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형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3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권의 책만으로도 홀딱 반해버린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두 번째로 읽은 작품은 <판사와 형리>이다. 제목만 보면 그다지 흥미가 일지 않는다. 왠지 고리타분한 이야기일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작품 중 첫 번째인 ‘판사와 형리’는 시작부터 흥미진진하다. 첫 페이지부터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죽은 사람은 스위스 베른 시의 유능한 형사인 슈미트 경위.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자신의 푸른 메르세데스 안에서 발견된다. 그 유능한 부하직원을 잃은 베르라하 경감이 사건을 맡게 되고, 동료인 찬츠와 함께 수사를 진행한다. 이윽고 슈미트의 시체가 발견된 차 옆 길가에서 총알 하나를 줍는다. 베르라하는 죽은 슈미트의 집에도 찾아가고, 그의 일기에서 ‘G.’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한 글자를 발견한다. 이 두 가지 단서로 베르라하는  살인자를 쫓기 시작한다.

‘추리소설’임을 알고 읽기 시작했던 터라 단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데, 이 작품은 어쩐지 좀 특이하다. 대개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탐정이나 수사관, 형사 등이 기막히게 잘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 꽁꽁 숨겨진 단서를 발견하고, 그 단서를 교묘하게 엮어서 아주 썩 훌륭한 결과를 도출해낸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은 그 단서와, 단서를 엮어서 빚어낸 과정이 정교하면 할수록 그 이야기에 열광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판사와 형리’ 및 뒤에 실린 ‘혐의’는 전통적인 추리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놀랍도록 잘 짜인 이야기구조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꽉 막힌 사건에 답답해 하다가 어느 순간(주로 끝 부분에 이르러) 와! 하고 탄성을 자아내는 추리(탐정)소설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이 늙은 수사관인 베르라하가 첫 번째 단서를 발견해내는 과정도 매우 싱겁다. 죽은 슈미트의 메르세데스 근처를 조사하다가 그냥 ‘우연히’ 총알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우연’이라는 키워드는 <판사와 형리>에 실린 두 작품에서 큰 역할을 한다. 뒤렌마트가 보기에 이 세계는 계획보다는 ‘우연’의 지배를 받고 있다. 때문에 ‘판사와 형리’, ‘혐의’ 두 작품에서 범죄를 추적하는 노수사관 베르라하 역시 우연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수사관은 대충 이리저리 쏘다니는데, 우연히 사건을 풀어나간다는 싱거운 이야기인가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에서 말하는 ‘우연’은 그런 작은 우연-그러니까 뜻밖에 총알을 발견하는-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함에서 비롯되는 우연을 의미한다. 베르라하는 인간이 타인의 행동 방식을 자신 있게 예견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나아가 만사에 개입해 작용하는 ‘우연’을 고려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범죄는 폭로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주장에 반대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 노수사관과 40여 년 전에 불꽃 튀는 토론을 벌인 남자, ‘가스트만’은 ‘인간관계의 뒤얽힌 상태야말로 인식조차 되지 못할 완전범죄’를 가능케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매우 많은 범죄가 처벌되지 않은 상태로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결국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는데, 그때 가스트만은 베르라하에게 호언장담한다. 자네 코앞에서 범죄를 저지를 것이며, 자신의 범죄를 절대로 입증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자, 여기서 눈치 빠른 사람은 ‘가스트만’의 이름에서 문제의 이니셜 ‘G’ 추측해낼 수 있을 것이다. 40여 년 전 터키의 한 술집에서 우연히 나눈 인간 본성과 범죄 심리에 관한 두 사람의 토론이 오랜 세월이 지나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은 한 스위스 형사의 목숨을 앗아간 것일까? 궁금증을 해결하는 일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

