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간만에, 보고 싶거나 봐야 할 드라마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월화드라마-별을 따다줘, 제중원(sbs), 공부의 신(kbs), 파스타(mbc).
어떤 것 하나도 뺄 수가 없어서 열심히 다운로드해 놨다가,
나머지 날들에 한편씩 야금야금 빼내어 보고 있다.
아직 2주밖에 안돼서 섣불리 판단하긴 어렵지만, 각각의 드라마들을 보면서 든 생각들-

 

1. 별을 따다줘.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이 드라마의 작가에 대한 관심때문이다.
이 작가는 이전에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 <가문의 영광>을 썼다. 두 편 다 매우 즐겁게 봤던 드라마이다.
<완벽한 이웃...>은 독특한 장르였는데...약간 '스릴러'물같기도 하고 <위기의 주부들> 한국판 같기도 한 이야기였다.
한 기업의 사택마을에서 벌어지는 미스테리한 사건, 사람들간의 복잡한 관계가 '한국 드라마'치곤 꽤 치밀했고,
배두나의 '프리스타일'연기도 매력적이었으며, 재벌문제를 다루는 시각도 나쁘지 않았다.

 

어떤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한 꼬마아이를 둘러싸고,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과정이 주된 스토리인 셈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부르주아, 재벌의 가혹함, 잔인함, 그리고 그 끝의 파멸과 참회, 
또 직장인들간의 계급, 지위에 따른 알력관계, 권력다툼, 갈등
그러나 그런 것들을 감싸고 있는 '완벽한 이웃들'간의 '연대', '용서'의 방법 등은 무척 신선했다.
김승우가 남자 주연이었지만, 여자 주연인 배두나와 엮이지 않는 것,  그야말로 '완벽한 이웃'으로만 남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 드라마를 썼던 정지우라는 작가의 그 다음 작품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이 드라마에 대해선 목록에 예전에 쓴 글이 있으니 참조.
드라마가 재벌 이야기를 안하기 쉽지 않지만, 그런 흔하고 상투적인 소재를 가지고도
어떤 '방향성'을 새롭게 보여주려 노력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역시 마음에 들었다.

 

이번 새 드라마 <별을 따다줘> 역시 재벌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대충의 내용은 이렇다. 


-진빨강이라는 철부지 아가씨가, 부모님의 갑작스런 사고로 졸지에 다섯 동생의 '엄마'노릇을 하게 되는, 그러면서 성장하는 이야기.
-그런데 진빨강만이 부모님의 친자식(정확히는 엄마의 친자)이고, 나머지 다섯동생은 부모님이 공개입양해서 키우던 아이들이라는 것.
-진빨강의 친부는 진빨강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고, 그 친부의 아버지, 즉 진빨강의 할아버지는 굴지의 보험회사 회장이다.
-진빨강의 할아버지는 죽은 큰아들(진빨강의 친부)과 세상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전재산을 사회복지를 위해 내놓으려 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작은 아들과 작은 며느리가 진빨강의 할아버지와 다투다 진빨강의 할아버지가 쓰러진다.(죽진 않았음)
-그 사이에 작은아들 부부가 진빨강네 부모를 사고사로 위장해 죽이고, 진빨강네를 몰락시킨 것.



즉, 이번에도 재벌이 사회에 자신의 재산 전액을 환원하는 이야기를 다루겠다는 기획의도를 갖고 있다.
아직 더 이야기가 펼쳐져봐야 알지만, 역시 잘쓴다.
육남매의 처절한 생존기는, 코미디이기도 하고 신파이기도 한데,
아슬아슬하게 '판타지'와 '리얼리티'사이를 줄타기하며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1,2회나 <공부의 신> 등을 보면서도 느낀 거지만,
정말 요즘 아역배우들은 따로 '아역'이라 부를 필요가 별로 없을만큼 연기들을 잘한다.
'아역배우'의 풀은 이제 충분한 것 같다.
그리고 아직까지 철없던 진빨강의 '정말 구제불능' 캐릭터도 너무 잘 만들어져있다.
그녀의 '성장기'가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물론 그런 그녀가 알고보니 재벌의 손녀였다..는 건 참 드라마다운 한계이지만)

