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만 하더라도 겨울이면 코로나에서 벗어나 극장도, 여행도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꿈이었다. 코로나는 갈수록 기승이다. 다행스럽게도 백신이 속속 나오고 있다.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앗아간 이 끔찍한 바이러스도 서서히 사라지겠지. 그러나 바이러스가 남긴 상처를 지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완전한 치유가 어려울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가 남긴 가장 큰 상처는 차별과 혐오가 아닐까. 맨 처음 이 바이러스는 인종차별을 불러왔다. 중국에서 시작했기에, 동양인들이 차별과 혐오, 폭력에 시달렸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땅에서는 이 바이러스가 처음 폭발적으로 터진 곳이 종교집단이었고, 두 번째로는 성소수자들이 자주 가는 클럽에서 대규모로 유행했기에 특정 종교인과 성소수자들이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뿐인가. 아무리 조심해도 ‘확진자’가 되는 순간 주위의 비난과 냉대, 혐오의 시선은 피할 길이 없는 것 같다. 백신을 개발했듯 이 깊은 상처를 낫게 하는 치유제도 인간은 지혜롭게 찾아낼 수 있을까?

사람들은 종종 책의 힘, 문학의 힘을 간과한다. 문학은 이 현실에서 쓸모없는, 어쩌면 몽상가들을 위한 지적 놀이 또는 허영으로까지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세상에서도 한 권의 책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위안과 위로, 지혜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차별과 혐오가 첨예해진 지금, 사람 사이의 연대를 강조하는 문학 작품이야말로 가장 좋은 마음의 백신은 아닐까. <지복의 성자>와 <레닌의 키스>에는 고달픈 현실에 지친 이들이라면 누구나 꿈꿀 만한 이상 세계가 등장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性)을 동시에 갖고 태어난 히즈라 ‘안줌’이 이곳저곳 떠돌다 무덤가 사이에 만든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와 지혜로운 ‘마오즈 할머니’가 이끌어가는 ‘서우훠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이 두 공동체에는 차별도, 혐오도 존재하지 않는다. 파라다이스라는 의미의 ‘잔나트’와 ‘수활(受活)’, 즉 ‘고통속의 즐거움’이라는 뜻을 지닌 ‘서우훠’ 마을은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그곳에는 저마다 세상에서 배척당한 이들이 모여 산다.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만든 안줌 자신이 앞서 말했듯 제3의 성 ‘히즈라’이며, 잔나트에는 그녀처럼 소외되고 버림받은 존재들이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든다. 매춘부라는 이유로 장례식장에서조차 거부당한 여자의 시신을 씻기고 장례를 치러주면서 이곳은 장례식장도 겸하게 된다. 죽은 이들까지 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진정한 파라다이스이다.

서우훠 마을은 애초부터 장애를 지닌 사람들만 모여살고 있다. 중국의 세 현이 교차하는 바러우산맥에 자리해, 가장 가까운 마을과도 최소 십 여리가 떨어진 이 마을은 명나라 때 조성되어, 맹인과 절름발이, 귀머거리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장애인이 아닌 장성한 사람들은 짝을 찾아 외지로 떠났다. 그러다 보니 바깥세상의 장애인들은 마을로 들어오고 마을의 ‘온전한 사람들’은 모조리 밖으로 나가, 현재는 장애인들만이 모여 사는 마을이 되었다. 이런 사정이라 어느 군, 어느 현에서도 이 마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서우훠는 세상에서 잊힌, 세상 밖 마을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폭압적인 사회주의 체제에 속하지 않는 행운을 누리게 되고,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몸이 불편해도 서로 돕고 보듬어주면서 다른 마을 사람들이 대기근에 시달릴 때도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지복의 성자>의 인도, <레닌의 키스>의 중국. 서로 멀리 떨어졌고 체제도, 정치 상황도 다르지만 소외된 이들이 서로 기대고 보듬어주면서 그들만의 천국을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은 꽤 닮았다. 그런 공간이 가능하도록 애써온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른바 ‘정상’을 벗어난 이들을 산 자, 죽은 자 가리지 않고 온 마음으로 껴안은 안줌과 서우훠의 마오즈 할머니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그처럼 성자와 같았느냐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그들도 젊은 시절에는 자기만을 위해 살았다. 그토록 바라던 여성으로 다시 태어난 안줌은 화려하게 꾸미고 여왕으로 군림하며 자기만을 위한 인생을 살아갔다. 마오즈도 한때는 혁명을 통해 현장이나 여주석 등 높은 인물이 되리라는 야망을 품었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상처 주게 되었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갉아먹었다. 그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보듬고 이끌어가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이 두 ‘할머니’들의 품에서 소외된 이들은 평화와 안식을 얻는다.


