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가는 길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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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힘겹고 모진 세상, 암담하기 짝이없는 상황에서도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사랑이 존재할 수 없는 그것’에서 사랑을 이룩하고야 마는 지노와 니농 두 사람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슬프다. 존 버거 특유의 독특한 글쓰기도 이 작품의 매력을 한결 돋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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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2-26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열화당이면.... 그림책 아닌가요? 까지 썼다가 확인해보니 소설책이라 깜놀!
2. 미리보기, 해서 보면 뒤쪽에 거의 반 페이지씩만 인쇄가 되어 있거든요. 혹시 여유, 널럴 이런 편집 아닌가요?
3. 역자 이름보고 또 한 번 깜놀! 윽, 그분이... 했다가 정신차리니까, 그저 비슷하군요. ㅋㅋㅋ 자라보고 놀란 가슴.

잠자냥 2021-02-26 09:27   좋아요 1 | URL
하하하하.
1. 열화당에서 존 버거 책 꾸준히 내고 있는데요, 존 버거 소설도 꽤 있습니다. <A가 X에게> 이 작품도 좋아요. <G>는 호불호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추천합니다.
2. 아, 이건 편집의 문제가 아니고요. 존 버거가 그렇게 쓴 거라,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3. 하하하. 이름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분이고요. 존 버거 소설 거의 이분이 다 번역했어요. 저는 좋았습니다. 최근에도 계속 열화당에서 존 버거 소설 나오고 있는데 소설은 다 이분이 번역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폴스타프 님께 존 버거 소설을 추천드립니다. ㅎㅎ 왠지 <G> 좋아하실 거 같아요.

잠자냥 2021-02-26 09:36   좋아요 0 | URL
아무튼 모든 페이지가 거의 반페이지씩 있다 뭐 그런 건 아니고요. 이게 시점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시점 변할 때마다 한 줄씩 공백이 있기는 해요.

Falstaff 2021-02-26 09:40   좋아요 1 | URL
그렇고만요.
근데, 하여간 열화당 책은 비싸요. 한정된 독자들이 찾는 곳이라 그런가봅니다. 대부분 매니아들의 집합소. ㅎㅎ
 

사람에게는 꿈이 중요하다 말한다. 어린 시절에 꿈에 대해 질문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답하는 아이가 이런저런 자기의 꿈을 밝히면 질문한 어른의 상당수는 그 꿈에 대해 평을 덧붙인다. 그 꿈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다, 꿈도 크다, 아니 어린 아이가 너무 꿈이 작잖아. 요즘 애들은 꿈도 참 현실적으로 꾼다 등등. 크면 커서 문제, 작으면 작아서 문제란다. 그런 어른도 정작 어린 시절에는 남들이 보기에 참 이루기 어려울 것 같은 꿈을 꾸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자기의 능력과 한계를 깨닫고는 꿈을 조정하고, 줄여가면서 현실이라는 틀에 맞춰 살게 된다. 그러면서 그 꿈 자체를, 아니 그런 꿈을 꾸었던 그 옛날의 자기를 잊고 먹고사는 일에 몰두해 나날이 살아가기 바빠진다. 나 또한 그런 아이였고, 그런 어른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단편집을 읽고 있다. 두 번째 작품 <없었던 것에 대해>는 실현 불가능한 꿈과 그 꿈의 좌절을 이야기한다. 주인공 디마의 어린 시절 꿈은 남들과 조금 다르다. 디마는 호랑이를 키우고 싶어 한다. 어느 날 아빠가 여섯 살 난 디마의 손을 잡고 동물원에 데려가 호랑이를 보여 준다. 호랑이의 푸른 눈에는 수직의 눈동자가 있고, 코의 검은 피부 주위로는 까만 동그라미가 퍼져 있다. 그리고 머리 위로는 이등변삼각형을 닮은 두 귀가 돌출해 있다. 디마는 호랑이를 보자마자 깊은 감동을 받고 아빠에게 조른다. “아빠, 나 호랑이 갖고 싶어.”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아빠에게 또 다시 조른다. “호랑이 갖고 싶어. 우리 집에서 살 수 있게.” 그런 디마에게 아빠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집에서는 개나 고양이가 사는 거야. 호랑이는 집에서 살지 못해.”