 
이 드라마는 시간대도 다른 '경쟁작'과 달라서(9시대) 뉴스 보기 싫은 사람들에겐 나름 호응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드라마 시간대가 아니라는 점은 약점이기도. 허나 극이 진행되면서 20%대까지는 충분히 나올듯.
그리고 이 드라마도 부디, 예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가족과 기업, 재벌에 관한 한국인들의 고정관념을 잘 깨어주길 빈다.
 
 

2. 제중원


미리 소설을 읽고 보는 터라, 일단 큰 긴장감이 없다는 것.
더구나 소설에 대해서 좀 실망했었기 때문에 그다지 기대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종의 '공부'하는 심정으로 보고 있다. 다운로드 받아놓고도 항상 가장 손이 나중에 가는 드라마이다.
 

'제중원' 문제는 사실 간단하지 않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라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는 세브란스병원과 서울대병원 사이의 '뿌리논쟁'도 연관되어 있고,
서양선교(의)사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 오리엔탈리즘의 문제도 엮여 있다.
게다가 제중원이 설립되던 시기의 한국 사회, 시대란 해석에 있어서 결코 만만치 않은 '역사의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2주까지 보고 난(사실 아직 4회를 못봤다;;;손도 안가고, 시간도 없고 해서...) 소감으로 말하자면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일단...이 드라마의 마지막에 제일 먼저 뜨는 크레딧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이라는 것에서 알수 있듯
이 드라마는 연세대 의대의 '지원'을 받고 만들어졌다. 따라서 제중원과 연관된 '뿌리'논쟁에서 이미 어느 한쪽으로 결론을 짓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 선교의사들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를 하기엔 다소 '치우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실 의료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고 외교권과 정치적 이권을 챙기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던
알렌에 대해서도 지나친 미화를 하고 있고, 앞으로 나오게 될 에비슨, 헤론 등의 의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최근 내가 들은 얘기에 따르면, 에비슨이 조선의 가난한 환자들에게 했다는 가혹한 처사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다 한다.
그 기록을 읽어봤는데, 이건 좀...ㅎㄷㄷ였다.
어쩌면 이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그러한 사실들은 학계에서 직접 언급해 줄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런 역사드라마들의 경우에 제일 어려운 것은 '선', '정의'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다.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정답인가? 이런 부분에 대해 사극의 경우 정말 신중하게 입장을 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제중원>에서는 선/악의 구별이 선험적이고 단순하다.
즉 서양의학, 선교사, 서양인이 선이고, 일본인, 전통의학 등은 악이다.
 

총상을 입은 황정이, 자신을 치료해 준 알렌에게 치료비를 낼 형편이 안되는데 어쩌냐고 하니, 유석란이 말한다.
"걱정 안하셔도 돼요. 사람목숨 살리는 일에 돈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알렌도 말한다.
"돈이 없다고 환자를 거부하는 의원은 의원이 아닙니다. 의원은 어떠한 경우라도 환자를 거부해선 안됩니다."
이때의 내 오그라들어버린 손발, 어쩔건데?

 
반면, 황정의 어머니를 치료해 달라고 일본 의사 와타나베에게 갔을 땐,
치료비를 내놓지 않으면 치료를 할 수 없다며 거절하는 장면이
그 단적인 예이다.
(와타나베 역을 맡은 강남길의 그 '했스므니다~'수준의 일본인 발음과 정형화된 '악인 쪽빠리'역은 도대체 앞으로 또 어쩔건데..
이건 80년대에 하던 드라마들에서나 나오던 일본 순사캐릭터를 그대로 가져 온 '코미디'이다.) 
 

이런 식으로 이미 정해져 있고,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단순화한다.
일본이든 서양이든, 한국을 자신들의 '먹잇감' 취급했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정말 오늘날과 같이 '제국주의의 폭력성'이 널리 알려진 시점에서,
서양선교사들이 그저 '병든' 우리를 '치료'해주고, '도와'주려고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것인가?

