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삶
실비 제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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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꼭꼭 씹으면서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다 읽고 난 다음에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게 되는 책이 있다. 실비 제르맹의 <숨겨진 삶>이 그랬다. 나는 이 작가를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책을 덮고는 그이의 다른 책들도 찾아본다. 또 다른 작품, 그의 다른 세계가 궁금해지는 사람,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읽은 것은 행운이다.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다.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서 더는 새롭지도 신기하지도 않은 이 말. 이곳에서의 나비 날갯짓이 저 먼 곳에서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이 말은, 일반적으로 아주 작은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숨겨진 삶>에는 바로 그런 이야기들이 그려진다.



벼룩 한 마리가 흑사병이나 티푸스를 퍼뜨리고말고,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고, 재채기 한 번으로 산사태가 날 수도 있지. 복권 한 장이 사랑을 파괴하고, 말 한마디가 무사태평한 기쁨과 신뢰를 단번에 사라지게 하고, 한순간의 부주의가 파리채로 파리 잡듯 한 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지. (40쪽)


인용 문장에 ‘복권 한 장이 사랑을 파괴’한다는 말이 보인다. 실제로 온라인 서점의 이 책 소개 내용을 보면 ‘복권’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빈’과 그녀의 남편 ‘조르주’ 사이에는 복권으로 얽힌 기막힌 사연이 숨겨 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은 이들에게 만일 <숨겨진 삶> 이 작품이 복권과 얽힌, 그로 말미암아 파괴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복권은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복권이라는 날개짓은 또다른 소소한 날개짓들에 비하면 그리 큰 사건도 되지 못한다.

작품은 어느 을씨년스러운 12월 강가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한 여인이 강변을 거닐고 있다. 그런데 그 몸짓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몸놀림도 예사롭지 않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둥거린다. 여자의 몸에는 불안이 잔뜩 스며있다. 이 을씨년스러운 날씨, 이 시간에 여자 홀로, 왜 강변을 저리 허둥대며 거닐고 있을까? 여자는 불안으로 곧 쓰러질 것만 같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 백화점에서 산타클로스 차림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피에르’가 바로 그다. 여자가 위험하다고 느낀 그는 허겁지겁 달려가 여자, 그러니까 ‘사빈’을 부르고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웃지 말라’고 외친다.

피에르는 사빈이 품속에 안고 있던 것, 그러니까 아이가 틀림없다고 생각한 ‘그것’을 가리키면서 딸인지 아들인지를 묻는다. 그런데 사빈은 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라고 말한다. 피에르는 여자가 아이를 품에 안고 강가로 달려갔고, 무언가 나쁜 일, 그러니까 아이를 안은 채 강으로 뛰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순간 “웃지 말라”고 말했을까? 사빈이 품에 숨기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 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라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이들에게 줄 인형일까? 아무튼 피에르는 자신이 걱정했던 것처럼 아이를 안은 채 자살할 생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순순히 사빈을 보내준다.

그러나 독자들은 사빈과 피에르가 이렇게 우연히, 기이하게 만났고, 별일 없이 헤어지기는 하지만 곧 만날 운명임을 눈치채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 그 사이 사빈, 서른 초반이지만, 열일곱이라는 아주 이른 나이에 일찍 결혼한 탓에 남편 조르주와의 사이에서 아이 넷을 둔 이 여인의 사연이 잠시 소개된다. 복권에 얽힌, 그리고 그 때문에 숨길 수밖에 없는 사빈의 사연과, 복권으로 드러난 조르주의 숨겨진 사연, 그러나 끝끝내 사빈은 알지 못하고, 이 책을 읽는 이들만 알게 되는 그 사연까지 그 모두가 스케치하듯 짧지만 강렬하게 지나간다.

사빈과의 그 짧은 인연으로 피에르는 곧 사빈과 함께 일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사빈의 가족, 그녀의 네 아이들과 가까워지고 가족처럼 지내게 된다. 그러나 이 관계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분명 있다. 사빈의 시아버지인 ‘샤를람’은 근본도 모르겠는, 어디선가 굴러먹다 온 기생충 같은 피에르가 눈엣가시와도 같다. 틀림없이 며느리인 사빈과도 그렇고 그런 관계일 것이라는 추측 아래, 자신의 손자들에게 피에르에 대한 나쁜 인상을 심어주려고 안달이다. 샤를람의 의도는 어느 정도는 성공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심하게 실패하기도 한다.