 

대부분의 아이라면 자라면서 호랑이를 왜 집에서는 키울 수 없는지 알게 되고 자연스레 그 꿈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런 꿈 자체를 어린 시절의 귀여운 일화쯤으로 치부하게 된다. 그러나 디마는 달랐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러 의사가 된 디마는 남들이 생각하기엔 버젓한 직업을 가졌지만 현실에 딱히 만족하지 못하고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호랑이를 갈망한다. 사람들은 위급한 상태에 처하면 디마를 집으로 호출한다. 그들은 디마의 왕진을 매우 기뻐하지만 상태가 좋아져 디마가 그들을 떠나는 즉시 그를 완전히 잊고 만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그와 같다.’ 디마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직업은 전혀 창조적이지 않고, 환자들은 무례하기 짝이 없다. 그런 데다가 집에서는 엄마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한다. “넌 어릴 때부터 주변머리라곤 없었어. 다른 애들이 간단하게 다 하는 망나니짓도 할 줄 몰랐지. 지금도 너는 그래. 나태한 인간들도 다 가진 꿈도 간단하게 꾸지 못하잖아. 너한테는 아무것도 없어. 앞으로도 절대. 아무것도 없을 거다.”

 

나태한 인간도 다 가진 꿈조차 간단하게 꾸지 못한다고 구박받는 디마. 그에게는 그래도 호랑이를 키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남들은 상상조차 잘 하지 않는 원대한 꿈이 있지 않은가? 술집에서 자기 신세를 한탄하던 그에게 누군가 조언한다. 동물원으로 가보지 그래요? 거기라면 호랑이 한 마리쯤 살 수 있지 않겠소? 디마는 드디어 자기 꿈을 실현하고자 행동으로 옮긴다. 그 어린 시절 동물원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런데 이 동물원은 어린 디마에게 줬던 감흥을 다시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20년 전에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독수리 우리에서 독수리 자체만을 봤다. 그런데 이제는 갇혀 있는 독수리를 본다. 독수리 우리는 위로 열려 있다. 독수리는 머리 위로 하늘이 있으나 그곳을 향해 날아갈 수 없다. 날개가 꺾였기 때문이다. 독수리는 꺾인 날개를 늘어뜨리고 넓은 그루터기에 앉아 있다가 가끔씩 나무 장식 위를 걸어 다니곤 한다. 그런 나무 장식은 주방 가구점에서나 파는 것들이다. ‘갇혀 있는 독수리를 보는 디마의 모습, 날개가 꺾였기에 하늘이 열려 있어도 그곳으로 날아가지 못하는 독수리는 꿈은커녕 하루하루 소시민으로 살아가기 바쁜 디마, 그리고 현대인의 모습과 같다.

 

디마는 동물원 관리소 원장과 이야기를 나눈다. 호랑이를 사고 싶다고. 그러나 원장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대꾸한다. 우리에겐 남는 호랑이가 없다, 그게 얼마나 비싼 줄 아느냐, 당신의 재력으로는 절대 호랑이를 살 수 없다 등등. 그러면서 서커스장 조련사에게 가보라고 권유한다. 그곳이라면 호랑이 한 마리쯤 팔지도 모른다고. 디마는 그의 권유대로 이번에는 서커스장을 찾아가 조련사를 만난다. 호랑이를 집에서 키우고 싶다는 디마를 조련사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상한 소원도 다 있군요.” 그러고는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내과 의사라는 말을 듣자 자기 병에 관해 질문하기 바쁘다. 이때 서커스 조련사가 하는 말이 인상 깊다. 호랑이는 당신보다 내게 더 필요해요. 당신에게는 꿈이지만 내겐 생산도구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사치스러운 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먹고사는 데 꼭 필요한 생산도구. ‘호랑이대신 다른 말을 집어넣어도 될 것 같다. 조련사는 마지막으로 두로프 우골로크’(학교나 공장에서 특별한 용도로 쓰이는 동물원이나 식물원)로 가보라고 제안한다. 디마는 또 그곳을 찾아가보지만, 그곳 관계자는 이곳에 집토끼, 비둘기, 너구리는 있어도 호랑이는 없다 말하며 자리를 뜬다.