 
그 외에도 갑신정변에 대한 묘사나 고종, 명성황후에 대한 설명 같은 부분의 얄팍함...
정말 '글로 배운' 역사인 게 너무 티난다. 한마디로, 아직 작가는, 역사물을 쓸 역량이 안되는 작가이다.
제중원이 병원, 의사 이야기니까 그것만 쓰면 되는 줄 알고 덤볐다가, 여기저기에서 빈틈을 보이며 허술함을 드러내고 있는 형국이다.
 

또한 서사가 허술하면, '비주얼'로라도 승부를 봤어야 하는데...비주얼에 있어서도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제일 결정적으로 실망을 한 장면은, 황정이 사체를 해부하는 장면이다.
백도양과 그의 하수인의 강요로 자신의 친구의 사체를 해부하게 된 황정은 배를 짼 후에, 일자로 째어진 틈 사이로 손을 넣어
장기를 하나씩 꺼낸다. 그게 '해부'란다. 이 뭥미?









따로 떨어져 있는 장기를 보기 위해 해부를 하는 건가?
백도양이 들고 다니던 <전체신론>에도 그것보단 자세하게 해부도가 들어있다.
즉 배부분을 다 드러내놓고 각 장기의 위치, 들어있는 형태, 모양 등부터 그대로 봐야 '해부'인 것을,
심장 따로, 간 따로 꺼내서 옆에다 놓은 걸 보면서 흡족해하다니, 뭐하시는 건가?
거기다 한번 꺼내서 훑어보고, 책이랑 대조해보고는 끝.
이 정도로 장차 최초의 서양의학자 중 한명이 될 사람의 '지적 호기심'이라 할 수 있나? 그냥 '장난', '놀이' 아닌가?

 
요즘 하는 의학 드라마들의 수술장면도 이것보단 더 보여주는데,
조선이 인간의 몸 속을 들여다보는 경이적인 '첫장면'을 이렇게밖에 못 보여주다니,
특수효과의 한계인가? 아님 시청등급상의 문제?
하여간 김이 팍, 새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외에도 문제는 많다.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건대, 백도양은 원작보다 더 '악인'이고, 황정은 원작보다 더 '영웅'일 듯하다.
안 가도 되는 장면에 끼어들어 자꾸 사건을 해결하는(갑신정변에 가마꾼으로 가서 민영익을 업고 나온다거나...) '황반장'이 되어가시고,
그래도 소설에선 인간에 대한 예의는 있어서 사체 해부 후 다시 꿰매고 장사지내 주라던 백도양이,  드라마에선 시체를 쓰레기취급만 하는 냉혈한으로 바뀌어 있다.


또한 고증의 기본도 안된 장면, 설정들이 너무도 많아 열거하기 입아프고...자주 손발이 오글거린다.
박용우의 연기는 나쁘지 않지만...오히려 이 허술한 드라마 속에서 혼자 '리얼'한 연기를 하고 계셔서 안쓰러운 느낌마저...


이 드라마는 아마도 15%(이하)정도가 유지될 것 같다.
본격적인 '병원'이야기로 가면 그보다 좀 나아질 여지는 있지만...
저 해부장면 수준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면 10%대 초반일 가능성도.
그러나 애국가 시청률이 될 리는 절대 없다.
새로운 소재를 즐기고, 멜로, 트렌디, 가벼운 드라마들을 싫어하는 시청자들의 어느 정도의 지지가 있을 것.


