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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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빌딩과 아파트로 들어찬 서울의 한쪽, 젊음의 인디문화가 꽃피는 곳, 나의 학창생활은 그 곳과 함께했다. 4년, 아니 5년 동안 생활했던 공간이다. 기껏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그 긴 시절을 교과서와 참고서에 매달리고 학원에 들인 생은 솔직히 별로 기억에 남을만한 추억이 없다. 역시 민주사회의 시민이 되기 위한 자유와 이성을 키우는 학습의 공간은 대학시절 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0년대의 중후반을 보낸 나의 대학시절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쇠락한(?) 운동권은 곳곳의 대학에서 집권에 실패했고, 급기야는 한총련을 탈퇴하는 학교들도 늘어갔다. 최루탄냄새를 간간히 맡을 수 있는 것은 군대가기 전 김영삼 정권 때에 손에 꼽을 만하고 그 외에는 학우들의 저조한 참여로 대회조차 무산되기 일쑤였다. 정치적으로는 좋은 시절이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남과 북이 손을 잡은, 민주화 운동의 명목이 사라져버린 때에 느닷없는 학생회의 강경한 구호는 민주화와 평화적 정권교체의 시대엔 오히려 생뚱맞을 지경이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꿈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원대한 비전을 펼치던 때였다. 군대를 거치고 아이엠에프가 국가에 떨어지면서 복학을 했고 나의 꿈과 희망을 현실에 차곡차곡 접어 넣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곳은 여전히 나의 추억과 꿈과 희망이 자라던 내 과거의 ‘자랑’이 되던 곳이다.

나는 홍익대학교 건축과를 다녔다. 미술로 유명한 학교는 비록 공대에 속하긴 하지만 ‘예술성’이 강조되는 건축설계분야 역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학교 주변에는 내가 다니던 시절에 많은 ‘작업실’이 있었다. 요즘 ‘개그콘서트’의 ‘분장실의 강선생님’ 의 분위기 같은, 엄밀히 따지면 선생님까지는 없고 선후배들로 구성된 집단 주거, 학습 단체라고 할 수 있는데, 소규모 선후배 관계로 이어져 ‘작업’을 하는 공간이었다. 30여년 된 작업실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도 있었다. 일부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은 우리말 작업실을 놔두고 ‘아틀리에 atelier'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부르기엔 좀 어둡고 눅눅하며 깨끗하지 못한 환경을 지닌 곳이었다. 여학생비율이 일정정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졸업 후의 도제방식의 설계사무실 환경을 미리 익히기라도 하듯, 선배에서 후배에게 기술이 전수되는 시스템은 지금의 세태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수도 있다.

어둡고 눅눅한 지하의 방에다 작업을 위한 제도판들을 배치해 놓은 것이 인테리어의 핵심이었고 벽에는 거장들의 작품이나 그 작품을 흉내내보는 자신의 스케치와 도면들이 붙어서 ‘작업실’임을 증명했다. 월단위로 나오는 설계 과제를 위해 매주 한번씩, 그리고 마감에 이르러서는 며칠밤정도는 잠을 안자거나 줄이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필수였다. 체력이 중요했으나 운동은 게을리 하고 잠을 자지 않으니 비쩍비쩍 마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설계 작품의 질보다 밤샘일수로 경쟁하기도 했고 과제에 집중하는 날보다 술로 날을 새는 날이 더 많았다. 가난한 학창시절을 식구이상으로 오랜 시간을 붙어 지내는 작업실 사람들은 소속감과 연대를 굳건히 하고 사회진출이후에도 서로의 안부와 경조사를 살뜰히 챙기는 사이로 이어진다. 그 황금기의 추억이 그들의 연대를 이어주는 것이다.

작업실 생활은 비단 '작업'만 같이 하는 것은 아니다. 취미와 여행, 연애가 모두 공유되며 이는 사생활침해를 생각하는 '개인'이라면 분명히 거부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티격태격 일도 많고 서로에 대한 애증이 싹트기도 한다. 감정과 자본의 '나눔'에 대한 훈련소 같은 곳이랄까.


