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부모님은 '안녕'하신가? 한 해가 또 바뀌고, 내 나이가 한 살 더 먹으면서 드는 수많은 걱정 중 하나는, 그만큼 부모님도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게 된 지 몇 년 되면서 나도 조금씩은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냉정'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아마도 따로 떨어져 살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의존하는 것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보다 상실감이 조금은 덜할 것이라, 짐작만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진정한 '준비'같은 건 불가능할 것이다. 여전히 부모님의 건강은 늘 걱정스러운 것이고, 부모님의 '안녕'은 무엇보다도 오래도록 기원하는 일이다.
난 아직 망자(亡者)의 몸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죽음'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하수'인 셈이다. 스스로는 고사하고, 타인의 죽음 앞에도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이런 내가 결국,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될, 사랑하는 사람 혹은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 나갈 수 있을까?
<편안한 죽음>은 페미니스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 중 한 명인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쓴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전소설이다. 욕실에서 넘어져 대퇴골 경부골절을 당한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가 우연히 암 말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어 4주간의 투병 끝에 숨을 거두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며 행한 일, 생각한 것, 느낀 감정을 섬세하게 적어내려가고 있다.
시몬느는 유명한 작가, 학자라는 점에서 어머니의 자랑거리였지만, 그녀의 사생활이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그녀가 종교를 갖지 않으려 한 점 등 때문에 두 모녀는 그다지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망한 나이는 일흔 일곱이었고, 그때 시몬느의 나이 역시 벌써 쉰 다섯이었다. '살 만큼 산', '죽을 때가 된' 어머니라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었고, 시몬느 역시 '어른' 중에서도 꽤 '지긋한' 연세의 어른인 셈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느에게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죽음과는 다른 그 무언가가 있었다.
시몬느는 몇 번의 고비를 넘겨가며 가까스로 생명을 이어 나가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 그렇게 겨우겨우 연장된 4주간의 시간동안 그동안 묵혀 놨던 어머니와 자신 사이의 갈등을 풀고 화해를 요청하며, 어머니의 생애를 '어머니'가 아닌 한 '여자', '사람'으로서 이해해 나간다. 그 4주는, 삶의 연장이기도 하겠지만, 어머니 자신에겐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딸들에게는 그 시간이 유예기간이었고, 어머니에게도 그간 소원해졌던 딸들이 자신 곁에 돌아와 있는 것에 기뻐 행복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대체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거쳐 어머니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시몬느는 실존주의자 답게, 이 과정을 통해 어머니뿐 아니라 인간 전체의 죽음의 문제를 성찰하며 끝을 맺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의학의 폭력성에 대한 서술도 자주 보인다. 의사들의 환자와, 환자보호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의 냉정함, 권위주의가 시몬느와 그녀의 가족들을 종종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의사들의 결정과 권유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무력감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환자(와 환자 보호자들)의 비극적 '숙명'이다. 한번씩이라도 '병원에 반대'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공감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의 대부분에 공감과 동의를 표하게 되지만,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게 하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시몬느 자매가 어머니에게 끝끝내 어머니의 병명과 남아있는 수명에 대해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잘 동의가 되지 않는다. 딸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의 시간이 필요했듯, 어머니가 아무리 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보였다 하더라도, 그녀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끝끝내 딸과 의사들의 거짓말에 속아 부질없는 희망으로 그 고통을 감내해 가며 그저 죽음을 지연시키기만 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단 하루를 살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납득하고, 누리고, 마무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결국 삶과 죽음은 누구도 함께해주지 못하는 철저히 단독적인 일이라는 걸 아는 시몬느가, 왜 함부로(?) 어머니의 삶과 죽음에 '거짓말'로 개입했을까? 그런 점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편안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시몬느 본인 위주의 해석은 아닐까?
아래는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구절들-----
35~37쪽) 어머니의 잠옷이 벌어져서 어머니의 우글쭈글하고 잔주름이 많은 배를, 그리고 털이 하나도 없는 치골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였다.(...)/어머니의 성(性)을 본다는 것은 내게 충격이었다./어떤 몸이든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은 없었다. 어릴 때 나는 몸을 좋아했다. 사춘기가 되자 몸에 대해서 나는 일종의 불안한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몸이 혐오감을 주면서 또 성스런 느낌을 주는 이중성, 곧 금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어쨌든 난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인 육체에 대해 이렇게 심한 불쾌감을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어머니의 무관심한 그 태도 때문에 나는 더욱 놀라웠다./어머니는 평생 동안 당신을 억눌러 왔던 금기 사항이나 금지된 것을 버렸다. 나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인정했다. 다만 그런 식으로 포기함으로써 그야말로 갑자기 오로지 육신에 지나지 않는 그 육신은 시체 따위와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어떤 방어도 하지 못한 채, 직업적인 손이 만지고 다루는 그 불쌍한 몸뚱이, 거기에는 이제 단지 무모한 관성만이 생명을 지탱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살아있는 존재였다. 나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언젠가,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어머니의 죽음은 그 탄생처럼 내가 알 수 없는 신비의 시간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혼자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나이라고 중얼거려 본 적도 있지만, 그것은 다른 많은 말들처럼 아주 공허한 말들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어머니 모습에서 이제 곧 다가올지도 모를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다.