 

디마는 호랑이를, 그 꿈을 잊고 싶다. 뇌에 스위치가 있어서 스위치를 끄면 모든 걸 잊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디마는 호랑이 꿈을 포기하게 될까? 그런데 뜻밖으로 이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디마에게는 어릴 적 친구인 바샤가 있다. 지질학자인 바샤는 얼마 전 시베리아 호랑이의 원산지인 우수리스크침엽수림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곳에서 사라진 매머드 추골을 찾아냈는데, 그것 말고도 새끼 호랑이 암컷을 선물로 받아 온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런 선물에 질색해서 새끼 호랑이를 정부에 무상으로 건네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성화했고, 드디어 디마에게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마침내 꿈이 실현된 것이다! 디마는 새끼 호랑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자기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축하하고자 아래층 레기나를 찾아 보드카를 마시자고 제안한다. 그때 레기나의 대답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꿈을 위해서디마가 제안했다.

그런 거라면 안 마실래요레기나가 거절했다

그래도 꿈이 없다면 산다는 게 불가능하잖아요.”

그럼 꿈꾸세요.” 그녀가 말했다. “아무 말 안 할 테니

 

새끼 호랑이를 드디어 집에서 키우게 됐으니 디마는 행복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디마와 달리 주변 사람들은 이 꿈의 실현이 못마땅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당연하다. 고양이도 개도 아닌, 호랑이지 않은가. 디마의 여자친구 랼랴는 정신적으로 이상이 없는 사람들은 호랑이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의 집에 오기를 거부한다. 디마도 호랑이도 똑같이 무서워한다. 디마와 함께 사는 엄마와 아빠도 불안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지루하지만 평온했던 일상은 무너졌다. 새끼 호랑이는 오줌을 아무 데나 쌌고, 자랄수록 고기 값도 많이 들었으며, 소파를 손톱으로 긁어대 엉망으로 만들었다. 엄마는 이 모든 것을 참는다. 호랑이가 무섭기 때문에 호랑이를 다그치지 못하고 디마를 향한 잔소리가 더 늘어간다. 엄마의 끊임없는 비난을 들으면서 디마는 문득 의심하기 시작한다. 내 꿈이 이상한 게 아닐까? 잘못된 게 아닐까? 엄마의 말과 바샤의 아내 행동이 이치에 맞는 게 아닐까. 디마는 호랑이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그러니까 제 꿈을 다시 없었던 상태로 돌려놓고자 애를 쓴다. 그런데 그마저도 쉽지 않다. 이루었던 꿈을 포기하려고 마음먹고 괴로워하는 디마에게 릴랴는 다른 꿈을 가져보라고 조언한다.

 

다른 꿈을 가져 봐

하지만 그건 배신행위야!”

뭐가 배신행위야?” “실현된 꿈은 이미 꿈이 아니야.”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는데, 내가 호랑이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나의 가장 좋은 부분이 나한테서 사라지고 말 거야.”

그렇지만 당신이 호랑이를 보호한다면, 그가 자라서 당신을 잡아먹겠지. 그럼 당신에겐 결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걸.”

 

실현된 꿈은 이미 꿈이 아니라는 말도, 그러니까 이제는 다른 꿈을 가져보라는 말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호랑이()’를 보호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가장 좋은 부분이 자기한테서 사라지고 말 거라는, 그건 배신행위라는 디마의 항변도 수긍이 간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당신이 호랑이를 보호한다면, 그가 자라서 당신을 잡아먹겠지. 그럼 당신에겐 결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걸.”이라는 랼랴의 말은 남들이 보기에 허황하고 무모한 꿈을 꾸는 일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실제로 호랑이가 사라지고 난 뒤 이웃들은 디마에게 전보다 더 친절해진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 디마는 자신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꿈을 잃은 디마는 술집에 앉아 우울한 얼굴로 옆에 앉은 사내에게 말한다. “엥겔스가 그런 말을 했다죠. ‘비극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실현 불가능과 욕망의 충돌이다라고 말이에요.”........ 나에게도 아직도 꿈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혹시 디마의 호랑이 같은 것은 아닐까..... 이 짧은 단편은 오늘 내게 많은 것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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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2-25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이 자라서 당신을 잡아먹겠지˝ 이 문장 인상깊네요. 방금 책 주문했는데 ㅜㅜ 이 📚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잠자냥 2021-02-25 17:42   좋아요 1 | URL
네,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모르고 지나가기엔 아까운 작가같습니다. 이 책으로 시작하셔도 좋고요. <티끌 같은 나>도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새파랑 2021-02-25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권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1-02-25 17:58   좋아요 1 | URL
토카레바는 믿고 추천합니다. <사랑의 역사>를 재미나게 보셨다면 아마 <티끌 같은 나>도 좋아하실 거예요. ^^

난티나무 2021-02-2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ㅠㅠ 정녕 호랑이인가요 제 꿈도...... 슬퍼지면서 동시에 보관함 슝 ~~~

잠자냥 2021-02-25 18:17   좋아요 0 | URL
ㅎㅎ 왠지 슬프죠. 이 책은 전자책도 있으니 쉽게 받아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전자책으로 읽어서 인용 문장 페이지를 밝히지 못했어요.
 
