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동력, 당신이 에너지다
유진규 지음 / 김영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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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나비가 날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언덕, 그 위로 풍력발전의 프로펠러가 소리없이 돌아가고 있고 화면이 바뀌면 광활한 대지위를 까맣고 반짝이는 ‘모듈’의 집합체가 태양의 궤도에 눈을 맞춘다는 해바라기 처럼 군무로 움직임을 보인다. 뛰어 노는 아이들 주변으로 꽃과 날아다니는 나비, 날씬한 몸매의 남녀가 잘 가꾸어진 트랙위에서 땀을 흘리며 조깅을 하는 모습이 비춘다. 빌딩들의 조명이 켜지고 실내에선 TV와 게임기 안의 아이들. 컴퓨터로 뭔가에 열중인 아버지와 전기 오븐에서 잘 익은 요리를 꺼내는 엄마가 환한 미소를 짓는다. 가족 나들이를 위해 오르는 차는 충전을 마치고 플러그를 뽑자마자 소리 없이 속도를 높여 도로를 질주한다.

“풍요롭고 행복한 미래의 원동력. 녹색 에너지”라는 타이틀이 떠오르고 곧 화면이 어두워진다.


실재하는 광고의 이미지는 아니지만 여태껏의 미디어를 접한 정보들을 조합하면 누구나가 상상할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미래에 대한 장밋빛 희망은 ‘신재생에너지’라 불리는 자연이 주는 힘을 전기에너지로 바꾸는데서 기인한다. 과연 그리 될 것인가 라는 의심보다는 어찌되었든 그들이 우리의 희망인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다.

석유는 언제가 고갈될 것이고 일부국가는 생산량 감소세로 돌아선 요즈음, 연일 높아가는 유가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큰 소요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별 근거없는 녹색성장을 보장하는 국가와 대체에너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대기업들의 홍보와 보도자료를 통해 이미 우리의 미래도 보장되었다는 ‘조작’에 종속된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생필품과 운송수단, 가전제품, 공구들과 심지어는 먹는 농산물까지도 ‘석유의 소모’(보통 ‘탄소’로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다)가 필수불가결한 시대이고, 2차 생산물을 위한 탄소 소모량도 점차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2012년 탄소의무감축에 의무를 지게 되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별 국가적 대책 없이 현 수준으로 탄소배출을 유지하며 다른 유력배출국들의 눈치를 보겠다는 것이 전략의 전부 라는데에 어이가 없는 지경이다. 대통령은 기껏 ‘가정의 절약’이 나라를 구한다는 메시지로 ‘또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나’라는 원성을 듣고 있고 결국 엄청난 탄소를 하천에 뿌릴 4대강사업은 강행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는 추세다. 과연,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석유없는 미래의 충격에 대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제로에너지 하우스부터 태양에너지를 이용한 조리기, 빗물을 활용하는 설비등 개인적인 노력이 국가적 지원을 앞지르고 있는 요즈음에 실상 움직이는 모든 것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이 에너지의 근원이 대부분 ‘석유’라는 것이 문제인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태양광, 풍력, 조력, 지중온도차 발전 등을 전국의 공터마다 설치하여 펼쳐 놓는다면 지금 쓰는 수준의 에너지를 얻을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가 분명하다. 아마 몇십분의 일 수준이라면 몰라도 현재 탄소를 배출하면서 얻는 에너지의 엄청난 양을 감당하기엔 그들의 발전수준이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결론은 지금 쓰는 수준에서 현저히 적은 양의 탄소배출을 하는 생활습관을 들이는 것은 물론이고 웬만하면 가공된 손실이 많은 에너지원을 이용하는 것 보다 가공되지 않고 손실이 별로 없는 에너지원을 사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촬영하면서 인간이 동력이 되는 것이 본인에게도 지구에게도 가장 적절하고 현명한 일이라는 것을 세계 곳곳의 실험적이며 진보적인 실천가들의 ‘기구’들을 소개하며 설득에 힘을 싣는다.

