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삶
실비 제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장을 꼭꼭 씹으면서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다 읽고 난 다음에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게 되는 책이 있다. 실비 제르맹의 <숨겨진 삶>이 그랬다. 나는 이 작가를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책을 덮고는 그이의 다른 책들도 찾아본다. 또 다른 작품, 그의 다른 세계가 궁금해지는 사람,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읽은 것은 행운이다.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다.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서 더는 새롭지도 신기하지도 않은 이 말. 이곳에서의 나비 날갯짓이 저 먼 곳에서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이 말은, 일반적으로 아주 작은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숨겨진 삶>에는 바로 그런 이야기들이 그려진다.



벼룩 한 마리가 흑사병이나 티푸스를 퍼뜨리고말고,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고, 재채기 한 번으로 산사태가 날 수도 있지. 복권 한 장이 사랑을 파괴하고, 말 한마디가 무사태평한 기쁨과 신뢰를 단번에 사라지게 하고, 한순간의 부주의가 파리채로 파리 잡듯 한 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지. (40쪽)


인용 문장에 ‘복권 한 장이 사랑을 파괴’한다는 말이 보인다. 실제로 온라인 서점의 이 책 소개 내용을 보면 ‘복권’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빈’과 그녀의 남편 ‘조르주’ 사이에는 복권으로 얽힌 기막힌 사연이 숨겨 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은 이들에게 만일 <숨겨진 삶> 이 작품이 복권과 얽힌, 그로 말미암아 파괴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복권은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복권이라는 날개짓은 또다른 소소한 날개짓들에 비하면 그리 큰 사건도 되지 못한다.

작품은 어느 을씨년스러운 12월 강가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한 여인이 강변을 거닐고 있다. 그런데 그 몸짓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몸놀림도 예사롭지 않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둥거린다. 여자의 몸에는 불안이 잔뜩 스며있다. 이 을씨년스러운 날씨, 이 시간에 여자 홀로, 왜 강변을 저리 허둥대며 거닐고 있을까? 여자는 불안으로 곧 쓰러질 것만 같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 백화점에서 산타클로스 차림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피에르’가 바로 그다. 여자가 위험하다고 느낀 그는 허겁지겁 달려가 여자, 그러니까 ‘사빈’을 부르고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웃지 말라’고 외친다.

피에르는 사빈이 품속에 안고 있던 것, 그러니까 아이가 틀림없다고 생각한 ‘그것’을 가리키면서 딸인지 아들인지를 묻는다. 그런데 사빈은 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라고 말한다. 피에르는 여자가 아이를 품에 안고 강가로 달려갔고, 무언가 나쁜 일, 그러니까 아이를 안은 채 강으로 뛰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순간 “웃지 말라”고 말했을까? 사빈이 품에 숨기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 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라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이들에게 줄 인형일까? 아무튼 피에르는 자신이 걱정했던 것처럼 아이를 안은 채 자살할 생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순순히 사빈을 보내준다.

그러나 독자들은 사빈과 피에르가 이렇게 우연히, 기이하게 만났고, 별일 없이 헤어지기는 하지만 곧 만날 운명임을 눈치채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 그 사이 사빈, 서른 초반이지만, 열일곱이라는 아주 이른 나이에 일찍 결혼한 탓에 남편 조르주와의 사이에서 아이 넷을 둔 이 여인의 사연이 잠시 소개된다. 복권에 얽힌, 그리고 그 때문에 숨길 수밖에 없는 사빈의 사연과, 복권으로 드러난 조르주의 숨겨진 사연, 그러나 끝끝내 사빈은 알지 못하고, 이 책을 읽는 이들만 알게 되는 그 사연까지 그 모두가 스케치하듯 짧지만 강렬하게 지나간다.

사빈과의 그 짧은 인연으로 피에르는 곧 사빈과 함께 일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사빈의 가족, 그녀의 네 아이들과 가까워지고 가족처럼 지내게 된다. 그러나 이 관계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분명 있다. 사빈의 시아버지인 ‘샤를람’은 근본도 모르겠는, 어디선가 굴러먹다 온 기생충 같은 피에르가 눈엣가시와도 같다. 틀림없이 며느리인 사빈과도 그렇고 그런 관계일 것이라는 추측 아래, 자신의 손자들에게 피에르에 대한 나쁜 인상을 심어주려고 안달이다. 샤를람의 의도는 어느 정도는 성공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심하게 실패하기도 한다.