나에게 <습지생태 보고서>는 ‘추억’이다. 만화를 하는 자취학생 대여섯이 모여 지하의 작업실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나의 과거와 겹친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젊음에도 불구하고 행동반경이 넓지 못한 신세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어두움을 작가의 시선으로 그린다. 젊은 미혼 남성 여럿이 장기간 합숙을 하는 비정상적인 생태에 대한 추억담. 은유와 블랙유머, 재기 넘치는 상상력이 특유의 선 굵은 그림과 어우러져 감동과 즐거움을 준다. 젊음은 그래도 아름다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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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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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인간이란 종에 관해 비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너무나도 교묘하게 행동한다. 인간은 자연을 투쟁의 대상이자 굴복 시켜야 할 상대로 인식한다. 인간이 이 지구를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대하는 대신 지구에 순응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생존가능성은 조금 더 높아질 것이다.- E.B.화이트
 
   

 


교외 시골의 시원한 푸른 들. 한쪽에 벌겋게 타는 ‘둑’을 본적이 있는가. 농촌 여행자나 살아계신 나이든 농부를 부모나 조부모로 둔 이들이라면 아마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일 것이다. 2005년 처음 전북 고창으로 거처를 구해서 살게 되었을 때 가장 충격적인 기억을 꼽으라면 붉게 물들어 타오르는 논과 밭의 풍경일 것이다. 봄이 시작되는 즈음이었는데 나는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죽는 특이한 풀도 다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촌(村)에 대한 경험이라고는 대학 일학년 때 농활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정체를 파악하고는 더욱 경악했다. 농부가 등에 맨 약통에서 약을 뿜어내는 분무기를 들고 이동한 곳이 바로 다음날, 내가 궁금해 마지않던 충격의 ‘불타는 둑방’으로 변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였다.


그 후로는 둑길 산책은 자제하게 되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집이라고 해서 안전하지 않았다. 50여 평 되는 앞마당에 풀이 자라고 있는 것을 주변 농부들이 견디지 못해했다. ‘게으른’ 옆집 총각을 위해 옆집 아주머니는 친히 본인의 노동력과 농약비용을 들여가면서 남의 집 마당까지 ‘풀약’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신 것이다. 다음날 나는 호들갑스럽게 누가 이랬느냐며 항의를 하려 했으나 항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고마워할 것까지 없다는 뜻의 말씀을 전해 듣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후에도 몇 번이나 무성한 풀밭을 보면 답답한 심정인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투약‘의 친절을 베풀곤 했다. 이후 작물들을 심고 ’관리‘를 한 덕택에 사태는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당시보다 5년이나 더 나이 먹은 농촌에서는 이제 ‘독약’이라고 써 붙여도 땅과 농작물에 뿌리는 ‘관성’을 버릴 수 없다. 아이들이 흐르는 냇물에서 물놀이조차 할 수 없어도, 하천이 오염되어 물고기 한 마리가 살지 못해도, 두루미가 논에서 식사하고 근처 언덕에서 비명횡사하는 모습을 보아도 그들은 바뀌지 않는다. ‘약’ 처방에 대한 믿음은 공고해졌고 없으면 농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다. 그나마 최근 젊은 농부들은 약의 사용을 줄이고 둑의 풀도 기계를 이용해서 깍지만, 선택성 제초제를 논에 뿌리는 것만큼은 그만두기 힘들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다.

인간이 자연을 조종할 수 있다는 기만에서 출발한 살충제와 제초제로 대표되는 ‘농약’은 20세기를 거치며 많은 문제를 낳았고, 이를 통해 환경문제와 유기농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확대됐다. 하지만, 오늘의 문제는 우리 곁에 여전히 남아있다. 분명히 독약이 분명한데 눈에 띄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하나, 그리고 어른이면(어른이 아니어도 심부름으로 위장하면) 누구나 구매가능하다는 것이 둘, 산과 들, 물 등 어디에나 뿌리고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셋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예로 담배 포장지엔 담배를 피우는 것이 신체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경고문이 들어가 있는 것과 비교해서 그 보다 훨씬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살충제에는 아무런 표시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이 이상하다. 급기야 에프킬라로 대표되는 가정용 살충제는 마치 향수라도 되는 것처럼 냄새가 향기롭다느니 하는 광고로 소비자를 기만한다. 농약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벌레를 죽인다면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 이치이나 이에 대한 영향력이나 효능(?)은 전혀 표기되지 않고 있다.  