<지복의 성자>와 <레닌의 키스>를 읽다 보면 인간은 서로 가장 상처 주는 존재이지만 결국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답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람으로 인해 구원받고 삶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는 <컬러 퍼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상처받은 영혼 ‘셀리’에게 ‘슈그’가 그런 존재이다. 흑인으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일찍부터 성폭행당하고, 팔려가다시피 결혼해 가부장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아가느라 삶이 고통 그 자체였던 ‘셀리’는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 ‘슈그’가 병들어 자신의 집에 오는 바람에 함께 살게 된다. 이 기묘한 상황 자체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데, 놀랍게도 셀리는 슈그에게 마음을 열면서 그녀로부터 위로받고 마침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운다. 두 여자가 서로 의지하고 기대면서 그들의 삶이 아름다운 보랏빛으로 물드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 감동적이다. 백인 남성의 모습을 한 신(神). 신은 셀리가 아무리 간절히 편지를 써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슈그를 만나기 이전 셀리는 끔찍한 삶을 저주하면서 신을 모독했다. 그러나 이제 슈그가 다정히 속삭인다. 신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그것’일 뿐이라고 이 세상 모든 만물이라고. ‘좋은 걸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고(<컬러 퍼플>, 260쪽). 누군가와 마음으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인간은 상처도 씻을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 기어이 살아남는다. 삶을 바꿀 수 있음을 셀리가 증명한다. 셀리는 슈그로부터 받은 사랑과 환대를 다른 이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누군가를 마음으로 환대하고 사랑하면 그것은 다시 고리가 되어 다른 이에게 이어진다.

안줌과 마오즈, 셀리와 슈그, 네 여성은 저마다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 편안하게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곳에서 폭력적인 시절을 거쳐 왔다. 자기 온몸으로 차별과 혐오를 겪었으며, 때로 억압의 대상이도 했다. <지복의 성자>에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카스트제도, 빈부격차 등등 인도의 복잡한 현실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남성의 몸 안에 갇힌 여성 안줌의 처지는 어떻게 보면 그 몸 자체로 인도의 복잡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힌두교 안의 이슬람, 인도 안의 이슬람교도, 또는 카슈미르인. 그 모든 것들이 그 한 몸에서 날마다 전쟁을 벌인다. 마오즈 할머니는 중국의 수많은 혁명의 역사를 제 몸으로 겪었으며 <컬러 퍼플>의 셀리는 가부장의 폭력과 인종차별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상처에 쓰러져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기어이 그 삶에 꺾이지 않은 것은 그 곁에 결국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줌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지켜보노라면 과연 정말로 그곳이 무덤인지, 폭력이 난무하고 계급과 성, 인종, 종교, 성적지향에 따른 차별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이 보통의 세상이 무덤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런 세상에 비하면 차별과 혐오가 사라진 공간인 잔나트와 서우훠마을이 사람들이 나아갈 가장 이상적인 세계는 아닐까. <지복의 성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서로를 배신하고 죽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258쪽)고.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마음, 공감하고 연민하는 마음에서 변화는 일어난다. “나아지고 싶다면 우리 모두 어디선가부터 시작을 해야 하고, 우리가 고쳐나가야 할 건 결국 우리 자신이에요.”(<컬러 퍼플>, 349쪽)라는 말은 그래서 더 의미 깊게 다가온다. 차별과 혐오가 그 어느 때보다 깊어진 코로나 시대에 이 책들은 분명 마음의 백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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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2-14 19: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안 읽으려고 작심에 작심을 거듭한 인간 옌례커를... 기어코 읽게 하시네. 내가 잠자냥님 덕택에 한 번 더 미칩니다, 밋쳐요!
내년에 독후감 쓰겠습니다. 에휴.... 인생이 다 그렇지 뭘.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2-14 22:27   좋아요 0 | URL
하하하 이렇게 낚나요! ㅎㅎ

레삭매냐 2020-12-14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슨 문동 리뷰 대회 응모작인가요?

