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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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을 읽다가 잠이 들어 책을 떨어뜨린 적이 몇 번 있다. 감기약을 먹어 정신이 몽롱했던 때였다. 그때마다 애인은 “태고의 시간! 제목부터 잠이 오네. 잠이 와”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아니라고, 잠이 든 건 감기약 때문이라고 했다. 태고가 그 태고가 아니야, 아니, 그 태고는 맞는데, 폴란드의 한 마을 이름이야. 태고라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야. 1900년대 초부터 그 마을에서 태어나고 죽어간 사람들 이야기. 그 사이에 1~2차 세계대전도 있고, 폴란드 사회주의 과정도 있고. 그제야 애인은 재미있겠네 한다.


실은 나도 그랬다. <태고의 시간들>이라는 제목만으로는 이 책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올가 토카르추크, 그이가 지난달 노벨상을 받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전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태고의 시간’이라니, 왠지 하품이 밀려온다. 옛날 옛적에 말이지, 하면서 할머니가 태곳적 이야기라도 들려주면 금세 잠에 빠져버리듯이. 이 책의 처음 몇 쪽을 읽어도 이런 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태고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라고 시작되는 문장은 이어서 태고 마을의 곳곳을 묘사한다. 그런데 이 문장들은 성경 한 구절을 읽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단군신화를 읽는 것 같기도 하다. 계속 이러면 좀 곤란한데? 이런 마음이 들 때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게노베파의 시간’ ‘미시아의 천사의 시간’ ‘크워스카의 시간’ ‘나쁜 인간의 시간’...... 태고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시간이 저마다 펼쳐진다. 


게노베파의 시간과 크워스카의 시간을 읽을 때부터 나는 이 책에 매혹당했다. 게노베파도, 크워스카도, 미시아도 모두 여성이다. 태고 마을에 사는 남성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의 삶부터 그려나간다. 전쟁터로 남편을 보낸 뒤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여인,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사랑에 빠져버리는 여인,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뿐이라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황폐해진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 그러면서도 남자에게 “왜 내가 당신 밑에 누워야 하죠? 나는 당신과 동등한데.”라고 말하는 여인. 그런 그녀들이 낳은 자식들 미시아, 루타, 그리고 이지도르, 그들이 또 다른 삶을 일구어나가는 모습들. 그리고 그들과 얽히고설킨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 


그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이 세상에 태어나 목숨을 연명해간다.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인생이다. 그렇다고 처참할 정도로 불행한가? 딱히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두 번의 전쟁, 그로 말미암은 크고 작은 사건들에 휩쓸리기도 하고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아끼는 이들의 죽음을 목도하거나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전쟁터에 나간 게노베파의 남편 미하우도 살아 돌아오지 않는가. 그런데도 삶은 늘 고단하다. 쉽지 않다. 크워스카와 루타 모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보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지닌 이지도르의 삶도 고단하기 짝이 없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을 것만 같은 부유한 상속자 포피엘스키는 또 어떤가. 그는 서서히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해갈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살아간다.


그들 저마다의 세월을, 시간을 지켜보노라면 문득 내 시간을, 내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은 지금 어느 즈음인가? ‘경계를 넘어 절정에 도달’하고 결국 그 뒤 ‘아래를 향해, 즉 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과정에 있을 뿐이 아닐까. 그런데도 인간은 왜 태어나서 이토록 모질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지금 당당하게 어둠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어둠을 부정하고 그저 방의 불이 꺼진 것뿐이라 여기며 과거에 머물던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중인가.’ 하염없이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정녕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이토록 많은 이들의 ‘시간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삶이 허무하다는, 덧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생각으로 이들이 살고 사랑하고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감정이 격해져 눈물이 흘렀다. 어느 아침, 숙취에 시달리며 자신이 마흔 한 살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파베우의 생각을 마주했을 때였다. 열심히 살았고, 사랑했으며, 그토록 원했던 여인 미시아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아이들을 낳고, 좋은 지위까지 누리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런데도 숙취에 시달리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던 그는 삶이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하며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도 없고,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긍정적인 생각을 일깨우는 것’도 없다. ‘그저 끊임없는 투쟁과 채울 수 없는 야망, 이루지 못한 꿈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룬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 속에 울고 싶어지고 울음을 터뜨려보려 하지만, 오랫동안 울지 않았기에 우는 법조차 잊고 말았다. 우는 법을 잊은 그 대신 나는 울고 있었다. 