 제초제는 더 독한 것이다. (자살을 시도해도 살충제보다 제초제가 확실하고 빠르다는 이야기도 있다) 위험물질에 등급에 맞는 경고문이 큼직한 글씨로 표기가 되어야 하고, 이를 사용하는 이들은 ‘관리’가 되어야 한다. 얼마의 농지에 얼마만큼의 농약을 얼마 동안의 기간에 사용하는지를 알게 하고 남용을 막아야 당연한 것이다. 제초제를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하는 농민들은 무덤, 길가, 논둑, 야산, 마당, 잔디밭등지에 마구 살포하고 있으며 이는 고스란히 우리가 먹는 물 등지에 흘러들어 결국 우리와 아이들의 입속을 타고 몸에 축적된다.

또 하나, 농약의 가장 무서운 점은 잔류성이다. 어디에 뿌려지든지 간에 남아 있게 되며 어떤 것은 수년까지 그대로 농도를 유지한다. 우리가 과일을 깎아 먹기 시작한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물로 아무리 씻어봐야 씻기지 않는 독약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껍질을 깎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식초나 흐르는 물 등이 노하우라고 하지만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그저 마음의 위안이 될 뿐이다. 농약이 그렇게 잘 씻긴다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적어질 수 있고, 이는 다수확을 바라고 피해를 예방하려는 ‘일반적인 농부’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안전을 증명하는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자료도 없이 수많은 농약이 농촌에 풀려서 사용되고 있으며, 장소의 제약도 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문제로 지적되어야 한다. 법적 규제를 통해 판매와 유통을 제한하고, 정해진 곳에 정해진 양만 뿌리는 것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은 순전히 내 머릿속을 떠돌 뿐이다. ‘미친놈’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당장 농사로 소득을 내야 생계를 유지하는 늙고 힘없는 농민들이나 방제법과 농약사용법으로 먹고 사는(?) 많은 농촌 지도소 관계자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농사를 짓되 최대한 흙을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유지하며 풍부한 미생물과 균류, 지렁이와 곤충들이 어우러지는 곳. 그 곳에서 작물과 그 밖에 잡초라 불리는 식물등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곳만이 미래농업의 비전이라고 하면 지나친 주장인가.

4천 년간 이어져온 농업방식을 깡그리 무시하고 외면한 채 서양에서 들어온 화학비료와 제초를 기본으로 하는 ‘관행농’을 수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다품종 소규모의 농사가 대규모 단일 품종의 경작방식으로 바뀌게 되면서 필연적인 병과 단일작물에 적합한 곤충의 집단서식이 그 이유일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의 방식의 편리성을 거부하기 힘든 것인가.

약제의 해악이 꾸준히 인간 세상에 안 좋은 결과를 낳았고 소비자들의 요구로 좀 더 독성이 약해지고 선택적 효과를 기대하는 합성물이 개발되어 사용 중이다. <침묵의 봄>이 겨냥한 50년 전의 미국은 지금 많이 좋아졌을까? 항공방제로 농업을 유지하는 규모의 농업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렇지 않다고 보인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은 철지난(?) 위협 속에 그대로 살고 있다.