잠자냥 2020-12-14 22:2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시즌이 시즌(?)인지라 문동 책 3권 이상으로 된 이런 리뷰가 많이 올라올 듯 하네요. ㅎㅎ

레삭매냐 2020-12-15 09:09   좋아요 0 | URL
오늘이 마감이네요...
그리하야 저도 도전해 볼까 어쩔까나
생각 중이랍니다 :> 시즌이니깐요 ㅋㅋ

<레닌의 키스>가 저랑 겹치시네요 ~

잠자냥 2020-12-15 09:36   좋아요 0 | URL
자 어서 도전하세요~ ㅎㅎ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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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파커에 비틀즈에 클래식에 야구에 맥주에, 동그란 젖가슴의 소녀에 그런 여자들이 별 매력 없는 남주를 좋아하거나 뜬금없이 하룻밤 자주는 거나... 하루키는 참 변함없이 하루키구나. 내가 이걸 왜 읽었지. 에휴 하루키 그만 읽자. 하루키옹 여전히 젊은이다워 좋겠수. 난 늙어서 그만 빠이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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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14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도대체 동그란 젖가슴을 왜이렇게 놓지 못하고 집착하나‘ 싶었어요. 네모난 젖가슴이 갖고싶어집니다.. 히융-

잠자냥 2020-12-14 08:29   좋아요 1 | URL
ㄴㅋㅋㅋㅋㅋㅋ 아 동그란 거 나올 때 또 시작이네 또 시작 했다니까요.

Falstaff 2020-12-14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 엄청 얻어맞을 제 생각을 굳이 이야기하자면.... 여태 하루키 읽는 사람도 있나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0-12-14 09:5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가끔 읽어 보고 싶어지기는 하더라고요. 근데 이젠 정말 못 읽겠습니다. ㅎㅎㅎㅎ

자목련 2020-12-14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이제 그만 읽으려고요. <고양이를 버리다>는 좋았는데 ㅎ

잠자냥 2020-12-14 17:1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최근 나온 장편은 읽지 않았어요. ㅎㅎ <고양이를 버리다>는 저도 좋았는데. ㅎㅎㅎ
 
러시아 인형 대산세계문학총서 1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안영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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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사랑, 삶과 꿈이 뒤섞인 이야기들. 인형 속에 또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처럼 여러 층위로 생각하게 만든다. 현대문학 단편선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읽기 전에 맛보기(?)로 읽었는데 이 정도 환상 문학이라면 다음 책도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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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2-14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소설을 저는 ‘아몰랑 주의‘라고 일컫습니다만. ^^;;
이상하게도, 분명히 마음에 들지 않는데 카사레스 이 냥반의 책이 눈에 띄면 읽는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돈 주고 사서 말입니다. 병입지요, 병. ㅋㅋㅋ

잠자냥 2020-12-14 09:57   좋아요 0 | URL
네, 폴스타프 님께서 전에 ‘아몰랑 주의‘라고 명명하신 것 보고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도 참 아몰랑-하죠? ㅎㅎㅎㅎ
현대문학 단편선까지는 읽어 볼 생각입니다. ㅎㅎ
 
블랙 유니콘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움직씨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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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자 흑인, 레즈비언로서 침묵과 횡포에 맞선 전쟁에서 스스로 시인전사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시로 기록한 오드리 로드. 아프리카의 신과 신화 등 낯선 언어들 때문에 읽고 이해하는 데 조금 버거웠지만 그만큼 우리가 얼마나 그간 백인, (그것도) 남성 위주의 시에 익숙해져 있는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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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 연습
레몽 크노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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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와우! 이 책 재미있겠다 싶었다. 같은 사건을 99가지 문체로 다시 쓰다니, 어떤 변주가 이뤄질지 생각만 해도 흥미롭지 않은가? 최근 이 책을 읽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읽는 내내 그 기발한 생각에 감탄하면서 웃게 되더라. 실제 사건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출근 시간 S선 버스 탄 한 남자의 모습이 묘사되고, 두 시간 뒤 다시 그 남자가 생라자르역에서 친구와 우연히 맞닥뜨린 장면이 그려진다. 99가지 문체로 변주되는 이 사건은 시작 부분인 이 책 11쪽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을 실었다.


