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24 블로거 29인의 내 삶의 쉼표 - 제3회 YES24 블로그 축제 수상작 모음집
YES24 블로거 29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가진 추억을 되짚어 보는 일은 적당한 고통과 회한, 기쁨과 환희를 오늘에 살려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러한 기회는 늘 오는 것이 아니며 어제 경험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어야 가능하다. 오늘에 살리는 일은 또 다른 것이다. 어떤 ‘매개’가 있어야 가능하다.


추억의 사람과 만났다거나 당시에 경험했던 경험과 비슷하거나 같은 사물, 환경에 맞닿았다거나 하는 일등이 기억중추를 자극한다.


남의 경험을 들여다보는 일도 그중 하나다. 나와 비슷한 경험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과거를 추억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내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여 생생하게 살려낼 길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예스24는 선도적 인터넷 서점이다. 인터넷으로 책을 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고객들에게 가격과 편리함을 무기로 장사에 성공했고 이를 모델로 한 유수의 기업들의 추격을 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물론 부작용도 없지 않다. 서적의 소비자가격이 오르고 ‘갑’의 무자비한 할인 경쟁에 ‘을’의 출판사들이 몸살을 앓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정가를 제대로 받는 오프라인의 동네 서점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다. 중소규모의 서점을 찾기는 힘들어졌고 대형서점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좋은 점도 있다. 전체적으로 파이를 키우는 노릇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소통의 공간 인터넷을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독자들과 교감하는 자리를 만들고 오프라인서점으로서는 흉내조차 힘들 파격적인 이벤트와 행사, 저자와의 만남, 북콘서트 등을 출판사와 손잡고 진행하여 독자와 저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글쓰기가 일상화된 요즈음 적극적인 저자 발굴로 다양한 분야의 ‘쉬운’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블로그 축제는 넓은 범위의 예술. 책, 영화, 음악의 세 분야를 주제로 자신의 인생을 아우르는 추억을 끄집어내는 작업이었다. 수백 명의 블로거들의 글들 중에 심사위원의 안목을 통해서 걸러진 추억들이 가득 담겨 있는 책. <예스24의 블로거 29인의 내 삶의 쉼표>


이거 예스24의 홍보지같이 보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책을 통틀어 ‘예스24‘라는 단어가 쓰인 곳은 손을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대신, 전문 글쟁이 뺨치는 야들야들한 솜씨의 글들이 내가 봤던 혹은 보고 싶게 만드는 책과 영화, 그리고 듣고 싶은 추억의 음악과 버무려져 상을 차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돌려”

“왜. 나 볼꺼야.”


나와 엄마는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꼭지엔 꼭 실랑이가 일어나곤 했다. 절망스러운 장면에 눈물 흘리더라도 그래서 가슴이 답답해 와도 굳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 자신의 마음속에 불안과 죄책감, 동정심 때문에 생기는 상처를 애초에 방지하려는 엄마.


매번 비슷한 장면들. 미디어를 통해서 보는 ‘참상’은 이제 눈감고도 그릴 정도다. 볼록한 배를 내밀고 힘없이 동그란 눈만 끔벅이는 아기. 제멋대로 눈가에 잔뜩 앉은 파리들. 돌이나 지났을듯한데 그 흔한 울음, 웃음을 볼 수가 없다. 그럴 힘조차 없는 것이다. 젖이 나오지 않는 엄마. 먹을 것이 없어서 흙을 말려서 쿠키를 만들어 주린 배를 채우는 사람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없고 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꿈도 꾸기 힘든 아이들을 보고 눈시울을 적신다.

우린 행복하구나 축복받았구나 감탄하며 하늘에 감사하는 ‘나’는 곧, 적당히 기름지고 소박한 저녁을 먹고 그들은 꿈도 꾸지 못할 차를 몇 잔 마시고 모기로부터 해방된 갇힌 공간에서 편안하고 푹신한 잠자리에 몸을 뉜다.


눈물짓지 않고 벗어날 길이 없다는 아프리카의 빈민 구조 활동은 유명배우들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대중에게 파급하는 효과가 커서 이용(?)되기는 하나, 아주 열성적인 활동가가 아니라면 기껏 며칠, 아니 어쩌면 그 하루의 봉사가 자신에게 주는 만족으로 그칠지 모른다. 그 땅을 벗어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척하고 있고 일부는 순전히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좆기도 하고, 또 존경할만한 일부는 전체를 바꾸어 보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던져 힘을 모으려 하고 있다.


왜, 그들이 굶는 것일까. 그들은, 그저 그런 운명에 영원히 놓여 있어야 할까?


   
 

-왜? 그런데 (식량을) 못 먹는 거지? 올해도 쌀이 남아돌잖아. 미국도 유럽도 남아돌아서 땅에다 묻을 정도라는데 주면 되지 않아?