그러나 그 이상의 입소문이 나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만큼 재미있지도,
'웰메이드' 드라마 소리를 들을 작품성이 뛰어나기에도 좀 부족해보인다.
(작품성보다, '학계'의 논란 속에 휘말리지 않고 '곱게' 끝날 수나 있을지...그게 더 걱정된다..;;)
딱 10~15%정도? (허나, 아직 '끝나지 않은' 드라마니까, 어디까지나) 현,재,로,서,는.^^ 

 
*헤....너무 길어서;;(난 왜 정말 '단상'을 '단'하게 못 쓸까..;;)
일단, 여기까지. <파스타>와 <공부의 신>은 coming soon~!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1-18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5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주>

박찬옥의 전작 <질투는 나의 힘>을 하도 인상 깊게 봐서 당장 비교가 됐다. 그녀는 ‘여자 홍상수’라는 별명을 얻었었는데, 이번에는 홍상수가 아니라 김기덕 쪽이었다. <질투는 나의 힘>은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한 남성-욕망에 관한 영화였는데, <파주>는 모호하고도 파괴적인 여성-도덕에 대한 영화이다.





 





* 여리고 파괴적인 영혼 ;





'그녀'(서우 분)는 자신을 간수할 수도 없을만큼 여린 존재이면서도,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한다. 그녀는 자신 속의 그 파괴적인 힘을 (막연히 느낄 뿐) 잘 모르면서도, 반드시 그렇게 행동한다. 그녀 자신 밖으로 반발짝만 나와도 그녀의 도덕률은 무용한 것임에도, 그녀는 그것을 믿는다. 그러니까 그녀는 일종의 미숙한 악마이다.(아름답고 어린 여자들이 바로 그런 악마이기에 적당하다. 맑고 모호한 그들의 영혼은 악마가 좋아하는 것이다.) 이를 표현하기에 무고한 서우의 얼굴은 어울린다. (전작에서의 박해일의 얼굴도 ‘비교적’ 그러하다. 하지만, 박해일은 점점 덜 위험한, 스놉이 되어간다.)




* ‘운동(권)’에 관한 표상 :


그는 1996년 연대 사건의 수배자이며 신학대학생이다. 즉, 헌신적인 그는 NL이며, 기독교인이다.(한국사회에서 NL인 것과 기독교인인 것은 대립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NL과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철천지원수다. 양자의 애증(?)과 모순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고도 흥미로운 것이다. PD는 거의 아무도 교회에 다니지 않을 것이다.)

골방에서만 살아가는 우울한 얼굴의 그는 번제물이다. 그의 희생이 스스로부터의 죄의식에 의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감독의 머릿속에 든 1990년대 후반 이후 ‘운동’의 이미지는 흥미롭고 황당하다. ‘연대사건 - 공부방(운동) - 이주노동자 돕기 - 북한인권운동 - 재개발지역 철거민 투쟁’이 그것이다. 연세대 사건과 용산을 언급하는 영화는 드물어 귀하다. ‘희생자’들은 이 운동들의 주체/대상에 있다는 것이다. 실제 현실에서 이 '운동들'은 계열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에, 이 운동의 과정은 '희생'에 대한 알레고리에 불과하다. 어쨌든 그럼에도, 서사가 ‘북한인권운동’으로 갑자기 비약한 것이나 그 문제로 연행된다는 설정은 이 영화에서 가장 황당한 점이 아닐까? 



움직이는 정신, 바뀌는 마음들(changes  http://blog.naver.com/heutek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추

 

요즘 많이 회자되는 지역사(마을사)ㆍ구술사, 그리고 ‘기억의 정치’를 영상으로 잘 담아낸 영화.

스케일은 ‘가족사’ 다큐지만, 아직도 지속+재생산되고 있는 ‘분단’의 여러 측면을,

(전근대적) 신분갈등에서 자이니치 문제까지 90분 내로 압축한 수작.

 

게다가 남편, 남동생, 오빠, 시동생 등 가족의 남성들이 

모두 좌익에 연루됐던 한 여인(감독의 외할머니)의 생애를 다룬 여성 현대사, 의 한 토막.

따라서 종합선물세트. 교육적 가치가 높은 영화.

 

이런 마을과 가족을 가진 감독은 행운아.(감독의 어머니가 특히 대단한 분.)

그래서, 그냥 연고 없는 연구자라면 구술 받기 어려운 소재를 비교적 깊이 잘 취재했음.

