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버린 여자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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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절대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책이다. <내가 버린 여자>라니. 제목 자체도 문제가 많지만 무엇보다 내용이 예상 가능하다. 단물 쓴물 다 빨아먹고 여자를 뻥 차버리는 나쁜 놈 관점에서 쓰인 소설이겠지. 우리나라 70~80년대 호스티스 문학이나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가난하고 순진한 여자를 못된 놈이 등쳐먹고는 나 몰라라 ‘버리고’ 달아나는 그런 문학이나 영화(‘버린다’는 표현도 불쾌하다). 그런데 이렇게 삼류 멜로, 에로(?) 영화나 문학이 상상되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순전히 작가가 ‘엔도 슈사큐’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 저자가 그 옛날 유명했던(?) 나상만(이 이름을 아는 사람, 연식 나온다)이었다면, 그래서 그 저자가 이런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더라면 절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엔도 슈사쿠’이다. 물론 그의 작품임에도 내용이 예상 가능하다. 어떤 못된 놈이 여자를 사귀면서 단물 다 빨아먹고 차버리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너무나 성스러운 인물이었던지라 쉽사리 마음에서 지우지 못하고 마음속에 부채감을 안고 살아가는 그런 내용이 아닐까. 그래서 훗날 후회하는 심정으로 그 ‘버린’ 여자를 회고하는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 얼마쯤은 이런 예상을 하고 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 생각은 조금은 들어맞는다. 작품 초반부터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이 작품은 ‘나의 수기’와 ‘손목의 반점’이라는 두 개의 제목이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나의 수기’는 주인공인 ‘나’, 즉 ‘요시오카’ 관점으로 서술된다. ‘나’는 전후(戰後) 일본의 가난한 대학생이다. 소설 첫 장은 ‘나’와 함께 생활하는 친구 두 사람의 가난하고  비루한 일상, 너무나 더럽기 짝이 없는 하숙 생활을 묘사하는데 엔도 슈사쿠가 직접 그런 생활을 해봤는지 너무나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어서 구토가 날 듯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 두 남학생은 가난하고 돈도 없어서 늘 굶주려있다. 실제 배고픔과 성욕 두 가지 면에서 모두. 가난하니까 연애를 할 수 없고, 그러다 보니 끓어오르는 성욕을 채울 길 없고. 이 두 남자는 돈도 벌고, 여자와 연애도 하고 싶다고 늘 노래를 부른다.

‘나’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다. 어느 날 우연히 삼류 잡지를 살펴보던 중 잡지 독자란에 올라온 어떤 여성이 보낸 글을 읽게 된다. 여자는 참 순진하게도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로부터 답장을 받고 싶다는 편지와 함께, 자기 주소를 남겼다. 될 대로 되라, 아무나 걸려라 하는 심정으로 ‘나’는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그렇게 해서 나, 그러니까 ‘요시오카’는 드디어 그 여자를 만나게 된다. 약속 장소로 나가면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이 여자를 저렴한 가격으로 ‘해치울’ 생각밖에 없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에게 욕지기를 느끼기도 한다. 그런 삼류 잡지 독자 투고란에 글을 보내는, 그것도 맞춤법도 엉망진창인 여자가 헤겔과 마르크스 운운하는 대학생인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리가 없다. 실제로 약속 장소에 도착한 ‘나’는 그 여자, ‘미츠’를 보고는 크게 실망한다. 못생겨도 저렇게 못생겼을 수가. 게다가 비누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여공인지라 차림새도 형편없다. 그럼에도 요시오카는 소기의 목적. 그러니까 여자와 하룻밤 섹스하려는 그 목적을 위해서 그 모든 못마땅함을 꾹 참는다. 술을 이용한 고전적인 나쁜 수법을 써서 미츠를 여관으로 끌고 가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미츠의 강한 거부와 함께 어떤 점 때문에 결국 자신의 동물적 욕망을 이루지는 못하고 터덜터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결국 두 번째 만남에서는 자신의 목적을 기어이 이루고 만다.