‘피에르 제브뢰즈’- 일정한 직업 없이 재주껏 생계를 꾸려나가고 거처를 자주 옮기며, 자신의 과거를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이 남자. 호적상 이름은 ‘에프렘’으로 ‘피에르’라는 이름은 가운데 이름에 지나지 않는데 자신을 피에르라고 불러달라는 이 남자. 어딘지 어두운 면모도 보이지만 한없이 선량하고 충직해서 절대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못할 것 같은 이 남자. 그런데 이 남자에게는 과연 무슨 사연이 있을까. 사빈에게 그날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가서 ‘웃지 말라’고 말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내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숨겨진 삶’이 드러날 때는 먹먹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피에르의 ‘숨겨진 삶’만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사빈에게도 속편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녀의 딸 ‘마리’에게도, 사빈 가족이 ‘왕고모’라고 부르는 ‘에디트’에게도, 그리고 또 다른 여인 ‘셀레스트’에게도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모두에게 하나같이 ‘숨겨진 삶’이 존재한다. 이 여인들뿐만이 아니다. 나오는 이들 대부분이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삶을 간직하고 있고, 그리고 그 숨겨진 삶은 그들에게 저마다 상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상처 때문에 자기 안에 갇히고 말지만, 그럼에도 제각각 그 은밀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버텨나간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에서 깊은 감동이 솟아난다.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앙리가 유랑하는 증인이 된 것도 어찌 보면 피에르 때문이었다. 지나가는가 싶었는데, 금세 사라져버리는 사람들, 전쟁과 혁명이 집어삼킨 운명들, 이 숨겨진 삶들을 즉각적인 망각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 세월과 더불어 광채를 잃어가는 노란 포스터. 하지만 로스코의 이 복제화는 색이 바래버린 지금도 앙리에게는 세상을 향해 여린, 탐색되지 않은 세계를 향해 열린 창이다. 이 그림 역시 숨겨진 삶이 식별되고 감지되게끔 하기 위해 한 사람이 애쓴 자취였다. 숨겨진 이 비극들 속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빛과 어둠이 마찰을 일으키거나 포옹하며 접촉했고, 다양한 색깔들이 수축과 팽창이라는 이중의 운동 속에 부동(不動)을 스치며 움직인다. (220쪽)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책 표지를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표지를 걷어낸 뒤 드러나는 속표지까지 그렇다. 다 읽고 나면 맨 앞장으로 돌아가 다시 읽을 수밖에 없는 책들이 있다. 이 작품이 그렇다. 그 모든 얽히고설킨 사연을 알게 된 뒤 다시 훑어보는 이 작품은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들, 아무것도 아닌 듯이 흩여져 존재했던 조각들이 얼마나 많은 정보들을 숨기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면서 감탄하게 된다. <숨겨진 삶>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이 책을 읽을 이들에겐 누가 되는 행동일 뿐이다. 여러 번 읽어도 좋은, 그런 작품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12-10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장바구니에 소설이 한 권도 안들어있어서 아아 어찌 이러는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했는데, 이 리뷰를 보기를 잘했네요. 이 책으로 소설을 담습니다.

사빈과 피에르가 우연히 만났고 곧 다시 만나게 된다는 글을 읽으니 어쩐지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떠올랐어요. 남자가 포르투갈 여자랑 우연히 다리 앞에서 마주치치 않던가요. 그리고 남주가 미친듯이 포르투갈어를 공부하던 그 장면도 연달아 떠오르네요. 저는 그 소설 자체를 그렇게 좋아했던 건 아니지만, 포르투갈어 엄청 공부하는 장면을 좋아했어요.

잠자냥 2019-12-10 17:58   좋아요 0 | URL
이 소설 정말 좋았어요... 아주 기냥 줄거리 최대한 안 밝히려고 애썼으니 온전히 잘 읽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
참, 책 표지 뒷면은 책 다 읽고 읽으세요. 먼저 읽음 안 됨!

다락방 2019-12-10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땡투땡투. 부자로 만들어 드리리..

잠자냥 2019-12-10 17:58   좋아요 0 | URL
오모나 땡투땡투 ㅋㅋㅋㅋ

유부만두 2019-12-10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 선택이 탁월하죠?!!!!

잠자냥 2019-12-10 21:39   좋아요 1 | URL
네 읽고 나서 보니 정말 표지 잘 만들었더라고요!

케이 2019-12-11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겉만 봐도 예쁜데 또 다른 표지가 있는 모양이네요. 이렇게 보관함에 책을 또 한권 넣어봅니다.

잠자냥 2019-12-11 17:10   좋아요 0 | URL
이 표지는 음... 예쁜 걸 떠나서 작품 내용과 아주 잘 조화를 이루는 표지에요. 또 다른 표지라고 말하기는 뭐하고, 요즘 양장본은 겉표지 떼어내면 그 안에 책만 나오잖아요? 그 책에 새겨진 그림도 작품 내용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집니다. 대부분 책 표지는 디자이너들이 작품을 잘 읽지 않거나(잘 모르는 채) 엉뚱하게 디자인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이 책은 디자인한 사람이(아니면 책 표지 디자인에 관여한 사람이) 분명 작품을 다 읽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coolcat329 2019-12-11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작가지만 저도 이상하게 끌리네요.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표지가 한 몫 제대로 하는듯 싶어요. 일단 사야겠어요.🤤

잠자냥 2019-12-12 09:23   좋아요 0 | URL
네 읽고 나면 아마 마음에 더 드실 거예요. ㅎㅎ
 
결혼, 죽음
에밀 졸라 지음, 이선주 옮김 / 정은문고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결혼과 출산율이 번번이 최저치를 갱신하고 있다. 오늘 본 기사에서도 서울 출산율이 역대 최저를 찍었다고 한다. 부부도 아이를 낳지 않는데, 결혼조차 하지 않으니 뭘 더 바라겠는가. 이 둘은 관련 없을 수가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비혼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죄악시하는 풍조 속에서는 더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모든 점을 헤아려봤을 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결혼해봤자 자신의 삶에 득이 될 게 없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게 아닐까.

사랑하는 두 사람이 오직 사랑만으로 결혼한다는 말처럼 허무맹랑한 소리도 없을 것이다. 결혼에는 많은 계산이, 돈이 오간다. 그래서 결혼도 비즈니스라고 하지 않던가. 비단 이런 풍조는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만은 아닌 것 같다. 저 19세기 사람 에밀 졸라가 살던 프랑스에서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졸라의 <결혼, 죽음>은 그 시대 결혼과 죽음에 얽힌 세태보고서와 같다. 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으로 나눠 그들이 결혼하게 되는 과정과 결혼식 당일,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짤막하게 스케치하고 있다. 그런데 매 이야기가 짧다고 그냥 가볍게 볼 수만은 없다. 그런 광경을 그려내는 붓을 든 이가 누구인가, 에밀 졸라가 아닌가. 정말 졸라, 날카롭다.