세대교체가 없는 한 ‘관행’은 계속될 것이며, 하천과 지하수, 농민과 그 후예들에게 보이지 않는 공격이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중장기적인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을 수 없는 늙은 농부들은 편리함과 굳어진 관습으로 ‘독약’이 우리 먹을거리와 앞으로의 터전인 농토에 축적하는 것, 지하수와 지표수를 오염시키는 것의 영향력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비전없는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그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남들의 눈에 요란스럽지 않게(?) 마무리 했으면 하는 것이니 그들을 설득하거나 논쟁을 통해 현재의 방식을 돌려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상황이 이러하니, 위에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민생을 생각하는 ‘국회’가 서민의 건강한 미래와 녹색 대한민국의 발판인 건강한 먹을거리와 농토를 위한 법제정에 나서야 한다. 물론 대안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책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60년 전에 당차게 외치던 ‘레이첼 카슨’ 의 이름으로, 상경하기 짝이 없을 소리 없는 봄의 미래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힘으로 <침묵의 봄>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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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살아 있게 하라
칼 에릭 스베이비. 텍스 스쿠소프 지음, 이한중 옮김 / 뜰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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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발전을 어떻게 볼 것인가. 급격한 경제성장을 거쳐 OECD가입국이라는 명찰까지 얻기에 이른 대한민국. 이와 함께 항상 등장하는 박정희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마다 나는 혼란스럽다. 어느 쪽의 말이나 옳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양측의 주장은 장기간 집권을 통해 이루어온 개혁과 성장의 옳고 그름을 따진다. 그가 이끌어온 정책을 통해 변화한 한국을 근거로 하고 있고, 이는 추리나 추측이 아닌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에 숫자로 표현되는 성장에 대한 논거는 반박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은 개인의 철학에 따라 판정을 하게 되는데 오히려 나의 어설픈 앎이 판단력을 흐리는 경우라 하겠다. 하지만, 민중의 삶과 그 지속가능성에 대한 가치로 판단하자면 분명히 ‘성장’의 ‘그늘’이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자유주의 경제는 관리대상이 되는 영토의 ‘확장’과 ‘소비’를 기반으로 한다.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기업이 크고 수출이 늘고 신기술과 문물이 들어오고 그들의 지식을 얻기 위해 ‘두뇌’들이 유학을 떠나기도 하고 그들이 지식으로 다시 들어오고 하는 일들이 오늘의 우리 사회의 현재의 ‘수준’에 이르게 한 원동력이다. 하지만, ‘다수의 행복’이라는 가치로 보자면 과연 못 먹고 못 입던 그 시절에 비해서 국민의 행복함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일각에서 GNP가 아닌 GNH(Gross National Happiness)로 따져보자는 주장과 연관하여 우리의 것은 투발루와 파키스탄, 쿠바 등과 같은 나라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자살자가 해마다 늘어나고 이민자들이 늘어가고 돈을 노린 칼부림과 총성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대에 사는 것이 결코 안정과 편안함과는 어울리지는 않는 일이다. 개화기 이전의 조상의 삶은 대부분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관에 의해 수정되거나 삭제된 영향으로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시각으로 분석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분명히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신문화는 무너져버린 전통적 가치와 함께 급격히 쇠락해왔음은 틀림없는 일이다.

총을 가지고 있던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항해술 덕택이었다. 자신들만이 ‘중심’이라 믿었던 유럽 백인들에 의해 원래 있던 원주민들의 땅을 ‘신대륙’이라 일컬으며 미개한 ‘원주민’들의 정신과 문화를 짓밟았다. ‘신대륙’을 접수한 유럽의 백인들은 당시 그들이 자랑하는 ‘문명’에 길들여진 수준의 눈으로 원주민을 바라본다. 지저분하고, 미개하며, 헐벗고, 문맹에다 교양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불 수 없는 그들은 미생물 같은 존재였다. 침략과 약탈의 시대가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이 되던 시대. 파리채로 파리를 잡는 것보다 더 쉽게, 총으로 원주민을 살해했다.

책의 배경이 되는 호주대륙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 등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진 침략속의 살육은 자연스럽게 ‘노예제’로 이어졌다. 미개한 원주민들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노력은 소수의 학자에 의해 꾸준히 있어왔지만 이미 한줌의 재처럼 남아있는 그들의 전통과 문화, 관습을 좆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다만 이 책은 그들 문화를 이해하는 서구의 학자와 원주민의 핵심가치를 담은 ‘이야기’를 전수받은 원주민의 후예가 함께 기술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이목을 끈다.