약기略記
출근 시간, S선 버스, 스물여섯 언저리의 남자 하나, 리본 대신 끈이 둘린 말랑말랑한 모자. 누군가 길게 잡아 늘인 것처럼 아주 긴 목. 사람들 내림. 문제의 남자 옆 사람에게 분노 폭발. 누군가 지날 때마다 자기를 떠민다고 옆 사람을 비난. 못돼먹은 투로 투덜거림. 공석을 보자마자, 거기로 튀어감.
두 시간 후, 생라자르역 앞, 로마광장에서 나는 그를 다시 만남. 그는 이렇게 말하는 친구와 함께 있음: "자네, 외투에 단추 하나 더 다는 게 좋겠어." 친구는 그에게 자리(앞섶)와 이유를 알려줌. (<문체 연습>, 11쪽)


이런 기본 메모를 바탕으로 99개의 변주가 시작된다. 이 글을 읽고 레몽 크노처럼 당신도 한 번 시도해 보라.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말투를 바꾸거나, 글 형식을 달리하거나, 글의 장르를 다르게 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레몽 크노 또한 이런 방법을 쓴다. 중복해서 말하거나, 조심스럽게 말하거나,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꿈결에서 하듯, 머뭇머뭇 거리는 어조로 저 아침 버스에서의 일화를 표현하기도 한다.

때로는 희곡으로 각색하기도 하고(그 솜씨가 참 절묘하다), 시(詩)로 바꾸기도 하는데, 그 시는 때로 소네트가 되기도 하고, 자유시가 되기도 한다. 아니, 저 특별할 것 없는 사건이 희곡도 되고 소네트도 되고 자유시도 된다니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철학 특강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함께 그려보아요’에서는 마치 아이와 함께 그림 수업을 받는 착각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신나는 동요가 되기도 하고, 구성진 가락의 창(唱)이 되기도 한다. 전보, 편지, 광고, 공식서한 등등 레몽 크노의 세계에서는 저 짧은 일화로 모든 게 가능하다.

시선을 달리하면 같은 일화도 완전히 달라진다. 얼마나 달라지는지 직접 느껴보라고 이 책의 ‘당사자의 시선으로’, ‘다른 이의 시선으로’, ‘객관적 이야기’ 이 세 구절을 앞부분만 조금씩 옮겨 보았다.



당사자의 시선으로
그러니까 말이야, 금일의 내 옷차림에 내가 못마땅해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어. 나는, 제법 재미있어 보이는 새 모자 하나, 그리고 아주 좋다고 생각하고 있던 외투 하나를 마침내 개시한 것뿐이라고. 생라자르역 앞에서 만난 한 아무개는, 내 외투의 앞섶이 너무 벌어져 있다면서 여분의 단추 하나를 거기에다 더 달아야 하나는 사실을 내게 지적해 보임으로써 내 즐거움을 망치려 들지 뭐야(......) (<문체 연습>, 25쪽)

다른 이의 시선으로
오늘 버스 안 승강대 위 바로 내 옆에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코흘리개 애송이 중 한 녀석이 있었는데, 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자식 중 하나쯤 그냥 죽여버리고 말았을지도 몰라. 그 자식, 그러니까 대략 스물여섯에서 서른 살 정도 쳐먹은 이 덜떨어진 애새끼는, 딱히 깃털이 모조리 빠진 칠면조 목덜미 같은 그 길쭉한 목 때문이었다기보다, 오히려, 그 자식 쓰고 있던 모자에 달린 리본, 그러니까 가짓빛을 띤 끈 같은 것이 리본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유달리 내 화를 돋우고 있었어(......) (<문체 연습>, 26쪽)

객관적 이야기
어느 날 정오경 몽소공원 근처, 거의 만원이 되다시피 한 S선(요즘의 84번) 버스의 후부 승강대 위에서, 나는 리본 대신에 배배 꼰 장식 줄을 두른 말랑말랑한 중절모 모자를 하나 쓰고 있는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정말로 긴 목의 소유자였다. 이 사람은 승객들이 오르거나 내릴 때마다 일부러 제 발을 밟았다고 옆 사람을 갑자기 불러세웠다(......) (<문체 연습>, 27쪽)



