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
마일리 멜로이 지음, 강정우 옮김 / 책세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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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하던 일상에 찾아오는 작은 균열의 순간을 잘 포착한 단편들. 그리고 그 균열에는 늘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갈등이 따른다. 주인공들은 잠시 극렬하게 갈등하지만 그 선택은 늘 안정적이다. 그렇기에 더 현실적이다. ‘삶의 어느 한 순간을 스케치하듯 그려낸다‘는 단편 미학을 잘 살린 수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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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골트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 한겨레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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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의 일이다. 그 기억은 유년 시절 내내 또렷하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말 리어카’라는 것이 있었다. 아저씨가 말이 매달린 리어카를 끌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코흘리개들한테 100원씩 받고 10분 정도 말을 태워주는 그런 거였다. 요즘 이 말 리어카는 좀처럼 볼 수 없고 가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옛 시절을 그리는 장면 속에 추억처럼 등장하고는 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말 리어카를 보면 나는 어김없이 어린 날의 공포가 떠오른다. 나는 이 말 타기를 좋아해서 동네에 말 리어카가 오면 신나게 달려가곤 했다. 그런데 초등학생 정도만 되도 덩치가 커져서 이 말은 작게 느껴진다. 때문에 초등학생이 이 말을 타는 것은 어쩐지 좀 우스워진다. 나 또한 초등학교 입학 전에만 말을 탔던 것 같다. 그 뒤로는 동생들이 말을 탈 때면 조금 부러운 눈으로 그 주위를 맴돌곤 했다.

그런 오후 중 하나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 말 리어카를 봤다. 아홉 살 즈음이었다. 그 말 리어카에는 풍선, 정확히 말하자면 비치볼 비슷한 것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아이들은 말을 타다가 손으로 그 풍선을 툭툭 치고는 한다. 그런데 그날 나는 말을 타지도 않으면서 그 풍선을 툭 쳤다. 리어카 앞을 지나가다가 위에 매달린 풍선들을 하나씩 툭툭툭 친 것이다. 말을 타지 못해서 심술이 났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그저 장난이었을까.

그런데 이윽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말 리어카 아저씨가 자기 머리통만 한 돌을  들더니 나에게 던지려고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랍고 무서워서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런 가운데도 어쩐지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를 못하던 나였지만 정말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얼마쯤 위협하다 말겠지 했던 아저씨는 계속 돌을 들고 쫓아왔다. 나도 내리 달렸다. 어떻게 어른이 아이한테 풍선 좀 쳤다고 저 큰 돌을 던지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풍선을 친 게 그렇게 나쁜 일일까? 죽기 살기로 달렸더니 어느 순간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워낙 말이 없던 아이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어도 집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뒤로 더 이상 그 리어카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집 근처에 말 리어카가 보이면 멀찍이 돌아오곤 했다. 그 아저씨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될 때까지도 그 리어카를 끌고 다녔다. 그즈음에야 그 아저씨가 그토록 난폭하게 굴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정신지체자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그가 보통 어른들과는 달리 판단력이 떨어질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날의 공포는 또 더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정말로 그 돌덩어리를 내게 던졌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루시 골트 이야기>를 읽다 보니 묘하게도 어린 시절 말 리어카 아저씨와의 작은 소동(?)이 떠올랐다. 어린 아이가 장난삼아 툭툭 쳐댔던 풍선. 순간 몹시 화가 난, 판단력이 떨어지는 정신지체자의 난폭한 행동. 이런 작은 우연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불러와 그 순간 정말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내 인생은 지금쯤 어떤 방향으로 달라졌을까? 그리고 또한 그 아저씨의 인생은?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돌덩어리는 무시무시하게 컸다.

삶에는 이렇듯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뜻과는 달리 불행한 결과를 불러오는 순간이 있다. <루시 골트 이야기>의 루시 또한 어린 시절 한 순간의 그릇된 판단, 아니 조금 맹랑한  실수로 말미암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불러오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정말로 그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삶의 방향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루시가 어찌 알았으랴. 아이로서 자기 의사를 확고하게 밝히고 싶었던, 마음대로 뭐든 결정해 버리는 부모님에게 작은 복수 또는 반기를 들고 싶었던 그 생각이 그토록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게 될 줄이야. 더욱이 자기 삶만 바뀐 게 아니다. 부모님은 물론 그 주변인들의 삶까지 완전히 달라진다.