귀족의 결혼을 보자. 막심은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면서 앞으로 외교 쪽 업무로 나아갈 궁리를 한다. 그의 고모인 뷔시에르 후작부인은 아주 발이 넓은 노년 마님으로, 막심의 미래 설계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렇다면 결혼부터 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혼이야말로 한자리 해먹으려면 꼭 필요한 토대’라면서. 아, 이 얼마나 솔직한 말인가. 고모는 마당발을 이용해서 적당한 후보를 찾아 막심의 눈앞에 들이댄다. 막심은 묻는다. “금발이지요?” 그의 질문에 고모는 말한다. “아니 갈색일걸, 사실 나도 정확히 모르겠구나.” 뭐 어쨌든 그게 무슨 대수인가, 확실한 것은 신붓감이 열아홉 살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집안도 좋고 지참금도 어마어마한데, 금발이든 흑발이든 빨강머리든 무슨 상관이랴! 결혼하기까지 그들은 딱 다섯 번 만난다. 그동안 막심이 신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통통한 편이고 피부가 하얗고, 음악을 좋아하고 남자 향수를 싫어하는 듯했으며 클레르라는 이름의 죽은 친구가 있다는 것 정도이다. 그쯤이면 충분하다. 집안이 좋은데 뭐, 됐다. 마침내 그들은 결혼식을 올린다. 귀족이니까 주위 눈도 있으니 결혼식 때 불우 이웃 돕기 행사를 살짝 걸친다. 막심과 신부 앙리에트는 각자 천 프랑씩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한다. 열네 달 뒤 둘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것은……. 당신에 상상에 맡기겠다(궁금하면 책을 펼쳐보라. 아마 당신의 상상이 100% 맞을 것이다. 그만큼 결혼은 지리멸렬한 비즈니스가 아닌가).

귀족의 결혼이 사람들 이목을 중시하면서 교묘하게 꾸민 일종의 비즈니스였다면, 부르주아 계급의 그것은 한결 적나라하다. 법조계에서 공부하겠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 분야에서 최고로 꼽히는 학교 교육을 받게 한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 학교 출신이 최근 수지맞는 결혼을 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장래를 걱정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또 충고한다. “결혼을 하려무나. 집에 여자가 들어오면 빛도 나고 활기도 생기는 법이란다. 부잣집 딸로다가. 아내도 가격이 있으니……. 그래, 데비녀 씨 댁 딸이 괜찮겠구나. 대수공업자 집안인데 지참금이 백만 프랑이라지. 아마, 네게 딱 맞는 비즈니스겠구나.” 오, 이 솔직한 아버지여. 아내도 가격이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아버지여, 결혼이 비즈니스라고 당당히 말하는 아버지여. 그리하여 아들은 재산을 늘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결혼을 선택한다. ‘결혼식은 마치 아주 엄청난 자본을 좌우하는 사업 체결에 참관이라도 한 듯’ 치러진다.

부르주아의 결혼이 이럴진대, 상인 계층의 결혼은 더 장사에 가까워진다. 그들의 결혼은 ‘돈’을 위주로 흘러가고, 결혼 후의 삶도 돈을 모으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부부는 돈을 열심히 벌어서 그 돈으로 파리 서북쪽 조용한 구석에 스위스식 별장을 지어 생활하기를 꿈꾸며 살아간다. 오늘날 결혼하는 평범한 부부의 모습도 거의 이러할 것이다. 아파트 한 칸, 노후에는 교외에 집 한 채 얻기를 바라면서 평생 돈벌이에 집착하는 삶……. 19세기 프랑스인들도 다를 바 없었다. 졸라는 말한다. ‘이 상인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지라도, 분명한 점은 돈을 토대로 잘 짜인 솔직한 동업자’라고. 그런데 서로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이 두 부부는 결혼한 후로도 늘 동침한다.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다들 포복절도하리라…….

서민의 결혼은 돈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스물다섯 청년 발랑탕은 클레망스에게 반해서 쫓아다니다가 결국 결혼에 성공하는데, 그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이것이 사랑인지 단순한 욕정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졸라가 보기에 결혼이란 돈, 아니면 욕정의 해소 그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자리에 사랑이 끼어들 틈은 없다. 사랑이라는 포장이 있을 뿐. 이들의 결혼 후 삶은 비참하다. 가난한 살림에 아이 셋을 기르느라 클레망스의 금발은 누렇게 변하고 얼굴은 상한다. 발랑탕은 술에 절어 생활한다. 잦은 부부싸움과 울어대는 아이들, 남편의 구타 등등. 소란스럽고도 구차한 인생이 이어진다.

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의 결혼을 쭉 읽어가다 보면 졸라의 시선이 점점 연민으로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위와 명예, 돈, 권력을 가진 이들을 묘사할 때는 냉소로 가득 차 있는데, 그래도 돈 없는 약자들의 삶을 그릴 때는 거기에 그나마 안타까움 같은 것이 깃든다. 이런 졸라의 시선은 ‘죽음’을 다룬 이야기들에서 더 뚜렷해진다. ‘죽음’ 또한 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 농부로 나눠서 그려나간다. 귀족의 장례식장은 귀족의 결혼식처럼 허례허식으로 가득하다. 죽은 고인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다들 슬픔을 억지로 꾸며내고 있지만 그들 머릿속은 온통 딴 생각으로 가득하다. 한 노인에게 죽은 고인을 추모하는 말이 들려온다. “마음씨가 고왔으며 관대로움과 선량함이…….” 그 말을 듣던 노인은 턱을 조금 움직이며 중얼댄다. “그래 나도 그런 존재를 하나 알았었지....”라고. 노인에게 그런 존재는 누구였을까. 죽은 고인이었을까? 궁금하면 책을 펼쳐 보라. 졸라는 냉소 속에서 때때로 이런 유머러스함을 발휘한다.

