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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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훌쩍 지난 것 같다. 한지혜의 글이 담긴 ‘책’을 읽는 것은. 소설집 <안녕, 레나> 이후 처음이다. 글을 많이 쓰지 않는 작가인가, 첫 소설집을 좋게 읽었던 터라 그 다음이 궁금했었는데, 그 다음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러고는 내 기억에서 조금씩 희미해져 갔던 것 같다. 내가 한국 소설을 부지런히 찾아 읽는 편은 아니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가 몇 해 전이던가. 어느 신문 칼럼에서 꽤 괜찮은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던 기억이 난다. 글쓴이를 보니 한지혜였다. 어? 이 사람이 그 한지혜인가? 그랬다. 그녀였다. 어느 날 우연히 소식 끊어졌던 옛 친구, 굳이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소식은 궁금했던 옛 친구의 안부를 듣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후로 그이가 쓰는 칼럼을 이따금 찾아 읽었다.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그 느낌, 담백하고 따뜻하고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품고 있는. 그렇지만 누군가를 상처 주는 말과 글은 아닌 그런 글.

이 칼럼들은 책으로 엮어져서 나오면 괜찮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참 괜찮은 눈이 온다>라는 제목으로 얼마 전 세상에 선보였다. 책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한다. 프롤로그, 그러니까 ‘개천에 살았던 적이 있다’로 시작하는 그 글은 내가 한지혜의 글을 다시 읽게 됐던 계기가 된 바로 그 글이었다. 이 책에서도 첫 번째 글로 실려 있어서 왠지 기분이 묘했다. 반갑다고 손짓해주는 것 같았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좋다. 비유도 상징도 아닌, 실제 ‘개천’에서 살았다는 고백. 이제 그녀는 개천에 살지 않는다. ‘용이 되어서 나오지는 못했지만 용이 되지 못한 것도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 시절을 자라면서 그녀가 본 세상의 풍경이라고 말한다. 그이는 여전히 세상을 ‘그곳에서 배운 시선’으로 읽는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또한 자기만의 고유함일 것이라고.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개천, 서울 변두리, 단칸방, 철거촌 등 한지혜 그녀가 살아온 풍경, 그리고 그 풍경이 가르쳐준 세상을 보는 법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몸소 살고, 겪고, 버티고 때로는 벗어나고 싶었던 삶과 공간에 대한 기록이라 진실이 문장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요즘 미디어에서는 가난을 낭만화하고 또 어떤 부자들은 가난조차 ‘체험’하고 ‘경험’해 보는 하나의 놀이처럼 소비한다는데, 한지혜에게 그것은 삶 그 자체였다.

여섯이나 되는 가족들과 발도 뻗기 힘든 단칸방에서 살았던 기억, 골목에서 뛰놀던 기억, 이층집에서 자기만의 방을 꿈꾸던 기억, 그리고 그 가난하고 힘든 생활 속에서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책 속으로 도피하고, 책 속에서 다른 세계를 만난 기억…. 너무나도 가난해 지금의 부모는 친부모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에서 부자로 살고 있는 진짜 부모가 있을 것이며, 그들이 어느 날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꿈꾸던 기억까지. 한지혜의 유년 시절은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거나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로 다가온다. 그러나 작가는 그 가난하고 힘겨웠던 시절을 마냥 그리워하거나 낭만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그런 시기를 거쳐 자신이 한 사람으로 어떻게 성장했는지, 어떤 시선을 가진 작가가 되었는지 담담히 기록할 뿐이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동네에서 하나둘 집이 철거되는 현장을 지켜본다. 포클레인이 지나갈 때마다 벽이 흔들린다. 그런데 그녀는 그 처참한 공간에서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흔들리는 벽에 기대어 책을 읽다가 먼지 많은 바람을 쐬러 나가면 부서진 담장 사이로 전에 본 적 없는 꽃무더기가 보였다. 나는 그게 참 신기했다. 저 벽들은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꽃을 품고 있던 걸까. 보고 있자면 기분이 묘했다. 그 꽃이 내게 가르쳐주는 것이 벽속에나 꽃을 가두고 있는 인생에 대한 비관적인 상징인지, 모든 벽도 사실은 꽃을 품고 있다는 낭만적인 상징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서러운 기분이었다. (44쪽)


