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는 한마디 - 시장이 거부할 수 없는 컨셉 카피의 8가지 원리
탁정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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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광고회사의 중역들의 생활상을 보고 있노라면 대단히 힘들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머리 빠지도록 고민해서 만들어낸 카피는 수많은 동종 회사들의 다른 경쟁기획사들의 카피와 경쟁을 해야 하고 그중에서 단 하나만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니 매일을 경쟁하는 스포츠 선수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육체적인 훈련을 거듭해야 하는 스포츠와 지식활동을 축적하는 작업이 비교대상이 될까 싶기도 하지만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매일 지속되는 스트레스는 육신을 망가뜨린다는 데에는 웬만큼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광고야 그냥 보기만 했지(사실 요즘은 너무 넘쳐서 별로 보고 싶지도 않다) 저걸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은 학교 때 교양으로 듣던 수업 때 잠깐 고민해 봤을 뿐이다. 넘쳐나는 광고들을 피할 길이 없는 오늘날에는 그냥 적당히 무심하게 바라보고 싶지만 좀 더 자극적이고 적나라한 언어로 마음을 끄는 시각효과와 카피들이 대중을 가만둘 리 없다.

어차피 우리가 생활하는 곳에서 의사전달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말이나 글이다. 내가 쓰는 장문의 호소나 연설을 진득하니 들어줄 사람도 없고 당장 어떤 행동이나 사건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호소력을 발휘하려 하면 설득력을 가진 한마디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죽이는 한마디’는 가장 효과적이면서 직접적으로 대중에게 호소하는 방법이다.

꼭 카피라이터가 아니라도 내 블로그에서 여럿에 쓰는 메일의 제목에서, 기고문이나 소설, 수필, 시 등에서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한마디가 바로 나를 그들의 기억에 강하게 남게 만드는 가장 쉽고도 빠른 방법인 것이다.

저자는 한마디의 ‘제작 매뉴얼’을 엮었다. 총8장으로 나뉜 ‘죽이는 한마디’ 만들기. 누구나 쉽게 가볍게 접근할 수 있도록 그리고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방법까지 상세하고도 친절하게 안내한다.

광고쟁이를 위한 안내서이기도 하지만 서문에서 저자가 이야기 하듯이 인문학을 빼어 놓고는 ‘한마디’를 생각해 낼 수 없다는 말이 와 닫는다. 사유와 성찰을 통해서 현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통하고 나서야 핵심적인 단어들의 조합인 한마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탁’ 보고 머릿속에서 ‘턱’하고 들어와 박히는 한마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주변에 대한 호기심이 자아내는 끊임없는 탐구가 기본이다. 이를 바탕으로 단어를 짜 맞추어 대중에게 호소력있는 문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기술이다.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책 읽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고와 주변에 대한 이해를 단시간에 습득하는 방법이고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창조적 생각. 이는 그냥 우연이 낳은 결과가 결코 아님을 단정하게 정리된 저자의 문장 창조론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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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는 죄악인가
권혁범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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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는 죄악인가/ 권혁범/ 생각의 나무/ 11,000원


한쪽에서는 굶어 죽어가고 한쪽에서는 남아서 버리는 음식. 음식이 남아서 버리면서도 굶어 죽는 이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다면, 과연 이 둘은 무슨 관계인가.

둘은 싸웠다. 둘의 생각은 너무도 큰 차이를 보여 도저히 마주앉아 이야기할 상황이 안 되었다. 그래서 싸웠다. 상처는 컸다. 집이 부서지고 마당이 불탔으며, 기껏 심어 놓은 온갖 곡식들도 다 타고, 심어 놓은 나무도 죽어버려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건물과 공장도 다 부셔져 완전히 새로 짓지 않으면 안 되다. 둘만 싸운 것이 아니라 둘의 싸움에 그 형들이 끼어들어서 싸움이 커져버렸다. 둘은 후회하지 않았다. 싸움을 끝낸 것이 아니라 잠시 쉬기로 한 것이다.

이 둘은 형제다. 피를 나눈 형제. 그 형제는 각기 자신의 땅을 보유하고 자신만의 체제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다. 그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형제가 누구 이었는지 잊고 있다.

어떤 때에는 서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휘장을 휘날리며 한마음이 되기도 한다. 더 큰 나라들을 상대로 싸움을 할 때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서로 마주보기조차 거부한다. 서로를 헐뜯고 오해하고 욕하기 일쑤다. 그러면서도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다. 애증의 관계인가.

형제는 한 ‘민족’이다. 몇 천 년의 역사를 하나로 가지고 있다. 그 역사는 ‘민족’을 규정한다. 그들의 역사 밖의 사람들은 모두 ‘외세’가 된다. ‘우리’만의 색깔이 있다. 그 색깔에 맞지 않는 이들도 문밖에 세운다. 흐름을 따르지 않으면 ‘이지메’ 당한다.