자전거로 시작할 수 잇는 실천은 비싼 에너지 들여가며 기계에 의존해 제자리뜀이나 하고 달리지 않는 싸이클로 근육을 키우는 헬스클럽의 시스템을 비웃는다. 두다리는 이동하기 위해 존재하고 세포는 이를 통해서 적절하게 몸의 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한다라는 이치를 생각하면 보통 40킬로미터를 하루에 걸었던 선조들과 달리 기껏 500미터 정도를 이동하는 오늘날의 인간들이 심각한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퇴화하는 세포와 근육들이 장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결국에는 각종 성인병으로 등장하여 죽음을 재촉하게 된다는 이론은 매우 설득력있게 들린다. 에너지 펑펑 써가며 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인간동력’을 이용해 에너지를 생산하자는 것이 책이 가진 의도다. 홍콩의 ‘캘리포니아 피트니스센터’는 운동기구에 발전기를 달아서 전기를 만들고 이것으로 조명과 각자가 보는 TV의 전력을 조달한다. 조깅을 하고, 집에서 페달을 밟아 30분정도 운동하면 50W의 전기를 만들 수 있다. 뱃살로 음악을 듣고, 컴퓨터를 사용하고, 세탁기도 돌린다. 꿩먹고 알먹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석유중독에서 벗어나 운동으로 전기에너지를 생산하는 일은, 당신 머릿속에 들어있는 당위적 에너지 절약의 개념이 체험적 실천으로 바뀌는 순간 체험하게 될 카타르시스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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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 년의 농부 농부가 세상을 바꾼다 귀농총서 16
프랭클린 히람 킹 지음, 곽민영 옮김 / 들녘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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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 농업의 미래를 밝게 볼 이가 있던가. 이 시대의 개혁과 개방은 신자유주의에 편입된 정부의 ‘선택’이며 여러 산업중 하나인 농업은 포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농민과 그들이 이끌고 있는 농업을 달래기 위한 것은 기껏 쌀 수매를 중단하지 않고 직불제를 유지한 정도가 고작이다. 이것으로 농민들은 위안을 삼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호구지책’이 될 뿐 인 농사. 자식도 다 여의고 농부로 사는 세상에 먼 미래에 대한 비전과 포부가 없기 때문일까. 결국 쌀 경작지도 해마다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고 작물에 투입되는 비료와 퇴비 값은 유류비와 같이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검게 산야를 뒤 덮은 인삼밭은 전국 대부분의 농토를 황폐화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천 년을 이어온 농업의 나라. 어쩌다가 오늘날 ‘농업’이 이런 모멸과 천대의 대상이 되었는가.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모두가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는데, 오늘날은 자급률 20%대에 그치는 농업의 현실조차 널리 인식하고 있지 못하니 미래 거대 농업유통회사에 복속 될 우리 음식의 미래는 어찌할 것인가.


1909년, 미국 토양관리국장을 지낸 F. H.킹 박사는 아시아 3국인 한중일의 농업을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된다. 책만으로는 그의 의도는 알 수 없으나 배움의 의지는 확고한 지식인이 분명했다. 이 기간 동안 꼼꼼하게 기록한 글과 사진들이 그 당시의 중국, 일본, 한국의 농업현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농토현장과 농민, 농기구와 농자재들을 담고 있다. 저자 유고 후 부인이 모아서 책을 내 놓았는데 100년이 다되어 대한민국에 선보이는 이유는 무얼까.