‘여자와 자고 싶다’는 그 목적을 이루고자 요시오카는 미츠에게 온갖 떼를 쓰고 심지어 강요와 협박을 하는데, 거기에 꿈쩍도 않던 미츠가 결국 마음을 연 까닭은 조금 뜻밖이다. 요시오카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왜소한 데다가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럽다. 그 모습을 본 미츠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연민이 스쳐지나가고, 바로 그 순간을 요시오카는 놓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몸 때문에 누구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고, 연애 상대로 보지도 않으며, 값싼 동정만 한다고, 미츠 너마저도 나를 그렇게 대한다고, 그래서 나와 함께 자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라고 잔뜩 불쌍한 표정을 짓고는 미츠의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 미츠는 가여운 마음에 자기 몸을 허락한다.

남루한 여관에서 치르는 사랑 없는(요시오카는 미츠를 1%도 사랑하지 않는다) 섹스는 허무하기만 하다. 요시오카는 그런 자기 자신이 혐오스럽기 짝이 없다. 자기에게 화가 나고, 아무리 욕망 때문이라도 다시는 이런 섹스는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여관을 나온다. 그것도 모자라 뒤에서 자기를 따라오는 미츠에게 폭언을 퍼붓고 떠나버린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놀란 눈으로 요시오카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미츠. 미츠는 그 뒤로 요시오카에게 연락해 보려고 애를 쓰고 그의 하숙집도 물어물어 찾아가 보지만,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하고 그 짧은 인연은 일단 여기서 끝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후 재건 시기였던지라 쉽사리 일자리를 얻은 요시오카는 반드시 출세하리라는 꿈을 품고 사회에서 첫 출발을 야심차게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끔 미츠가 떠오른다. 남루한 옛 거리를 지나거나, 둘이 몸을 섞었던 그 허름한 여관 근처를 지날 즈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그 못생기고 촌스러운 미츠가 생각난다. 왜일까?

‘손목의 반점’에서는 미츠의 삶이 작가의 눈으로 그려진다. 미츠가 요시오카처럼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조리 있게 해나갈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가 선택한 방식일 것이다. 미츠는 요시오카처럼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그렇기에 대학생인 요시오카를 동경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 두 가지가 복잡하게 얽혀서 그 별것도 아닌 놈을 그토록 헌신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 바보 같은 여자, 미츠의 삶에는 늘 타인에 대한 고통이 크게 자리한다. 절대로 그런 여관에서 그렇게 남자와 자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요시오카의 불쌍한 모습에 마음이 허물어져 버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시오카에게 잘 보이려고 열심히 돈을 모아 마침내 원하던 가디건을 손에 넣을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도, 돈이 없어 쩔쩔매는 누군가에게 결국 그 돈을 모두 줘버리고 만다. “이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너의 슬픔을 다른 사람의 슬픔과 결부시키는 거야.”(107쪽) 생각하면서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자기 자신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 말이다. 그러는 가운데 가난한 여공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아서 미츠의 삶은 자꾸만  밑바닥으로 떨어져 간다. 그러다가 급기야 사형 선고 같은 소식을 접하고 만다. 무심코 넘겼던 ‘손목의 반점’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의사가 ‘한센병’이라는 말을 하고, 그것이 뭔지 몰라 간호사에게 물어본 미츠는 ‘나병’이라는 말에 휘청거리고 만다.

남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은 채 밑바닥 삶을 살다 끝내 한센병 환자가 되는 미츠- 이런 여주인공이라니, 정말 신파도 이보다 더한 신파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이 작품 말미에서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미츠는 한센병을 앓는 이들이 모인 곳에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제는 누구도 사랑해 주지 않는 이들, 누군가의 애정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들의 삶을 마주한다.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더더욱 그럴 일이 없는 자기 인생을 저주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왠지 그들의 모습이, 고통이 마음에 아리도록 맺힌다. 그러는 사이에 요시오카는 출세도 하고, 자기가 꿈꾸던 매력적인 여자와 연애도 하는 등 나름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런데도 가끔은 미츠의 소식을 뜻밖으로 듣게 되기도 하고, 문득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우리 인생에서 타인에게 끼친 행위는, 어느 것이건 태양 아래 얼음이 녹듯이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 상대에게 떨어져 전혀 생각지 않게 되더라도, 우리의 행위는 마음속 깊이 흔적을 남긴다는 점’(124쪽)을 어렴풋이 깨달아 가면서.