실화를 바탕으로
델핀 드 비강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독자를 점점 숨막히게 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L은 과연 존재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보자면 이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스티븐 킹의 ‘미저리’와 ‘샤이닝’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엔 문학(창작)에 관한 이야기. 현실이 상상보다 더 멀리 나간다는 말이 가장 인상 깊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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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2-24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흥미로운데요. 프랑스 고교생들은 수준이 높은가봐요. 이들이 뽑는 상도 있다니. ㅋ 찜했어요. 요거 제 스탈 같은데 언제 읽을지 ㅠㅠ 잠자냥님은 책 보는 안목도 남달라요^^

잠자냥 2021-02-24 09:34   좋아요 0 | URL
네, 프랑스 고교생들은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작품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생각해 보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다 읽고 나서도 독자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을 것 같고요. 델핀 드 비강 이 작가 작품은 계속 읽게 되더라고요. 행복한책읽기 님도 이 작가를 발견하는 행운이 있기를 바랄게요.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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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한 극장에서 어떤 연극이 시작한다. 이 연극을 위해 모인 사람들은 다양할 것이다. 먼저 무대 위에 오르는 배우도 있고, 이 연극을 기획하고 만드는 데 애를 쓴 연출가 및 극단 관련자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이 연극을 보고자 모인 수많은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한 공간에 모인 이들 대다수는 아무런 관련이 없겠지만, 그들 중 몇몇은 서로 크든 작든 인연이 있을 수 있다.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이런 배경 아래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열두 명의 서로 다른 여성들의 삶을 그려 나간다.

 

이 작품은 앰마도미니크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다호메이의 여전사들> 이 연극 초연을 앞두고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는 여성이 앰마이기 때문이다. 도미니크는 앰마와 죽이 잘 맞는 친구로 한때 앰마와 함께 여성들만의 극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지금은 저 먼 미국으로 떠나 생활하고 있으나, 오늘만큼은 절친인 앰마의 연극을 위해 그 먼 곳에서 날아왔다. 두 사람은 1980년대에 여자 교도소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오디션장에서 만났다. 그 무렵 그들은 노예, 하녀, 매춘부, 유모, 범죄자 같은 배역을 받거나 그마저 없으면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데 넌더리가 났고 마침내 서로 의기투합해 여성들을 위한 극단을 직접 세웠다. 앰마도 도미니크도 둘 다 레즈비언이지만 서로 반하지는 않은 단짝 친구로 그들 모두 페미니스트이며 흑인 역사, 문학, 정치 등을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유롭고 똑똑한 중년여성이다.

 

앰마에게는 야즈라는 이름의 딸이 하나 있는데, 자신처럼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게이의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했고, 그녀는 아이가 생김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어쩐지 반 페미니즘적인 것 같아서 그런 느낌을 아무에게나 잘 털어놓지는 못한다. 어느덧 대학생이 된 야즈는 딸 앞에서도 늘 새로운 파트너를 데리고 오는 일을 멈추지 않는 천하의 바람둥이 엄마와 똑똑하지만 나르시시스트인 게이 교수 아빠 두 집을 번갈아 오가면서 자랐고, 부모가 저마다 자기 활동에 힘 쏟는 동안에는 여러 대모와 대부(주로 레즈비언과 게이들인)에게 맡겨져 자랐다.

 

앰마는 야즈가 자유로운 환경에서 페미니스트가 되길 바랐는데 야즈는 최근 들어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심지어 앰마에게 페미나치라는 소리까지 한다. 야즈가 말하기를 페미니즘은 너무 떼 지어 몰려다니는 짓같고 솔직히 여자라는 것도 요즘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같단다. 야즈는 말한다. “모건 말렌가라고 내 눈을 뜨게 해 준 논바이너리 활동가가 있어 미래엔 우리 모두 논바이너리가 될 거라고 생각해 여자도 아니고 나자도 아닌 어쨌든 이런 건 젠더 기반의 성가신 일이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엄마가 말하는 여성의 정치 자체가 필요 없어질 거라는 얘기야 그건 그렇고 나는 인도주의자야 페미니즘보다 훨씬 더 높은 단계지 그게 뭔지 엄마는 알기나 해?”(62) , 녀석 기막히게 말 한 번 잘한다.