철거 현장. 부서진 담장 사이에서 꽃무더기를 볼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벽들을 바라보며 벽속에 꽃을 가두고 있는 인생에 대한 비관적인 상징일지, 아니면 모든 벽도 저마다 꽃을 품고 있다는 낭만적인 상징일지 그 둘 모두를 헤아릴 줄 아는 시선을 키워 온 사람. 그런 그가 작가로서 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기에 ‘빛과 어둠’이 모두 담긴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가난한 시절을 함께 겪은 가족 이야기도 자연스레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글을 읽다 보면 이이는 아버지를 참 좋아하는구나,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참 애틋하구나 싶어 부럽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담긴 글을 보면 낯설면서도 신기하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엄마에 대한 글이 많지 않아 엄마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나 싶었는데, 읽다 보면 엄마와 아픈 기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주 오래 전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 ‘자전거 타는 여자’가 결국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였겠구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아버지를 버리고 엄마가 도망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여자는 아마 한지혜 그 자신이었으리라. 이렇게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오래 전, 조금 알게 됐던 한 친구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 더 깊숙하게 그를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책이었다. 내게는.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읽다가 급기야 눈물을 훔치게 된 것은 뜻밖에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분에서였다. 그이가 문학상 심사 위원 자격으로 수많은 작품을 읽었던 과정이 담긴 어느 구절을 읽을 때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도 놀랍게도 한지혜는 자기에게 주어진 작품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고 한다. 아주 형편없는 작품이 있을 수 있고 눈에 띄는 작품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모든 작품을 빠짐없이 읽는다.


사람도 그렇고 사물도 그렇고 작품도 그렇고 좋고 빼어난 것은 흔하지 않다. 신인의 것이든 기성의 것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원고지 백 장, 천 장을 채운다는 건 도깨비 방망이로 금 만들듯 맘만 먹으면 뚝딱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천장을 쓰고 버려야 백 장의 소설이 나오고, 만 장을 쓰고 버려야 천 장이 소설이 나오는 건,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은 누구나 아는 법칙이다. 그 시간과 노력에 헌신한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그 예의는 단 하나, 그들의 수고가 담긴 작품을 끝까지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읽다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작품 같은데, 보석 같은 문장이 한두 문장쯤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런 문장을 만나는 순간이 나는 너무 좋다. 그런 문장은 마치 처음부터 끝까지 형편없는 삶은 없다는 증명 같기도 하고, 누구에게나 빛나는 한 가지는 있다는 외침 같기도 하다. 겨우 하나의 문장으로 당선의 기쁨을 누릴 수는 없는 법이니 그 문장의 주인을 만나면 혼자 인사를 한다. 괜찮아, 네가 있으니 다음도 있을 거야. (....) 나 자신이 성공보다는 실패를 많이 겪은 삶이기 때문일까. 당선자보다는 낙선자에게 늘 마음이 쓰인다. (48~49쪽)