‘미츠’는 얼마 전 읽은 <바보>의 ‘가스통’과 똑닮은 인물이다. 자기 자신이 가진 것도 없고 더 내줄 것도 없으면서 결코 누군가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한다. 자기보다 못나고 약한 존재는 물론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한테서도 고통과 아픔을 발견하면 쉬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끌어안는다. 그 포용력은 끝을 몰라 결국 자기 자신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왠지 어딘가에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미츠와 가스통 그 두 사람은 모두 예수의 현신과도 같다. 그래서 가스통의 주변 사람들이 그랬듯이 미츠의 주변 사람들도 쉽사리 그녀를 잊지 못한다. 동물적인 욕망, 출세와 성공, 안락한 삶, 부와 그것이 가져오는 평온한 일상 등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추구하면서, 모두 그렇게 살아가니까 나 정도는 괜찮다고 자위하면서도 요시오카는 종종 미츠를 떠올린다. 그럴 때마다 왠지 양심의 가책을 받기도 하고, 굳이 그런 줄 깨닫지 못해도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돌덩이 하나를 얹은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시오카와 비슷한 인생을 살 것이다. 요시오카는 아주 나쁜 놈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미츠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편치는 않으니까. 지금에 만족하는 요시오카는 그 소시민적인 삶에 안주하게 되겠지만 앞으로도 가끔은 미츠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요시오카처럼 인간의 마음에는 ‘미츠’ 또는 ‘가스통’ 같은 존재를 완전히 외면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런 희미한 마음에서 믿음이, 구원이 싹틀 수 있다고 엔도 슈사쿠는 믿는 것 같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도 ‘미츠’나 ‘가스통’을 닮은 그 무엇인가가 툭툭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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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여자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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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 같은 제목에, 신파 같은 내용인데도 결국 눈물이 나는 이상한 소설. 이것도 엔도 슈사쿠의 힘이겠지. ‘우리의 고통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그 고통을 자기 것으로 끌어안은 여자 ‘미츠’- 예수의 얼굴이자 <바보>의 ‘가스통’과 똑닮은 그 여자가 끝내 마음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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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선이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2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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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에서는 해미시도, 프리실라도 죽음의 위협에 놓인다! 그런 와중에 뭔가 새로운 사랑의 그림자가... 여전히 흥미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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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1-0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잠자냥 님의 독서 스펙트럼이 참 다양합니닷. ^^

잠자냥 2020-11-08 22:23   좋아요 0 | URL
ㅎㅎㅎ재미난 책이라면... ㅎㅎ
 
뭔가 유치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쏜살 문고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박소현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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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종, 계급 문제를 바라보는 맨스필드의 섬세한 시선. 그 유명한 ‘가든 파티’의 맨스필드의 시작은 이러했구나! 이제껏 흔히 만날 수 없었던 초기작들 위주로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맨스필드 팬을 위한 필수 소장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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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또는 예술이 도구로 쓰이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기지 않을 것이다. 선전선동을 위한 문학이 누군가의 마음을 흔드는 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친일문학가나 정권 찬양을 노래한 시인에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리라.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저 유럽에서도 나치 독일에 부역한 문인이나 예술가, 철학자들은 그 이유로 사람들의 외면을 받거나 바로 그 전력이 가장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만일 문학이 냉전시대에 어느 한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고 그 세계를 지키는 데 일조하거나, 또는 반대로 상대 진영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고발하는 역할을 했다면 어떨까? 조지 오웰의 <1984>와 <동물농장>은 파시즘 및 소련의 전체주의 사회를 풍자, 고발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그 조지 오웰이 영국 외무부 정보조사부(IRD)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으며 임종 당시 IRD에 공산주의 동조자 명단을 정부에 넘겨주었다면? 그리고 그 대가로 IRD는 <동물농장>을 여러 나라 언어로 출간될 수 있도록 돕고, <1984>를 위해서도 온갖 좋은 일을 해주었다면? 이런 사실을 알고도 오웰에 대한 감정이 예전과 똑같을 수 있을까? 실제로 오웰은 찰리 채플린, E.H. 카, 역사학자 아이작 도이처를 비롯한 38명을 ‘서방을 위한 선전자(propagandists)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지명해서 넘겨주었다.