부르주아의 죽음도 모두 돈과 연관된다. 상인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 두 계층을 바라보는 졸라의 시선은 조금 다르다. 계층이 낮아질수록 연민과 안타까움이 커져간다. 이런 시선은 서민의 죽음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모리소는 얼음 깨는 일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런데 이 추위 때문에 어린 아들이 심하게 병들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끔찍한 추위가 아들을 죽일 수 있다보니 얼음이 녹기를 바랐지만 그러면 그는 일자리를 잃게 된다. ‘일하러 갈 때는 허옇게 언 길을 보며 일거리가 있으니 안심’하지만 ‘드러누운 아이를 위해 태양이, 아니 미지근한 봄볕이라도 어서 나오기를 기원’하는 모순에 처한 것이다. ‘빈민에게는 온갖 종류의 날씨도 적’인 셈이다. 결국 얼음이 녹기 시작해 그는 해고당하고 만다. 일자리를 잃어 죽어가는 아이를 지켜 볼 불을 밝힐 양초조차 살 수 없다. 얼음도 녹았으니 아이는 살아나야 할 텐데, 그 간절한 바람은 덧없기만 하다. 아이가 떠난 뒤에야 도착한 구호품. ‘빈민 구제소는 항상 기차가 떠나버려야 도착한다면서’ 허탈하게 웃는 모리소를 지켜보노라면 가난한 이들에게 던져지는 삶의 무게로 인해 마음이 잔뜩 무거워진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결혼’은 이른바 ‘적령기’가 있어서 대부분 주인공들이 젊은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데, 그에 비해 ‘죽음’에서는 세상을 떠나는 이들의 나이가 다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에서는 한껏 냉소적이던 졸라가 ‘죽음’에서는 좀 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보여준다. 삶 자체가 버텨나가기 매우 어렵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책에서 ‘서민의 죽음’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한편, 마지막 3장에 실린 ‘어떤 사랑’은 사랑, 결혼, 죽음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런 단편들을 쓸 수 있었기에 졸라는 그 장대한 루공 마카르 총서를 써내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결혼, 죽음>은 졸라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의 단편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졸라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졸라 입문서, 또는 맛보기용으로 꽤 괜찮은 역할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행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가 아닐까? 공항에는 설렘이 있다. 만남이 있고 이별도 있다. 그러나 어디론가 떠나는 이들의 얼굴에는 그 무엇보다 설렘이 가득하다. 비행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삐 움직이는 걸음에도, 검색대 통과를 기다리느라 길게 늘어선 줄에도, 특별히 살 게 없어도 괜히 둘러보는 면세점에서도 많은 이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어딘가로 향하는 것일까? 가까운 곳이든 아주 먼 곳이든 그들은 곧 낯선 세계에 도착하리라.

많은 이들이 여행을, 그러니까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행위를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로는 낯섦과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클 것이다. 한곳에 오래 머무는 행위는 권태를 불러일으킨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어딘가 늘 한곳에만 머무르면 일상이 지리멸렬해진다. 그럴 때 인간은 떠난다. 물론, 인파가 몰리는 장소로 이동하는 것을 극히 꺼려해 여행을 싫어하는 이도 분명 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면 어디론가 이동했다가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일터로 출퇴근 했거나 학교에 가거나 산책을 다녀오거나 등등. 몇날 며칠 방안에만 콕 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창문을 열어 환기라도 한다. 공기의 순환, 그 이동을 통해 신선한 기운을 만난다. 이 또한 하나의 이동이고 움직임이다.

인간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흔히 ‘머무르는 상태’를 뜻하는 ‘안주한다’라는 말을 좋은 의미로는 쓰지 않는다. 현실에 안주하고, 현재에 안주하는 삶은 정체되었고, 더는 발전하거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상태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움직여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만나고, 받아들여서 변화를 꾀하고자 한다. <방랑자들>에는 그런 수많은 이들의 삶이 그려진다. 떠나고 돌아오고 여행지에서 길을 잃기도 하는 그런 사람들. 이 책은 여행자들을 위한 성경과도 같다. 아니 21세기의 베데커 여행서라고나 할까?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작품을 통해 모든 움직이는 것들, 어딘가로 향하고, 무엇인가를 향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라도 이동하는 존재들, ‘방랑자들’의 삶을 찬양한다. ‘몸을 흔들어, 움직여, 움직이라고, 그래야만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에겐 움직임을 지배할 능력이 없어. 우리의 몸은 움직일 때 비로소 신성하다’고 말한다.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정지하는 자는 곤충처럼 박제될 거야. 심장은 나무 바늘에 찔리고, 손과 발은 핀으로 뚫려서 문지방과 천장에 고정될 거야.’(391쪽)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왜 ‘방랑’을 ‘떠남’을 ‘이동’을 ‘여행’을 찬양할까? <방랑자들>에서는 죽어서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것, 유리병 속에 방부처리된 육체도 등장한다. 육체가 죽으면 우리는 종종 ‘영혼’은 어딘가에서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그러나 실체가 모호한 이 대상은 당혹스럽다. 이 작품에서 말하듯이 ‘인간의 진정한 권력은 인간의 육신에만 작용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육체를 다스리는 것은 삶과 죽음의 왕’(397쪽)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인간은 움직여야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 것, 심지어 죽음까지도 포함한다. ‘그는 정지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꼼짝도 하지 않는 것,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모든 것을 지배’(389쪽)한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392쪽).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면 그곳은 일상이 되어 매력은 점차 빛이 바랜다. 모든 ‘집과 대로, 공원, 정원 그리고 도로에는 누군가의 죽음이 스며’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동함으로써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새롭고 깨끗하고 순수하다고, 어떤 면에서는 불멸이라고까지 느끼게 된다’(460쪽) 이런 이동을 끊임없이 하다보면 언젠가는 여행의 가장 최상의 단계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된다. “내가 어디에 있든 중요치 않다.”(590쪽)고 말하게 되는 그런 단계. 그래서 다시 사람들은 방랑길에 오를 것이다. 죽음을 벗어나 새로 태어나기를 꿈꾸며. 그렇게 영원한 삶을 꿈꾸며……. <방랑자>들은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 변화를 꿈꾸는 인간의 삶을 예찬한다. 떠났다 돌아올 때 그는 조금은 새로 태어나 있을 것이기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11-27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여행자들을 위한 성경과도 같다니, 안읽어볼 수가 없겠네요.
주말에도 김포공항 갔다가 ‘아, 나는 공항이 진짜 너무 좋아 ㅠㅠ‘ 했는데, 저는 공항이 좋아서 여행이 좋은건지 여행이 좋아서 공항이 좋은건지 모르겠어요. 공항이 ‘왜‘좋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지 모르겠는데, 저는 공항에 취직하고 싶어요 ㅠㅠ 그러나 일터가 되면 싫어질까요?

