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들은 무수히 쏟아지는 주변의 '언어'들을 들으며 나름대로 자신의 언어를 생성해 나간다. 

비분절화된 웅얼거림의 단계를 지나 소위 말문이 트이고 한마디 한마디 인간의 언어를 따라 배울 때는, 전적으로 청각영상의 모방에 따라 언어 습득이 이루어지는 듯 보인다.

어른들의 언어를 유사하게 모방하는 단계는 필수적이다. 자신의 귀에 들린대로 그들이 반응하는 것은 분명하다. 의미에 대한 자각이 전무하지만 그들은 그저 흉내내기를 통해 언어에 다가간다. 

 동요를 배울 때 이러한 무자각적 모방은 분명해 보이는데, 예를 들어 '달달 무슨달'을 '달달 무은달'로, '어디어디 떴나'를 '으디으디 엇나' 이런 식으로 그저 흉내만 내다가 점차 분명한 발음을 훈련하게 된다. 역시 의미와는 상관없는 단계가 오래 지속된다.

그런데 두돌이 지나고 이제 단어 차원의 모방을 넘어 sentence의 단계로 넘어가면서 아주 흥미로운 현상을 관찰하게 된다. 

 짱아가 가장 처음 구사할 수 있게 된 문장은 '물 더 줘'였다. 물론 '물, 또조' 이런 식으로 들린다. 아기에게 '또조'라는 말은 단지 물을 더 먹고싶을 때 써먹을 수 있는 하나의 음성기호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짱아뿐만 아니라 주변 아이들이 가장 먼저 인식하게 된 문장 성분은 주어인 듯 보였는데, 이를테면 뭘 할라치면 늘 '엄마가', '아빠가' 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엄마가 (해)(줘)', 아빠가 (해)(줘)'의 의미임은 분명하다. '누가?' 또는 '누가 그랬어?'라는 질문에서도 그 '누가'의 자리에 '엄마가', '아빠가', '훈이가'가 올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는 것 같다. 

 여기서 '가'는 문법적인 형태소로서의 주격조사에 대한 인식과는 전혀 무관하게 '누가'에서의 '가'를 단순히 덧붙인 것일 수도 있고, 어른들에게서 한단어로 발화되는 주어 즉 '엄마가 줄게', '훈이가 해봐'와 같은 문장 형태에서 빌려온 단순한 모방일 수도 있겠다.

 
문법은 교육을 통해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연발생적인 또는 학습자의 내재적인 언어습득체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가설에 힘을 실어주는 현상을 또 발견할 수 있다. 

 두돌 무렵부터 짱아가 많이 쓴 말은 '아저씨 이사 갔어'라는 문장이었다. 3월이 되어 동네에 이삿짐 나르는 사다리차 소리가 아침마다 요란하자 아이가 창밖으로 자꾸 손짓을 하면서 그 소리의 정체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때마다 '누가 이사가나봐' 또는 '누가 이사갔어?' 이렇게 재미삼아 물었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맨날 아파트 앞에서 만나는 경비 아저씨와 '이사갔어'라는 말을 결합시켜 '아저씨 이사 갔어'라는 문장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고 놀라운 것은 그 뒤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아빠 이사 갔어'(아빠, 이다 가또), '엄마, 이사 갔어', '훈이, 이사 갔어' 이런 문장들을 저절로 구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사갔다'가 어떤 행위나 상태에 대한 설명임을 지각한 뒤 그것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계열체들을 나름대로 교체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현상은 또 다른 무척 흥미로운 현상들과 결합한다.

'이사갔어?'라는 말꼬리를 올리는 의문형식의 발화를 아이는 '이사갔어'라는 말꼬리를 내리는 종결형 발화로 바꾸어놓을 수 있었다.

또한 '이사갔다'라는 기호의 의미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각이 싹텄음도 엿볼 수 있다. 즉 moving의 개념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아이는 이 말을 '현재 여기 없음', '보이지 않음', '부재함'의 기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빠가 회사를 가고 나서 집에 없을 때 아이는 '아빠, 이사 갔어'라고 말을 했으며, 엄마가 출장으로 며칠 집에 없었을 때 '엄마, 이사 갔어' 하고 화를 냈다.

