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적지 않은 수의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시술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모임'(진오비) 회원들로 680여 명의 산부인과 의사가 모였다고 한다. 산부인과 의사(개원의만인지 전체인지는 불분명)가 3000~4000명이라 하니 대다수는 아니어도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이다.
숫자도 숫자지만, 분만실을 운영하지 않는 대부분의 산부인과가 불법낙태시술 수입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 비춰볼 때, 이런 '운동' 자체가 매우 충격적인 일임은 분명하다. 정부나 보건 당국에서도 모른 채하며 묵인하고 있는 마당에, 간단하게 큰 돈을 벌 수 있는 마당에, 괜히 나섰다가 산부인과 문을 닫아야 할 판에, 그들이 왜 그랬을까? 쉽게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그래서 우습게도 카톨릭교 배후설이나 정부 배후설(출산율 제고)까지 나오는 모양이다.
미리 밝히자면, 나는 낙태 찬성론자이다. 물론 이 선언에는 단순히 찬성론자/반대론자를 따지기에는 좀 복잡하고 모순적인 속내가 있다. 나 자신은 앞으로 결코 낙태를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는 나의 자기선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출산이든 낙태든 그 선택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으로서 보장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다시 말해 내가 하든 하지 않든 무관하게 누군가가 그것을 행할 권리는 보장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낙태가 야매로 또 음성적으로 행해져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보면 낙태 찬성의 입장은 산부인과의 의료기술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여성의 주권 행사를 위해 산부인과의 과잉진료와 폭력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한편, 또한 낙태가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의 행사'라는 원칙을 고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역시 의술과 의료행위에 대한 자기의 주권 행사라는 점에서 결국 일맥상통하다고 보는 것인데, 나는 내 몸의 주인이기 위해 의술을 거부할 권리도 그것을 이용할 권리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산부인과 의사들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들은 이 사회의 암묵적 승인과, 많은 '당사자들'의 요구에 편승해 낙태를 오랫동안 시행해 왔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고 불법이라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어떤 이들이 스스로 나섰다. 병원 입구에 "낙태수술을 하지 않습니다"라는 팻말을 걸고, 진정으로 사활을 건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필사의 선택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정말로 그들(병원)은 망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평균 20건 씩 낙태수술을 해왔다는 의사들의 증언이 나오고, 일 년에 행해지는 낙태 건수가 30만 건이 넘는다는 통계도 제시된 터이다.
그들의 선언은 그저 '나는 더이상 안(못) 하겠다'라는 자기 죄의식 해결 차원도, 단순한 양심선언도 아니다. 낙태에 대해 공론화시키고 수면 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자는 것이 그들의 취지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낙태찬성론자인 나는 그들의 낙태거부운동에 동의한다. 그들의 '선언'을 단순히 종교적 교리나 '태아살인론(낙태가 살인이라는 입장)'에 입각한 단순한 낙태반대론에 묶어두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오비의 '선언'을 둘러싼 이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낙태가 그르냐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임신과 출산의 전 과정 즉 섹스, 피임, 낙태에 비혼부모 문제까지 모두 포함하여 자기 몸과 자기 행동에 책임과 주체성을 확보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낙태율을 줄이는 문제조차도(그것이 목적이라면) 낙태를 불법화하거나 찬성론을 탄압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저 일군의 산부인과 의사들의 선언에서 내가 읽고자 하는 것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자기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그리고 자기 몸에 대한 주권 행사가 가능한 조건 속에서 낙태에 대한 선택도 출산에 대한 선택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재미있는 것은 낙태가 엄연히 '불법'인 즉 명목상 낙태가 이루어질 수 없는(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현실에서 '낙태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무얼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이름뿐인 명목 법률에 대한 조롱을 포함한다. 이는 이미 한국은 낙태금지국가가 아니며, 합법화만 아닐 뿐 낙태 만연국가라는 점을 공적으로 환기하고 있다. 어찌 보면 불법화해놓고 묵인하고 또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보건당국에 대한 우회적 공격일 수도 있다.
그러면 계속 불법으로 묶어둘 것인가? 아니면 아예 이참에 낙태를 합법화할 것인가? 이번 일은 쉬쉬해 왔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차라리 합법화하여 의료보험에 적용시키는 것이 더 현실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낙태 시술 비용은 30~50만원이고 의사에게 이 수입은 탈세의 대상이다. (한 해 낙태 건수가 30만건이라고 잡았을 때 30만원씩 치면 총액 9백억원에 이른다.) 낙태가 합법화된다면 오히려 불법이라 몰래 쉬쉬하며 할 때보다, 대놓고 시술하고 대놓고 낙태를 할 확률이 줄어들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합법화되면 훨씬 낙태율이 높아질 거라는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한 역시 근거 없는 반박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임신을 한, 비슷한 조건의 여성들 있다. 낙태와 관련해서 가장 많은 건수를 차지하고 가장 문제가 되는 경우들이 바로 이 케이스일 것이다. 이들 중 누구는 낙태를 선택하고 누구는 출산을 선택한다. 이 두 선택을 똑같이 지지하고 도와줄 수 있는 보장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다. 개인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과는 별개로, 두 선택 모두 열려 있으며 이후 그들의 삶이 불행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하는 임무가 공동체에 있다.
의사들의 '낙태 거부 선언'이 환기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낙태 찬반론을 넘어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시작되기를 바란다. 종교적 이유로, 또는 태아도 사람이라는 논리로 접근하는 이상론은 여기서 도움이 안된다. 앞에서 말했듯 나는 낙태를 안 할 것이며, 태아가 사람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입장은 현재의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논의는 낙태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만연해 있는 지금의 현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