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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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월이면 늘 일에 빠져 허덕이게 된다. 육아와 직장과 사교 사이를 헤매다 보면 '독서'는 아련한 꿈이 되기 일쑤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소근거리는 이야기를 나만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소외감과 불안함에 부지런히 책을 사재고 펼쳐두고 벌여둔다. 이번에도 알라딘 서재의 선택이 한목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열광했던 '우타노 쇼고'의 <밀실 살인 게임2.0>은 읽고 있으면서도 내내 불편했던 작품이다. 현실이 아니었으면 싶은 섬뜩하고 잔혹(?)한 이야기가 무미건조하고 담담하게 서술되고 있는 장면이 기괴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서평을 남길 일도 책 내용을 되새길 일도 아주 오랫 동안 없었다.  

그런 내 앞에 '폴 오스터'가 돌아왔다. 공교롭게도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인물 중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보른'과 함께 등장한 그의 작품. 지옥을 헤매고 있는 그의 모습과 소설 속의 인물이 나의 주의를 확 잡아 끈다. 독서를 하다보면 글을 쓸 줄은 몰라도 뭔가 흥미를 잡아끄는 글을 알아보는 안목은 생기는 모양이다. 오랜 세월 동안 책을 잡고 있으므로 생긴 내공이랄까? 그래서 첫 장을 펼쳐보면서 '이거 물건이구나' 나름 짐작은 했었다.  

'나'의 이야기만 있다고 생각한 나에게 작가는 '나'가 '그'가 되는 모습을, '그'가 '너'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눈 번연히 뜨고 있음에도 순식간에 바뀌고 있는 이러한 시점의 이동을 나는 경이롭게 쳐다볼밖에 없었다. 세상 이래 더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고 외치는 이들에게 여기 저기서 한방을 올려부치는 작가들의 펀치가 독자로서는 기쁘기만 하다. 글쟁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나는 어느새 그가 되고, 너가 되고, 우리가 되어 있다. 작중 인물의 말처럼 역겹고 천인공노할 만한 사건에도 그닥 거부감이 들지 않는 이유가 바로 '폴 오스터'가 지닌 글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컷 독자를 끌어 들여놓고 이야기에 빠뜨린 후 여기서 말한 '애덤'은 '애덤'이 아니고, '보른'은 '보른'이 아니며 '그윈'은 '그윈'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능청스러움. 소설은 어차피 픽션인데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떨까 생각하면서도 '세실'은 '세실'이고 '짐'은 '짐'이며 '마고'는 '마고'일 것이라는 생각을 거둘 길이 없다. 모두 죽고 없어진 소설 속의 인물을 왜 자꾸 만나보고만 싶어지는지. 

"이건 사실이면서 거짓인 셈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도 꼭 만나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여운 속에서 한동안은 몽롱한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을 듯하다. <보이지 않는> 소설을 볼 수 있어서 행복한 한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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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 바쁜 일상에 치여 놓치고 있었던, 그러나 참으로 소중한 것들 46
정희재 지음 / 걷는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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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의 '역사'라는 책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부피가 주는 중압갑이 장난이 아니긴 하지만 말로만 듣던 고전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최근 들어 더욱 강해진지라 엄두를 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역사서라 일컬어진 이 책이 그닥 쉬이 읽히는 책이 아닌지라 서서히 한 장씩을 넘기는 중입니다. 그러던 참에 생일이 돌아왔고 지인에게 받은 선물이 바로 이 책입니다. 책 제목이야 아무렴 어떨까 싶지만 작가의 이름을 보고 망설이지 않고 펴들었습니다.  

'정희재'의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라는 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녀의 책에는 삶을 조용히 응시하는 고즈넉함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늘 담겨있었기에 저절로 손이 간 것이지요. 도시 생활에 지친 나에게 분명 위로의 손길을 내밀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거든요. 

그녀가 서울에 상경해서 겪은 일들에 내가 겪은 일들이 자연스레 포개졌습니다. 대학 시절 기숙사에 박혀 느꼈던 감정과 지하철의 복작거림에 당황했던 출퇴근길의 압박들, 쌀쌀한 서울의 인심에 토라져 자기 연민을 느끼던 나날까지. 그러나 그녀의 말처럼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장소에 존재하는 '나'이니 말입니다. 알고 있었으니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들을 그녀 덕분에 기분 나빠하지 않고 알게 되었습니다. 설교조가 아니라 조근조근 혼잣말하듯 속삭이는 그녀의 어투는 묘하게 듣는 사람들의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듭니다. 부쩍 '행복'이라는 화두와 돈을 연관시켜 미친 듯이 달려가는 세상에서 그녀가 말한 행복론이 기억에 남습니다. 