매일 아침 이삿짐을 옮기는 사다리차는 눈에 보이지 않은 채 소리로서만 존재했으므로 아이에게 그것이 '사다리차 소리=>이사갔어=>부재함'으로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아이는 매일매일 배운 말들과 이를 통해 자기 내부에서 생성된 말들을 내뱉고 연습하고 강화하면서 흥미로운 언어의 폭발을 보이고 있다. 

 언어와 언어 습득이란 생각하면 할수록 참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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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낙태 근절을 위해 낙태 시술 병원들을 고발하고 정부에 엄격한 단속을 요구하고 있다. 

 
당신들 말대로 현재 낙태 시술이 불법이라는 것도 사실이고 엄정한 법 집행이 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생명을 없애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또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이들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그대들의 의도도 의심하지 않겠다. 
 

1) 그러면 그대들의 목적은 낙태 시술이 이 땅에서 사라지도록 하는 것인가? 
 

2) 아이를 가진 모든 여성들이 모두 다(모자보건법에 규정된 낙태 허용 사례-강간 임신이나 유전병 또는 근친상간 임신 등을 제외하고)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가? 
 

3) 그대들이 벌이고 있는 낙태 금지 운동과 고발 운동이 과연 현상 타개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가? 
 

그 문제가 되는 현상이란 이런 거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첫째. 낙태가 만연한 현실. 우리나라 낙태 건수는 2005년 조사된 것만 35만건이고 현재 많게는 50만건까지 추정하고 있다. 이게 순수한 '낙태 금지'와 엄격한 법집행과 처벌로 해결될 거라고 보는 건가, 정말로?


둘째, 미혼모 문제. 출산을 선택하는 미혼,비혼 여성들은 꾸준히 있어왔고 선진국처럼 늘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가진 한국 여성들은 당신네들 주장을 따르자면 크게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무조건 낳아서 이 척박한 땅에서 힘겹게 아이를 기르거나/자기가 낳은 아이를 버리거나, 아니면 음성적으로 야메로 시술을 받거나. 현재 한국에서는 그렇다. 당신네들이 이 모두를 책임지겠다는 건가?


당신들이 순진한건지 무식한 건지 도통 짐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당신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한다. 
 

낙태근절운동으로 낙태가 근절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설마. 그렇게 믿는다면 당신들은 대화의 여지도 없는 '바보'들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사창가 단속이랑 낙태시술 단속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법망을 피하는 길은 반드시 열리게 마련이다. 당신들 생각과 달리 인간들은 그렇게 단순하고 순진하지 않다. 이 정도는 당신네들도 모르지 않으리라고 믿기로 한다.


미혼모들이 고통받는 현실, 아이의 임신과 출산에서 전적으로 여자만이 모든 짐을 떠안게 되는 현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대들은 아이를 포기하는 것보다 낳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며 아이를 낳으면 길은 열릴 것이라고(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주장을 왜 이런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생각해 봤는가? 

순간의 실수로 또 무지로 아이를 임신한 여성들이 낙태를 선택한다고 해서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이 의사들인 당신들이 역시 한 생명인 이 여성들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정당하고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하는가? 태아의 생명은 그토록 소중히 여기면서 이 여성들에게는 왜 그렇게 가차없는 태도를 취하는지알 수 없다. 낙태를 하지 말라는 건 곧 낳으라는 이야기이므로 가차없는 몰아붙이기에 다름 아니다.

당신들의 그 엄정함의 가면을 쓴 공격성과 무자비함은 당신들이 도외시하고 있는 한 생명을 궁지로 또 사지로 몰 수도 있다. 


이상의 질문들에 대답을 할 수 없는 한, 아무리 여론 조사에서 낙태 반대가 찬성을 앞지르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당신들의 행위는 결코 지지받을 수 없을 것이다.