열강 미국의 농업은 넓은 땅과 유럽에서 수입되는 사료와 무기비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고스란히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유입되어 오늘의 ‘관행농법’으로 이어진다. 당시의 관점이야 분명했다. 선진 농법을 후진 국가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분명 ‘선진 미국’에서 시찰 왔을 저자는 자국의 농업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수치와 통계를 근본으로 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3개국의 농업이 우월함을 증명한다. 일본에서 중국으로 다시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어지는 여정 동안의 그가 본 모든 것을 ‘풀 한포기’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노력은 자국에서 당사국내에서 조차 구하기 힘들 수많은 사진과 통계, 묘사의 자료들로 남겨져 한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3개국의 농업현실이 ‘리얼’하게 펼쳐지는 동시에 농사 준비와 과정, 결실까지 추적해 생활과 농업의 연관과 그 효율성까지 유추해내고 이와 관련한 각 국의 통계자료를 미국의 농업과 비교하는 일을 지나치다 싶은 정도로 집요하게 집필해 놓았다. 이는 단순히 ‘견문록’ 이상이라 평가할 만하며 당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과 이에 대한 근거의 글은 미국인을 위한 것이라 생각되지만 오히려 오늘날의 아시아인들에게 훨씬 더 유용할 듯하다. 자신의 과거를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일은 과거를 ‘조작’하고 미래를 새롭게 ‘가공’하려는 국가들에게 어려운 일이다. 당시 농업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오늘에 되살리는 데에 충분하지 않지만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 기대된다.

일본, 중국, 홍콩과 광둥을 따라 서강등지에서 본 농민과 농업의 현주소를 평가하고 풍습과 건축, 의복 등에도 신경을 많이 써서 평가하였다. 서양에서 쓰레기로 분류되어 골치덩어리 뿐일 인분의 효율적인 처리방법에 놀라고 어찌하여 ‘파리’를 보기가 이렇게 힘든가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과연 퇴비를 그렇게 논밭의 구석에 쌓았는데 파리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은 통기성을 고려한 마른 풀들과 톱밥, 나뭇가지 등을 섞었다는 이야기에서 믿음으로 바뀌었다.

40여 년 전, 이 책을 접하고 훌륭하게 활용해 주변에 그 가치를 퍼뜨리는데 온 생을 바친 조셉 젠킨스의 <똥 살리기 흙 살리기>는 오히려 이 책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었다. 오늘날 귀농인과 유기농법 실천자들의 참고서로 활용되고 있는 ‘퇴비 만들기’의 거의 유일하다 싶은 참고서니 말이다.

쌀 문화, 비단 문화, 차 산업과 농지공간의 효율적 활용을 분류해 기술해 놓은 책은 옛날을 그리워하는 단계가 아니라 ‘복원’해서 우리의 살림을 풍요롭게 해보자는 움직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다.

기껏 백년도 되지 않은 옛 농업문화를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 이 땅을 살리고 농업을 살리는 일이라는 점을 절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미국 지식인의 ‘오래된’ 저서는 과거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 농업을 이어서 그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희망의 메신저다.


서문 말미에 쓴 ‘효율성’에 관한 저자의 말은 오늘 농업을 생각하는 모든 이들이 새겨들어야 할 ‘미국인’의 금(金)같은 조언이다.

   
 