한 사건인데도 보는 방식, 즉 관점에 따라 조금씩 어조는 물론 의미가 달라지고, 맨 앞에서 소개한 ‘약기’에서는 알 수 없었던 다른 정보가 드러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목이 긴 그 남자의 모자에 달린 끈 같은 것이 ‘가짓빛’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이렇게 같은 사건을 관점을 달리해서 쓰는 정도는 초보(?) 수준일 수도 있다. 크노의 99가지 실험적 글쓰기는 이런 기초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때로는 너무나 신선한 아이디어라 절로 경탄하게 된다. 이를테면 냄새와 맛처럼 글로는 도전하기 어려운 분야까지 시도한다(‘냄새가 난다’, ‘무슨 맛이었느냐고’). 언어를 뛰어넘는 시도도 종종해서 ‘라틴어로 서툴게 끝맺기’를 하거나 ‘일본어 물을 이빠이 먹은’, ‘미쿡 쏴아람임뉘타’처럼 읽노라면 웃음이 터지는 글도 꽤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혀를 내둘렀던 점은 ‘수학적으로’ 변형을 시도하거나, ‘사이언스 픽션’으로 만들거나, 하나의 ‘게임’ 설명서로 빚어낸 부분이었다. 그런 글을 읽을 때는 정말 이 인간, 천재가 아닌가 싶어졌다(물론 내가 수학은 젬병이라 크노가 쓴 ‘수학적으로’ 이 글이 정말 수학적으로 말이 되는 것인지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내가 박장대소하며 웃거나 참 기가 막힌 변주라고 생각한 부분 몇 구절을 더 옮겨 본다. 물론 모두 전문은 아니다. 궁금하신 분들을 이 책을 사보시라.



책이 나왔습니다
일찍이 수많은 걸작을 선보여 그 명성이 자지한 소설가 모씨는 유니크한 재능으로 한껏 빛나는 이번 신작 소설에서 키가 크거나 작은 사람들 너 나 할 것 없이 수긍할 만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맹활약을 펼치는 인물들로만 모든 장면을 연출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어느 날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거는 제법 수수께끼 같은 한 인물을 자기가 타고 있는 버스 안에서 공교롭게 맞닥뜨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사연이 소설 전반을 가득 수놓는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멋쟁이 중 단연코 최고인 어느 친구의 조언을 매우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 있는 이 신비로운 인물과 다시 조우하게 될 것이다(......) (<문체 연습>, 36쪽)

허세를 떨며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 드디어 흩어지기 시작하는 시각, 나는 S선 저 구불구불한 노선에 맞서고 있는 암소 눈의 위풍당당한 어느 버스에 쏜살같이 빠른 화살 모양으로 잽싸게 올라타고 말았다. 전투의 길목 위로 드리운 인디언 전사의 정확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는 어떤 젊은이의 출현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의 목은 다리가 날렵한 기린의 것보다 길었고, 문제 연습 한 편의 주인공이라도 된다는 듯이, 베베 꼰 장식 줄을 두른 말랑말랑한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문체 연습>, 56쪽)


나는 고발한다
여러분, 내가 어떻게 고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고발하고자 한다,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고 토끼 소굴처럼 바글바글한 S선 버스를. 나는 고발한다, 정오라는 시간과 플랫폼의 폼을. 나는 고발한다, 이 젊은이의 젊음과 그의 목 길이,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그가 모자 주위에 두르고 있던, 하나가 아닌 리본의 실상을(......) (<문체 연습>,140쪽)

단카
버스가 오네
재즈 모 청년 타니
어이쿠 충돌
차후 생라자르 앞
이제 단추가 문제 (<문체 연습>, 93쪽)

집합론
S선 버스에 앉아 있는 승객을 집합 A로, 서 있는 승객을 집합 D라고 간주한다. 어떤 정류장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집합 P가 있다. 또한 버스에 오르는 승객 집합 C가 있다(......) (<문체 연습>, 91쪽)

게임의 규칙
이 게임은 주사위 두 개와 (접이식) 놀이판 한 개로 진행한다. 두 개의 주사위를 굴려 8과 4가 나오면 S선(84번) 버스에 오른다. 1과 7이 나오면, 17번(몽소공원)으로 간다. 이 외에는 만원이므로 1번(대기 번호)으로 가고, 이 외에는 포르트샹페레로 간다. 콩트르스카르프에서 되돌아온다. 7과 3이 나오면, 73번(목이 긴 젊은이)으로 가거나 37번(줄을 두른 모자)로 간다(......) (<문체 연습>, 146쪽)

다음 문제를 풀어보시오
조건은 다음과 같다.
a) 축약하여 문자 S로 지칭되는, 소위 버스라 일컬어지는 운송수단 하나;
b) 전술한 버스의 후부 승강대;
c) 이 버스에 실린 호모사피엔스의 대표자 일정수; 이중에서 선택한다(......) (<문체 연습>, 148쪽)


옮긴이의 해제에서는 이 <문체 연습>을 ‘에세이도 소설도 단편도 모음집이라고도 할 수 없고 콩트라고 하기에도 어려움이 따른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것도 아니며 ‘흔히 말하듯 누보로망의 실험적 글쓰기’라고 하기에도 뭔가 부족하거나 과도하다고 느껴지는 글이라고 지적한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이 책이 지금 알라딘에서는 ‘소설/시/희곡’장르로 분류되어 있던데, <문체 연습>은 그 모두가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이 아니기도 한 참으로 독특한 책이다.