 

상은 이미 많이 받았지만, 조금만 작가가 덜 나타나고 좀더 프로처럼 찍었다면...

 



 

 

간혹 삽입된 애니메이션 외에도 볼만한 대목이 상당히 많다. (아래 스포일러 있음.)

 

* 상대, 중대, 하대(중동)으로 나눠져 있던 조그만 리 규모의 마을이 좌우익으로 갈라져 친구ㆍ친지끼리 서로 죽이고 죽었다는 것. 그 원한은 지금도 남아서...  

 

* 하대(중동) 마을은 원래 “쌍놈” 마을로 불린 민촌이었으나, 오히려 6.25 전후에 ‘우익 마을’이 됐다는 것. 왜냐, 식민지 시대에 하대(중동)에서는...

 

* 좌익이었던 외할머니의 남동생은 일본에 도피했다가, 형이 우익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알고 동경에 눌러 앉고 조총련 동경지부장까지 지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북송이 한창이던 시절, 17세밖에 안된 자기 외동딸을.....

 

* 식구들은 모두 아비ㆍ삼촌의 연좌제 때문에 고생할 때, 외할머니는 외려 1970년대에 ‘국가’로부터 '승공' 활동 관련해서 표창장을 받았다. 할머니의 승공이란...

 

* 좌익마을이었던 동네 친인척 어른들이 어릴 때 빨치산들에게 배웠던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기억해내고 ‘해 맑게’ 부르다가...


움직이는 정신, 바뀌는 마음들(changes http://blog.naver.com/heutek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저녀 논란에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루저녀를 매장시킨 네티즌들의 행위와, 그것이 어떠한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가 하는 지점이었다. 이는 얼마전 고 최진실씨를 비롯한, 연예인들의 자살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왜 '우리'는 '루저녀'를, 그리고 연예인들에게 '댓글'이나 게시글을 달고, 이 '루저녀'나 연예인들은 이에 반응하고 괴로워하는가?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벤담의 일망감시체제를 설명하며, 이것이 '봄-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킴으로서, 이 건축의 체제 자체가 권력의 작동방식을 만들어낸다고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일망감시체제란, 수인들은 각자의 감방 안에 나뉘어서 서로는 볼 수 없지만, 가운데 탑에서 감시자는 모든 감시자들을 볼 수 있고, 교묘한 건축적 장치로 수인들이 감시자(들)이 자신을 감시하는지 아닌지 여부도 알 수 없게 만들어놓았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공인'들의 경우, 이러한 '일망감시체제'적인 권력 배분이 발생한다. '공인'들은 보여지지고, 우리는 그러한 '공인'들을 본다. 루저녀가 논란이 되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까발림의 대상이 되게 된 근본적인 '권력'은 이러한 시선의 '봄-보임'의 분리에 있다.  

인터넷 시대에 '공인'들이란 그러한 권력의 배분을 깨닫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익명'이 아니며, 끊임없이 시선에 노출되어 있고, 그런 측면에서 그들을 보는 '우리'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연예인들이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돈과 명예 등을 획득하는 계약을 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특히 인터넷과 같이 공개되고 쉽게 자신의 의견을 남들에게 표할 수 있는 매체가 전면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첫째, 이러한 '인터넷'이라는 매체로 인해, 소위 '다중'이 어떠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배치가 드러나고 있다면 이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것. 둘째는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를 경유해서, 다시금 맑스 또는 맑스주의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첫째 상념과 연결되는 것은, 최근의 미네르바, 그리고 이제 30년전이 되는 광주이다. 아직 지금의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검열이 존재하지만, 그 검열이 부재의 흔적을 남긴다. 따라서, 인터넷이 있었다면, 30년전 광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고 최진실이나 루저녀 사건 또는 조두순 사건 같은 현상도 나타난다. '다중'에 의한, 인터넷을 매개로 한, 처벌, 소문의 전달 등. 