 
부디 사창가 단속한다고 막대한 인력과 예산과 시간을 낭비한 '풍속의 수호자'들 꼴 나지 않기를. 태아는 생명이며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원칙론은 집어치워라. 그런 누구나 입에 올릴 수 있는 원칙만 고집하지 말고 제대로 된 그리고 현실성 있고 가능한 대책을 논의하는 데 힘을 보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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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10-03-0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news.donga.com/Column/3/04/20100307/26668271/1&top=1 이 글도 도움이 되네요.
낙태와 성매매특별법은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전자에 대한 현정부의 정책이나, 노동부장관의 발언은 어이상실이며, 천박함을 보여주는 증표라고 생각하지만, 성매매특별법은 '막대한 인력과 예산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국가가 표면적으로는 성매매에 반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현실적인 대응방안이 뒤따라야 되겠지만요. 반면 낙태에 대한 반대는, 훨씬 더 공적으로 논의가 있고,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고서야 판단되어야 될 것인데, 이 정부는 마구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인 것 같아요.

녹두 2015-01-18 13:3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낙태는 뱃속아이를 죽이는거임
즉 남의 주권을 침해하고 해끼치는거지
매춘은 어느누구에게도 해끼친거없고 주권침해한거없음
도대체 뭔소릴하는건지
뇌가 어뜨케되잇는건지
사고능력이 있는 인간이긴한건지

기인 2010-03-07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도 성매매와 출산이 어떻게 기저에서는 연관되는지도 말하고 있어서 흥미롭네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37093&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2

기인 2010-03-07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는 제 생각이랑 비슷한 기사. 노동부 장관이 정말 '저출산'이 '국가'를 위해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저는 이 생각에도 별로 동의하지 않지만, 아이는 사회, 국가적 책임임을 인지해야 하겠지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34715&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2

녹두 2015-01-18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대체 먼소릴하는건지 뱃속에 있는 아이라고 멋대로 죽여도 되고 죽일수잇다는건 무슨 근거로 하는소리??
 

대학 '신오리(신입생오리엔테이션)'때 둘쨋날 쯤이었나. 그 당시 가장 사회적 이슈였던 우루과이 라운드의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할 시간이 주어졌었다. 선배들은우루과이 라운드를 '논술'로만 배운,  뭣도 모르는 '공부기계' 1학년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해 보자고 했다. 이 시간은 신오리랍시고, 다짜고짜 버들골로 데려가 어색해하는 '새내기'들에게 춤과 민중가요를 가르치고, 갑자기 "역사는 쪽수다"와 같은 구호를 외치게 강요하는 것 만큼이나 폭력적이었다. 무슨 유인물 한장씩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 뒤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이 '사안'에 대해 '얘기해 보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 중 소심한 (부르주아) 범생이였던 내 동기 하나가 '별로...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했다가 '공부좀 해라', '사회에 대해 고민좀 해라'라는 소리를 듣고 울고 말았다.

 

그런 핀잔을 한 학번 위인 선배가 대놓고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나 그런 선배 앞에서 '감히'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할 수 있었던 것도 94년이기에 가능했지 않을까? 그 어정쩡함의 시기가 바로 94년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운동권' 선배들이 무서웠고, 더 마음 깊은 곳에서는 싫었던 것 같다. 그들이 자주 언급하는 '진정성'이라는 단어에 한편으로는 부채의식을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론 '정말 너희는 진정성이 있냐?'라는 반발심이 들었었다.

 

그런데 그때의 내 '마음'은 아마도 나 개인의 감정만은 아니었나보다. 87년체제와 97년 체제 사이의 중간쯤인 94년에  내게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건 어쩌면 그게 사회의 마음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 이 책, <마음의 사회학>을 읽고 보니.