레몽 크노는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글쓰기를 시도했을까? 이 책을 읽다 보면 문득 그런 질문이 떠오른다. 크노는 “내가 <문체 연습>을 쓰게 된 것은, 실제로 그리고 아주 의식적으로, 바흐의 음악, 정확하게 말하자면, 플레옐관館에서 열린 연주를 회상하면서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처음에 이 열두 편의 에세이에 <정십이면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 이 아름다운 다면체가 열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열 두 개의 얼굴, 여기에 답이 있지 않을까? 앞서 내가 사례로 든 ‘당사자의 시선’, ‘다른 이의 시선’, ‘객관적인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문체는 곧 시선이다. 이 <문체 연습>의 99가지 색다른 문체 시도는 하나같이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나를 비롯해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 문학 작품을 읽는 이유는 바로 그 다른 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위함이 아닌가? <문체 연습>은 문체가 곧 하나의 시선임을 증명하면서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을 독자에게 전한다.

옮긴이는 해제에서 크노의 이런 글쓰기가 ‘문학 전통 속에서 꾸준히 진화하며 고유한 역사를 갖게 된 문체, 아직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무형식의 문체, 문어보다는 입말로 자주 실현되는 문체, 일상적으로 사용되지만 문학의 언저리에서 좀처럼 진입하지 못하는 문체, 사라진 문체,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폐기될 위험에 처한 문체, 백지에서 벗어나 목소리로 발화되는 문체 등을 하나의 테이블 주위에 불러 아흔아홉 개의 의자 위에 앉힌다’고 말했다. 이 문장에서 문체를 시선으로 바꿔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크노는 자신의 이런 글쓰기를 일컬어 “사람들은 여기서 문학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보고자 한 것 같은데” 사실 그것은 전혀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의도는 순수한 “문체 연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어쩌면 고루하고 여러모로 녹슨 문학에서 문학을 잘라내는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문체 연습>, 157쪽) 말한다. 그의 말처럼 순수한 의도에서 시작된 즐거운 문체 연습은 기존의 고루한 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 새롭게 보는 방식을 빚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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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0-12-09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의 리뷰로 만난 책들은 모두 읽고 싶지요. 이 책은 더욱!

잠자냥 2020-12-09 10:17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정말이지 문학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읽으면서 감탄할 책이라고 믿습니다. ㅎㅎㅎ

다락방 2020-12-09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시도를 한 것 자체가 신기하네요. 저라면 상상도 못했을텐데요. 저는 살면서 점점 더 제가 얼마나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가를 깨닫게 돼요. 문체 연습이 의도였다니.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은 따로 있는가봐요.

잠자냥 2020-12-09 10:3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대부분 작가들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자기 문체를 고집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이런 시도를 한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99가지를 만들어냈어요! 다락방 님 레몽 크노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사람은 글을 쓸수록 달필가가 된다.˝ 많이 쓰세요! ㅎㅎㅎ

레삭매냐 2020-12-09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도서관에서 빌릴 예정입니다.

얼마나 재밌으려나... 쵝오의 낚시꾼 !!!

<레닌의 키스>는 찾아 두긴 했는디.

잠자냥 2020-12-09 10:46   좋아요 0 | URL
오, 아직 도서관이 문 (다시) 안 닫은 모양이군요!
레삭매냐 님에게도 흥미로운 책이되길 바랍니다!

Falstaff 2020-12-09 1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범대학 다니는 후배 아이들이, 약기略記 비슷한 걸, 버스에서 만난 사람에 관한 작문을, 글쎄 중간고사 시험문제로 내 준 교수가 있다고, 당시 복학생이었던 제게 신이 나서 떠들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선생은 심지어 시험지에 ˝은사시나무 이파리를 투명 테이프로 붙여라˝는 문제까지 냈답니다. 그이가 오탁번 선생이었군요. 아, 오래 전입니다.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집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0-12-09 13:09   좋아요 0 | URL
오오오, 아주 재미난 문제입니다. ㅎㅎ 수업도 알찼을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