이 구절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조금 눈물이 나더니 ‘괜찮다’는 문장을 읽을 때쯤엔 펑펑 울고 있었다. 슬럼프라고 해야 하나. 올봄, 어딘가에 장편 소설 원고 하나를 보내놓고 여름쯤 결과를 알고는 기운이 많이 빠져 있었다. 회사 다니면서 몇 년 틈틈이 쓴, 첫 장편이라 내게는 의미가 큰 그런 원고였다. 끝까지 읽기는 했을까? 제목이 별로였나? 첫 문장 첫 문장 하는데, 내 첫 문장은 그렇게 강렬하지 않지.... 그리고 또 뭐가 문제일까? 끝까지 읽긴 읽었을까? 아마 대충 보고 안 읽었을 거야. 뭐 이런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그 뒤로 그 작품은 이제 잊고 새로운 걸 쓰자고 몇 번이고 마음을 먹었지만 책상 앞에 다시 앉기가 쉬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슬럼프에 빠져 있던 나에게 저 문장은 폭풍처럼 다가왔다. 내가 쓴 원고지 800여 매. 아마 그중에는 보석 같은 문장 한두 개쯤은 있을 거라고, 그런 문장이 ‘마치 처음부터 끝까지 형편없는 삶은 없다는 증명’과 같을 거라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누구에게나 빛나는 한 가지는 있다’고 외치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그렇게 내게 속삭이는 위로 같았다. 이렇게 마음 깊숙이 다가오는 위로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내가 고민했던 첫 문장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이 또한 소설을 공부할 때 첫 문장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그러나 한지혜는 말한다. ‘첫 문장과 소설의 완성도는 무관’하다고. ‘시작은 창대하나 나중은 미약한 소설도 있고, 시작은 초라한데 결말에 울림이 있는 소설도 있고, 시작도 결말도 딱히 특색은 없으나 보석 같은 몇 개의 문장을 품고 있는 소설도 있다.’고…. 그래 내가 쓴 그 소설도 누군가의 마음을 완벽하게 훔칠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보석 같은 몇 개의 문장이나 그런 장면 한 두 개쯤은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다음’이 있을 거라고.

벽이 품고 있는 꽃 무더기, 괜찮은 문장 한 두 개쯤은 있을 것 같아서, 아니 원고지 백 장, 천 장을 채운 어떤 이들의 노력을 헤아리기 때문에 공모전에 투고한 모든 원고를 빠짐없이 읽고, 당선자보다는 낙선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 한지혜. 그이는 어쩌면 개천에서 자랐기에, 1등이 아닌 2등이라 신춘문예에 당선될 수 있었던 전력이 있었기에, 선택받은 존재보다 그렇지 못한 존재에 한 번 더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분꽃을 보며 ‘꽃이 핀다고 모두 열매를 맺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함을 느끼기도 한다. 영 활짝 피지 않아 모자란 꽃 취급을 했던 분꽃은 알고 보니 밤에 피는 꽃이었다. ‘누가 뭐라 하든 제가 피어야 할 시간에 맞춰 부지런히 피고 지는’ 분꽃- 요즘 통 글을 쓰지 못하고 있던 내게 이 말은 위로이자 따끔한 충고로 다가온다. 누가 뭐라 하든 피어야 할 시간에 부지런히 피어야지! 하는 그런 생각…. 이처럼 주변에서 선택받고 화려한 조명을 받는 존재들보다는 꽃을 피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분꽃 같은 존재에 더 애정을 지닌 작가의 이 다정한 위로는 요즘의 나처럼 삶이 버겁고 좀 낙담한 이들의 마음에 분명 포근한 함박눈처럼 스며들 것이다. 함박함박 떨어지던 눈이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말하는 듯했다던 작가의 이야기처럼 이 책은 실패로 침울했던 내게 ‘괜찮다고’ 속삭이며 마음에 내려준 함박눈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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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11-05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읽고 저도 괜히 마음이 찡하네요.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좌절치 말고 꾸준히 쓰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요. 비록 출판되지 않는 글이라 해도 저 같은 독자에게는 큰 울림이 될 때도 많으니까요. 잠자냥님 언제나 응원합니다.
P.S 분꽃은 맨드라미, 채송화와 더불어 제 어린 시절 추억 때문에 제일 좋아하는 꽃 중 하나예요. 너무 신통방통하게 해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예쁘게 피는 꽃.

잠자냥 2019-11-05 17:50   좋아요 0 | URL
넵! 이렇게 케이 님처럼 제 글 읽어주시고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그래도 씁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전 분꽃이 해질 무렵에 피는 줄 이제야 알았어요. ^^;;

다락방 2019-11-05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의 글쓰기를 가만가만 응원합니다.

잠자냥 2019-11-05 18:00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2019-11-12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12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jijinbb 2019-11-15 0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치 한지혜 작가의 책을 읽은 듯한 기분입니다.
읽어 본적 없지만...

내 맘에도 괜찮다고 함박눈이 내린 거 같아요.

잠자냥 2019-11-15 09:38   좋아요 0 | URL
과찬 감사합니다. 이 책 한번쯤 읽어보세요.
더 많은 위로와 공감을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