 

사회학자(문학사회학 전공)이자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이기도 하다는 저자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 이 책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종교-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심이나, 근대 인식론이 이야기하는 마인드, 그리고 근대 심리학이 육체와는 다른 심적 활동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는 사이키가 아니"라, "뒤르켐의 '집합표상', 베버의 '정신', 푸코의 '에토스', 토크빌의 '습속', 아날학파의 '심성',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정서구조'와 같이 사회학의 방대한 전통 속에 이미 존재하는, '집합적 마음의 구조화된 질서'라는 의미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7)

"'마음의 사회학'은 고전과 현대 사회학의 다양한 이론적 기초들을 아우르면서 문화, 문학, 예술사회학, 사회심리학, 정신분석학, 사회운동론, 사회사를 가로지르는 트랜스적 탐구과제의 새로운 이름으로 이해"(8)해 달라는 것이 저자의 당부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 '마음의 레짐'에서는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중요한 규범적 동력이었던 진정성의 구조, 기원, 소멸을 탐색한다. 진정성은 우리 사회의 지배적 주체 형성 기제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97년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급격하게 약화되어간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마음의 레짐을 나는 스노비즘과 동물화의 경향에서 발견한다. 제2부 '마음의 풍경'에서는 '문화적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특수한 풍경들을 추출하여 이를 분석한다. 나는 풍경과 파상력의 개념을 사회학적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찰성, 멜랑콜리 그리고 카이로스적 시간성을 각각 살핀다. 제3부 '마음의 징후'에서 나는 다양한 문학, 예술 텍스트들을 사회적 마음이 표현하는 징후들로 파악하고, 그런 징후들을 해독함으로써 사회의 마음을 추론하고자 하는 사회학적 비평의 가능성을 타진한다.(이상, 김수영, 미래파, 하루키, 오즈 야스지로 등)"

 

3부의 경우는 개별 텍스트에 대한 비평의 글이어서 일단 패스하고, 1, 2부만 먼저 읽어보았는데, 재미있다.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는데, 번역투가 거의 없고, 시인이라 그런지 문장이 깔끔하면서도 명확하다. 그래서 다양한 이론가들이 등장하고 여러가지 복잡한 개념들에 대한 설명임에도 불구하고 술술 잘 읽힌다. 특히 1부의 경우에는 우리 사회의 현 시점의 문제들, 피부에 깊숙히 와닿는 '우리'의 이야기들과 사회학의 이론이 절묘하게 만나고 있어 돋보인다. 2부는 1부에 비해 다소 어렵다. 이론중심적인 부분으로, '문화적 모더니티'라는 개념(사회적 모더니티의 지배적 가치들에 저항하는 미적 기획:215)을 중심으로 (지식)사회학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이 책에는 이 시대의 사회, 문화, 문학을 바라볼  매우 유용하고도 예리한 개념 도구들을 다수 제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진정성/포스트-진정성, 마음의 레짐,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 미국적 동물/일본적 속물, 스놉, 스노보크라시, 모럴/윤리, 풍경, 파상력, 사회적 모더니티/문화적 모더니티, 멜랑콜리의 전략, 세계관/세계상/세계감, 진보의 역사철학/순간의 역사시학 등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지금-여기를 설명하는 진정성 체제와 포스트-진정성 체제에 대한 것. 그 '마음의 레짐'의 이행기에 일어나는 변화들에 대해 이미 몇몇 학자들이 잘 말한 바 있지만, 김홍중의 분석방식 역시 흥미롭다. 코제브의 개념을 가져와서 미국적 동물과 일본적 속물 속에 들어 있는 '타인지향성'을 설명한 것이나(75) '포스트 진정성 체제'의 신자유주의적 생존주의 방식에 대해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경제적 생존'(경제 행위의 건강성이 상실된 상태에서 불안을 동력으로 추진되는 병든 노동, 가령 '일중독'),'사회적 생존'(무차별적 과시가 지배하는 왜곡된 인정투쟁 공간에서의 성공지상주의, 입신출세주의, 속물주의)'생물학적 생존'(건강하고 장수하는 삶을 신성화하고 상품화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오직 육체적 조건으로 환원시키는 '무차별 건강주의')(66)로 논하는 부분 등에서는 내 연구에 필요한 중요한 영감도 얻었다.