   
 

p203 

살아보니 행복은 하루 벌어 사는 것이었다.  행복에 관한 한 우리는 일용직 신세였다. 비정규직이었다. 내일 몫까지 미리 쌓아 두기 힘든 것, 그게 행복이었다. 냉정하고 불공평한 세상탓만은 아니었다. 스스로 행복의 기준이 늘 바뀌기에 오래 행복을 붙잡아 둘 수 없없던 것. 

 
   

행복은 잡으려고 한다고 잡히는 것이 아님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행복의 기준이 늘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5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먹을 수만 있어도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봐야 500원이면 차고 남았을 행복이었는데 지금은 5억이 있어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행복의 기준이 어느 틈에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이렇게 자리를 잡은 것인지 당사자인 나조차도 어리둥절 할 뿐입니다. 행복은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껴야 하는 것이고, 나를 위해 갈무리 해 둬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퍼내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그녀의 책 덕분에 오늘 하루 또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녀의 말처럼 육안으로도 구분할 수 있는 3천 500여 개의 별을 도시 하늘에서 볼 수 있도록 밤이 조금 더 어두워지고 세상은 조금 더 밝아지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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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신곡 강의 - 서양 고전 읽기의 典範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안티쿠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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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영어로 'classic(클래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고전은 재미없으나 읽어야 하는 지루한 책' 정도로만 생각되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 유명한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을 때에도 1권까지는 그럭저럭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을 뿐 2권을 넘어가자 배경 지식이 부족한 덕분에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그냥 읽어가는 것에 만족했을 뿐이다. 말 그대로 그냥 읽었을 뿐이지 내용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고문(古典文學)'이 나에겐 '고문(拷問)'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러한 나의 무지함을 깨우쳐 주고 고전의 매력을 알려 준 책은 다름아닌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이다. 이 책을 읽는 순간 고전이 얼마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인지 알게 되었다. 살짝 맛만 본 것인데도 그 강렬함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꼭 읽어야 할 책이 바로 클래식이란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 나의 눈에 띈 두 번째 고전강의가 바로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이다. 이 책은 '고전'이란 무엇인지, '클래식'의 어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부터 친절하게 설명해 주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저명한 저자들이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이들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나에게 지식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고전을 비롯한 심도 깊은 강의는 시작부터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마미치'의 강의는 시작부터 나를 후욱 빨려들어가게 만들어 주었다.  

클래식은 라틴어 클라시쿠스에서 유래된 말로서 원래는 '함대'라는 의미를 가진 '클라시스'에서 파생된 형용사라고 그는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한다. 클래식이 고전이란 의미로 굳어진 이면에 담긴 설명만으로도 그의 수업은 쉽고 친절하다는 인상을 준다. 쉽고 친절한 강의는 학습자의 학구열을 높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시작한 그의 강의는 바로 단테의 수업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단테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울퉁불퉁한 길을 비로 쓸고 다져준다. 행여나 단테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길이라는 과정 때문에 사그라지들 않도록 도와주는 듯하다. 단테를 천국으로 이끌어주는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처럼 저자는 우리에게 단테라는 여정의 길잡이가 되기를 자청한다. 

저자는 단테가 모범으로 삼은 베르길리우스, 베르길리우스가 모범으로 삼은  호메로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가 당황하고 헤매지 않도록 시작부터 차근차근 짚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테를 공부하고자 한 나는 예기치 않게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의 내용까지 덤으로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단테로 다가가는 오르막이 턱없이 높게 여겨지거나 힘들게 생각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수월한 여정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단테의 신곡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희망을 버려야만 들어설 수 있는 지옥편을 설명하면서 지옥은 지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버리는 그 순간이 바로 생지옥이란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지옥문에 쓰인 비문을 읽어주며 단순이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의미로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지옥문이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잃게 만드는 말 한 마디,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행동 하나가 바로 지옥문이란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혹여 '나'가 다른 이의 지옥문이 되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그의 말은 우리에게 일침을 놓기에 이른다.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나를 다그치거나 비난하기보다 바른 길을 가게끔 이끌어주고자 하는 그의 선의가 충고에 대한 나의 반감을 없애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단계적으로 나뉜 지옥의 구조 또한 흥미진진하다. 불륜의 죄보다 폭식의 죄가 더 크다는 부분에선 왜 슬며시 웃음마저 나오는 것인지. 식탐이 가득한 나를 돌아보며 미소지어본다.-고전을 읽으며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괜히 내가 더 지적인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달까? 왜 대부분의 학자들이 '단테'의 '지옥편'을 예찬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옥편'과 '천국편' 또한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는 알찬 내용으로 가득하다.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가혹하고, 천국으로 보내기에는 부족한 이들이 머무르는 '연옥편'에서 만나는 이들의 모습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성찰하게 만든다. 참혹한 지옥편의 모습은 절대자의 가혹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따른 벌을 보여줌으로서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사랑이라는 그의 가르침도 새롭게 다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이 가장 뛰어나다고 이야기 하지만 '이마미치'는 "단테의 신곡은 '천국편'을 위한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런 그의 확신에 힘입은 덕분이겠지만 '천국편'의 내용은 신비롭고 역동적이었다. 단순히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만족할 수 있는 방탕함이 만연한 곳이 아니라 새로운 빛과 사랑으로 충만한 천국의 모습은 지루하게 느껴지는 곳이 아니었다. 또한, 천국에 도달했다고 안심하기보다 지옥과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 사회에서 평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 또한 생각할 수 있었다. 나만의 안위를 생각하기보다 인류의 행복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일 테니 말이다.  