무엇보다 이들 국가가 농업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생산계층이 삶의 모든 부문에서 실천해온 모범적인 생활 태도 때문일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땅은 먹을거리와 연료, 옷감을 생산하는 데 남김없이 쓰인다.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사람과 가축의 입으로 들어간다. 먹거나 입을 수 없는 모든 것은 연료로 쓰인다. 사람의 몸과 연료, 옷감에서 나온 배설물과 쓰레기는 모두 땅으로 되돌아간다. 동아시아인들은 이것들을 잘 보관해뒀다가 1~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동안 꾸준히 작업을 해서 거름으로 쓰기에 아주 좋은 상태로 만든다. 이는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충분한 사전 준비를 거쳐 이뤄진다. 한 시간, 또는 하루의 노동이 조금이라도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면 일을 놓지 않고, 비가 오거나 땡볕이 쏟아져도 일을 게을리 하거나 미루지 않은 것은 이들에게 적어도 불가침의 원칙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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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마 2021-06-13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남 장흥에 살고 있는 교사 입니다. 4천년의 농부 서평을 매우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다른 어떤 책들을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패스트푸드의 제국
에릭 슐로서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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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고 반짝이는 최신의 인테리어의 매장. 가족과 친구, 연인이 예쁘게 모여 앉아 그들의 음식 문화를 향유하는 곳. 혼자라도 나쁘지 않다. 양복에 넥타이를 맨 사무직들이 한손에 서류가방을 들고 나머지 한 손에 ‘가볍게’ 쥐고 끼니를 풍성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곳. 바쁜 일상에 간편함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풍부한 영양과 ‘행복한 식사 Happy Meal'을 제공하는 곳. 출출하고 심심한 밤을 함께 해줄 간식을 전화 한통으로도 이미 우리는 ’패스트푸드의 제국‘에 있는 것을 실감한다. 웰컴 투 패스트푸드 네이션.


‘먹는 것이 곧 그 사람을 말한다’ 라는 말을 생각하면 내가 무엇을 먹는지, 그리고 ‘먹은것’이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관심은 당연한 일이다. 아이들의 대부분이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패스트푸드를 이용한 식사를 하고 있다면 더욱 그 ‘음식’에 대해서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다. 패스트푸드는 말 그대로 ‘빠를’ 뿐 아니라 간편하고 풍성한 맛을 지니고 있어서 쉽고 빠른 ‘속도’를 원하는 지금 시대에 꼭 들어맞는 ‘효율의 식사법’이라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듯하다.

문제는 제공되는 ‘음식’이 고도로 축약된 산업체계에서 만들어진다는 데에 있으며 우리가 사용하는 물품과 기기와는 다르게 생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영양물질을 너무 빨리 쉽게 생산해서 제공한다는 데에 근거한다. 기계화 된 생산 공정을 통해 포장되어 전국 각지로 보내지는 원료를, 숙련되지 않은 ‘누구라도 조리할 수 있는’ 시설을 이용해 조리한다는 것은 편리함과 빠름 이면에 있는 그 무엇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만들어지는‘ 과정을 분해해 보면 문제가 생길 요지가 다분한데 먼저 원료인 곡물과 축산물은 대량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용하는 ’농약‘과 유전자 조작, 항생제와 빠른 시간에 살찌우게 만드는 합성사료가 문제의 근원이며 이어서 도축과 포장육으로 가공 시에 생기는 위생 상태와 처리와 보관에 따른 변질, 이물질과 병균의 유입, 매장으로 ’얼려서‘ 이동하고 내려진 이후에 생기는 미성숙한 관리를 통해 발생하는 문제, 조리 시에 생기는 위생 문제 등으로 크게 분류해 볼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매장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미성년자들로 이루어지고 이들의 시급은 ’보람을 느낄 수 없는‘ 수준이 뻔 한 것이기 때문에 (편의점과 비슷하다) 강요된 미소와 서비스정신, 가공할 노동시간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것은 당연시된다. 이는 위생의 문제뿐아니라 산업이 가지는 노동력을 대하는 철학의 문제인 것이다.


패스트푸드의 대표주자 맥도널드의 영향력은 누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정도다. 책은 대표주자의 역사와 사례를 통해서 미국 패스트푸드 산업의 문제를 분석한다. 1968년 미국 1000개 지점을 가지고 있던 것이 오늘날 세계 30,000여 곳에 퍼졌다. 매년 100만 명 이상을 고용하는 엄청난 회사이며 미국 최대의 쇠고기, 돼지고기, 감자의 구매자이고 두 번째 가는 닭고기 수매자이다. 게다가 세계 제일의 상업부동산 소유회사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유명한 기업’의 자리에 있던 코카콜라를 제치고 앞으로 나선지 10여 년째이다. 이러한 막강한 ‘권력’에 있는 기업이 우리 몸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음식’을 제공한다고 할 때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옆집 아주머니가 주말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무농약 채소를 주면 믿고 먹을 수 있는 것과 광대 ‘로널드’나 치킨 집 ‘샌더스 대령’의 포근하고 따뜻함을 믿고 곧 우리의 몸이 되어 버릴 음식을 택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책은 아주 유용한 참고서가 될 것이다.