처음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척 궁금해서 책장을 숨 가쁘게 넘긴다. 그러다가 그 일이 일어난 뒤로는 루시의 삶과 그 부모의 삶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인생이 어쩌면 이럴까 싶어서 먹먹해진다. 삶이 다 이런 것은 아닐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지구 곳곳에서 단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몹시 어리석어서 같은 실수는 아닐지언정 비슷한 실수를 또 저지른다. 루시만 하더라도 그렇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유형지에서의 삶과 비슷하게 살아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끝없이 자신에게 형벌을 가한다. 삶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187쪽)


삶의 길을 잃어버린, 방향을 상실한 루시 앞에 우연히도 ‘길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길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루시를 만나게 된다. <루시 골트 이야기>는 인생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의미를 생각해보게끔 한다. 레이프는 길을 잃었기 때문에 루시를 만난다. 루시는 레이프처럼 진짜로 길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로든 어린 시절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의 길을 잃고 스스로를 유폐하는 형벌을 내린다. 어디 루시만 그러할까. 그녀의 부모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삶에 이런 영향을 끼치게 한 ‘그 사람’도 길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다. 그 어둡고 쓸쓸한 길에도 과연 빛은 있을까?

윌리엄 트레버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루시 골트 이야기> 또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쓸쓸한 삶이 조용히 그려진다. 그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한 번 꺾여버린 인생은 쉽사리 행복한 삶으로, 극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의 삶이 완전히 불행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길을 잃어버렸을지언정, 그리고 그 길에서 또 다시 자기 삶을 더 어두운 곳으로 이끄는 어리석음을 보일지언정, 결국에는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법을, 빛을 찾는 법을 인간은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 존재임을 <루시 골트 이야기>는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전하기 때문이다. 그 감동은 책을 덮고도 오래도록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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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골트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 한겨레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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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순간 그릇된 판단으로 자기 삶을 유형지로 몰아가는 한 여인의 이야기. 인생이 어쩌면 이럴까 싶은데 생각해 보면 많은 이들의 삶이 그렇지 않을까? 길을 잃고 헤매는 인생, 그런데 그 길에도 어느 순간 빛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방법은 자기 자신 안에 있음을 일깨워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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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3
제임스 조이스 지음, 진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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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 Dubliners>은 그의 난해한(?) 문학세계에 처음 도전하는 이들에게 적당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을 때 좀 당혹스러웠다.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컸다. 15개의 단편이 모두 갑자기 시작해서 느닷없이 끝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주인공과 각 인물들의 관계는 무엇인지 도통 감 잡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15편의 단편은 말 그대로 ‘더블린’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서로 연관이 있는 걸까? 궁금했는데,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걸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앞의 세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화자도 모두 다르다. 화자에 따라 이야기의 느낌도 달라진다. 때문에 초반에는 ‘역시 난해한 것인가?!’하는 느낌도 있고 조금 지루하고 따분하기도 했다. ‘재미있자고 보는 책, 왠지 읽어야 할 작가니까, 의무감에 읽을 필요가 있을까? 이런 태도는 내 가치관(?)과도 맞지 않잖아?’하며 꾸역꾸역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미련 없이 확 내려놓지는 못하고….


그러다 몇 편의 단편을 넘기니 서서히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몇몇 단편은 꽤 마음에 들었고, 책을 덮을 때쯤엔 ‘와, 잘 썼다’하는 탄성이 나왔다.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종교적으로는 부패했고, 경제는 궁핍하고, 가정은 화목하지 않다. 꿈은 좌절되기 쉽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고 현실에 매여 있거나 탈출할 기회가 주어져도 용기가 없어 무기력하게 주저앉는다. 종교 못지않게 정치도 부패했고, 대다수 사람들은 알코올에 취해있다. <더블린 사람들> 15편의 삶은 모두 그렇다. 무기력감이 팽배하다. 언젠가 보았던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 <숏컷>이 떠오르기도 한다.