푸코의 접근과 대비해보면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접근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권력을 확보하고 있고, 이 권력이 왜 부당한가가 된다. 반면에 푸코에서 핵심은, 이 권력이 어떻게 작동되는가이다. 전통적인 '누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중의 부각이나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아도르노 식 비판이 물론 존재할 수 있지만)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질문은 '어떻게'로 돌려본다면, 다른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촛불과 루저녀. 두 가지가 존재한다. 인터넷 안과 그 밖이라는 경계도 문제적이다. 

두번째,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던지고 있는 흥미로운 가정은, 모든 사람이 눈이 멀고 한 사람만 볼 수 있다면 어떠한 세상인가 이다. 많은 독자들,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장님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노릇을 한다'와 같은 속담을 떠올렸을 것이지만, 오히려 주인공은, 눈먼자들이 자신이 눈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며 두려워 한다. 따라서 그녀는 눈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비밀로 한다. 

나는 남들을 모두 볼 수 있지만, 남들은 나를 볼 수 없다는 것. 물론 여자는 이를 이용해, 불의를 응징하지도 하지만, 만약 '모두' 또는 '다수'와 '소수'라는 이분법이, 볼 수 없는 자와 볼 수 있는 자라는 분류와 결합하게 되면, 볼 수 있는 자는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이러한 알레고리는, 현재 '88만원 세대' 논의와 맞물려서 흥미로운 지점들을 생각하게 한다. 만약 우리가 모두 '88만원'이며, 이것을 극복할 가능성이 '없다'면? '거의 희박하다'가 아니다. 지금 '당신'한테 없다면? 우리가 '부르주아'가 될 가능성이 '없다'면? 그러면, '볼 수 있는 자들'은 '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의 극복가능성이 있다고 믿게 만들며, 언젠가 볼 수 없는 자들이 볼 수 있는자들이 될 지도 모른다고, 또는 볼 수 없는 자들은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윤리적'으로 닥치고 살라는 생각들 때문에 지금과 같은 다수와 소수의 이분법이 공고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소수의 '볼 수 있는 자들'은, 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한다. 

맑스(주의)적으로 말한다면, 여기가 끝일지 모르나(혁명이후, pt독재 이후는 '유토피아'적 환상으로 점철되어져 있거나 '영구혁명'), 사라마구와 푸코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자들을 볼 수 없는 자들이 잡아서 노예로 부린다고 해서, 사회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시 볼 수 없는 자들 중에서, 강한 자들이 나머지를 부리는 사회가 왔던 것을 우리는 목도하지 않았는가. 문제는 어떠한 식으로 권력이 배분되고 행사되어야 하는가이다.  

벤담의 '일망감시체제'에서, 중간에 있는 높은 탑에는 누가 들어가도 상관없이 잘 작동한다. 문제는 배치다. 

* 앞으로 공부하고 싶은 것은, 매체론이 될 것 같다. 특히 인터넷이라는 매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리스> 광화문 촬영분이 방영되었다. 호들갑에 비하면 화면은 생각보다 스펙터클하지도 박진감 있지도 않았다.

나는 매일(?) 광화문-삼청동, 또는 광화문-안국동(-재동)을 지나 직장에 다닌다. 그래서 <아이리스> 광화문 촬영이 결코 일개 드라마 촬영을 위한 범상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길에는 실로 많은 함축적인 것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저 기괴한 정치드라마도 광화문에서 클라이막스 씬들을 찍었을 것이다.

  

광화문통은 사람을 늘 조금씩 긴장하게 한다. 그것은 실로 정신건강에 안 좋다. 인간을 ‘정치’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아침의 명상’ 따위는 없다. 효자동ㆍ청운동을 드는 입구가 있고, ‘정부종합청사’가 나오자마자, 이순신과 세종이 지키는 광화문통이 보이고 ‘총독부’라는 별칭으로 불리워 온 미대사관도 있다. 삼청동에는 국무총리 관저가, 재동에는 헌법재판소가 있다.(‘굴욕’의 장소들이다.)