더불어 날로 치열해져가는 경제시스템아래 놓인 ‘외식기업’이 ‘효율‘을 위해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가공 및 유통 경로에서 ‘쉬운 길’로 가기는 결코 ‘안전’은 아니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다.

책은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미국의 ‘음식문화’를 들여다봄으로서 보다 폭 넓은 미국 산업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접근한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농업, 축산업, 가공업, 서비스업까지의 연결고리가 몇 개의 회사에 의해 조정되고 이를 통해 생산자와 노동자는 ‘착취’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미국 음식산업의 그늘을 보여준다.


저자는 소비자인 우리의 ‘선택’을 강요한다. 소비자의 힘으로 회사의 부도덕한 정책과 관리를 바꾸자는 이야기다. 과거, 연대를 통한 요구로 회사의 정책을 바꾼 예들 중, 영국 맥도널드를 상대로 10년 넘는 소송을 이끌어온 그린피스 소속의 2인이 결국 승리하는 모습과 투쟁을 통해서 흑인의 취업을 이끌어낸 일, 유럽등지에서 여론을 업고 일어난 유전자 조작 감자거부가 미국 내에까지 영향을 미친 사례를 들면서 이익을 목표로 하는 기업은 ‘판매’가 떨어지는 일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의 ‘고객’이 손잡고 요구하면 지금의 문제점들이 충분히 해결되면서 안전과 효율이 공존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매번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음식 이물질이나 위생문제의 뉴스는 재탕, 삼탕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무감각한 소비주체인 우리의 의지부족이 문제인 것이다. 아이들 대부분이 ‘식사’를 해결하는 패스트푸드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은 ‘패스트푸드의 제국’에서 음식을 제공받는 국민의 권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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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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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아내가 작가에게 던진 한마디


“그래도 절 사랑해 줄건가요”


   
  그 질문은 오랫동안 저를 괴롭히는 화두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남자와 마찬가지로 저는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또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을 한다 해도 잔인한 진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어쩔 수 없이 미남과 부자가 좋은 당신이라면 그런 저 자신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해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에겐 너무나 먼 <가야할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못생긴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를 다루는 최초의 소설‘ 이라고 이야기 하는 저자의 평이 아니더라도 소설가 ’박민규‘를 아는 이라면 약자나 소수자, 아웃사이더에 대한 시선이 어떠할지는 가늠해 보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책을 읽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사랑‘의 현실에 대한 풍자, 결코 ’불가능할 것 같은‘ 픽션의 ’가능성‘이 어떻게 스토리를 통해 세상의 수많은 독자들에게 다가오는지 말이다.


‘우리’가 아닌 ‘나’는 비록 잘, 편안하게 살고 있다하더라도 어려운 처지와 환경에 놓인 소설속의 화자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과 함께 애정을 흠뻑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속에 ‘나’는 소설속의 타자, 그들과 마찬가지이므로 결코 주인공인 ‘그’나 ‘그녀’가 이야기하는 현실속의 비현실, 그러니까 ‘지독하게 못생긴 여자와 연애하는 것’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美)에 대한 끊임없는 인간의 욕구가 문명, 문화가 역사와 함께 발전하는 힘이었다고 하는 것과 같이 추함, 못남에 대한 혐오와 증오의 정도도 꾸준히 그려지지 않은 선을 넘어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내가 아름다워야 하고 아름답지 못한 모든 것들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마땅하고 특히 내 눈앞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극단의 행동이 실제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현실이 오늘의 사회다. (<백설 공주>의 경우와 비교해 볼만 하다. 왕비가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백설 공주를 죽이려 하니까) 특히 ‘법’과 익숙한 사회적 ‘눈치’의 경력의 경험이 덜 된 학생들 사이에서 심각성을 띠기도 한다.