 

이런 야즈에게는 백인 친구도 있고 무슬림 친구도 있다. 백인 친구는 흑인인 야즈를 사귀면서 특권을 조금 포기해야 하며, 아랍인이 아닌데도 히잡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아랍인이라고 오해받는 와리스는 특권이라는 것 자체를 누려본 적이 없다. 와리스는 흑인, 무슬림, 여성, 가난한 자, 히잡을 쓴 사람, 다섯 가지 모두에 해당하기에 누구보다 억압받는다. ‘무슬림 한 명이 총기 난사를 하거나 폭탄을 터뜨려 사람을 죽이면 테러리스트라고 불리지만 백인 한 명이 똑같은 짓을 하면 그저 미친 사람이라고 불리는’(88) 세상에서 흑인이면서 히잡을 쓴 와리스의 억압과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한편 앰마에게는 도미니크와는 정반대인 친구 셜리가 있다. 셜리는 답답할 정도로 모범생이다. 그러나 앰마가 백인들만 있는 학교를 다니며 왕따를 당하던 시절, 셜리 그 자신 또한 흑인의 한 사람으로 앰마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때부터 둘은 단짝이 된다. 정체성의 혼란을 잠시 겪은 뒤 앰마가 레즈비언으로서 당당히 선언하자, 단짝 친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왠지 꺼려지면서도 앰마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하나뿐인 딸이면서도 오빠들과 차별받으며 자란 셜리는 공부로써 자신을 증명한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 역사를 공부하고 교사 자격증까지 따자 그제야 부모들은 자랑스러워한다. 오빠들은 해내지 못했지만 그녀는 해낸 것이다. 그녀는 집안의 성공 스토리가 된다. 교사로서 첫 발을 내디딘 셜리는 꿈에 부푼다. 흑인 아이들에게 자기처럼 성공의 기회를 주고, 시궁창 같은 삶을 벗어날 기회를 주겠노라 뜨겁게 마음먹는다. 실제로 셜리는 타고난 교사라고 칭찬받는다. 학생들과 잘 공감하고 교사의 의무를 넘어 모범적인 교육 방법으로 월등한 시험 결과를 얻으며 같은 민족에게 귀감이 된다고 교장에게 칭찬받는다. 셜리는 지금까지도 압박감을 느낀다. 훌륭한 교사이자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전 세계 모든 흑인을 대표하는 그런 대표. 그렇지만 오랜 교사 생활 후 남은 것은 시들어버린 꿈과 남루한 인생뿐이다. 이제는 남편과 함께 해마다 엄마인 윈섬의 집을 찾아 대가족이 여름휴가를 즐기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 되었다. 오늘 앰마의 초대로 연극을 보러 온 셜리는 그곳에서 우연히 뜻밖의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열두 명의 여자들 중 앰마, 야즈, 도미니크, 셜리 등 네 사람의 이야기만 했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는 인종, (), 젠더, 계급 문제까지 드러난다. 나머지 여성들, ‘캐럴’. ‘버미’, ‘라티샤’, ‘윈섬’, ‘퍼넬러피’, ‘메건/모건’, ‘해티’, ‘그레이스는 앰마, 야즈, 도미니크, 셜리와 어떤 관계이며 저마다 또 어떤 이야기를 펼쳐 보여줄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 작품은 첫 장부터 매우 역동적으로 흡인력 넘치는 이야기 풀어가며 독자를 끌어들인다. 인용 구절을 보고 눈치챈 이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 작품에는 마침표가 없다. 609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끝나는, 그조차도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로 맺어지는, 어찌 보면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열 두 여성의 삶의 기록이자 연대기이다. 그런데 그 흐름이 물 흐르듯 막힘이 없다. 그러면서도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늘날 현대 사회가 지닌 거의 모든 문제, 인종 차별, 성 차별, 계급 차별,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영국 사회의 문제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읽다 보면 정말 대단한 작품이구나, 마거릿 애트우드와 부커상을 공동으로 수상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구나,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2019년에 부커상이 이 흑백 두 여성에게, 그것도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증언들>과 같은 페미니즘 작품에 상을 준 것도 시대 흐름상 마땅한 결과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은 페미니스트가 되는 게 유행이야  블로그, 시위, 크라우드 펀딩, 정말 못 봐주겠어

페미니즘이 다시 살아나 활기를 띠는 게 왜 좋지 않은 일인지 날 이해시켜 볼래?