잠자냥 2019-11-27 09:37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작가 자전적 이야기도 섞여 있는데, 작가가 여행을 꽤 좋아하는 사람 같아요. 공항 같은 곳에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좋을 것 같은 그런 책입니다. ㅎㅎ 물론 어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 내용이기도 해서 앞에서부터 읽으면 좋겠지만.... 음 아무 쪽이나 읽다 보면, 왠지 여행지에서 지도 보며 목적지 찾아가는 그런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해요. ㅎㅎ

공항 좋죠? 저도 공항 좋아해요. ㅋㅋㅋㅋ 인천 공항 가면 이미 거기 진입한 순간부터 여행지 온 것처럼 막 설레고 ㅋㅋㅋㅋㅋ 김포 공항도 요즘 리뉴얼 많이 해서 더 설레고 ㅋㅋㅋㅋㅋ 근데 전 공항에 취직하고 싶진 않아요. 일터 노노 ㅋㅋㅋㅋㅋㅋㅋㅋ 내 소중한 공항은 남겨둘래요.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고의 시간들>을 읽다가 잠이 들어 책을 떨어뜨린 적이 몇 번 있다. 감기약을 먹어 정신이 몽롱했던 때였다. 그때마다 애인은 “태고의 시간! 제목부터 잠이 오네. 잠이 와”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아니라고, 잠이 든 건 감기약 때문이라고 했다. 태고가 그 태고가 아니야, 아니, 그 태고는 맞는데, 폴란드의 한 마을 이름이야. 태고라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야. 1900년대 초부터 그 마을에서 태어나고 죽어간 사람들 이야기. 그 사이에 1~2차 세계대전도 있고, 폴란드 사회주의 과정도 있고. 그제야 애인은 재미있겠네 한다.


실은 나도 그랬다. <태고의 시간들>이라는 제목만으로는 이 책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올가 토카르추크, 그이가 지난달 노벨상을 받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전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태고의 시간’이라니, 왠지 하품이 밀려온다. 옛날 옛적에 말이지, 하면서 할머니가 태곳적 이야기라도 들려주면 금세 잠에 빠져버리듯이. 이 책의 처음 몇 쪽을 읽어도 이런 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태고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라고 시작되는 문장은 이어서 태고 마을의 곳곳을 묘사한다. 그런데 이 문장들은 성경 한 구절을 읽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단군신화를 읽는 것 같기도 하다. 계속 이러면 좀 곤란한데? 이런 마음이 들 때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게노베파의 시간’ ‘미시아의 천사의 시간’ ‘크워스카의 시간’ ‘나쁜 인간의 시간’...... 태고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시간이 저마다 펼쳐진다. 


게노베파의 시간과 크워스카의 시간을 읽을 때부터 나는 이 책에 매혹당했다. 게노베파도, 크워스카도, 미시아도 모두 여성이다. 태고 마을에 사는 남성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의 삶부터 그려나간다. 전쟁터로 남편을 보낸 뒤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여인,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사랑에 빠져버리는 여인,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뿐이라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황폐해진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 그러면서도 남자에게 “왜 내가 당신 밑에 누워야 하죠? 나는 당신과 동등한데.”라고 말하는 여인. 그런 그녀들이 낳은 자식들 미시아, 루타, 그리고 이지도르, 그들이 또 다른 삶을 일구어나가는 모습들. 그리고 그들과 얽히고설킨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 


그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이 세상에 태어나 목숨을 연명해간다.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인생이다. 그렇다고 처참할 정도로 불행한가? 딱히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두 번의 전쟁, 그로 말미암은 크고 작은 사건들에 휩쓸리기도 하고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아끼는 이들의 죽음을 목도하거나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전쟁터에 나간 게노베파의 남편 미하우도 살아 돌아오지 않는가. 그런데도 삶은 늘 고단하다. 쉽지 않다. 크워스카와 루타 모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보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지닌 이지도르의 삶도 고단하기 짝이 없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을 것만 같은 부유한 상속자 포피엘스키는 또 어떤가. 그는 서서히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해갈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살아간다.


그들 저마다의 세월을, 시간을 지켜보노라면 문득 내 시간을, 내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은 지금 어느 즈음인가? ‘경계를 넘어 절정에 도달’하고 결국 그 뒤 ‘아래를 향해, 즉 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과정에 있을 뿐이 아닐까. 그런데도 인간은 왜 태어나서 이토록 모질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지금 당당하게 어둠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어둠을 부정하고 그저 방의 불이 꺼진 것뿐이라 여기며 과거에 머물던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중인가.’ 하염없이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정녕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이토록 많은 이들의 ‘시간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삶이 허무하다는, 덧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생각으로 이들이 살고 사랑하고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감정이 격해져 눈물이 흘렀다. 어느 아침, 숙취에 시달리며 자신이 마흔 한 살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파베우의 생각을 마주했을 때였다. 열심히 살았고, 사랑했으며, 그토록 원했던 여인 미시아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아이들을 낳고, 좋은 지위까지 누리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런데도 숙취에 시달리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던 그는 삶이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하며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도 없고,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긍정적인 생각을 일깨우는 것’도 없다. ‘그저 끊임없는 투쟁과 채울 수 없는 야망, 이루지 못한 꿈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룬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 속에 울고 싶어지고 울음을 터뜨려보려 하지만, 오랫동안 울지 않았기에 우는 법조차 잊고 말았다. 우는 법을 잊은 그 대신 나는 울고 있었다. 