개그우먼 박지선(KBS 개그콘서트 출연자)이 성공한다고 해서 ‘못생긴 얼굴’이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할 수는 없다. 오늘도 여전히 여자들에겐 안내데스크와 로비에 서있는, 레이싱걸 엘리베이터걸과 같은 ‘걸’과 항공승무원의 ‘원’이 붙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면’을 갖춘 외모와 일정 이상의 높이가 요구되는 키를 가진 ‘몸’이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변호사, 판사, 검사, 의사, 건축사, 변리사 등의 사가 붙거나 삼성, 엘지, 포스코 등의 브랜드를 아로새긴 한 쪽의 그림에 나란히 새겨진 이름이 있는 명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위해 스펙, 스펙하며 몇 번 써먹지도 못할 외국어와, 몇 번은 쓸 수 있는 졸업증명서와 한 번도 제대로 써먹지 못할 '발성연습, 면접대비' 같은 학원까지 다녀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만 하면서는 도무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세상. 공부하고 학원을 다니고, 피아노와 태권도, 체육활동과 봉사활동, 특기활동과 외국여행 등을 가방한쪽에 교과서를 차곡차곡 쌓아서 넣어 두는 것과 수능시험을 잘 보기위한 입시대비반에 다닌다거나 결국은 토익시험을 위한 외국어 학원에 다닌다거나 학점을 높이기 위한 술수를 찾아서 주변과 선배의 옆구리를 찌르거나 그것도 안 되면 나는 도무지 마실 일 없을 것 같은 술이 담긴 술병을 교수의 선물로 준비한다거나 하는 것. 취업은 승진을 위한 자격증을 준비한다거나 매주, 매달 반복되는 회사의 테스트를 견딘다거나 점점 말도 되지 않는 업무지시를 내리는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쓸게, 콩팥을 밖에 내 놓는 일 따위. 모두가 배우자를 잘 맞기 위한 준비라고 하면 결코 ‘사랑’하기에 함께 있고, 그래서 미래를 약속하고 둘을 닮은 아이를 낳고 하는 일 따위는 ‘행복한 나의 인생’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끊임없는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에 놓인 젊음이 ‘사랑’을 일찍 선택하고 철이 들면 ‘사랑’보다는 다른 ‘필요한 것’을 위해 ‘선택’을 하게 되는 이 사회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내가 다가가서 가까워지고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리는 드라마는, 어쩌면 황당하다기보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치고 지금 이세상의 이치에 절어있는 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가 않을 뿐이다.

벨라스케즈의 <시녀들>

외모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별로 없다. 벨라스케즈가 그렸다는 ‘시녀들’의 그림 중에 등장하는 난쟁이 시녀를 보고 유추해 볼뿐, 그저 ‘어’하고 놀랄 정도의 최악의 조건을 지닌 여자를, 그녀와 가족으로 인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남자둘이 어울리고, 그중 하나와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다는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다. 다소 불편하고 머리에 거슬리는 상황의 이야기는, 그저 우리가 익숙하지 않을 뿐이라고 그리고 이런 상황이 지금 세상 속에서 작은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달랜다. 그럴 수 있다고, 그녀의 얼굴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 내면의 교양과 인성, 따뜻함과 부드러움,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가려질 것이라고 상상을 해보지만 그러다 얼굴을 마주 보았을 때의 느낌은 어떨까라고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크리스마스 겨울에 시작하여 스무 살 겨울로 돌아오는 작은 러브스토리가 뫼비우스의 띠 처럼 제자리로 돌고 있는 특이한 이야기. 피아노곡 음악을 제목으로 선택하고 스무곡 가까운 팝 넘버가 이야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흐르는 소설.