그들의 창조 설화부터 시작해서, 역할과 소통,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어찌 보면 일개 변방에 사라져가는 소부족의 ‘이야기’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뭐가 그리 중요할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우리사회가 상대적으로 워낙 발전되었기 때문에 덜 발전된 사회로부터 배울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덜 발전된 것이 대체 어떤 것일까? 세계를 지속시키는 것일까, 착취하는 것일까? 자연을 보살피는 것일까, 오염시키는 것일까?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일까, 제국을 건설하는 것일까? 무형의 것을 생산하는 것일까(예술, 지식, 관계), 유형의 것을 생산하는 것일까(자동차, 컴퓨터, 총)? 자연요법의 개발인가, 화학약품을 개발하는 것일까?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 한 두 시간씩 ‘일’하는 것일까? 여덟 시간 이상 일하는 것일까?
 
   

 


결론처럼 다가오는 위의 글은 왜 지금 우리가 석기시대의 문명을 가진 미개한 ‘원주민’의 소통방식과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는지를 말하려하는듯 하다. 후대가 살아야 할 이 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한 지금 ‘소비’로 지구생태계를 위협하는 오늘의 산업사회가 그들에게 배울 점은 충분하다. 다만 어떻게 받아 ‘지금’의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은 또 하나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미 능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우리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탈무드’처럼 세대를 전해서 공동체의 문화를 전달하는 이런 방식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눙가바라’ 전통방식에 따라 공저자의 손으로 그려진 그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피카소의 그림을 통해 얻는 쾌감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좀 더 넓은 세계관과 감정, 문화와 이야기를 함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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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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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에 한 달간 집을 비운 적이 있었다. 아파트가 아니라서 북풍한파를 홀로 주인 없이 막아내며 온기 없는 집은 결국 얼고 말았다. 주기적으로 돌아가던 난방마저 별 소용이 없어지고 수도를 포함한 난방배관까지 꽁꽁 얼어버렸다. 양지에서 집안으로 들어가면 한기가 뼈까지 스며드는 느낌이 드는 데에 놀랐다. 아이와 처를 이웃집으로 피신시키고 난로를 빌려다가 집안 곳곳을 데워서 녹이는 일에 착수했다. 삼사일 정도 지나서 얼어버렸을 것이다. 그 지난겨울의 외출을 떠올리면 그랬다. 이불을 두껍게 깔아 놓아도 소용이 없었다.


폐허가 된 도시. 사람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고 제 멋대로 자란 풀들과 빌딩 전체를 감아 올린 넝쿨. 깨진 유리창과 허물어져 내린 벽. 번쩍거렸을 고층건물을 그 높이만 겨우 알아볼 정도로 너덜너덜 해지고 부식된 기둥은 언제라도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을 준다.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로 나무들이 자라있고 다수의 새들과 곤충, 동물들이 어우러져 마치 도시의 흔적을 가진 밀림의 모습이다.

그곳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인간 없는 세상>은 인간이 사라져버린 지구엔 어떤 일이 생길까를 상상한다. 공상과학영화들의 소재인 중성자탄의 폭발이나 핵무기가 사용된 3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고 외계인의 침공이나 테러리스트의 가공할만한 생화학무기로 인간이 멸종되어 버린 상황이라면 지구는 어떻게 변해갈까. 물론, 덧붙이는 가정은 ‘인간만 없는’ 상황이다. 동물과 식물들은 현재의 수준으로 살아있고, 인간들이 세워 놓은 문명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상상을 해보자.


저자가 단순히 ‘인간 없음’이 어떤 풍경을 가져올지에 대한 묘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등장 이래로 ‘망가져온’ 생태계와 하루라도 인간의 손이 닿지 않으면 이상이 생기고 말 불안한 기계, 공장, 건물, 교통시설, 발전시설, 석유화학 분야의 ‘문명’의 허술함을 지적한다. 철옹성처럼 단단해 보이는 문명이 실상 ‘관리’가 되지 않으면 ‘분해’가 되고 만다는 것이 책의 핵심이다. 이를 통해서 좋아지거나 위험해지거나 다시 좋아지거나 안정되거나 한다는 것이 모두 자연의 힘이라는 것.