자신의 시간을 돌아봤을 때 이룬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 이루지 못한 꿈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처럼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그럴 때 인간은 과거와는 다른 미래의 시간을 꿈꾼다. 파베우 또한 마찬가지로 ‘미래 속에 생각을 던져 넣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억지로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긍정적인 생각도 곧 사라지고 끔찍한 슬픔만이 되돌아온다. 미래 역시 과거와 별다르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이 모든 것들, 교육과정과 승진, 펜션과 집 증축, 모든 계획과 활동 너머에는 궁극적으로 죽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에서 정오의 시각은 이미 지났음을.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은밀하게, 서서히,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땅거미가 내려앉으리라는 것’을 그는 그 아침의 숙취 속에 깨닫는다. 이처럼 참혹한 진실이 있을까.


<태고의 시간들>은 이렇듯 그 수많은 시간을 거쳐 무(無)로 돌아가는 모든 존재를 이야기한다. ‘파멸 그리고 혼돈, 파멸 그리고 혼돈’으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부단히도 살아가려 애쓰는 나약한 인간의 삶. 결국 그 지난한 과정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죽음을 앞둔 대부분의 인간은 미시아가 그러했듯이 ‘언어 능력, 삶의 환희, 생에 대한 호기심과 의욕을 전부’ 잃어버릴 수도 있다. ‘자신이 필멸의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틀림없이 공포’에 떨게 될지도 모른다. 죽음으로써 몸에서 영혼이 분리되고 두뇌 활동이 멈추게 되면 인간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 한 사람이 지녔던 고유한 특성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미시아의 ‘특별한 샐러드와 초콜릿 크림을 끼얹은 케이크와 생강 과자 또한 영원히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또한 ‘그녀의 생각과 말, 그녀가 직접 겪고 몸담았던 모든 일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은 또한 이지도르가 ‘사랑했던 장소들이 점차 흐릿해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들이 희미’해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감정도 사라진다. 조카가 생겼을 때의 벅차오르는 감동, 사랑하는 이가 떠났을 때의 끝없는 절망, 기쁨, 확신, 공포, 자부심, 그 밖의 수많은 다른 느낌들 그 모두가……. 나와 당신의 죽음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인간은 왜 오늘을 살아가야만 할까. 신조차 ‘세상을 창조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세상을 창조해 봐도 얻어지는 건 전혀 없다. 뭔가를 발전시키거나 확장할 수도 없으며,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저 헛된 일일뿐’이라고 생각한다. 신조차 이럴진대 나는 이 세상을 왜 살아내야만 하는 걸까. 게다가 악으로 넘쳐나는 듯한 세상을 개선한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며 ‘세상은 개선할 수도, 개악할 수도 없’고 그저 ‘지금의 상태로 유지될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에서 살아내고자 하는 인간들의 이 미약한 몸짓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인생처럼 평범하지만, 그 속에는 어둠과 슬픔이 깃들어 있다고 가족들은 생각했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숨을 수 있는 껍데기를 찾아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다. (345~346쪽)


신에게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신은 때로 ‘자신이 세상 속에 가두어 놓고, 시간의 굴레에 얽매어놓은 인간들처럼 죽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자신 말고도 절대 불변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질서로 인해 변화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모형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을 신은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조차 아우르는 그 질서 안에서 시간에 의해 흩어져버리는 순간적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시간의 너머에서 일제히,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신은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육체의 시간은 끝나지만 그 시간 너머의 또 다른 시간, 영원으로 향한다는 진실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그 영원의 존재는 신마저도 부러워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닐까.


‘신이 보고 계신다. 시간은 달아난다. 죽음이 쫓아온다. 영생이 기다린다’. 개개인의 시간은 언젠가 끝이 난다. 그리고 그 개인은 소멸해간다. 그러나 시간은 영원하다. 신조차 그 영원은 어찌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개인은 또 다른 개인이 되어 영속한다. 미시아의 커피 그라인더가 그의 딸의 손으로 이어지듯이. 나무가 보기에 인간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영원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죽음이라 부르는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꿈의 중단 상태일 뿐’이리라. 인간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진실. 그렇기에 불안한 인간과 동물의 삶. 그러나 그 시간 너머의 영원을 <태고의 시간들>은 묵직하게 전한다. 태고에서 태어나 다시 태고로 돌아가는 삶. 슬프지만 그렇기에 아름다운 진실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년도 훌쩍 지난 것 같다. 한지혜의 글이 담긴 ‘책’을 읽는 것은. 소설집 <안녕, 레나> 이후 처음이다. 글을 많이 쓰지 않는 작가인가, 첫 소설집을 좋게 읽었던 터라 그 다음이 궁금했었는데, 그 다음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러고는 내 기억에서 조금씩 희미해져 갔던 것 같다. 내가 한국 소설을 부지런히 찾아 읽는 편은 아니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가 몇 해 전이던가. 어느 신문 칼럼에서 꽤 괜찮은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던 기억이 난다. 글쓴이를 보니 한지혜였다. 어? 이 사람이 그 한지혜인가? 그랬다. 그녀였다. 어느 날 우연히 소식 끊어졌던 옛 친구, 굳이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소식은 궁금했던 옛 친구의 안부를 듣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후로 그이가 쓰는 칼럼을 이따금 찾아 읽었다.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그 느낌, 담백하고 따뜻하고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품고 있는. 그렇지만 누군가를 상처 주는 말과 글은 아닌 그런 글.