‘무규칙 이종’이라는(작가의 데뷔이래로 계속되는 실험처럼) 파격적인 쓰임새를 보이는 ‘문장, 문단 나누기’는 읽는 이의 호흡을 제멋대로 ‘조종’하며 <가장 적절한 형태의 문장 읽기에 대한 텍스트디자인 활용>은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리포트를 읽는 느낌이다. 4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양’ 속에서 차츰 그의 이야기에 익숙해질라 치면 마지막 책을 덮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아, 한숨을 크게 쉬며 다시 책 밖으로 내 몸을 끄집어내거나 책의 모서리를 잡고 기어 나와야 하는 것 같이 빠져 나오기 힘들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에게 기적처럼 다가온 사랑과, 열정을 다해 살아가는 ‘열린’ 연인들과, ‘사랑의 가치’를 가정에서, 사회에서, 국가너머 실현하고 계신 모든 분들을 떠올리게 하는, 참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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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오토바이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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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아버지가 없다면 어떨까?

만날 술에 취해서 혀 꼬인 큰 소리로 엄마와 시비하는 소란이 잠자리에 든 우리를 깨웠을 때, 동생과 나는 둘 다 깨어있음에도 눈을 꼭 감고 자는 척 하고 했다. 휴일이나 퇴근 후에 집안일과 우리들의 문제로 싸움이라도 있는 때엔 동네가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아들이 있으나 없으나 신경 쓰지 않고 소리소리 지르는 모습이 진저리쳐지기도 했다.

잠에서 깨기 전에 출근, 잠자리에 들고 나서 퇴근하시는 아버지. ‘돈 벌어 오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어린 시절 가끔 휴일 틈을 내서 숙제를 도와준다고 하시다가 부족한 아들의 학습능력과 태도를 군대식 얼차려로 무지막지하게 야단을 치고 흥분하시는 모습에 온가족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일도 연중행사였다. 나 뿐 아니라 동생도 마찬가지였는데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잘 대응하는 동생과 달리 나는 두려움에 아는 것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엄한 아버지얼굴과 꼭 쥔 커다란 주먹 앞에서 백지장같이 하얗게 변하는 머릿속과 눈앞은 먹물처럼 까매지는 덕택에 더 길고도 지루한 얼차려를 받고는 했던 것이다 

  어찌나 심하게 했는지 지금도 아버지와 식사하는 자리에서 “왜 그렇게 아들을 잡으셨어요?” 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동생의 경우엔 초등학교 삼사학년 때인가로 기억하는데 집 앞에서 불장난을 하다가 아버지께 걸렸다. 문제는 추궁과 다짐 속에서 태운 성냥의 개수를 물었는데 야단맞기가 싫어서 동생이 개수를 줄였다가 금방 추적에 의해 걸린 일이었다. 이 일로 동생은 죽지 않을 만큼 맞고 싹싹 빌고 다시는 거짓말 안하겠다는 다짐을 수십 번이나 받은 뒤에나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풀려났는데 이때 나는 그 참상을 옆에서 숨죽이며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아, 거짓말을 절대로 하면 안 되겠구나.’라기 보다는 걸리면 죽겠구나. 라는 교훈이 더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걸리지 않게 하고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겠다’가 아버지를 대하는 우리 형제의 자세였다. 

 

그러다 사춘기를 지날 즈음에 ‘아빠가 없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가끔 했었고 곧 돈 없이 우리 가족은 불행해질 것이다, 라는 맹랑한 상상으로 가로막히기도 했다. 더욱 문제는 고등학교 즈음에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로 거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내 스스로는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흘릴 눈물에 앞서 앞으로 나도 동생도 대학을 가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병원에 가서(충격을 걱정해서 인지 경황이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우리를 거의 열흘이 다 되어서야 아버지의 면회를 하게 했다) 비쩍 마르고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칭칭 동여맨 얼굴과 몸을 보면서 겨우 아버지의 주사가 꼽힌 손을 잡고 말은 못했지만 꼭 일어나세요 라고 마음으로 소극적인 전달을 시도했던 것은 나나 동생이 같았을 것이다.(동생도 아무 말 없었다.)