엄밀히 한 민족이면서 서로에게 배타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의 규정은 국가 통치의 권력에서 유래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가진 한 민족에 대한 정의의 모순이다. 모순은 이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금발에 파란눈을 가진 외국인은 우월하고 검은 피부에 검은 머리를 한 이들은 천시한다. 그러면서도 그네 나라의 침략때는 동맹이니 협력이니 하는 단어를 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민족주의는 죄악인가>의 저자는 민족주의가 악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민족’이라는 단어의 유래와 의미. 오늘날에 민족주의가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알린다. 언제나 ‘타자’를 적으로 놓는 것으로 작용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민족주의다. 히틀러의 독일이 수백만의 유태인들을 파리 잡듯이 가스실에 가두어 죽였던 것처럼, 유색외국인에게 험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더럽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우리의 동남아인에 대한 적의감이 자연스레 솟아나는 것도 다 태어난 이후 교육을 통해 습득한 민족주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다민족화가 진행되는 현실에서 이러한 사고는 갈등과 반목만을 낳을 뿐이다.


이를 좀 더 진보적으로 해석하고 현재의 불합리를 극복하는 길은 무엇일까.


   
 

‘민족주의는 죄악인가? 아니다. 다만 현 시점에서 그것의 부정적인 영향력이 클 뿐이다. 지금 21세기의 세계자본주의체제에 대한 고민과 진보적 대안 모색에서 필요한 것은 ’탁선산‘이 인용한 사학자 ’지수걸‘의 말대로 민족주의에 대해 ‘겸손한 장례식’을 치루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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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길을 가라
로랑 구넬 지음, 박명숙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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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와 두려움. 내 인생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한 번의 실패로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다음번에 다시는 같은 시도를 하지 않으려 한다. 상대방에게 부탁하거나 희박한 확률을 가지고 있는 모험에 대한 두려움은 나를 좀 더 사교적이고 진취적인 인간이 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게 한다.

나는 알고 있다 나의 단점을. 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오랜 세월동안 억눌려 온 내 자아의 일부가 그리 쉽게 펴질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꾸준한 자기 암시로 좋아질 수는 있을 거라는 희망은 갖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진 이후로 몇 년이 흘렀지만 나는 정체되어 있음을 느낀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원하는 길로 가기 위해서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로랑 구넬의<가고 싶은 길을 가라>는 진정으로 나와 내 인생의 올바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생각과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주인공은 ‘네가 얼마나 잘 고치는지 보겠다’ 라는 마음으로 찾은 ‘치료사’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인생 최대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다시는 찾지 않을 것 같았던 첫 방문의 마음이 바뀌고, 매일 찾아서 이야기 나누고 그가 내주는 ‘숙제’를 실행하면서 얻는 깨달음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끼고 급기야는 완전히 몰입하게 되어 자신을 결국 변화시키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변화는 그리 긴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며칠의 기간이 내 삶을 되돌아보고 온전한 나를 찾기 위한 발돋움으로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나에게 가르침을 줄 선생이 필요한 것인가. 스스로 생각을 전환하여 실행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이제부터는 ’나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내가 내린 경정과 선택과 의지로 이루어진 삶을. 의문과 망설임, 다른 이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나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과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는 영원히 작별을 고할 때다……삶이라는 게임의 주연으로서 그 규칙을 조금씩 터득해 나가야 한다. 비록 삶의 목적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남아 있겠지만.’  
   




주인공 줄리앙의 마지막 독백은 내가 가지고 있는 불만을 대변한다. 곧 내가 변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그가 대변하는 것이다.


나는 변할 수 있을까. 현재의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삶을 조금씩 바꾸어 나갈수 있을까. 주인공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샴탕 선생의 말들이 나에게 변화를 주고 있는 것일까. 사실 나는 가고 싶은 길을 걸어왔다. 삶에 만족도도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 상당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여전히 목은 마르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 그리고 그 길에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행복이 지금의 나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다. 내 자신에 대한 확신, 그것이 <가고 싶은 길을 가라>가 ‘나’에게 던지는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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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2권 세트
아트 슈피겔만 지음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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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민족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해 온 국민으로서 외국인이나 타 국가의 얼굴색이 다른 이들을 배타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전쟁과 같은 극한의 상황이라면 더할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이념에 따른 타자를 평생을 같이 살아온 ‘이웃’임에도 고발하거나 직접 죽여야 했던 과거사가 있는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그 고통을 동감하는가?


‘아우슈비츠’로 떠올리는 유태인 학살에 관한 이야기는 광기어린 파시즘과 민족주의가 어떤 결말을 가져오는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지금도 세계의 변방에서는 총성과 학살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중심의 세계와 막후에서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유태인들에 의해 그네들의 이스라엘 지배를 합리화 하는데 이용되고 있다는 일부의 지적은 별도로 하고서라도 그 규모와 위악성이 오히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전쟁과 식민지배 시대의 학살사건들을 가려버리지 않는가 경계도 해야한다.