 

또한 사회학자이면서 문학평론가인 저자 답게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론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한 부분도 흥미롭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선 어딘가 찜찜하기도 했다. 근대문학이 끝났다...고 한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비판하고, "가라타니의 논의는 이 시대의 근본적 모순에 대한 ‘해답’이 아닌 ‘질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의 종언론은 문학과의 결별을 촉구하는 언명이 아니라 ‘문학이 불가능한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문학의 정신과 윤리와 열정을 갱신하고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 질문을 통해서 문학의 운명은 이제 문학의 영역을 벗어나 비판적 관심과 지향을 갖고 있는 다양한 담론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문학과 비판적 지식체계는 운명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운명 공동체의 한 성원이 사회학이다.(133)"라고 진술한 부분은, 과연 가라타니의 의견과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잘 이해가 안간다. 가라타니 고진 역시 문학에 대한 기대는 접었으나 문학 외부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운동과 실천은 지속될 수 있다고 보았(110)지 않은가? 나의 해독력의 문제인가?

 

그리고 파상력 개념(부재하는 대상을 현존시키는 힘인 상상력과는 반대로, 현존하는 대상의 비실체성 혹은 환각성을 깨닫는 힘. 파괴적 성격’의 소유자는 과거의 모든 사물, 가치, 장애물, 유습 등을 파괴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자(벤야민)(180-181) 벤야민적 사유의 저류를 구성하는 파상력은, 근대의 사회, 경제, 문화적 차원을 공통적으로 관류하던 일종의 파괴적 역동성을 그 모태로 한 것.(207) 파상력의 어머니는 바로 근대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근대는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듦으로써, 모든 환(幻)을 멸(滅)함으로써 그리고 성스러운 것들의 초월적 후광을 제거하고 신비의 베일을 벗겨냄으로써, 파상의 실제 공간을 창출하기 때문이다.(208))이나 멜랑콜리의 전략(237)은 20세기 초의 문화와 담론 설명에 유용할 개념인 듯 하다. 

 

한편 사회적 모더니티와 문화적 모더니티 개념-"근대가 창출한 사회적 모더니티가 국민-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시민사회를 축으로 하는 공적 제도의 영역에서,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 없는 전문가’와 ‘가슴 없는 향락자’들을 양산했다면, 사회적 모더니티의 지배적 가치들에 저항하는 미적 기획에 다름 아닌 ‘문화적 모더니티’는 진보하는 부르주아의 공적 세계가 엄폐한 사적 공간에서 되살아난 우울의 신 사투르누스의 힘에 복속된 ‘토성의 아이들’을 탄생시켰다. 사회적 모더니티는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외적 자연을 탈마법화시키고, 열정을 이해로 변신시킴으로써 인간의 내적 자연마저 정념의 마성으로부터 해방시켰으나, 문화적 모더니티는 이러한 해방의 아이러니한 결과에 다름 아닌 환멸감 속에서 죽은 고대의 신에 다시 사로잡힌다. 역사적이고 집합적인 파토스의 차원에서 보자면, 근대인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우울자들을 비호하는 사투르누스였다...멜랑콜리는 문화적 모더니티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적 코드이며, 대다수의 문화적 산물들의 심정적 배경을 구성하는 문화해석학적 열쇠이다.(215-216) 문화적 모더니티와 사회적 모더니티의 구분은 문화와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시차에 근거하고 있다."(244)

--은 도식적이어서 명징하기는 하나 과연 이러한 구분이 가능한 것인지, 문화적 모더니티를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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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아는 왼손잡이다. 아니 왼손잡이인 것 같다.

이제 두 돌 무렵이라 단언하긴 어렵지만 지금까지의 활동 양상을 보면 그렇다.

밥도 꼭 왼손으로 먹으려고 하고, 크레용도 왼손으로 잡으며, 공도 왼손으로 던진다.

세 살까지는 알 수 없다는 말도 있고, 아기들은 왼손 쓰는 걸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런데 이게 무슨 문제냐고? 물론 나도 머리로는 아무 문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근래 왼손잡이에 대한 재해석(?) 또는 재발견(?)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다.

  

아이가 왼손잡이 성향을 드러내면 대부분의 어른들은 걱정을 시작한다.

한마디라도 걱정을 거들지 않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얘가 왼손 잡이가 되려나보네, 왼손잡이라 어떡하냐, 오른손 쓰도록 차차 가르쳐야지 등등. 대체로는 '아이 돈 케케케케케케어~' 이러고 넘어가지만 내 마음속에도 아주 작게나마 파문이 이는 것이 사실이다.  