오웰뿐만이 아니다.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의 <문화적 냉전 : CIA와 지식인들>에 따르면 조지 오웰을 비롯해, 이사야 벌린, 레몽 아롱, 버트런드 러셀 등 우리가 익히 아는, 세계 지성을 이끌었던 인물들의 이름이 여럿 등장한다. 미국은 냉전을 확산하고 연장하기 위해 지식인들을 동원하고 이용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미국적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반공 성향의 지식인들을 내세운다. ‘세계문화자유회의’ 같은 선전선동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한 민간단체를 만들었고, 이 단체는 세계 35개국에 지부를 두고 <인카운터>를 비롯한 수많은 잡지를 발행했다. 이언 매큐언의 <스위트 투스>에도 이런 내용이 언급된다. 인카운터는 CIA 자금으로 운영되었으며, CIA는 1940년대 말부터 그들이 지식층 문화라고 여기는 것을 후원해 왔다고. 대부분은 한 발 물러서서 ‘다양한 재단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목적은 중도 좌파 유럽 지식인들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도록 꾀어내고 자유세계를 옹호하는 것이 지적으로 높이 평가되도록 만드는 것’(<스위트 투스>, 157쪽)이다.

<스위트 투스>는 바로 이 시기, 1970년대 초 영국 보안정보국 MI5을 배경으로 삼는다. 아름다운 외모의 ‘세리나 프룸’은 케임브리지대학 수학과 졸업을 앞두고 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녀가 수학과에 진학한 것은 모두 어머니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의 작고 단단한 씨앗을 깊숙이 간직한 어머니’는 세리나가 케임브리지대학에 가서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 ‘여성으로서의 의무’라고 말한다. 문학이 아닌, 과학이나 공학이나 경제 분야에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통 이 분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세리나는 학교 다니는 내내 문학, 그것도 온갖 종류의 소설 읽기에 푹 빠진다. 당연히 전공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런데 이런 세리나에게 운명처럼 한 남자가 나타난다. 전(前) 보안정보국 요원이자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 교수 ‘토니 캐닝’- 캐닝은 세리나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가능성을 알아본다. 두 사람은 곧 연인 사이가 되는데, 토니는 세리나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심어주고 마치 선물이라도 주듯 보안정보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세리나는 토니로부터 배운 온갖 지식을 동원해 훌륭히 면접을 치르고 입사에 성공한다.