'단테'의 <신곡>은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사랑가라고 어처구니 없이 알고 있던 나에게 이 책은 단비와 같았다. 인문고전이 이렇게 재미있구나라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벅찬데 단테의 신곡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다니...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래서 책장을 덮은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거릴 정도이다. 이러한 길잡이만 있다면 고전에 한 애정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만 같다. 이러한 강의를 직접 들은 이들은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간간이 이 글의 저자가 이탈리아어로 낭송해주는 신곡의 구절을 듣지 못한 것이 이렇게 애석할 수가 없다. 울림이 아름다운 이탈리어로 직접 낭송하는 원문은 또 얼마나 아름다우랴. 조만간 나도 이런 강의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비싼 가격이라고 생각하여 큰맘 먹고 구입한 책인데 읽고 난 지금 저 가격이 너무나 가볍다고 느껴진다. 다들 '이마미치'가 쓴 <단테 '신곡' 강의>에 빠져보는 행운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 

덧붙이는 말로 성급하긴 하나 올해 읽은 책 중에 단연 1위로는 '단테 신곡 강의'를, 2위는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를, 3위는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를 4위로는 <리스본행 야간열차1,2>를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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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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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의 용도가 무엇인지 확인할 시간조차 없는 바쁜 9월이었다. 보름 동안을 정신없이 살아 온 때문인지 나에겐 9월이 이미 끝난 것처럼 느껴진다. 아직 반이나 남았는데 말이다.-보름을 한 달 처럼 살아버린 것이 시간을 번 것일까 시간을 잃어버린 것일까?- 갑자기 몰려오는 일거리에 허덕거리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새로 나온 책이 있나 없나 알라딘을 흘끔거렸던 자투리 시간 덕분이었던 것 같다. 책 제목을 눈으로 낚는 것은 나에겐 산책과 같은 휴식이나 다름없다. 그러다 익숙한 작가의 책을 발견하면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듯 장바구니에 가득 담고, 반값에 나온 책들도 우선 담고 보는지라 여전히 책을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쌓이는 책을 보며 사람들은 한심한 듯, 안쓰러운 듯 바라보다가도 말로는 좋은 책 추천 좀 해 달란다. 그게 인사치레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진정으로 책을 빌려달라고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앞으로 이런 책들을 이고지고, 또 이사를 해야 할 형편을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한데 어째 버리는 책보다 사들이는 책이 많은 것인지. 인생에는 분명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있는 모양이다. 이래선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순간 말이다. 그렇게 이 책도 내 수중으로 들어왔다. 

  책과의 만남에도 때가 있다더니 이런 바쁜 와중에 내게 읽힌 '설계자들'과의 만남 역시 예사롭지만은 않다. 솔직히 제목이 아닌 작가의 이름을 보고 신간인데도 망설임없이 구매한 책이다. 그러나 도착한 책을 보고 처음에는 화들짝 놀랐고, 두 번째는 어이가 없었으며, 세 번째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분명 '김연수'인 줄 알고 샀는데 '김언수'가 아닌가.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빼면 '남'이 된다더니 점 하나 빠진 것이 이렇게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다니... 사람은 정녕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확실한 모양이다. 이기적인 멍충이. 그렇지만 이러한 어리석음 덕분에 새로운 작가와 또다시 안면을 튼다. 예정에 없던 만남이고 그만큼 삶이 더 복잡해지긴 할 테지만 세상은 그런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기 마련이니 이 만남을 후회하진 않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캐비닛'의 명성을 익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책을 아직 읽지 않은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때가 무르익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만날 인연은 만나게 마련인지 이 책은 나의 실수를 가장하며, 우연을 연기하며 내 앞에 등장했다.  

