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굳이 다시 읽은 까닭은 순전히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을 보기 위해서였다. 영화가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머릿속에서는 책을 괜히 읽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원작이 있는 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겼을 때 책보다 좋았던 적은 극히 드물다(물론 예외도 있기는 하다). 나의 상상력과 해석이 당신(감독)의 그것과 많이 다르기에, 그 간극에서 비롯한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그런 면에서 원작과는 참 다른, 그래서 실망스러웠던 작품이다. 물론 원작하고 똑같이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비틀었어야 했을까?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이 메리 셸리의 원작과 참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결국 세상을 보는 방식이 원작자인, 여성 메리 셸리와는 애초부터 달랐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영화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점은 빅터와 그의 가족, 특히 아버지에 관한 묘사이다. 원작의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내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부모와의 관계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형제, 그리고 사랑하는 사촌이자 훗날의 약혼자가 되는 엘리자베스와의 사이, 그리고 절친한 벗 등 주위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상처나 오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물론 열일곱의 나이에 맞닥뜨린 어머니의 죽음이 빅터를 생명과 죽음의 원리에 탐닉하게 만들기는 한다). 무엇보다 소설 속 빅터의 아버지는 다정다감하고 사랑 넘치며 끝까지 아들 빅터를 믿고 응원해주는 자상한 캐릭터이다. 그런데 영화 속 빅터에게는 이런 관계가 전무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는 한데 이 어머니는 힘이 없으며, 냉혹하고 차가운 아버지는 빅터를 단지 자신의 의사라는 가업을 물려받을 존재로만 인식, 빅터를 몰아붙이기만 한다. 영화 속 아버지는 아내도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그런 아내를 닮은 장남 빅터를 차별하고 은근히 혐오한다. 반면 자신을 닮은 빅터의 어린 남동생 ‘윌리엄’은 한없는 애정으로 대한다. 때문에 빅터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의심하며(윌리엄을 낳다가 죽은 어머니를 의사인 아버지가 방치해 일부러 죽였을 것이라는 의심), 이 미움과 증오는 영화의 빅터를 재능은 있지만 오만하고 비뚤어진 인간으로 자라게 하는 데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그렇게 자란 빅터는 결국 생명과 죽음마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방자한 인간이 되어 범죄자를 데려와 실험하고 여기저기서 시체를 끌어 모아다 실험의 재료로 쓴다. 이런 빅터에게서 일말의 도덕적 고뇌나 죄의식, 윤리, 양심의 가책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죽음을 정복하겠노라는 그 야망으로만 불탈 뿐이다. 유유상종이라고나 할까. 이런 인간 주변에는 비슷한 인간이 꼬인다. 원작에서는 없는 인물 ‘하인리히’(크리스토프 왈츠)가 빅터의 연구에 흥미를 갖고 그에게 막대한 자금을 후원하겠노라며 접근한다. 원작에서 빅터는 몇 년 동안 오로지 혼자 실험실에서 고대 연금술사들의 오컬트적인 이론을 독파하고 화학적 실험을 거듭하는데 이것과는 꽤 다른 지점이다. 하인리히는 굳이 왜 빅터를 후원하는 것일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에게도 죽음을 정복해야만 하는 치명적인 이유-질병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앓는 질병도 참 상징적이긴 한데, 두 독버섯 같은 인간이 서로의 독을 알아본 셈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렇게 야심과 욕망에만 불타는 두 인간에게 생명이나 죽음을 인간이 좌지우지한다는 것에 대한 윤리나 도덕, 죄의식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단순한 존재인가?