<더블린 사람들>처럼 한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작품들은 꽤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독특한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조금은(?) 불친절한 구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렇고 어떤 사연이 있는데, 그 사연 때문에 이러저러하다고 ‘작가’가 개입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철저히 뒤로 숨어 있다. 카메라가 이 집을 비추다가 갑자기 다른 집을 비추듯이 그저 한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가 비춘 그 시점부터 카메라가 또 다른 집을 비추기 전까지의 상황만으로 독자는 그 앞뒤전후를 파악해야 한다. 때문에 전통적인 서사구조에 익숙한 독자들은 처음에는 당혹감을 느끼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그 나름의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퍼즐을 푸는 기분이랄까.

단편을 읽어감으로써 당시의 아일랜드와 더블린의 상황에 대해 점점 더 알아가게 되기 때문에 읽는 게 더 수월해지기도 한다. 작가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점차적으로 그 무렵 시대 상황이나 종교, 정치의 부패, 사회의 타락 등을 유추해갈 수 있도록 짜놓은 구조와 사실적이면서도 담백한 묘사가 돋보인다. 게다가 독자의 상상력을 한없이 자극한다. “아이고 망측해라, 저 추잡한 짓을 하는 노인 좀 봐”라는 구절은 나오지만 ‘추잡한 짓’이 끝내 뭐였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텍스트는 한 없이 열려있고, 작가의 존재는 보이지도 않고, 독자는 읽고 생각하기 나름이다.

이런 매력 때문일까,<더블린 사람들>은 왠지 한 번은 더, 다시 읽고 싶어진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문학동네 번역본으로 빌려 읽었는데, 각주가 불필요할 정도로 많아서 흐름이 많이 끊겼다. 다시 읽어볼 때는 다른 버전으로 읽어봐야지. 제임스 조이스 한 단계를 넘었으니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까지는 읽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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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0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이스의 소설은 재미없어요. 그런데 얼마나 재미없는지 궁금해서 계속 읽게 돼요.. 《율리시스》가 그래요.. ㅎㅎㅎ

잠자냥 2017-11-08 17:15   좋아요 0 | URL
ㅎㅎ 얼마나 재미없는지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이런 심리일까요. ㅎㅎㅎ

Falstaff 2017-11-0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알라딘 서재에 서재 동무님 글을 볼 수 있는 기능이 있구먼요. 완전 형광등입니다. 한땐 얼리 어답터를 자부했는데 시간이란 놈이 거 참 힘이 세요.
전 이 책을 예전에 영문과 아가씨들이 가슴에 많이 끼고 다녀서 궁금해 읽었고, 이후에 돈 벌어서는 창작과비평사가 전두환 정권 시절에 문 닫고 창작사던가로 이름 바꿨을 때 한 권 사 보고, 이후에 언젠가 한 번 더 사보고, 마지막으로 요즘에 펭귄으로 다시 읽었군요. 왜 그랬는지 ㅎㅎㅎ 재밌어요. 인생이죠 뭐.
잠자냥님의 필력도 대단한데, 으쌰으쌰, 좀만 더 힘을 내보셔요!!! 응원하겠습니다.

잠자냥 2017-11-09 09:24   좋아요 0 | URL
하하, 아직 그 기능을 모르셨었군요! 전 그 기능으로 폴스타프 님 글 올라오면 바로 읽고는 한건데. ㅎㅎㅎㅎ 네 이 책은 문학동네 버전으로 빌려 읽고 펭귄버전으로는 사두었습니다. ㅎㅎ 조이스의 다른 작품도 곧 읽어봐야지요- ㅎㅎ

케이 2017-11-09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좋아서 이것 저것 검색해 보다가, 제임스 조이스가 무기력한 조국 아일랜드 더블린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해 썼다는 견해(?)를 읽었는데, 저는 전혀 그렇게 느끼진 않았어요.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에게 각성할 것을 촉구하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는데... 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참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 읽을 당시 우울감을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던 때였는데, 뭘해도 안되던 중병이 이 책 읽고 한번에 치유됐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에겐 정말 은혜로운 책이예요. 하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다른 책은 엄두가 안나고, 독서내공이 좀 더 쌓이면 도전해보려고요. 10년쯤 뒤?ㅋ