자신의 시간을 돌아봤을 때 이룬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 이루지 못한 꿈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처럼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그럴 때 인간은 과거와는 다른 미래의 시간을 꿈꾼다. 파베우 또한 마찬가지로 ‘미래 속에 생각을 던져 넣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억지로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긍정적인 생각도 곧 사라지고 끔찍한 슬픔만이 되돌아온다. 미래 역시 과거와 별다르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이 모든 것들, 교육과정과 승진, 펜션과 집 증축, 모든 계획과 활동 너머에는 궁극적으로 죽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에서 정오의 시각은 이미 지났음을.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은밀하게, 서서히,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땅거미가 내려앉으리라는 것’을 그는 그 아침의 숙취 속에 깨닫는다. 이처럼 참혹한 진실이 있을까.


<태고의 시간들>은 이렇듯 그 수많은 시간을 거쳐 무(無)로 돌아가는 모든 존재를 이야기한다. ‘파멸 그리고 혼돈, 파멸 그리고 혼돈’으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부단히도 살아가려 애쓰는 나약한 인간의 삶. 결국 그 지난한 과정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죽음을 앞둔 대부분의 인간은 미시아가 그러했듯이 ‘언어 능력, 삶의 환희, 생에 대한 호기심과 의욕을 전부’ 잃어버릴 수도 있다. ‘자신이 필멸의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틀림없이 공포’에 떨게 될지도 모른다. 죽음으로써 몸에서 영혼이 분리되고 두뇌 활동이 멈추게 되면 인간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 한 사람이 지녔던 고유한 특성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미시아의 ‘특별한 샐러드와 초콜릿 크림을 끼얹은 케이크와 생강 과자 또한 영원히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또한 ‘그녀의 생각과 말, 그녀가 직접 겪고 몸담았던 모든 일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은 또한 이지도르가 ‘사랑했던 장소들이 점차 흐릿해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들이 희미’해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감정도 사라진다. 조카가 생겼을 때의 벅차오르는 감동, 사랑하는 이가 떠났을 때의 끝없는 절망, 기쁨, 확신, 공포, 자부심, 그 밖의 수많은 다른 느낌들 그 모두가……. 나와 당신의 죽음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인간은 왜 오늘을 살아가야만 할까. 신조차 ‘세상을 창조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세상을 창조해 봐도 얻어지는 건 전혀 없다. 뭔가를 발전시키거나 확장할 수도 없으며,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저 헛된 일일뿐’이라고 생각한다. 신조차 이럴진대 나는 이 세상을 왜 살아내야만 하는 걸까. 게다가 악으로 넘쳐나는 듯한 세상을 개선한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며 ‘세상은 개선할 수도, 개악할 수도 없’고 그저 ‘지금의 상태로 유지될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에서 살아내고자 하는 인간들의 이 미약한 몸짓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인생처럼 평범하지만, 그 속에는 어둠과 슬픔이 깃들어 있다고 가족들은 생각했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숨을 수 있는 껍데기를 찾아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다. (345~346쪽)


신에게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신은 때로 ‘자신이 세상 속에 가두어 놓고, 시간의 굴레에 얽매어놓은 인간들처럼 죽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자신 말고도 절대 불변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질서로 인해 변화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모형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을 신은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조차 아우르는 그 질서 안에서 시간에 의해 흩어져버리는 순간적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시간의 너머에서 일제히,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신은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육체의 시간은 끝나지만 그 시간 너머의 또 다른 시간, 영원으로 향한다는 진실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그 영원의 존재는 신마저도 부러워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닐까.


‘신이 보고 계신다. 시간은 달아난다. 죽음이 쫓아온다. 영생이 기다린다’. 개개인의 시간은 언젠가 끝이 난다. 그리고 그 개인은 소멸해간다. 그러나 시간은 영원하다. 신조차 그 영원은 어찌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개인은 또 다른 개인이 되어 영속한다. 미시아의 커피 그라인더가 그의 딸의 손으로 이어지듯이. 나무가 보기에 인간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영원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죽음이라 부르는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꿈의 중단 상태일 뿐’이리라. 인간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진실. 그렇기에 불안한 인간과 동물의 삶. 그러나 그 시간 너머의 영원을 <태고의 시간들>은 묵직하게 전한다. 태고에서 태어나 다시 태고로 돌아가는 삶. 슬프지만 그렇기에 아름다운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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