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토리노
늙어서 무용하고 의미 없는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는 주로 남성들이 가진 것이라 한다. 그들은 ‘고독한 영웅’으로 죽기를 바란다. 조한혜정ㆍ우에노 치즈코의 <경계에서 말한다>에서는 이를 ‘노년의 삶 자체’ 또는 ‘여성’의 입장에서 비판하며, 벽에 X칠하며 사는 것도 ‘다른 인생’이며 가치로운 것이라 말했다.(그런데 한 정신과 의사에게 물으니 치매에 걸려 의식이 퇴화된 노인 스스로가 행복한지 어떤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한다.)
노년의 삶을 다르게 긍정하는 이런 여성학자들의 관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남성들의 그같은 바람도 결코 비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고독한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잘’, ‘폐 끼치지 않고’, ‘의미있게’, 그리고 ‘확’ 죽는 것 말이다. <그랜토리노>가 바로 이런 문제를 다룬 영화였다.
(<밀리언달러베이비>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랜토리노>도 인생의 궁극점들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용서받지 못한 자> 이래로 죽 이어진) ‘죄의식+구원’에 관한 테마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구원은 어디까지나 ‘자기 구원’이다. 그래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의미가 있다. 구원은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거나 기도 몇 마디가 아니라, 투쟁하고 수행해야 이뤄진다. 그래서 불교는 기독교보다 우월하다. 
<밀리언달러베이비>에서도 그랬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이 특별한 노인은 제대로 늙고 죽기 위한 몇 가지 근본적 방법론을 사유하고 있다. 노인은 수행하고 있는 인간이자, ‘먼저 살아낸 인간’으로서, 젊은이들이 처한 고난에 진심으로 연민을 느낀다. 그런데 노인은 자기가 살아온 세상 자체가 여전히 비참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음을 절감한다. 그곳은 젊고 맑은 영혼이 살기에 적절하지 않다. 그리고 노인은 무력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노인은 제대로 된 그 연민을 진정한 자기 구원의 한 방편으로 삼는다. 그때 구원은 깊은 자기성찰로부터 뿐 아니라, 과감한 연대의 실천행동에 있는 것이다...
<밀리언...>에서처럼 외롭게 사라지지 않고 <그랜토리노>의 영감님은 너무 멋있게 죽는다. 그래서 외려 지나치다는 느낌까지 준다. 하지만, 노인들이 이런 희생과 영웅의 길을 택한다 하면 세상은 다른 곳이 되지 않을 수 없다.(갑자기 강우규의 죽음이 떠오른다.) 경험적으로 관찰해봤을 때, 대부분의 한국 노인은 지혜, 신중, 관용 같은 가치의 담지자가 아니라, 퇴행, 고집, 꼴통, 우익, 신자유주의, 이명박, 특권, 소통불가, 비겁 같은 것들의 수호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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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제로 아무 쓸 데 없는 늙다리가 되는 일 자체가 주로 남성에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권위적이고 지위가 높아서, 사회적ㆍ사적으로 ‘강한 남성’이었을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다. 제 밥 한끼 스스로 차려 먹을 줄 모르는 그들은 잃어버린 권력과 권위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시대착오’를 범하면서도 절대 성찰하지 않는다.(늙으면 반성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은, 전두엽이 점점 화학적ㆍ물리적으로 굳어서 생기는, ‘세포 수준’의 일이라고 한 의사는 말하기도 했다. 즉, 반성할 줄 모르는 그것이 바로 ‘늙음’이라는 것.) 이럴 때 노인이란 사회의 암종 비슷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노인이 되었다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정말 궁극의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자랑스러운 연세인’ 서정갑 대령은 좋은 사례를 제시한다. 기사를 보니, ‘60년대 학번들’이 그를 ‘자랑스런 연세인’으로 뽑았다 한다. 여기저기서 뒷방 차지가 돼 가고 있는 ‘60년대 학번들’의 딱딱해져가는 뇌세포가 걱정된다. 그리고 기회가 있다면, ‘자랑스런 XX인’ 같은 상 자체를 폐기하는 데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다.
움직이는 정신, 바뀌는 마음들(changes http://blog.naver.com/heutek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