이 칼럼들은 책으로 엮어져서 나오면 괜찮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참 괜찮은 눈이 온다>라는 제목으로 얼마 전 세상에 선보였다. 책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한다. 프롤로그, 그러니까 ‘개천에 살았던 적이 있다’로 시작하는 그 글은 내가 한지혜의 글을 다시 읽게 됐던 계기가 된 바로 그 글이었다. 이 책에서도 첫 번째 글로 실려 있어서 왠지 기분이 묘했다. 반갑다고 손짓해주는 것 같았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좋다. 비유도 상징도 아닌, 실제 ‘개천’에서 살았다는 고백. 이제 그녀는 개천에 살지 않는다. ‘용이 되어서 나오지는 못했지만 용이 되지 못한 것도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 시절을 자라면서 그녀가 본 세상의 풍경이라고 말한다. 그이는 여전히 세상을 ‘그곳에서 배운 시선’으로 읽는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또한 자기만의 고유함일 것이라고.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개천, 서울 변두리, 단칸방, 철거촌 등 한지혜 그녀가 살아온 풍경, 그리고 그 풍경이 가르쳐준 세상을 보는 법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몸소 살고, 겪고, 버티고 때로는 벗어나고 싶었던 삶과 공간에 대한 기록이라 진실이 문장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요즘 미디어에서는 가난을 낭만화하고 또 어떤 부자들은 가난조차 ‘체험’하고 ‘경험’해 보는 하나의 놀이처럼 소비한다는데, 한지혜에게 그것은 삶 그 자체였다.

여섯이나 되는 가족들과 발도 뻗기 힘든 단칸방에서 살았던 기억, 골목에서 뛰놀던 기억, 이층집에서 자기만의 방을 꿈꾸던 기억, 그리고 그 가난하고 힘든 생활 속에서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책 속으로 도피하고, 책 속에서 다른 세계를 만난 기억…. 너무나도 가난해 지금의 부모는 친부모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에서 부자로 살고 있는 진짜 부모가 있을 것이며, 그들이 어느 날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꿈꾸던 기억까지. 한지혜의 유년 시절은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거나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로 다가온다. 그러나 작가는 그 가난하고 힘겨웠던 시절을 마냥 그리워하거나 낭만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그런 시기를 거쳐 자신이 한 사람으로 어떻게 성장했는지, 어떤 시선을 가진 작가가 되었는지 담담히 기록할 뿐이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동네에서 하나둘 집이 철거되는 현장을 지켜본다. 포클레인이 지나갈 때마다 벽이 흔들린다. 그런데 그녀는 그 처참한 공간에서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흔들리는 벽에 기대어 책을 읽다가 먼지 많은 바람을 쐬러 나가면 부서진 담장 사이로 전에 본 적 없는 꽃무더기가 보였다. 나는 그게 참 신기했다. 저 벽들은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꽃을 품고 있던 걸까. 보고 있자면 기분이 묘했다. 그 꽃이 내게 가르쳐주는 것이 벽속에나 꽃을 가두고 있는 인생에 대한 비관적인 상징인지, 모든 벽도 사실은 꽃을 품고 있다는 낭만적인 상징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서러운 기분이었다. (44쪽)


철거 현장. 부서진 담장 사이에서 꽃무더기를 볼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벽들을 바라보며 벽속에 꽃을 가두고 있는 인생에 대한 비관적인 상징일지, 아니면 모든 벽도 저마다 꽃을 품고 있다는 낭만적인 상징일지 그 둘 모두를 헤아릴 줄 아는 시선을 키워 온 사람. 그런 그가 작가로서 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기에 ‘빛과 어둠’이 모두 담긴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가난한 시절을 함께 겪은 가족 이야기도 자연스레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글을 읽다 보면 이이는 아버지를 참 좋아하는구나,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참 애틋하구나 싶어 부럽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담긴 글을 보면 낯설면서도 신기하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엄마에 대한 글이 많지 않아 엄마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나 싶었는데, 읽다 보면 엄마와 아픈 기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주 오래 전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 ‘자전거 타는 여자’가 결국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였겠구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아버지를 버리고 엄마가 도망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여자는 아마 한지혜 그 자신이었으리라. 이렇게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오래 전, 조금 알게 됐던 한 친구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 더 깊숙하게 그를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책이었다. 내게는.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읽다가 급기야 눈물을 훔치게 된 것은 뜻밖에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분에서였다. 그이가 문학상 심사 위원 자격으로 수많은 작품을 읽었던 과정이 담긴 어느 구절을 읽을 때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도 놀랍게도 한지혜는 자기에게 주어진 작품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고 한다. 아주 형편없는 작품이 있을 수 있고 눈에 띄는 작품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모든 작품을 빠짐없이 읽는다.