인간은 그렇게 강하고 덕이 높고 훌륭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사악하고 비열하단 말인가? 어떤 때는 악한 원칙만 물려받은 자손처럼 보이다가도, 또 어떤 때는 고상하고 신성한 생각만 하는 존재 같기도 했지.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영화에 비해 원작의 빅터는 여러 차례 고뇌와 갈등을 겪는다. 처음에는 그 또한 탄생과 죽음의 비밀을 밝히고 말겠다는, 그리하여 불멸의 존재를 창조하겠다는 야망에 넘쳐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실험을 하는 동안을 비롯해 실험이 성공한 이후에도 자신의 연구가, 그런 선택이 그릇된 것은 아닌가 여러 번 의심하고 꺼림칙해한다.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꺼림칙해할 줄 아는 그 마음, 그것이 인간을 더 인간다워 보이게 하지 않는가? “내 마음이 불행으로 오염되어, 세상에 널리 도움이 되겠다는 밝은 꿈이 나 자신에 대한 우울하고 편협한 회상으로 바뀌기 전”을 빅터는 그리워하기도 한다. 자신이 창조한 괴물의 흉측한 모습을 보고서는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이따금 그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를 보았을 때, 움직이고 말하는 그 끔찍한 거구를 보았을 때 가슴이 쓰려서 공포와 증오의 감정으로 바뀌었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메리 셸리는 빅터라는 인물의 복잡한 심정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기에 그의 오만함, 광기와도 같은 열정도 어느 지점에선 이해가 되기도 하고, ‘자신이 만든 괴물의 노예’로 살아가는 그에게 연민마저 든다. 게다가 그의 고통은 자기가 창조한 괴물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가할 때마다 더더욱 커져간다. 내가 생명을 불어넣은 존재가 누구보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그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창조자의 삶은 지옥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 엘리자베스는 그 엘리자베스가 아니었기에
그러나 영화 속 빅터라는 인물에게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가? 그렇지는 않다. 특히 그의 이기심, 자기의 욕망 앞에서는 윤리도, 죄의식도 도덕적 망설임도 없는 뻔뻔함에는 경멸의 감정까지 솟구치는데, 그가 ‘엘리자베스’를 대하는 태도에서 이런 감정은 절정에 달한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 원작과 다른 기묘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엘리자베스’라는 캐릭터이다. 원작에도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여성은 등장한다. 그러니까 빅터의 사촌으로, 어린 시절부터 소꿉동무이자, 일찌감치 신붓감으로 점찍은 여성. 빅터와 엘리자베스는 세상 둘도 없는 친구이자 가족이자 연인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 엘리자베스를 원작과 달리 동생 윌리엄의 약혼자로 둔갑시킨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약간 삼류로맨스....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동생이 약혼녀를 소개하겠다면서 이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형 빅터를 찾아왔을 때부터,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함께한 식탁에서 도도한 표정으로 빅터의 생명창조설 이론에 살짝 반기를 들면서 냉소를 머금은 조롱 비슷한 미소를 지을 때부터, 관객은 모두가 다 예상하게 된다. 아, 저 둘이서 또 사랑에 빠지겠구먼, 동생의 약혼자, 약혼자의 형을 사랑하는 금기 아닌 금기의 로맨스가 펼쳐지겠구먼, 그런데 둘만 안타깝겠구먼....
실제로 영화는 그렇게 전개된다. 빅터는 동생의 약혼자, 이 당돌한 여자에게 매혹당해 그녀를 갖고 싶어 한다. 엘리자베스가 마음을 줄 듯 말 듯 하기에 더 애가 탄다. 여기서도 빅터는 동생 윌리엄에 대한 죄책감이나 죄의식 등은 없다. 그냥 탐이 나니까 빼앗고 싶을 뿐이다. 시체를 누덕누덕 기워서라도 괴물이라도 상관없으니 생명을 창조하면 그만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엘리자베스라는 여성도 좀 신기하다. 약혼자인 윌리엄과는 생김새부터 정반대인 형 빅터에게 처음부터 끌린 것 같은데(망나니 같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오만방자형의 전형적인 나쁜 놈에게 끌리는 심리),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또 그를 경멸하듯이 내치기 때문이다(그런데 왜 또 같이 웃고 싸돌아 다니는지 원....). 사실 이 여자가 결국 빅터를 선택하지 않는 지점에는 다른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다. ‘하인리히’라는 보이지 않는 손. 그러니까 이 여자는 그냥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남자들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메리 셸리의 원작에서는 볼 수 없는 그냥 전형적인 여자 그 자체인 캐릭터이다.