  서론이 길었다. 여튼 결론만 말한다면 이 만남은 아주 신선했다. 꼭 피가 낭자한 한 편의 느와르 영화를 감상한 듯한데 어째 끈끈하고 음산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세상을 설계한다는 명목하에 온갖 일을 자행하는 설계자들과 그들의 장기말처럼 온갖 일을 자행하는 청부살인업자, 평범한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그들로 인해 영문을 모르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영문을 모르고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평범한 사람들(나를 포함하여) 때문에 이렇게 어이없고도 끔찍한 사건이 자행된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난 실제 세상을 허구화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일까? 자신이 겪어보지 못했다고 그런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란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하긴 보았다고 해도 보려고 하지 않는 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산 이유처럼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듯이 '설명해 주지 않는다고 모르는 것은 설명을 해 줘도 모르기' 마련인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은 저 윗대가리들 탓이라고 소리높여 투덜거렸던 나에게 작가가 한 말이 뜨끔하게 들린다. 

   
  p299 "세상이 왜 이 모양인 줄 알아? 너구리 영감과 한자 같은 악인 때문에? 그들에게 청부 일거리를 주는 권력의 배후 때문에? 아니야. 악인 몇 명이 세상을 어찌할 순 없어. 세상이 이 모양인 건 우리가 너무 얌전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 당신 같은 체념주의자들 때문이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의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렇게 쿨한 척 말하면 멋있니? 너구리 영감이나 한자 밑에선 찍소리도 못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착하게 고분고분하게 살면서, 결국 제 밥그릇 챙길 걱정밖에 못하는 당신 같은 인간이 술자리에선 뭘 다 안다는 듯 욕하고 투덜거리기 때문에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인 거야. 당신은 한자보다 더 역겨운 인간이야. 당신은 한자를 너무나 유명한 악인으로 만들면서 자기는 여전히 한자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믿고 싶은 거지. 결국엔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 자기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당신보다는 차라리 한자가 더 나아. 적어도 한자는 욕이라도 실컷 얻어먹고 있으니까."   
   

  세상이 선과 악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진다는 생각을 버린 것은 예전이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신이 악을 만들 이유가 없듯 선을 만들었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나누고 있을 뿐이다. 적어도 다른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들을 욕하는 나는 악인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악인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 다 나 때문에 비롯된 일이었는데 난 그걸 항상 잊는다. 아니 잊고 싶어하고 정말 잊어간다. 아마 한동안 이 충격을 간직하지 않는 한 계속 잊고 살아갈 것이다. '의아한 북극곰(p352)'처럼 말이다. 

  '김언수'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해 본다. 그의 글이 그래서 쪼금 마음에 든다. 그런데 사실은 그의 소설보다 그의 후기가 더 마음에 든다. 다양한 종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숲 속에서 단지 같이 서 있는 것만으로 숲의 일원이 된 듯하여 혼자 울었다는 그가 온마음으로 이해가 된다. 나도 꼭 숲에 서 있는 듯 하여 더욱 찡하다. 느낌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싶어 당장 아무 숲이나 달려가고 싶을 정도인데 도시의 밤이 너무 환하기만 하다. 사람을 사랑할 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던 그의 말을 되새기며 도시의 가로등을, 주변의 타인들을 숲 속의 다양한 나무인 양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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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 일기 쓰기부터 소설 쓰기까지 단어에서 문체까지
안정효 지음 / 모멘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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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교본이라 할 만하다. '김화성'의 <책에 취해 놀다>라는 책에 인용된 구절에 끌려 구입한 책인데 참으로 읽을 만한 책이다. 책의 덩굴에 엮인 또 하나의 물건. 막연히 글이란 것이 쓰고 싶었던 나에겐 구체적인 행동지침처럼 여겨진다. 글에서 선택해야 하는 낱단어에서부터 불필요한 표현과 문장, 단락의 흐름까지.  

"글을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죠? "라는 질문에 "자아~알."이라는 대답을 해야 했고, 그 대답을 들어야 했던 사람들의 막막하고 허탈한 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여 주며 연필을 쥐어주는 책이다. 누군가는 평생 글쓰기를 한다고 해도 재능이 없는 사람을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한 거만한 작가에게 비난을 퍼부으며 흥분했던 것은 아마 그 말이 사실이라고 나 역시 몸 속 깊은 곳에서 인정했기 때문일 게다. 또한 거만한 작가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 비난을 퍼부을 수 있었ㅇ르 망정 비판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거만한 작가의 놀라운 글발을 외면하고 폄하할 수 었었기 때문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던 얄미운 진리가 이대도록 원망스럽다니... 그런데 이 글을 읽고 있으니 왠지 나도 무엇인가를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이 뚜벅뚜벅 걷는 모습도 괜찮지 않은가!  

안정효의 말처럼 걸작을 쓰겠다는 오만과 자학만 버린다면 산고에 빗대어지는 글쓰기의 고통도 나름 즐길만 하겠다 싶다. 마음에 실낱같은 용기는 생겼고, 이젠 연필을 집어들기까지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우유부단한 나 같으니라고 마지막으로 자학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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