제아무리 케임브리지를 졸업해도 여성인 세리나는 요원으로 일할 수 없다. 1970년대 영국은 남녀차별이 심해 정보국에 들어간 여성들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그저 사무 보조원으로 만족해야 했다. 세리나 또한 사무직 말단으로 몇 달을 보내며 희망 없는 상대와의 연애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던 중, 드디어 그녀에게  임무다운 임무가 주어진다. 암호명 ‘스위트 투스’- 이 작전은 지식인들을 후원함으로써 그들이 서방 자유세계를 옹호하는 입장을 대중에게 널리 퍼뜨리도록 은밀히 조종하는 것이다. 작가를 포섭하기 위해 "현대의 저술, 그러니까 문학, 소설에 훤한" 세리나가 적격이라고 판단된 것이다. 세리나는 ‘세계 곳곳에서 예술의 탁월성과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자유국제재단 소속’으로 위장하고 이제 막 데뷔한, 장래가 촉망되는 소설가 ‘톰 헤일리’를 찾아간다. <스위트 투스>의 진짜 재미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세리나는 톰을 만나러 가기 전부터 그에게 흥미를 느낀다. 자신이 담당할 작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의 단편들을 섭렵하는데, 읽을수록 이 남자가 궁금해진다. 자기 멋대로 그에 관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실제로 만났을 때 톰의 외모는 세리나의 상상과 달라 뜻밖이지만 그래도 매력적이다. 게다가 톰 헤일리도 세리나의 미모에 반했는지 첫날부터 은근히 작업을 건다. 톰은 자유국제재단에서 자기를 콕 집어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의아해하고, 반신반의하지만 조건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소설만 쓰고 싶은데,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가져야 하고, 직업을 가지면 소설 쓰기는 어려워질 것이라는 딜레마에 빠졌던 그에게 이런 재단의 전폭적인 후원은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진다. 그들을 위해 자신이 뭔가 특별히 해야 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톰은 세리나가 국가 정보부에서 왔는지 전혀 모르니까). 게다가 자기 담당자인 세리나도 꽤 매력적이고……. 거절할 이유가 없던 그는 덥석 이 제안을 물고, 재단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이 아름다운 여자를 연인으로 얻어 소설 창작에 몰두하는 꿈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것이 자신에게 덫으로 돌아올 줄은 전혀 모르는 채.

이렇게만 적어놓으니 <스위트 투스>는 단순한 첩보 스릴러 같지만, 사실 문학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광이라고 부를 만한 세리나가 바로 그 문학에 대한 탐닉 때문에 보안요원이 되고, 또 그로 인해 평생의 사랑이나 마찬가지인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리나의 첫사랑인 토니도 문학 때문에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리나가 톰과 사랑에 빠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 소소한 견해 차이는 있지만 늘 문학과 관련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작가가 좋아, 저 작가가 더 좋아, 이 작품 읽어 봤어?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독서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것이다. 심지어 세리나는 톰의 새 작품을 가장 먼저 읽고 평해주는 충실한 독자이자 때로는 편집자 역할도 해준다. 톰의 작품을 읽고 그를 이해하고 알게 되면서 점점 더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는 세리나.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아니 진실을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사실 이 책 맨 앞부분에 사랑에도, 임무에도 실패했다고 쓰여 있기 때문에 세리나와 톰의 사랑이 파국을 맞는다는 것, 그러고 나서 회한에 차서 그 모든 일을 세리나가 기록하고 있음을 독자는 알고 시작한다.

그러나 이언 매큐언은 그렇게 쉽게 독자가 바라는 대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지는 않는다. 세리나의 첫사랑인 토니의 숨겨진 비밀, 톰과 세리나의 사랑이 어떻게 될지 등등 독자의 예상을 살짝 비껴나가면서 참으로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빚어낸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너무나 쉽게 사랑에 빠지고, ‘페미니스트의 작고 단단한 씨앗을 깊숙이 간직한 어머니’와 달리 토니와 톰, 또 그 밖의 남자들의 말에 너무 쉽게 휘둘리는 세리나라는 캐릭터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하고, 여자가 정말 이렇게 생각한다고? 아닐 거 같은데, 이언 매큐언 당신이 좀 잘못 아는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종종 있는데, 이 작품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그 모든 의구심이 풀리면서 아, 하고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맨 앞 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마 이 작품을 읽는 모든 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작품을 읽는 내내 앞서 언급한 <문화적 냉전 : CIA와 지식인들>이 떠올랐는데, 아니나다를까 이언 매큐언은 이 책 끝부분에서 손더스의 이름과 함께 바로 이 책을 언급하면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매큐언의 <스위트 투스>를 통해 얼핏 접했지만 부드러운 냉전 시대, 지식인들이 어떻게 프로파간다 도구로 쓰였는지 더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문학이라는 한 세계를 빚어내지만, 그 문학이 도구로 쓰일 때는 그 도구를 쓰는 이들이 원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냉전은 끝났지만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문학과 예술은 그렇게 이용되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스위트 투스>는 작품 안팎으로 무척 흥미로운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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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1-05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건 또 뭡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문학과 첩보요원이라니... 와. 너무 흥미진진하네요!! 당장 읽고 싶어요!! >.<