그래서, 늘, ‘전투’경찰과 진짜 ‘요원’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수와 표정은 일종의 풍향계이다. 90%의 인간 위에 군림한, 1%의 지배세력이 오늘은 과연 무슨 ‘일정’을 치르는가, 어떤 ‘통치 정신’으로 이 지배를 연장하는가에 관한.

이명박정권이 들어서고 난 뒤에, 언제나 그 회색 또는 쥐색 옷을 입은 인간들, 그리고 그들을 태운 차들이 도로를 가득 점거하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체증’의 한 주범이며, ‘불법’의 행사자라는 것을 나는 매일 본다.

  그러나 한미 FTA가 입안ㆍ추진되던 어느 날 밤의 광화문-안국동 풍경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노무현은 그날 청와대 안에서, 민중들에 의해, 그리고 스스로, 포위당했었다. 광화문으로 오는 모든 대로는 경찰병력이 점거했고, 반FTA 시위대는 시청 쪽부터 봉쇄당했었다. 물론 청와대 주변의 모든 작은 길도 차단되었다. 그날 밤 늦게까지 우리는 ‘봉쇄’ 당해 갈 데 없어, 안국동 안에서만 뱅뱅 돌며 술 마시다 노무현을 욕했었다. 그렇게 ‘통치’를 수만의 경찰병력으로 보호받던 그 꼴은 2008년 5-6월의 이명박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스스로 고백했듯이 그게 노무현을 죽게 했다.


** 
 

‘촛불’이 만들었던 여러 풍경도 생생하다. 물론 그 하이라이트는 2008년 6월 10일이었다. 그날 아침 일찍 ‘명박산성’이 세워졌다. 광화문을 오가는 사람들은 체증 때문에 화를 내거나, 권력이 비밀리에 준비한 큰 코미디 덕분에 아침부터 크게 웃었다. 오후가 되자 서울 전역에서 광화문으로 소풍 나온 사람들이 너도 나도 명박산성을 즐겼다. 그 앞에서 디카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V자’를 그렸었다. 그리고 그날 밤, 50만명이 모인 광화문과 ‘시민 토성’. 아무일도 없었다.

‘촛불’ 이후, 광화문의 풍경은 많이 바뀌었다. 그것은 물론 오모가 주도한 것이다. 잘 알다시피 광화문 풍경을 망친 가장 최근의 사건은 세종대왕상의 건립과 이른바 ‘광화문 광장’을 조성한 일이다. 나는 ‘국어국문학과’ 출신이지만, 이 금색 세종대왕상이 전혀 존경스럽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외려 그 금색 세종대왕상이야말로 희대의 졸작이며, ‘한글’과 ‘우리말’에 대한 상상력이 얼마나 메마른 것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생각한다. 그 동상의 크기, 색깔, 표정, 자세, 의상 따위는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까? 이 금박 세종대왕상은 분명 '초딩용' 표상이다. 그 상을 부디 영릉이나 다른 데로 옮겼으면 좋겠다.

 **



시민단체들은 집회시위의 허가에 관한 ‘형평성’을 주장하지만, <아이리스> 촬영은 광화문에 관한 이 정권의 상상력, 또는 정치적 무의식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아마 그것은 단지 KBS 드라마국이 건의하고 서울시장에 의해 ‘결재’된 것이 아니다. 그 촬영은 '최고 통치 행위'의 일부이자, '국가 안보'의 문화적 전치다.

현상적으로는 간단하다. 그들은 시민과 민중의 ‘정치’를 광화문에서 추방하고자 한다. 대신 장악당한 TV 프레임 안에서, 이병헌-김태희의 사랑놀음 안에서만, 광화문을 이해하라 강요한다.

심리학적으로도 간단하다. 불에 덴 트라우마를 지우고 싶은 것이다. 광화문 가장 깊숙한 곳을 점거한 그들은 아직도 ‘촛불’의 화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쥐’가 아니라 고양이처럼, 계속 제 살을 핥고 또 핥고 있다. 물론 가끔 독이 올라, '인간'을 할퀴면서. 


움직이는 정신, 바뀌는 마음들(changes http://blog.naver.com/heutek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