꽁꽁 막아놓은 두꺼운 아스팔트위에 조그만 틈으로 피는 민들레를 본적 있는가. 차가 다니지 않고, 미화원이나 관리원이 없는 도로는 곧 작은 틈에서 자라는 풀과 조금 더 큰 틈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자라면서 갈라지고 급기야는 갈아엎은 땅처럼 들려 오를 것이 틀림없다.

집은 작은 구멍에서 시작해서 습기와 곰팡이, 그리고 이에 붙는 곤충들과 동물들의 배설물을 통해서 분해된다. 나무와 못으로 지탱하는 목조주택의 경우라면 분해속도는 훨씬 더 빨라진다. 도시의 바닥을 그물처럼 이어지는 각종 배관은 흐르지 않아서 계절이 바뀌는 순간 얼었다 녹는 과정에서 틀림없이 터지고 만다. 봄철의 물바다는 이루는 도시에서 좀 더 빠른 식물들의 안착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서식지를 확보하게 되는 곤충의 활약과 이들의 포식자들이 자연스럽게 장악하면서 문명의 흔적을 지우게 된다. 뉴욕지하철의 경우엔 단 이틀만 펌프로 물을 빼주는 사람이 없어도 범람하는 지하수로 지하철구간이 가득 잠기고 말 것이라고 한다.

새로 잇는 고속도로가 집중 강수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나 주기적인 태풍에 전혀 대비하지 못하는 21세기의 현실을 보더라도 자연 앞에서 무능해져버리는 인간의 힘을 깨닫기는 쉬운 일이다.

인간 없음의 미래는 지구를 위해서 유익한 일이 될지 모른다. 온갖 위험을 안고 ‘관리’를 위해서 ‘소비’하는 인간문명은 전력을 위해 수십만년 동안 치명적인 방사능이 방출되는 폭탄 같은 물질을 드럼통에 넣어 땅 밑에 묻고 그 위에서 삶을 누린다. 생활의 편리를 위해 개발된 석유화학의 주요 산물인 플라스틱은 분해되지 않고 바다로 흘러들어 잘게 분해된다. 더 이상 분해가 불가능한 이 물질은 바다를 부유하며 플랑크톤 같은 미생물로 시작하여 고래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바다생물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한다.

이러한 위협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인간의 힘으로 처리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고 급기야 필연적으로 ‘사고’로 이어지게 되면, 그땐 후회해도 늦다. 수 많은 인간과 환경이 파괴되고 그 영향력은 지금 인간이 예측하기 힘든 재앙으로 이어진다.


인간 없는 이로움은 바로 우리 곁에도 있다. 전쟁이 낳은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DMZ라 불리는 곳은 한반도의 허리를 수 킬로의 폭으로 가로지른다. 이곳에서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보지 못할 종류의 동식물의 안식처가 되었다. 지뢰가 묻혀 있고 철조망으로 보호되는 안전지대, 단지 사람이 없음으로 생기는 동식물의 평화는 어떻게 자연을 보호해야 할 것인가의 물음에 너무나 쉽게 답을 준다. 우리가 더 보기 쉬운 예는 서울 한 가운데 위치한 한강의 ‘밤섬’이다. 조류보호지역이지만 이곳의 생태를 더 살핀다면 훨씬 더 보물 같은 자연의 생명력과 조화를 관찰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자연은 놀라운 생명력으로 지금 위태로운 지구의 환경을 되돌려 놓을지 모른다. 물론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 인간이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자연을 존중하며 마치 그 존재가 없는 듯 행동하기. 딩동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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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공식 한국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잘 살고 못 산다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이미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돈’이 아닐까. 돈은 만물의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기준이고, 의식주를 충족할 수 있는 수단이며, 문화와 지식, 정보를 향유하게 할 수 있는 도구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는 아프리카의 교외지역이나 얼마 남지 않은 아마존등지의 밀림에서 사냥을 통해 근근이 살아가는 부족들, 그리고 동남아시아 지역 산간 지방, 농업지대에 살고 있는 농민들을 보노라면, 그들의 궁핍과 가난, 갖추어지지 못한 관계시설과 등불로 밤을 밝히는 생활 등의 불편함이 그들에 대한 동정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일부의 시청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여서 그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시설’을 지원하는 행위를 자랑스러워 한다.


