경찰이나 검찰은 그 사건이 그저 '사건'일 뿐이다. 

 

지금의 네티즌들도 '분노'라는 이름으로 

그들과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영이와 그녀의 가족들은 일파만파로 퍼져가고 있는 

나영이의 충격적 경험과 상처들에,  

한편으론 새로운 해결의 돌파구를 찾는 기분이 들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성폭력 사건 전말의 글귀에 

괴로울 것이다. 

 

나영이 사건을 본 많은 시청자들이 그 아이에게 후원을 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나영이 부모는 거절했단다. 

나영이네 집은 기초생활수급자로 형편이 매우 어렵고(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440168&cp=nv), 

나영이의 치료비로 앞으로도 많은 돈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도움을 거절했겠는가? 

그만큼, 나영이의 존재가 이런 방식으로 노출되는 것이 공포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나영이라는 여성도 앞으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니까.  

 

지금 그렇게 퍼 나르는 나영이의 경험들이 다시 나영이의 발목을 잡아선 안된다.

네티즌들이 정말...분노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냥 그들이 받은 상처와 결과만을 알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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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근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소재이기도 한, 소위 법 너머에서 또는 법에 '반하여' 행해지는 '개인적 복수'라는 것이 어떤 순간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고 가능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더군요. 저 부모들이 아이가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심정도 이해가 가지만,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만약 나였으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응징' 또는 '복수'했을 거라고-그자를 죽였을 거라고, 그런 생각만 드네요.

somun 2009-10-01 10:50   좋아요 0 | URL
네, 이해가 갑니다. 저도, 평소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쪽이지만, 나의 딸이 그런 일을 당한다면 신고고 판결이고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서 죽여버리고 싶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이런 일을 하는 자는 용서가 안될 것 같아요. 근데..어제 뉴스를 보니 별 도리가 없는 모양이네요, 법적인 절차상으론 돌이킬 수가 없는. 기껏해야 가석방을 못하게 하는 정도가 전부인 모양...법을 고쳐야 해요.
 

나는 여러모로 기대가 별로 없는 사람이다. 특히 나라가 우릴 위해 뭘 해줄 거라는 기대는 거의 가져 본 적이 없다. 내가 다닌 공립학교들은 집에서 뭘 가져오라면 가져오라고 했지. 우릴 위해 뭔가를 마련해 준 적이 없었다.  

 

우리는 매달 집에서 폐품을 바리바리 날랐고, 조금 가져오면 선생님의 눈총과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다닥다닥 4남매인 우리집은 나름 풍족한 가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황당하게 폐품이 모자라서 매달 눈치를 봐야했다.) 하여튼 달마다 무언가때문에 돈이나 쌀이나 기타 등등 가져오라는 게 많았다. 그 외에 국가랑 큰 관계를 맺어볼 기회가 없던 나로서는 그런 이미지가 쉽게 털어질리 만무했다. 

 

그런데 아이를 갖고는 보건소라는 곳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해준다는, 매우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철분제도 주고, 유아용품도 줄 때도 있고, 초음파 검사도 해준다고 했다. 교육도 해주고, 심지어 아이를 낳은 뒤 도우미를 보내주기도 한다고 했다. 놀라웠다.  

 

하지만 보건의사는 7개월까지만 검사해주니 나머지는 병원가서 알아보라고 했다. (근데 일반 병원에서는 만삭의 산모가 오는 것을 매우 기피한다. 핑계는 그 이전까지 검사기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사실은 돈이 안 되니까 그렇다.) 고형의 철분제는 나중에 탈크가 나왔다는 뉴스를 들어야 했다. (뭐 보건소의 잘못은 아닐 수 있다.) 가사 도우미는 예산부족으로 끊겼다.(정권이 바뀌고 예산 편성의 방향이 많이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보건소의 나른하고, 성의없는 진료에 신뢰가 가지 않았다. 초보엄마의 신경증이었을지도 몰랐다. 

 

아이를 낳고 나니, 예방접종을 무료로 해준단다. 아이가 나오고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한동안 병원을 다녔다. 사실 임신했을 때 갔었던 보건소의 분위기가 한 몫을 했다. 그런데 병원에 갈 때마다 몇 만원씩 깨졌다.  

 

아이가 돌이 지나고 이제 키우는데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돈이 아까웠다. 그래서 보건소 문을 두드려 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떤 것이 무료인지, 무슨 접종을 해주는지 몰라서 지식이 많은 친구들(지식인)에게 인터넷으로 상담을 했다. 결론은 각 구의 보건소마다 다르니 전화로 문의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르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으로 우리 구 보건소를 들어가보니 바보같이 돈내고 맞춘 예방접종들이 무료로 가능하다고 쓰여 있었다. 이런 이런...마침 뇌염접종을 해야 하는데 병원의 이십분의 일에 가까운 가격이어서 '옳타꾸나'했다. 하지만 전화해 보니, 현재는 백신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서 11월에나 전화해보고 오라고 한다.  

 

병원에는 사백신과 생백신으로 나누어 설명해주고 맞출 시기를 알려주었을 뿐 백신 수급에 대해서는 별 말은 없었었다. 보건소는 무슨 백신인지 알려주지도 않았고, 그 이전에 맞춘 예방접종과 얼마간의 차이를 두고 맞춰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아... 여전히 나른하고 무기력한 설명, 무지할 수록 아무 설명도 들을 수 없다.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엄마들에게는 난감함의 연속이다.) 

 

전화를 끊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모든 국민이 맞아야 하는 예방접종이라면, 그러니까 꼭 맞춰야 하는 것이라서  보건소에서 접종하는 것이라면 왜 일반 병원에서도 싼 가격에 맞출 수 없는 것일까? 의료 보험의 차원에서 처리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수급때문에 복잡하게 접종시기를 늦추거나 할 필요가 없을텐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건소의 업무부담이 줄어들지 않을까? 게다가 구마다 사람들이 걸릴 수 있는 질환이 다른 것도 아닌데, 무료 예방접종의 종류가 왜 다른 것일까? 우리 보건소에 수급이 부족하다는 그 백신이 다른 구 보건소에도 그럴까? 순간 출생신고를 하는 순간 몇 십만원을 쥐어 줬다는 어떤 구와 허접한 체온계를 쥐어준 우리 구가 떠올랐다. 

 

지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건소 업무까지 지자체의 예산편성을 따른다는 것은 좀 그렇다. 건강은 돈 없다고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보건소에 가려면, 풍족한 예산 편성이 된 지역에 살면서, 보건소에 열심히 전화해서 일정을 맞출 수 있고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너무 게으른 엄마일까? 갑자기 여러가지 의문과 자책과 불만에 휩싸이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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