잠자냥 2020-11-05 15:46   좋아요 0 | URL
이거 정말 재미났어요. 제가 이언 매큐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건 참 재미났습니다. ㅎㅎ

잠자냥 2020-11-05 15:48   좋아요 0 | URL
그리고 이거... 섹스 묘사하는 부분 많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1-05 16:13   좋아요 0 | URL
저는 이언 매큐언 몇 권 읽었는데, 칠드런 액트가 참 좋았어요.

아니, 뭐라고요? 섹스 묘사하는 부분 많다고요?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거에요? 왜죠? 영문을 모르겠네요?

=3=3=3=3=3=3=3=3=3=3=3=3=3=3=3

단발머리 2020-11-05 16:13   좋아요 0 | URL
이것은!! 볼드체로 알려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다다다다다다다닥!!

잠자냥 2020-11-05 16:18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좋아하실 거 같아서.............. 좋아하실 거면서 ㅋㅋㅋㅋㅋㅋ(아니 다락방 님은 이거 읽으시고 별로 많지도 않은데? 이럴지도 ㅋㅋㅋㅋ)

다락방 2020-11-05 16:20   좋아요 1 | URL
도대체 저를 어떤 인간으로 보고 계신거에요? 네?

아무튼 살건데요, 야한 거 많이 나온다 그래서 사는거 아니에요. 그건 꼭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흥!!

단발머리 2020-11-05 16:24   좋아요 0 | URL
제가 사실 이언 매큐언을 좀 좋아하지 않습니까? 속죄도 좋았고 칠드런 액트도 좋지 않았습니까? 그런 의미로다가 이 책도 1독 해야겠군요! 에헴!!!

다락방 2020-11-05 16:32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도 이언 매큐언 좋아서 사는거 저 다 알아요. 야한 거 때문에 끌린 건 아니잖아요. 저처럼... 그쵸?

단발머리 2020-11-05 16:45   좋아요 0 | URL
암요암요! 딱 그거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0-11-05 19:32   좋아요 1 | URL
요즘 알라딘에서 식스(...)하면 syo지!!
난 야한 거 많이 나오는 이언 매큐언 좋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 쓸데없이 당당한가

다락방 2020-11-05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 연말결산 댓글 1위 누구에요? 저 아니에요?

단발머리 2020-11-05 16:44   좋아요 0 | URL
저는 아니지요?!?🙄

다락방 2020-11-05 16:47   좋아요 0 | URL
갑분1위쟁탈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11-05 16:49   좋아요 0 | URL
겁나 치열해서 이러다가 싸움 날 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1-05 16:56   좋아요 0 | URL
압도적으로 다락방 님이 1위이십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1-05 16:56   좋아요 0 | URL
그 다음은......... 다락방 님 절반에 해당하는 댓글로 폴스타프 님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1-05 17:16   좋아요 1 | URL
전 뭘해도 압도적이란 말예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포스트잇 2020-11-05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오웰에서 진심 놀랬습니다. 저는,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까지 겨우겨우 읽었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에서도 통 재미가 없어서 그만뒀는데 뒤에 뭔 얘기가 있길래 좋다고 이 난리신지... 다시 읽어야 하는건지..
영화 <식스센스>도 초반에 너무 재미없어서 나가려다 반전에 뒤통수 맞았던 적이 있어서 또 그 경험을 하는건가 싶네요.
.......

잠자냥 2020-11-05 23: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러셨군요! 그런데 이 책은 진짜 끝까지 보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