히말라야 고지대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의 국경이 이어지는 중앙에 몇백년 동안 이어지는 그들의 고귀한 전통과 문화를 잃어가는 공동체가 있다. 언어학자 헬라나 노베르 호지는 ‘에서티베트 고원과 고대문화의 고장 라다크’에서 16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배움’을 얻는다.


   
  라다크 사람들은 사회구성원 사이의 유대관계 그리고 주변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내면의 평화로움과 기쁨이 넘치는 삶의 태도를 부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종교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건강하고 따뜻하고 편안하고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무지와 질병과 끝없는 노역이 미개발 사회의 운명이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진보라 생각하는 ‘개발’이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파괴하고 획일적인 의식주와 관습의 파괴와 정체성을 위협한다. 과거 그들이 외부의 ‘간섭’없이 살때의 평온과 만족, 행복에 대한 가치들을 스스로가 부정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저자는 세계가 너무 한쪽으로 치닫지 않고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평화와 풍요로움은 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소규모 자족사회가 이어오는 대가족 제도와 종교, 문화와 농경을 통해서 얻는 것은 ‘재화’가 아닌 생활의 ‘만족’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행복’의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편리’와 ‘풍요’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저자의 집념의 노력과 성품이 그들의 마음에 한발 가까이 갔지만, 그들의 세계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컨대 그들이 말하는 ‘일’은 우리와 틀리다. 10시간이 넘게 문서작업을 하는 것은 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이 몸을 움직여서 무언가는 생산하거나 이동하는데 쓰는 노동만을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일’을 한다고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가 난다거나 하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라다크 사람들은 서구사회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스트레스나 지루함, 좌절감 같은 것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한번은 내가 마을 사람들에게 스트레스의 개념을 설명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반응은 이랬다.

“그러니까,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화가 난다는 말인가요.”

 
   

 


그들의 가치는 생활을 통한 교육으로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3대 4대에 걸친 대가족이 함께 생활을 하면서 각자가 맡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이는 누가 ‘계약’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이방인들이 보기엔 잘 짜인 연극처럼 보일수도 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그들은 스스로의 할 일과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와 관점을 습득하게 되며 이는 공동체내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와 협력의 근본을 이룬다.

   
 


세대를 거류하면서 라다크 사람들은 스스로 의복과 주거를 마련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그들은 야크 자죽으로 신발을 만들었고, 양털을 이용해 옷을 만들었다. 또 돌과 진흙으로 집을 지었다. 그들의 교육은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었고, 살아있는 세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한 것 이었다. 그로 인해 어린이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원을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직관적인 자각능력을 갖게 된다.

 
   




작은 규모의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고 하는 일들이 생활의 기반이며, 이를 통해서 돈이 없더라도 그들이 살아가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풍족하지 못한 소비는 그들에게 검소하고 절약하는 가치의 소중함을 알게 해준다.


   
  우리가 지금 시급히 해야 하는 일은 농업자체에 그에 함당한 권위를 복원시킴으로써 앞서 언급한 추세를 반전시켜야 하는 것이고 또 농업을 정식 직업의 위상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일이다. 탈 중심화의 개발은 그 추진과정에서 소규모 농경세대에게 상당한 수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는 위기에 있다. 농업은 무너지고 사회는 점점 양극화로 계급화가 심해진다. 고통받고 있는 다수의 민중에겐 ‘행복’과 ‘만족’이라는 단어는 위선이다. 작은 공동체에서 작고 느린 가치에 소중함을 깨닫고 이를 통해서 만족하며 생활하는 라다크에게서 선진국의 국민이 ‘배움’을 얻게 되길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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