‘피에르 제브뢰즈’- 일정한 직업 없이 재주껏 생계를 꾸려나가고 거처를 자주 옮기며, 자신의 과거를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이 남자. 호적상 이름은 ‘에프렘’으로 ‘피에르’라는 이름은 가운데 이름에 지나지 않는데 자신을 피에르라고 불러달라는 이 남자. 어딘지 어두운 면모도 보이지만 한없이 선량하고 충직해서 절대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못할 것 같은 이 남자. 그런데 이 남자에게는 과연 무슨 사연이 있을까. 사빈에게 그날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가서 ‘웃지 말라’고 말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내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숨겨진 삶’이 드러날 때는 먹먹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피에르의 ‘숨겨진 삶’만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사빈에게도 속편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녀의 딸 ‘마리’에게도, 사빈 가족이 ‘왕고모’라고 부르는 ‘에디트’에게도, 그리고 또 다른 여인 ‘셀레스트’에게도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모두에게 하나같이 ‘숨겨진 삶’이 존재한다. 이 여인들뿐만이 아니다. 나오는 이들 대부분이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삶을 간직하고 있고, 그리고 그 숨겨진 삶은 그들에게 저마다 상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상처 때문에 자기 안에 갇히고 말지만, 그럼에도 제각각 그 은밀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버텨나간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에서 깊은 감동이 솟아난다.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앙리가 유랑하는 증인이 된 것도 어찌 보면 피에르 때문이었다. 지나가는가 싶었는데, 금세 사라져버리는 사람들, 전쟁과 혁명이 집어삼킨 운명들, 이 숨겨진 삶들을 즉각적인 망각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 세월과 더불어 광채를 잃어가는 노란 포스터. 하지만 로스코의 이 복제화는 색이 바래버린 지금도 앙리에게는 세상을 향해 여린, 탐색되지 않은 세계를 향해 열린 창이다. 이 그림 역시 숨겨진 삶이 식별되고 감지되게끔 하기 위해 한 사람이 애쓴 자취였다. 숨겨진 이 비극들 속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빛과 어둠이 마찰을 일으키거나 포옹하며 접촉했고, 다양한 색깔들이 수축과 팽창이라는 이중의 운동 속에 부동(不動)을 스치며 움직인다. (220쪽)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책 표지를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표지를 걷어낸 뒤 드러나는 속표지까지 그렇다. 다 읽고 나면 맨 앞장으로 돌아가 다시 읽을 수밖에 없는 책들이 있다. 이 작품이 그렇다. 그 모든 얽히고설킨 사연을 알게 된 뒤 다시 훑어보는 이 작품은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들, 아무것도 아닌 듯이 흩여져 존재했던 조각들이 얼마나 많은 정보들을 숨기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면서 감탄하게 된다. <숨겨진 삶>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이 책을 읽을 이들에겐 누가 되는 행동일 뿐이다. 여러 번 읽어도 좋은,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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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2-10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장바구니에 소설이 한 권도 안들어있어서 아아 어찌 이러는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했는데, 이 리뷰를 보기를 잘했네요. 이 책으로 소설을 담습니다.

사빈과 피에르가 우연히 만났고 곧 다시 만나게 된다는 글을 읽으니 어쩐지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떠올랐어요. 남자가 포르투갈 여자랑 우연히 다리 앞에서 마주치치 않던가요. 그리고 남주가 미친듯이 포르투갈어를 공부하던 그 장면도 연달아 떠오르네요. 저는 그 소설 자체를 그렇게 좋아했던 건 아니지만, 포르투갈어 엄청 공부하는 장면을 좋아했어요.

잠자냥 2019-12-10 17:58   좋아요 0 | URL
이 소설 정말 좋았어요... 아주 기냥 줄거리 최대한 안 밝히려고 애썼으니 온전히 잘 읽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
참, 책 표지 뒷면은 책 다 읽고 읽으세요. 먼저 읽음 안 됨!

다락방 2019-12-10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땡투땡투. 부자로 만들어 드리리..

잠자냥 2019-12-10 17:58   좋아요 0 | URL
오모나 땡투땡투 ㅋㅋㅋㅋ

유부만두 2019-12-10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 선택이 탁월하죠?!!!!

잠자냥 2019-12-10 21:39   좋아요 1 | URL
네 읽고 나서 보니 정말 표지 잘 만들었더라고요!

케이 2019-12-11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겉만 봐도 예쁜데 또 다른 표지가 있는 모양이네요. 이렇게 보관함에 책을 또 한권 넣어봅니다.

잠자냥 2019-12-11 17:10   좋아요 0 | URL
이 표지는 음... 예쁜 걸 떠나서 작품 내용과 아주 잘 조화를 이루는 표지에요. 또 다른 표지라고 말하기는 뭐하고, 요즘 양장본은 겉표지 떼어내면 그 안에 책만 나오잖아요? 그 책에 새겨진 그림도 작품 내용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집니다. 대부분 책 표지는 디자이너들이 작품을 잘 읽지 않거나(잘 모르는 채) 엉뚱하게 디자인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이 책은 디자인한 사람이(아니면 책 표지 디자인에 관여한 사람이) 분명 작품을 다 읽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coolcat329 2019-12-11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작가지만 저도 이상하게 끌리네요.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표지가 한 몫 제대로 하는듯 싶어요. 일단 사야겠어요.🤤

잠자냥 2019-12-12 09:23   좋아요 0 | URL
네 읽고 나면 아마 마음에 더 드실 거예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