잠자냥 2017-11-09 10:51   좋아요 0 | URL
하하하. 저도 그렇게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는걸요? ㅎㅎ 비판과 각성이라. ㅋㅋㅋㅋ 오히려 무기력한 그 사람들에 대해 연민이 있다면 모를까요. ㅎㅎ 같은 책을 읽어도 느끼는 건 그렇게 다르기도 하군요. ㅎㅎ 전 <율리시스>까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읽을 것 같아요. ㅎㅎ

카알벨루치 2018-08-06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때 조이스의 더블리너는 “ paralysis”로 범벅되어있다고 배웠어요 <율리시스>한국판은 저희집에 백과사전보다 더 큰 책이 먼지만 가득...읽고싶네요 햐 언제쯤ㅋㅋㅋ

잠자냥 2018-08-06 09:3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저도 <율리시스>는 죽기 전에 읽기는 읽어봐야 할 텐데.... 언제쯤? ㅎㅎㅎㅎ
 
곤충 극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04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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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수록 좋아지는 작가가 있다. 카렐 차페크는 분명히 그런 작가에 속한다. 희곡 선집인 <곤충 극장>까지 읽음으로써 지금까지 읽은 차페크 작품은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도롱뇽과의 전쟁>, <로봇>, <호르두발>, <별똥별> 총 일곱 권이 된다. 앞으로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까지 읽은 뒤 차페크 평전을 읽을 계획이다.

그의 철학 소설 3부작으로 꼽히는 <호르두발>(1933), <별똥별>(1934), <평범한 인생>(1934)가운데 <평범한 인생>만 못 읽었는데, 이 책은 절판된 상태이고 중고로도 비싸게 팔리고 있어서 새로 출간되지 않는 한 한동안 읽지는 못할 것 같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이 작품이 없다. 사실 <호르두발>과 <별똥별>도 내가 신청해서 도서관에 비치했다. 지만지 시리즈에서 <평범한 인생>까지 출간한다면 또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을 예정인데,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다.

차페크의 모든 작품들이 대단한데, <곤충 극장>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 책에는 희곡 3편이 실려 있다, 세 편 모두 100쪽 남짓으로 짧지만 강렬하다. 첫 희곡인 ‘곤충 극장’은 한 편의 우화에 가깝다. 인간인 여행자가 곤충들의 세계를 엿보게 되는데, 그 곤충들의 삶이란 보면 볼수록 인간의 삶과 다름없다. 나비들은 암컷수컷 할 것 없이 짝짓기에 몰두한다.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른 짝한테 추파를 던지는 꼴불견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쇠똥구리는 또 어떠한가? 똥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을 끌고 다니면서 그것이 마치 이 세상에 더 없을 숭고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광적으로 집착한다. 쇠똥구리가 똥 덩어리를 대단하게 여기면서 종일 굴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집착하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돈, 성공, 명예, 권력 같은 것들이 어쩌면 저렇게 하나의 똥 덩어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싶어져서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된다.



    쇠똥구리 부인: 진즉에 결혼을 했는데 아직 공도 없는 거요?
    귀뚜라미 부인: 공을 어디다 써요?
    쇠똥구리 부인: 제대로 된 똥 공은 가족을 하나로 묶어 준다오. 진정한 삶- 즉 안정을 주지.
    귀뚜라미 부인: 아니, 아니에요. 삶이란 우리만의 가정이에요. 둥지를 짓고, 가게를 사고, 커튼도 달고요. 아이들도 있지요. 꼭 맞는 귀뚜라미 씨를 만나는 거예요. 우리의 작은 가정, 우리의 세계.
    쇠똥구리 부인: 그렇지만 똥 공 없이 살림을 어떻게 꾸려가려고? 어디를 가나 굴리고 다녀야지. 새댁, 잘 들어요. 자기만의 똥 공이 있어야 남편을 꽉 붙들어 매놓고 살 수 있다니까!
    귀뚜라미 부인: 좋은 집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쇠똥구리 부인: 똥 공이라니까! (60쪽)


이미 많은 것을 갖고 있으므로 거기에 만족하고 살아가도 되는 맵시벌이 욕심 때문에 다른 곤충의 목숨까지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모습은 이기적 욕망에 충실한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때문에 이 이야기는 그저 모두 곤충, 눈살 찌푸려지는 벌레들의 추잡한 이야기라고 치부하면서 웃어넘길 수만은 없게 된다. 이런 맵시벌을 비판하는 ‘기생충’의 역할이 흥미롭다. 흔히 기생충은 그 이름부터가 혐오감을 갖게 하는데, ‘곤충 극장’에서는 이 기생충이 차라리 가장 순수하다.