 

가끔씩 왼손에 쥔 숟가락을 뺏어 오른손에 다시 쥐어준다. 크레파스를 줄 때 일부러 오른손에다 준다. 어쩌다 오른손으로 뭘 하고 있으면 내심 반색한다.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도 자동반사적으로 아이는 왼손으로 왼손으로 다시 고쳐 잡으며 자기 성향을 고집스레 발휘한다.

 

왼손잡이에 대한 엄마의 걱정은 다른 무엇보다도 왼손잡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 또는 왼손잡이들의 삶의 고달픔 순전히 이런 것 때문이다. 왼손잡이는 소수이다. 많이 잡으면 15%라는 통계도 있지만 실상 우리 사회에서 왼손잡이는 매우 드문 존재이다. 원체 수가 적기도 하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왼손잡이를 '교정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왼손잡이였다가 교정받고 오른손잡이가 되었다거나 양손잡이가 되었다는 고백을 심심찮게 듣게 되는 건 아마 한국적 특성일 것이다.

 

왼손잡이들은 오른손잡이 편의로 된 세상에서 매사에 어려움을 겪는 데다 그것도 모자라, 뭘 하든 서툴다는 인상으로 각인되기 마련이다. 왼손으로 글씨를 어떻게 쓰냐, 왼손으로 칼질하면 금방 벨 것 같다 등등. 이래서 왼손잡이들은 오른손잡이들보다 스트레스를 훨씬 많이 받고 살고 수명도 짧다는 보고도 본 적이 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아이 키우는 것은 매사에 선택으로 이루어지고, 순간적인 선택이 많은 것을 좌우하기도 한다. 분유를 먹일까 말까, 예방접종을 맞힐까 말까, 아플 때 병원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부터 나중에는 사교육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등등 지긋지긋한 선택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왼손잡이인 아이를 놓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냥 내버려두거나, 양손을 다 쓰게 만들거나, 오른손잡이로 기어이 만들거나 이런 선택들이 있다.

 

양손잡이가 양쪽 두뇌를 골고루 써서 훨씬 바람직하다는 둥 말도 있지만, 사실 양손잡이들 가운데는 왼쪽 오른쪽이 헛갈리는 순간이 있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들은 오른쪽 깜박이를 넣어햐 하는데 왼쪽 깜박이를 넣는다든가 하는 실수를 소소하게 저지르고 산다. 좌회전으로 핸들을 돌려야 하는데 우회전으로 돌리는 큰 실수도 하지 말란 법은 없다. 이런 사람들은 백이면 백 강제로 교정된 왼손잡이들이다.

 

왼손잡일 가능성이 높은 내 아이를 나는 무리하게 오른손잡이로 교정할 생각은 없다. 그저 오른손이 퇴화하지 않게 조금씩 연습은 시켜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안되면 할 수 없고 되면 좋고 하는 마음으로. 

 

지금으로서 바람은, 적어도 초등학교 들어가서 선생님이 '글씨는 오른손으로 써야 해' 이렇게 강제하지만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더 두려운 것은, 훗날 나 자신 아이에게 '글씨는 오른손으로'를 외치는 엄마가 되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걸 경계하기 위해 포스팅 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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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왼손잡이였다가 오른손잡이로 개조되었는데 어린 시절에는 남들보다 왼손이 힘도 세고 더 잘 쓸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동안 잊고 있고 있었는데 가위질이며 운전이며 모든 것이 오른손잡이 위주로 되어 있다는 왼손잡이 학생의 발표를 듣고 왼손잡이로 사는 것이 정말 많은 일상적인 귀찮음을 동반하는 것이구나 깨달았지요. 불편하겠지만 나름 희귀하다는 이유로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하니까 넘 걱정마세요.

글쓴이 2010-02-09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그대가 왼손잡이였구려~ 왼손잡이였다가 오른손잡이로 개조당하지 않은 사람은 정말 찾기 어려운 듯 하구려..
 