몇 개월 만에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그리고 퇴원으로 이어진 기적 같은 일에 우리식구 뿐 아니라 주변사람들도 경이로워 했다. 함몰된 뼈와 근육으로 몹시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을 했지만 아버지는 걷기도, 먹기도, 말도 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몹시 다행이다 하면서 행여나 내가 과거에 했던 몹쓸 생각들이 효과를 나타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사실 오늘날 이렇게 낙천적이며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자아를 가지게 된 것은 (물론 자평이라 객관성은 떨어지겠지만) 어머니의 영향이 훨씬 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이를 들면서 나도 아버지가 되고 아이를 대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 내가 받았던 아버지의 행동들이 ‘이해’의 수준에 들기 시작했다. ‘동의’하기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이 얼핏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 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아버지는 ‘좋지 않은 것’들로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고 기껏 좋은 점이란 한손가락에 꼽을 정도, 어린 시절의 여행 추억뿐이었다.

나는 어떤 아버지가 돼야 할까.

조두진의 소설은 섬세하면서도 건조한 문체가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말랑말랑한 묘사에 눈이 닿으면 빠져서 묻히듯 잘 읽힌다. <도모 유키>때도 그랬지만 <아버지와 오토바이>는 오직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자신의 삶이나 인생은 없이 ‘희생’만으로 평생을 보내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식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도 가장으로서 최소한 ‘처자식 밥 굶기지 않는’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몸이 불편한 큰 아들을 위해 최선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삶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죽음과 이를 조사하는 형사의 부름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아버지와 가장 오랜 세월을 ‘노가다판’에서 ‘지기’로 지냈던 진기풍이라는 사내의 입을 통해서 아버지의 진면목이 대부분 그려진다. 실상 아들이라고 하는 엄종세는 아버지와 만나지도 통화하지도 않은 채 살아왔기 때문에 어떤 인간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왜 그렇게 만나기 힘들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이런 점이 오히려 아버지 살해사건을 놓고 아들인 엄종세를 의심하는 형사의 추정에 힘을 실어준다.

결국 단순 뺑소니가 살인범이었음이 밝혀지고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아들은 스스로의 삶 또한 슬며시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부도덕한 일을 통해서 돈을 모으고 오로지 그 돈을 처와 자식에게만 썼던 한 인간. 그를 통해서 과연 이 사회에서의 아버지란 어떤 존재이며 가족과 그 안의 아버지의 역할은 어때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아버지는 우리와 떨어져 사는 게 좋으십니까? 아버지는 왜 사십니까? 어머니는 늘 한숨만 쉽니다. 어머니도 싫고 아버지도 싫고 집도 싫습니다. 요즘 저는 집을 나가버리고 싶습니다.
 
   

 


오학년때 엄종세가 보낸 편지에 답장하는 아버지의 편지는 아버지가 가진 삶의 철학을 보여준다. 어쩌면 우직하면서도 요즘 유행하는 ‘바보’같은 인생관을 가진 한 인간이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기러기 아빠’와 비교하면 비교가 될까?


   
 

종세야, 왜 사느냐고 물었니? 어린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아버지에게는 원대한 목표가 없다. 그런 것이 있으면 좋겠지.......하지만 나는 그런 게 없구나. 아버지는 다만 너희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열심히 공부해서 반듯한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종세야, 아버지는 무엇이 되고자 살지 않는다. 우리 식구들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아버지에게는 가장 소중한 일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해야 하는 일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래서 너와 너의 형이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다. 너희 어머니와 너희들이 굶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 것이 내가 원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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