수용소 생활과 가스실에 대한 묘사가 과거 유태인 학살에 대한 이미지의 전부이고 이는 대중매체와 미디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컸다. 영화와 책이 대중적으로 전하지 못하는 부분의 전달을 시도하는 만화, <쥐>는 작가의 아버지가 경험했던 전쟁과 수용소생활을 작가의 현실 속에서 그리는 ‘액자식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주관적 가족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꾸는 효과뿐 아니라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뇌와 현실의 ‘지독한 인간’인 아버지가 그의 과거를 통해서 내면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이해를 돕는다.


당시의 유태인을 향한 광기의 근본을 따지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라해도 히틀러의 정치기반이 ‘증오’로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600만의 인원이 죽어야 했다는 사실은 인류사의 커다란 비극임이 틀림없다. 이를 받아들이는 오늘의 독일은 당시의 미친 짓에 동의했다는 사실만가지고도 커다란 부끄러움과 용서받지 못할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이는 역사현장과 사료의 보존과 후세에 이어지는 끊임없는 교육으로 다시는 비슷한 일이나 생각이라도 가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래전 방영되었던 <여명의 눈동자>를 기억나게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의 제품과 자동차는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면서 결국 영토와 과거사의 문제에 대해서는 핏대를 세우며 으르렁 거린다. 그네와 다른 점은 그들의 대부분은 ‘무관심’하지만 우리의 대부분은 ‘오버’한다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이며 약자인 입장으로서 한국을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 부분이다. 예컨대 평상시 일본의 악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일상어, ‘일본 놈들’은 자기위안의 내뱉음에 불과하며 상처 치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좀 더 세밀하고 이성적인 관찰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노력, 그리고 과거사의 면밀한 분석이야 말로 후세로서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를 위한 자기발전의 한걸음이 되지 않을까.

<쥐>는 그저 ‘아우슈비츠’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엄정한 학살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가 현실을 살아가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당시의 야만이 얼마만큼 지독했는지를 상세하게 그리고 있지는 않는다. 우화된 유대인, 독일인, 폴란드인의 등장은 어쩌면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물캐릭터의 만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동물농장>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당시의 국가적 성향과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전쟁을 통해 몸에 익어버린 불안과 공포. 지극히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히스테릭한 감정과 행동을 보이는 아버지.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아버지의 구술과 자료를 바탕으로 그려지는 전쟁과 학살속의 ‘가족’과 ‘이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된다는 당시의 현실이 너무 생경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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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다산연구회 편역 / 창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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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그러했을까. 조선후기의 유명한 실학자인 정약용은 학자다. 천주교를 받아 들여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고, 뛰어난 학문으로 당시 최고의 권력자에게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가 오늘에 뛰어난 학자로서 추앙을 받을 수 있던 것은 당시의 세태의 흐름에 당당히 반기를 들고 실용을 중시한 학문을 추구했던 것 때문이다.

주자학을 모시는 이기설(理氣說)·예론(禮論) 등만 놓고 갑론을박하던 당시의 학자들과 거리를 두고 현실에 쓸모가 있는 학문을 추구했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가 아니면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입장에서 출세와 권력을 추구했다면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그 많은 권세가들과 탐관오리들은 당시를 호령했겠지만 후세에 길이 남는 이름은 정직하고 백성을 생각했던 관료나 학자들의 이름인 것이다.


<목민심서>엔 정약용의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고을의 수령으로서 부임하면서 퇴임할때까지 가져야 할 마음과 몸가짐, 당시의 격식이 아닌 소박한 예에 대한 소견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부임(赴任)과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 진황(陳荒), 해관(解官) 등 12부의 각 6조씩 72조로 구성된 방대한 ‘지방행정지침’에 관한 내용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당시엔 고귀한 사명과 같은 일이었다. 오늘날 서비스업으로 전락해버린 행정과는 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지위를 이용해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별로 다를 바 없고 재물을 축적하는 관료역시 천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바뀌지 않은 더러운 습속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경계하고 자신이 물들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윗사람’으로서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이고 널리 두루 이롭게 하기 위해 항시 주변을 살피고 자신의 행동이나 언사에 상처받지 않을 ‘아랫사람’이나 백성은 없는지를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케케묵은 옛이야기를 오늘에 꺼내 보는 일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엿보는 재미가 있어서 좋은 일이다. 그리고 행정가이자 사상가, 종교인이었던 정약용선생이 추구했던 목민(牧民)을 오늘의 ‘윗사람’들이 널리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학자이며 위정자인 오늘 대한민국의 총리인 정운찬님에게 ‘백성’을 생각하는 행보를 하시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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