그랜토리노

 

늙어서 무용하고 의미 없는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는 주로 남성들이 가진 것이라 한다. 그들은 ‘고독한 영웅’으로 죽기를 바란다. 조한혜정ㆍ우에노 치즈코의 <경계에서 말한다>에서는 이를 ‘노년의 삶 자체’ 또는 ‘여성’의 입장에서 비판하며, 벽에 X칠하며 사는 것도 ‘다른 인생’이며 가치로운 것이라 말했다.(그런데 한 정신과 의사에게 물으니 치매에 걸려 의식이 퇴화된 노인 스스로가 행복한지 어떤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한다.)

 

노년의 삶을 다르게 긍정하는 이런 여성학자들의 관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남성들의 그같은 바람도 결코 비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고독한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잘’, ‘폐 끼치지 않고’, ‘의미있게’, 그리고 ‘확’ 죽는 것 말이다. <그랜토리노>가 바로 이런 문제를 다룬 영화였다.

 

(<밀리언달러베이비>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랜토리노>도 인생의 궁극점들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용서받지 못한 자> 이래로 죽 이어진) ‘죄의식+구원’에 관한 테마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구원은 어디까지나 ‘자기 구원’이다. 그래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의미가 있다. 구원은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거나 기도 몇 마디가 아니라, 투쟁하고 수행해야 이뤄진다. 그래서 불교는 기독교보다 우월하다.

 

<밀리언달러베이비>에서도 그랬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이 특별한 노인은 제대로 늙고 죽기 위한 몇 가지 근본적 방법론을 사유하고 있다. 노인은 수행하고 있는 인간이자, ‘먼저 살아낸 인간’으로서, 젊은이들이 처한 고난에 진심으로 연민을 느낀다. 그런데 노인은 자기가 살아온 세상 자체가 여전히 비참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음을 절감한다. 그곳은 젊고 맑은 영혼이 살기에 적절하지 않다. 그리고 노인은 무력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노인은 제대로 된 그 연민을 진정한 자기 구원의 한 방편으로 삼는다. 그때 구원은 깊은 자기성찰로부터 뿐 아니라, 과감한 연대의 실천행동에 있는 것이다...

 

<밀리언...>에서처럼 외롭게 사라지지 않고 <그랜토리노>의 영감님은 너무 멋있게 죽는다. 그래서 외려 지나치다는 느낌까지 준다. 하지만, 노인들이 이런 희생과 영웅의 길을 택한다 하면 세상은 다른 곳이 되지 않을 수 없다.(갑자기 강우규의 죽음이 떠오른다.) 경험적으로 관찰해봤을 때, 대부분의 한국 노인은 지혜, 신중, 관용 같은 가치의 담지자가 아니라, 퇴행, 고집, 꼴통, 우익, 신자유주의, 이명박, 특권, 소통불가, 비겁 같은 것들의 수호자들이었다.

 

***

 

그런데, 실제로 아무 쓸 데 없는 늙다리가 되는 일 자체가 주로 남성에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권위적이고 지위가 높아서, 사회적ㆍ사적으로 ‘강한 남성’이었을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다. 제 밥 한끼 스스로 차려 먹을 줄 모르는 그들은 잃어버린 권력과 권위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시대착오’를 범하면서도 절대 성찰하지 않는다.(늙으면 반성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은, 전두엽이 점점 화학적ㆍ물리적으로 굳어서 생기는, ‘세포 수준’의 일이라고 한 의사는 말하기도 했다. 즉, 반성할 줄 모르는 그것이 바로 ‘늙음’이라는 것.) 이럴 때 노인이란 사회의 암종 비슷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노인이 되었다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정말 궁극의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자랑스러운 연세인’ 서정갑 대령은 좋은 사례를 제시한다. 기사를 보니, ‘60년대 학번들’이 그를 ‘자랑스런 연세인’으로 뽑았다 한다. 여기저기서 뒷방 차지가 돼 가고 있는 ‘60년대 학번들’의 딱딱해져가는 뇌세포가 걱정된다. 그리고 기회가 있다면, ‘자랑스런 XX인’ 같은 상 자체를 폐기하는 데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다. 

움직이는 정신, 바뀌는 마음들(changes http://blog.naver.com/heutek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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