사실 내가 거슬리는 건 페미니즘의 상업화야 엠마, 예전에는 미디어에서 페미니스트를 심하게 비난하다 보니 아무도 페미니스트라는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아서 몇 세대의 여자들이 자신의 해방을 외면해왔지 이제는 미디어와 야합하고 있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파격적인 옷차림을 한 채 거창한 몸놀림을 보이는 화려한 사진 본 적 있지? 이제는 유행도 아니야

페미니즘의 토대 전체가 바뀌어야 해 그저 유행을 따르는 변모 정도가 아니고

수백만의 여자가 깨어나 완전한 권리를 지난 인간으로서 우리 세계의 주인 자리를 찾는 가능성에 눈을 뜬다는 건 축하할 일이야

우리가 어떻게 이걸 반박할 수 있겠어? (608~609)

 

앰마와 도미니크의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페미니즘이 유행처럼 번지고 상업화되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이 작품 속 퍼넬러피처럼 페미니스트가 됨으로써 가정이 깨지고, 그래서 홀로 늙어가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자유를 즐기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이 내 삶을 망치는 데 일조했다고 불만을 품은 여자도 있을 수 있고, 뒤늦게 페미니즘을 알아가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뜨며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 자기 욕망에도 눈뜨는 윈섬같은 여성도 있을 수 있으며, 야즈나 모건처럼 페미니즘은 이제 한물간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젠더 프리를 외치며 더 앞선 세상을 꿈꾸는 젊은이들도 있을 수 있다. 여성해방보다도 살기 위해, 시궁창 같은 삶을 벗어나기 위해 백인과도 같은 삶을 받아들이는 일이 먼저인 캐럴같은 여성도 있을 것이며, 19세기, 20세기 초에 태어나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알기도 전에 가부장제의 폭력에 시달린 그레이스같은 여성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열두 명의 삶은 우리 여자들/아무도 칭송하며 노래해주지 않고/아무도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356) 그 여성들의 삶을 전면에 내세우며 모두가 귀 기울이게 하는 데 성공한다. 그저 젊고 활기찬 세대뿐만이 아니라 처음에는 딸이었고 다음에는 아내이자 어머니였고 이제는 할머니면서 증조할머니, 또는 고조할머니가 된 여성들의 이야기도 한 개인으로 보여준다는 데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들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어느 지점에선가 아, 이건 내 이야기구나 하게 된다. 특히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마지막 그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이 이야기가 결국은 인간 전체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되며 이 영리하고 에너지 넘치는 작가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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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2-22 15: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안 사려고 꾹꾹 버티고 있는데 안 살 수가 없네요.

잠자냥 2021-02-22 16:06   좋아요 2 | URL
ㅎㅎㅎ 다른 책은 몰라도 이 책은 꼭~! 읽으세요.

레삭매냐 2021-02-22 16: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작년에 나오자 마자 사두기는
했는데 여적 뭉개고 있네요...

다음달에는 꼭 읽어야지 싶습니다.

잠자냥 2021-02-22 17:34   좋아요 2 | URL
저도 작년에 사두고 이제야 읽었는데, 작년에 읽었다면 아마도 작년 올해의 책. ㅎㅎ

유부만두 2021-03-14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야즈 이야기 부터는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재미있게 정신없이 읽었어요. 어째 억지 해피엔딩? 같아서 좀 아쉽기도 했지만 (백인 냄새;;;) 왜 그러지 말아야하나 싶기도 했고요. 미국 흑인 작가와 비슷한듯 다른 색이라 더 흥미로웠어요. 잠자냥님 말씀대로 읽길 정말정말 잘 했어요.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1-03-14 17:40   좋아요 0 | URL
만두 님 말씀처럼 진짜 생생한 연극 한 편 보고 나온 기분입니다. 정신없이 재미나게 읽으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ㅎㅎ
 
18세기의 방 - 공간의 욕망과 사생활의 발견
한국18세기학회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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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라는 어쩌면 너무나 일상적인 소재를 중심으로 18세기 사회상을 들여다 본다. 문학, 회화 등을 통해 그 시대 ‘방’의 변화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간은 개인을 발견하고, 사생활을 갖고자 하는 욕망과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을 갖추게 되면서 방을 점점 세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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