-얘가? 모르면 가만있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우리도 올해 쌀이 남아서 버리게 생겼다는데 수십만이 굶어서 죽어간다는 북한에 한 톨도 주지 않고 있지 않니?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생각 없이 주었다가는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온다구.

-주는 게 나쁠 수도 있어?

-그럼, 예를 들어 독재국가에 지원할 경우라면 그 식량을 독재자와 주변의 기득권세력이 재물로 바꾸거나 식량을 팔아서 생긴 이윤을 독식하게 될 거고 혹시 물품지원을 하러가는 도중에 반군이라도 만나면 약탈을 당해서 게릴라군 들의 군량미로 들어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구.

-어떡하지 그럼.

-어쩔 수 없어. 멜서스라는 신학자가 이야기한 인구이론 들어봤지. 식량생산과 인구증가에 대한 이야긴데. 그 인간은 그래서 자연도태 되는, 다시 말해 굶어죽는 인간들이 있어야 지구상의 인류가 존속된다는 이론을 발표해서 오늘날의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비지원을 합리화할 때 잘도 쓰이고 있지.

-심각한 문제네

-그렇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굶어죽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려하고 있어. 왜냐하면 부끄럽기 때문이지. 수치심을 덮기 위해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이란다. 국제적 기업들은 못사는 나라들에서 이익을 뽑아내는데 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지도자가 굶어죽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국가가 분유를 지원하는 사업을 하려고 했어. 그런데 당시 ‘네슬레’가 칠레의 목축업을 기본으로 한 분유사업을 장악하고 있었거든. 국가가 살 테니 팔아라 했는데 안판거야. 그리고 정치적 로비를 통해서 아옌데정부를 흔든 거지. 파업을 조종하고 견제세력을 지원해서 말이지.

-와, 비겁한데.

-그래, 결국은 군부 구데타가 일어나서 그를 지지하고 함께했던 이들과 함께 총살당했지. 백주 대낮에 대통령관저에서 말이야.

-암울하다. 우리나라의 과거도 떠오르고.

 
   




책을 읽고 떠올린 내용의 가상 대화다. 대화체인 책의 형식까지 빌렸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학자이며 활동가인 저자가 다년의 경험과 연구를 통해서 ‘과잉 생산되는 식량 속에서 기아로 죽어가는 다수’라는 지나친 모순에 대해 자신의 자식에게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누구나 알기 쉽게 역사적 사례들을 들어가며 설명해 놓았다.


전쟁과 정의를 찾기 힘든 정치적 무질서, 구호조직의 활동과 현실의 딜레마, 부자들의 쓰레기로 겨우 연명하는 사람들, 소는 먹고 사람은 굶는 현실, 사막화와 산림파괴의 영향, 도시화와 식민지 정책, 불평등을 가중시키는 글로벌 금융과두지배구조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이는 우리가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비관적이다. 나의 관심이 얼마나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저자는 이 땅의 여러 사람들이 사실을 알고 세상을 바로보기 시작하면 전 세계의 굶고 있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줄 가능성을 믿는 모양이다. 쉽고 차분하게 이렇게 암울한 주제의 이야기를 열성적으로 외치는 것을 보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혹하는 에디터 - 고경태 기자의 색깔 있는 편집 노하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내가 글쓰기에 맛들인(?) 때는 시골의 삶과 함께였다. 누구는 신춘문예당선이나 소설집필등을 이유로 한적하고 외딴 시골의 집을 얻어서 산다고들 했다. 나는 시골의 삶이 영감을 주어서 글을 쓰게 하였다는 것이 달랐다.

남을 보여주기 위한 글쓰기, 그것은 '오마이뉴스'와 함께였다. 내가 쓴 글이 청탁이나 당선을 통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에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이 일기형식으로 글을 '보존'해오던 나로서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물론 지금도 허점투성이지만 그때의 글들을 읽어보면 다시 쓰고 싶어진다. 많지도 않았지만 기사로 채택된 적도 드물었던 시기였다. 편집국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곧 한풀이의 기회가 왔다. 다음해 마을 간사로 취업하면서 스스로 편집까지 하게 되었다. 마을 간사의 할 일중 중요한 하나가 ‘마을신문’ 제작이었다. 기사를 쓰고 손보고 배치하고 프린트하는 일인 신문사의 사주가 된 것이었다. 물론 명목상 이장을 포함한 마을 간부들이 발행인이었지만 단 한 줄의 기사제보나 편집의 간섭이 없었으니 신문제작의 모든 것은 내 맘이었다.