엘리자베스를 동생의 애인으로 둔갑시키고, 게다가 ‘괴물’을 마주하게 하는 존재로, 그리하여 ‘괴물’이 진심으로 마음을 열게 되는 대상으로 바꾼 것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가장 다른 지점이면서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망작으로 만든, 좋지 않은 각색이 아니었을까. 엘리자베스는 네 남자(빅터-윌리엄-하인리히-괴물) 사이에서 갈등을 촉발하는 존재이면서도 그 갈등을 능동적으로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단지 아름다운 ‘여성’으로만 그려진다. 게다가 이 엘리자베스가 ‘괴물’을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은 무엇인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같이 보던 집사2에게 영화를 보다 말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지금 저 여자가 괴물한테 느끼는 감정이 호기심이야? 두려움이야? 공포야? 연민이야? 애정이야? 애정인 것 같은데 그게 사랑이야? 아니면 반려동물한테 느끼는 그런 애정이야?”(아는 분은 제보 바람). 괴물에게 “나를 데려가 달라”라고 말할 때도 타자를 이해하는 또 다른 타자의 동질감에서 비롯한 호소라고 받아들여보려고 애를 써 봐도 그 감정선이 뜬금없어서 생뚱맞아 보이기만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처럼 또 한 번 괴물과 인간 여성 간의 사랑을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 그 영화에 비하면 이 작품의 로맨스는 좀 공감하기 어려웠다.
인간들은 부와 결합된 고귀하고 순수한 혈통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도 배웠어.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사람들은 존경할 거야. 하지만 둘 중 하나도 없으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선택된 소수를 위해 자기 힘을 낭비해야 하는 부랑자나 노예로 간주되었지.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내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나를 창조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르지. 하지만 내게 돈이나 친구, 재산이 전혀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지. 게다가 내 외모는 끔찍하게 추악하고 혐오스럽지. 심지어 내게는 사람의 본성도 없어. 나는 사람보다 더 민첩하고, 더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고 살 수도 있어. 또 심한 더위나 추위를 견딜 수 있지. 내 키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크지. 주위를 둘러보니, 나 같은 존재는 보거나 들어 본 적이 없어.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괴물이란 말인가? 모든 인간이 도망치고, 모든 인간이 부인하는 지상의 오점이란 말인가.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눈이 멀어야 더 잘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
타자는 타자의 슬픔을 알아보건만
그럼에도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 아름답고 그래서 슬픈 장면들이 있다. 괴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부분이다. 원작을 읽을 때도 괴물의 고통은 빅터의 그것보다 더 절절하게 와닿는다. 영화는 원작의 이 장점을 잘 살린다. 괴물은 추악하고 못생긴, 게다가 태생부터가 혐오스러운 존재이기에 창조자인 빅터마저도 그 기이함에 혐오감을 느끼고 달아난다. 그러나 그런 괴물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는 영화에서나 원작에서나 늙은 노인, 그것도 눈먼 노인이다. 눈이 멀어 그는 괴물의 형체, 겉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의 목소리나 행동(남을 돕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으로 괴물이 다정한 친구, 요정, 님프 같은 존재라고 인식한다. 노인 또한 여러 의미로 타자이다(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병들고 약한, 노인이라는 점에서).
영화에서 괴물에게 연민과 동질감을 기반으로 한 애정을 느끼는 존재도 ‘엘리자베스’라는 여성, 또 다른 타자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셸리의 원작에서 말하듯 ‘그들의 눈은 치명적인 편견에 가려서,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친구를 보아야 하는데 혐오스러운 괴물만’ 본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고통,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또 다른 존재가 전무한 외로움의 고통,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끝낼 수도 없는 형벌과도 같은 삶. 이 삶을 그나마 견디고자 괴물은 자신과 닮은, ‘추악하고 못생긴 여자 괴물’을 창조해달라고 빅터에게 말한다(영화에서는 ‘동반자’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그러나 원작에서도 영화에서도 괴물의 이 간절한 소망, 자기처럼 결함이 있는 존재, 같은 종족이라서 편견 없이 자기를 온전히 받아들여줄 또 다른 타자, 그리하여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잊게 해줄 존재의 탄생은 이뤄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영원한 타자인 괴물은 스스로 죽지도 못한 채 이른바 정상성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사라지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메리 셸리는 그 자신이 타자였기에 타자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고통, 그 영원한 형벌과도 같은 삶의 모순을 괴물이라는 타자를 창조함으로써 폭로했다. 그런데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그 타자의 고통에 얼마나 다가갔을까? 권위적이고 폭압적인 아버지를 죽이고(넘어서고) 싶었던 빅터와 또 그런 빅터를 죽여야만 하는 괴물의 이야기, 타자의 소외와 슬픔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 만들어버린 <프랑켄슈타인>은 나에게는 실패의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