    여행자: 당신은 누구요?
    기생충: 나? 사실 별거 아니야. 빈털터리고 ? 고아, 기생충, 뭐 그렇게들 부르더군.
    여행자: 옳은 일이 아니잖아요. 저렇게 죽이다니!
    기생충: 아,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친구.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 나처럼 배를 곯은 것도 아니잖아. 저 친구는 그저 바리바리 쌓아 놓으려는 거라고. 충격적이지!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아무것도 없는 사람도 있는데, 저놈은 먹이 창고를 저렇게 꽉꽉 채워 놓고 말이야. 안 그래? 비수가 있다 이거지. 나는 맨손밖에 없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 (61~62쪽)

    여행자: 다 고기 한 덩어리 얻어먹자고 하는 짓이군!
    기생충: 그게 바로 내 말이야. 죄다 고기 한 덩어리 얻자고 하는 짓이라니까. 다른 딱한 새끼가 배를 곯더라도 말이야! 죄다 자기 배를 불려야 하는 거지! 안 그래? (64쪽)


이렇게 우화와도 같은 ‘곤충 극장’이 끝난 다음에는 스릴러와도 같은 ‘마크로풀로스의 비밀’과 한 편의 그로테스크한 SF를 보는 듯한 ‘하얀 역병’이 이어진다. <곤충 극장>에 실린 희곡 모두 좋았지만 나는 뒤로 갈수록 더 좋았다.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은 웬만한 독자라면 ‘그 비밀’을 눈치 챌 수 있다. 혹시 그런 게 아닐까? 그럴 거야 하는 의심이 심증으로 굳혀질 때쯤 독자의 예상대로 비밀은 밝혀진다. 하지만 그 비밀은 이 작품에서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그 비밀을 통해서 차페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의미가 있다. 그 메시지는 ‘곤충 극장’의 마지막 장면과도 일맥상통한다. ‘곤충 극장’의 에필로그 부분에서는 하루살이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삶을 예찬한다. 오직 단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그 하루살이들은 알고 있었다. 단 하루 밖에 살수 없기 때문에 그 하루가, 그 삶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에는 이 하루살이와는 정반대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영원히 살기 때문에 모든 것에 의미를 잃었다. 사랑을 느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연민, 즐거움이나 행복 같은 감정과도 거리가 멀다. 사람의 목숨이 ‘1백 년, 130년까지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그런 삶이 끝없이 이어지면 깨닫게 된다. ‘영혼이 속에서 죽어 버’리는 것이다. 결승점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전력질주를 해야 할 어떤 의무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는 어쩌면 단 하루뿐일지라도 끝이 있는 삶을 사는 ‘곤충 극장’ 하루살이들의 삶이 더 의미 있으리라.

마지막 희곡인 ‘하얀 역병’에서는 놀라운 장면이 있다. 나는 이 작품이 가장 좋았는데, 어떤 부분을 읽다가, 거의 100년 전 이야기가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 이야긴가 싶어져서 차페크의 혜안에 무릎을 쳤다. 한 도시에 나병과 증상이 비슷하지만 나병은 아닌, ‘하얀 역병’이 창궐한다. 치료법은 없다. 그런데 이 백색 바이러스 즉 ‘쳉 바이러스’는 신기하게도(?) 50세 이상만 발병하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쉰 살 이상이면 어김없이 모두 이 바이러스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도 그 세대는 많은 것을 가진 기득권층이다. 인생의 절정기를 살고 있다. 반면 젊은이들은 그 세대들이 모두 하나씩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빌붙어 살아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할 기회가 없다. 때문에 젊은이들은 이 하얀 역병의 창궐을 어떤 면에서는 반기기까지 한다. 이 바이러스 관련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던 어느 가정의 대화가 의미심장하다.