60여세대가 읽거나 보는(글을 읽지 못하는 분들이 꽤 있어서 사진의 비율이 현저하게 높았다) 마을신문은 격월 또는 4개월만에 나올때도 있었다. 내용도 단 4페이지에 불과했다. 신문이 나왔을때 A₃를 반으로 접은 한 장짜리(?) 신문을 들고 동네를 도는 날이면 그렇게 긴장이 되었다. 비판적인 기사는 없이 마을 동정과 행정사업에 관한 정보가 전부였다.

집집마다 돌며 돌리는 신문을 받아들이는 주민들의 표정이 나에겐 ‘숙제’로 남았다. 그냥 한쪽에 치워놓고는 잘 가라는 분, 신문은 보지도 않고 들어와 커피나 한잔 하라는 분들이 많았다. 비오는 날이 제일 좋았는데 거의 모든 마을 분들을 직접 만나서 신문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밥때에는 밥을 얻어먹고 술 마실 땐 술을 얻어먹었다. 자신의 사진이라도 실리면 주변 분들에게 부러움의 눈길을 사고 겸연쩍어 하는 모습이 그렇게 순박할 수 없었다. 그런 모습들도 사진기로 찍지만 그때 감정과 느낌이 살지 않아 스스로의 사진기술을 한탄하기도 했다.1년 동안 6호의 신문을 내면서 마을에 들어와 10년 넘게 사신 분보다 더 많은 인맥을 쌓았다. 지속적이지 못해 인맥이라기보다 안면이라는 것이 낫겠다.

작년 집짓기동안 손을 놓았다가 올해 수목원 다니면서 공부할시간이 늘고 자연스레 글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진안신문에 주기적으로 기고를 하고 오마이뉴스엔 서평을 올리기 시작했다. 서평을 쓰면 책이 많이 들어올 것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쓰기 시작했는데 넘쳐나는 책에 요즘은 욕심을 줄여서 받는 책의 양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 익히기 시작했다. 매주 마감을 끝내고 여유 시간이 생기는 날이면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회사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였다. 정기간행물실에 비치된 각종 신문들을 뒤지며 종일 ‘공부’했다. 모범이 될 만한 신문 편집의 다양한 실물을 가급적 많이 보려고 노력했다. 6개월여간 매주 1회씩 국립중앙도서관을 드나들었다. 일간지든 주간지든 그럴싸해 보이는 지면 편집이라면 모방하거나 응용해 써먹었다. 그렇게 흉내내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했고, 이를 조금씩 극복하면서 지면을 꾸미는 노하우를 심화시켜 나갔다. 소설 지망생이 훌륭한 소설가의 문장을 수백 번 베껴 써가며 연습하듯 말이다.‘-본문중

 
   




매번 기사가 되지는 못했다. 초기엔 기사로서의 기본도 갖추지 못해서 수거된 적이 많았고 근래에 책을 많이 읽으면서 글쓰기에 대한 실력도 조금씩 늘어서 기사가 되는 비율이 높아진 것뿐이다. 초창기엔 설령 기사가 되더라도 엄청나게 수정되어 오른 기사를 보고, 이건 내 글이 아니라 편집기자의 기사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제목은 물론이고 부제와 기사의 머리말과 마무리까지 바뀌어 나오는 것을 보고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내 글과 그 분야 기사로 올라온 글들을 비교해보고 매일 읽는 신문의 기사들을 꼼꼼히 읽기시작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글과 사진의 배치, 제목을 어떻게 쓸 것인가가 제일 고민되는 일이 되었다. 제목이 잘 뽑힌 날은 기사채택률이 높았다. 물론 제목보다는 기사 내용이 독창적이고 읽을 만한 이슈가 담겨야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기사가 될 만한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판단이 적중하기라도 하면 다음기사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기자 또는 기고가로서 읽는 <유혹하는 에디터 고경태기자의 색깔있는 편집노하우>는 글쓰기에 대한 성의와 열의를 부추긴다. 편집에 대한 이해가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그리고 제목은 어떻게 붙여줘야 편집이 쉬워질지를 가늠하게 하기 때문이다.


   
  ‘글을 줄이기 위해선 중심부를 살리고 주변부를 죽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장들 속에서 중요한 내용과 사소한 내용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중요한 것을 남기고, 사소한 것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옥석을 가리며 핵심을 정제하는 작업은 결국 헤드라인을 뽑는 과정과 비슷하다.’-본문중
 
   




저자 고경태는 ‘한겨레’에서 13년간 편집을 한 경험을 사례와 함께 자신의 카피와 제목을 자가 분석하고 편집을 꿈꾸는 이들에게 친절한 조언을 가득 담았다. 쉽고 재미있게 쓰여서 누구나 읽을 만하며 나 같은 ‘편집’ 초짜에게도 ‘아하, 그래’하고 쉴 새 없이 맞장구 칠 내용들이 가득했다.