사람도 그렇고 사물도 그렇고 작품도 그렇고 좋고 빼어난 것은 흔하지 않다. 신인의 것이든 기성의 것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원고지 백 장, 천 장을 채운다는 건 도깨비 방망이로 금 만들듯 맘만 먹으면 뚝딱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천장을 쓰고 버려야 백 장의 소설이 나오고, 만 장을 쓰고 버려야 천 장이 소설이 나오는 건,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은 누구나 아는 법칙이다. 그 시간과 노력에 헌신한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그 예의는 단 하나, 그들의 수고가 담긴 작품을 끝까지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읽다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작품 같은데, 보석 같은 문장이 한두 문장쯤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런 문장을 만나는 순간이 나는 너무 좋다. 그런 문장은 마치 처음부터 끝까지 형편없는 삶은 없다는 증명 같기도 하고, 누구에게나 빛나는 한 가지는 있다는 외침 같기도 하다. 겨우 하나의 문장으로 당선의 기쁨을 누릴 수는 없는 법이니 그 문장의 주인을 만나면 혼자 인사를 한다. 괜찮아, 네가 있으니 다음도 있을 거야. (....) 나 자신이 성공보다는 실패를 많이 겪은 삶이기 때문일까. 당선자보다는 낙선자에게 늘 마음이 쓰인다. (48~49쪽)


이 구절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조금 눈물이 나더니 ‘괜찮다’는 문장을 읽을 때쯤엔 펑펑 울고 있었다. 슬럼프라고 해야 하나. 올봄, 어딘가에 장편 소설 원고 하나를 보내놓고 여름쯤 결과를 알고는 기운이 많이 빠져 있었다. 회사 다니면서 몇 년 틈틈이 쓴, 첫 장편이라 내게는 의미가 큰 그런 원고였다. 끝까지 읽기는 했을까? 제목이 별로였나? 첫 문장 첫 문장 하는데, 내 첫 문장은 그렇게 강렬하지 않지.... 그리고 또 뭐가 문제일까? 끝까지 읽긴 읽었을까? 아마 대충 보고 안 읽었을 거야. 뭐 이런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그 뒤로 그 작품은 이제 잊고 새로운 걸 쓰자고 몇 번이고 마음을 먹었지만 책상 앞에 다시 앉기가 쉬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슬럼프에 빠져 있던 나에게 저 문장은 폭풍처럼 다가왔다. 내가 쓴 원고지 800여 매. 아마 그중에는 보석 같은 문장 한두 개쯤은 있을 거라고, 그런 문장이 ‘마치 처음부터 끝까지 형편없는 삶은 없다는 증명’과 같을 거라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누구에게나 빛나는 한 가지는 있다’고 외치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그렇게 내게 속삭이는 위로 같았다. 이렇게 마음 깊숙이 다가오는 위로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내가 고민했던 첫 문장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이 또한 소설을 공부할 때 첫 문장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그러나 한지혜는 말한다. ‘첫 문장과 소설의 완성도는 무관’하다고. ‘시작은 창대하나 나중은 미약한 소설도 있고, 시작은 초라한데 결말에 울림이 있는 소설도 있고, 시작도 결말도 딱히 특색은 없으나 보석 같은 몇 개의 문장을 품고 있는 소설도 있다.’고…. 그래 내가 쓴 그 소설도 누군가의 마음을 완벽하게 훔칠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보석 같은 몇 개의 문장이나 그런 장면 한 두 개쯤은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다음’이 있을 거라고.

벽이 품고 있는 꽃 무더기, 괜찮은 문장 한 두 개쯤은 있을 것 같아서, 아니 원고지 백 장, 천 장을 채운 어떤 이들의 노력을 헤아리기 때문에 공모전에 투고한 모든 원고를 빠짐없이 읽고, 당선자보다는 낙선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 한지혜. 그이는 어쩌면 개천에서 자랐기에, 1등이 아닌 2등이라 신춘문예에 당선될 수 있었던 전력이 있었기에, 선택받은 존재보다 그렇지 못한 존재에 한 번 더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분꽃을 보며 ‘꽃이 핀다고 모두 열매를 맺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함을 느끼기도 한다. 영 활짝 피지 않아 모자란 꽃 취급을 했던 분꽃은 알고 보니 밤에 피는 꽃이었다. ‘누가 뭐라 하든 제가 피어야 할 시간에 맞춰 부지런히 피고 지는’ 분꽃- 요즘 통 글을 쓰지 못하고 있던 내게 이 말은 위로이자 따끔한 충고로 다가온다. 누가 뭐라 하든 피어야 할 시간에 부지런히 피어야지! 하는 그런 생각…. 이처럼 주변에서 선택받고 화려한 조명을 받는 존재들보다는 꽃을 피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분꽃 같은 존재에 더 애정을 지닌 작가의 이 다정한 위로는 요즘의 나처럼 삶이 버겁고 좀 낙담한 이들의 마음에 분명 포근한 함박눈처럼 스며들 것이다. 함박함박 떨어지던 눈이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말하는 듯했다던 작가의 이야기처럼 이 책은 실패로 침울했던 내게 ‘괜찮다고’ 속삭이며 마음에 내려준 함박눈과 같았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케이 2019-11-05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읽고 저도 괜히 마음이 찡하네요.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좌절치 말고 꾸준히 쓰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요. 비록 출판되지 않는 글이라 해도 저 같은 독자에게는 큰 울림이 될 때도 많으니까요. 잠자냥님 언제나 응원합니다.
P.S 분꽃은 맨드라미, 채송화와 더불어 제 어린 시절 추억 때문에 제일 좋아하는 꽃 중 하나예요. 너무 신통방통하게 해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예쁘게 피는 꽃.

잠자냥 2019-11-05 17:50   좋아요 0 | URL
넵! 이렇게 케이 님처럼 제 글 읽어주시고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그래도 씁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전 분꽃이 해질 무렵에 피는 줄 이제야 알았어요. ^^;;

다락방 2019-11-05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의 글쓰기를 가만가만 응원합니다.

잠자냥 2019-11-05 18:00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2019-11-12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12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jijinbb 2019-11-15 0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치 한지혜 작가의 책을 읽은 듯한 기분입니다.
읽어 본적 없지만...

내 맘에도 괜찮다고 함박눈이 내린 거 같아요.

잠자냥 2019-11-15 09:38   좋아요 0 | URL
과찬 감사합니다. 이 책 한번쯤 읽어보세요.
더 많은 위로와 공감을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