126)때때로 환자들이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그 주변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데 화가 나서 '나라면 환자를 죽이겠어요'하면서 분개하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그런 일을 겪자 나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사회적 도덕에 굴복한 대신 나 자신의 도덕을 부정했던 것이다. 사르트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지. 당신은 의학 기술에 굴복한 거지. 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사실 그렇다. 전문의사들이 내린 진단과 예측과 결정에 대해 우리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환자는 의사들의 소유물이 되었다.
169)무엇보다도 우리가 고통스러워 한 것은, 어머니가 겪는 임종의 고통을 보다가, 다시 또 의식을 차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모순된 감정이었다. 고통과 죽음이 경주를 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차라리 죽음이 먼저 와 닿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었다./하지만 어머니가 아무런 의식도 없는 얼굴로 잠이 들면 우리는 하얀 평상복 위에 시선을 늘어뜨리고는 어머니 시계를 매어둔 검은 리본이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마지막 경련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가슴이 딱 멎는 듯 고통스러웠다.
173)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살아서, 의식이 있는 상태였지만, 자신이 살아있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전혀 모르고 거기 있었다. 우리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야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 몸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마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배, 부스럼, 흘러내리는 배설물, 푸르스름한 피부색, 살갗에서 흐르는 액체 따위에 대해 어머니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거의 마비가 되다시피 한 두 손으로는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볼 수도 없었고 사람들이 부축해 줄 때면 머리가 뒤로 꺾어졌다. 거울을 달라고 하는 때도 이제 없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모습을 한 자신의 얼굴은 존재하지도 않고 있었다.
183)어린애 같은 어머니 목소리를 들으니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어머니는 철저히 혼자였다. 나는 어머니를 만져보고 어머니에게 말을 하지만 어머니의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210)나에게도, 더구나 어머니에게도, 종교가 죽음 뒤에 오는 행복에 대한 희망일 수는 없었다. 영원불멸이라는 것이 천국에서 이루어지든 지상에서 이루어지든, 삶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영원불멸이 죽음에 대한 위로가 될 수는 없다.
213)우리에게 소중한 사람 누군가가 사라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계속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고통스런 가책을 수없이 느끼게 된다.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그만의 유일한 단독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는 그가 없음으로 인해 완전한 무(無)가 되기도 하고 그가 있음으로 인해 온전히 존재하기도 하는 세계마냥, 거대한 존재가 된다./우리에게는 그가 우리 삶 속에서 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했어야 했던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그도 다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주는 어지러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도, 심지어는 자신이 처해 있던 한계가 분명하더라도, 자신이 최선을 다할 수는 없기 때문에, 항상 우리 자신에게 많은 비난의 여지가 남아있게 된다. 어머니에 대해서 우리는 죄가 많다. 특히 그 말년에 우리가 어머니를 소홀히 하고 등한시하고 피해왔기에 더욱 그렇다.
225)잠깐 동생이 흐느껴 울었다./"한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나도 엄마처럼 저 속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사실이야. 그게 아니라면 너무 말도 안돼."하고 그 아이가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가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장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불행한 사실은 누구나 똑같이 겪게 될 이 일을 우리는 각자 혼자서 겪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자신이 회복되어 가는 줄 알고 있던 그 고통의 시간에 우리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철저히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239)'그 사람도 죽을 나이가 됐지'하는 말. 노인들의 슬픔, 노인들이 쫓겨가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도 죽을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도 어머니에 대해서마저 그런 상투적인 말을 쓴 적이 있다./ 사람들이 일흔이 넘은 자기 부모나 조부모가 숨을 거둔데 대해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쉰 살이나 된 여자가 자기 어머니가 죽었다고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나는 그 여자가 신경과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차피 죽을 운명일 테니까. 여든 살이면 그야말로 죽어도 좋을 만큼 많은 나이가 아닌가....../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람은 태어났기 때문에, 또는 다 살았기 때문에, 늙었기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죽는다.(......)자연사란 없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어떤 일도 결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세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비록 그가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 지라도 그것은 부당한 폭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