    딸: 그렇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아빠! 우리가 사회에서 일을 시작하기 어렵다는 얘기일 뿐이에요. 일자리도 없고 말이죠. 우리도 인생을 살고 가정을 꾸리려면 뭔가 희생이 필요하다는 거죠…….
    어머니: 일리 있는 얘기에요, 여보.
    아버지: 그러니까 당신도 얘 편이다 이거군- 그 말대로라면 우리는 모두 인생의 전성기에 꼴깍 죽어 넘어가야 한다는 거네.
    아들: 아빤 또 왜 저렇게 흥분하고 계세요?
    어머니: 아무 일도 아니다. 얘야, 그저 그 질병에 대한 기사를 읽으셨는데-
    딸: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려면 어떤 식이든 희생이 필요하다고 내가 말했어.
    아들: 그건 사람들이 다 하는 소리에요, 아빠! 역병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니까요! 누나는 결혼도 못 할 거고, 나 역시 끝도 없이 시험만 치면서 악전고투하고 살았겠죠…….
    아버지: 때마침 잘됐다 이거냐, 이 녀석아?
    아들: 어쨌든 요새는 학위도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나이 든 사람들이 죽고 나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죠. 뭐, 농담입니다! (253~254쪽)


그런데 이 아버지 또한 나중에 회사에서 동료들이 죽어나감으로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니 참 아이러니하다. 아버지는 자식세대들이 자신들이 죽어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자신 또한 회사 동료들의 죽음으로써 기대하지도 않았던 자리를 차지하게 되니, 그 ‘하얀 역병’이 반갑지 않은 것만은 아닌 게 된다. 아니 오히려 자신은 그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 자부하면서 그 병을 반긴다.

이런 설정도 놀랍지만 이 작품은 뒤로 갈수록 전율하게 된다. 이 바이러스를 치료법을 알아낸 의사 갈렌이 역병 치료법을 나라에 알려주는 조건으로 ‘평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을 고칠 수 있도록 해주는 대신 전쟁을 멈출 것. 병 때문에 죽어가는 목숨과 전쟁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목숨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보게끔 하는 설정에서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게도 평화보다는 전쟁을 선택한다. 자기 목숨이 꺼져가고 있음에도 전쟁을 놓지 못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차페크의 작품은 이렇듯 한없이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풍자한다. 그 풍자는 위트가 넘쳐서 읽고 있노라면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 풍자와 해학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다. 인간은 어리석고 이토록 못났지만 그래도 불쌍한 존재라는, 이렇게 자기의 행복과 삶의 기쁨을 놓쳐버리는 안타까운 존재라는 연민어린 시선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늦게라도 어리석은 자신들의 존재를 돌아볼 줄 알고 ‘수정’할 줄 알거나 그렇게 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차페크의 작품들을 읽노라면 어리석고 못난 인간들 때문에(물론 나를 포함해서) 늘 한숨짓다가도 그래도 인간은, 완전히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1%의 가능성이라도 확인하기에 그저 ‘절망’하면서 책장을 덮지는 않게 된다. 차페크의 문학이 갖는 힘이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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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14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어요 누르니 바로 피드 뜨는 잠자냥님 리뷰네요 ^^

잠자냥 2021-06-14 16:45   좋아요 2 | URL
제가 어쩌다 보니 카렐 차페크 마니아 1위인데요... 쿨럭쿨럭... 이 책 정말 재미나요. <곤충극장> 희곡이긴 하지만 읽으시고 괜찮다 싶으면 다음엔 차페크의 <도룡뇽과의 전쟁>도 추천합니다. 참, <도룡뇽>은 희곡 아닙니다~~ ㅎㅎ

coolcat329 2021-06-17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저 어제 알라딘 우주에서 딱 한 권 있는 이 책 구해서 샀습니다. 2만원 맞추느라 또 끙끙거리면서요~😅😅

잠자냥 2021-06-17 12:50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애쓰셨네요! 우주점에 있었군요. 2만원 맞출 게 있었다니 다행이에요. ㅎㅎ 애쓰신 만큼 재미나야 할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