재미를 편집인의 사명이라 생각하는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포털메인에서 제공하는 뉴스의 헤드라인들은 온통 ‘낚시질’이다. 지나치게 유혹하는 제목에 낚여서 기사를 읽고 나면 허탈하고 짜증이 밀려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요즘은 선정적이며 자극적인 카피보다는 ‘진중하고 우직한 단어의 조합‘을 클릭하게 된다.  

물론, 재미있고 참신한 제목에 손이 가는 것은 당연하고 기사에 대한 궁금증도 극대화 된다. 편집자의 역할은 읽게 만드는 것이다. 때로는 좋은 기사를 가려내고 이 내용을 압축해서 짧고 굵게 표현하는 일.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이 읽게 되고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만한 ‘특종’을 만드는 것이 사명임은 부인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라는 종족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범죄는 왜 일어나는가. 연구자들은 과거 개인의 가정사에 초점을 두고 성급한 결론을 지어왔다. 하지만 최근엔 사회가 이 범죄에 대한 책임이 크다는 이론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곳의 강력범죄율의 차이가 큰 것이 통계로 증명된다.

경쟁과 이기로 무장한 사회에서 개인의 고립이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변수이며 이를 개인과 그 주변에서 찾은 요인으로 분석하기란 더 어려운 일이다.

‘몬스터’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우울하게 생긴 창녀인 여자주인공이 남자들의 폭력에 변화하고 극한의 폭력에 죽음의 위기를 살인으로 모면하면서 연쇄살인범이 되어 버린다는 줄거리였다. 영화는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보다 폭력적 일상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사회적인 파장력에 대한 연구논문과 같은 인상이었다.

결국 환경이 낳는 범죄는 개인의 가정사도 크겠지만 사회적인 시스템과 제도의 탓도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라는 종족’은 이와 일맥상통하는 단편집이다. 9개의 에피소드는 각각 9명의 여주인공들의 ‘잔혹성’이 한계에 내몰린 자신의 환경에 있는, 그래서 결국 범죄로 이어진다는 심리적 분석이 드러나 있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지만 여성이 가진 특유의 매력이 이끄는 치명적임은 우리가 팜므파탈이라고 하는 독창성과도 통하는 것 같다.

절제되고 명료하며 정교한 문장으로 다듬어진 세계는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만의 특별한 힘이라 하겠다. 기존에 흔하지 않던 부류를 창조해내는 힘. 그것이 이 단편집을 놓치 못하게 하는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소리 우리 음악 - 김명곤 아저씨가 들려주는,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세종도서) 상수리 호기심 도서관 9
김명곤 지음, 이인숙 그림 / 상수리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그윽한 밤에 대청마루 한쪽에 다소곳이 한복을 입고 앉은 여인, 그리고 그 앞에 높여있는 현악기. 그녀를 둘러싼 관객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아진다. 뚱 뚜둥. 소리가 악기에서 나와 부드럽게 천장을 두르고 관객들 사이로, 마당으로 울려 퍼지면 ‘소리’가 관객의 가슴에 젖어 들고 마루로 올라서는 댓돌에, 마당에 심어진 도화에 내려앉는다.


가야금연주를 생으로 들어본 적 있는가. 그 오묘한 소리의 울림은 그대로 가슴에 와 닫아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조차 잊게 만들만큼의 마력을 발휘한다. 마치 뱃사람들을 현혹해서 죽음에 이르게 만들만큼 치명적이었던 사이렌의 노랫소리처럼.


아쟁은 또 어떠한가. 가녀리고 구슬픈 소리이나 결코 그 울림이 작지 않고 소리의 전달력이 모자라지 않으니 문득 가을낙엽이 떨어질 무렵 아쟁산조를 듣고 있노라면 눈물이 한 방울 뺨을 타고 흐를 만하다.


우리 소리와 우리 음악은 우리에게 서양에서 들어온 음악과 클래식에 대한 융숭한 대접에 반해 밖으로 밀려나 있다. 극히 일부만 즐기고 농촌에서 잔칫날이나 들어볼 수 있는, 꽹과리와 장구를 주축으로 하는 농악풍물패의 음악정도가 명목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음악은 학교에서도 천대받고 있다. 국영수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교육체계는 음악, 체육, 미술 등의 예체능을 홀대한다. <우리 소리 우리 음악>은 김명곤 씨가 쓴 음악교과서이다. 교과서가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니 재미있는 그림으로 치장한 책이 등장하나보다. 부록으로 들어있는 한국 음악사 CD를 들으면서 글을 쓰고 있으면 마치 과거로 선조들의 삶속에 가 있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