우연은 두 번째 사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혐의’에서 베르라하는 ‘우연히’ 펼쳐 든 <라이프>지의 사진 한 장을 보고 어떤 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이 늙은 수사관에게는 사실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이런 설정도 흥미롭다. 죽음을 앞둔 수사관이라!). 전편인 ‘판사와 형리’에서 이 사실이 언급되어 그는 급하게 수술을 받게 되는데, 수술 후 입원 치료를 받던 중 한 잡지에 실린 사진을 그의 주치의이자 친구인 훙거토벨이 주의 깊게 바라보는 모습을 베르라하는 놓치지 않는다. 훙거토벨의 얼굴에 스쳐가는 온갖 미묘한 표정을 감지한 베르라하는 수사관 특유의 집요하고도 날카로운 감각으로 질문한다. 무슨 이유로 그 한 장의 사진에 그토록 집착하느냐고. 훙거토벨은 사진 속 인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과 집시를 가둔 수용소 안에서 마취 없는 수술을 집행했던 고문광 넬레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넬레는 어쩐지 현재 취리히에서 버젓이 고급 병원을 운영하는 어느 의사와 동일 인물인 것 같다. 이 막연한 ‘혐의’만으로 베르라하는 그 의사의 뒷조사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범죄 현장도, 살인도, 살인자도 없다. 단지 혐의만으로 사건을 조사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혐의만으로도 어떤 범죄(자)를 쫓는 일은 정당한 것일까? 이런 의문은 베르라하도 품고 있다.
 

“혐의란 끔찍스러운 것이며 악마한테서 나오지. 어떤 혐의를 품는 것처럼 사람을 고약하게 만드는 게 없다네. 그래서 내 직업을 곧잘 저주했네. 모름지기 우리는 혐의의 책동을 받아서는 안 되거든.” (‘혐의’, <판사와 형리>, 138쪽)


그럼에도 이 혐의는 아픈 몸을 이끌고 힘겹게 현장을 오가는 늙은 수사관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다. ‘판사와 형리’에서 ‘G’라는 이니셜과 40여 년 전, 완전 범죄가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겠다는 한 미치광이의 선언, 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잔혹 행위를 저지른 자가 신분을 숨기고 승승장구하는 의사가 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 등으로 은퇴를 앞둔 시한부 인생의 노수사관은 ‘즐기듯’ 범죄를 저지르는 미치광이들의 뒤를 기꺼이 쫓는 것이다. <판사와 형리>의 매력은 바로 이런 미치광이들이 왜 범죄를 저지르는지 동기를 파헤치는 것과 그 동기를 파헤치고 악을 처벌하기 위해서라면(비록 몇 십 년이 지났을지라도!) 기꺼이 자기 한 몸을 내던지는 정반대에 선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해서 ‘기분이 내키면 멋대로 선(善)을 연습하고, 또 기분이 달라지면 악(惡)을 사랑하는 그런 인생’(77쪽)을 살아갈 수 있다. 가스트만이나 넬레처럼 악 그 자체를 즐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악을 평생 뒤쫓는 베르라하 같은 인간도 있는 것이다. 베르라하는 부와 명성 뒤에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살아가는 냉혹한 범죄자 가스트만의 본질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다. 때문에 그 스스로 말하듯이 가스트만을 ‘심판할 유일한 판관’이기도 하다. 그러나 참으로 재미나게도 베르라하가 고른 형리는 ‘법’의 범위를 벗어난다. 결함 많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세상이기에 악을 심판하고 그것을 처단하는 형리가 때로는 ‘법’의 범위를 벗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우연’이 빚어낸 심판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악과 선을 넘나들 수 있다. 뒤렌마트는 그런 인간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독일 땅에서 벌어졌던 일은 특정한 조건만 갖춰지면 어떤 나라에서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조건들이야 다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어떤 인간, 어떤 민족도 예외가 아닙니다. (....) 인간 사이에는 오로지 한 가지 차이밖에 없다는 겁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차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유혹에 빠진 자와 그것을 모면한 자라는 구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혐의’, <판사와 형리>, 221쪽)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0-08-27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열광을 했는데요, 좀 지나서 <약속>을 읽고는 아예 뒤집어졌답니다. ㅋㅋㅋㅋ
세상에 그런 추리소설도 있는가 싶었습지요. <약속>도 놓치지 마세요.

잠자냥 2020-08-27 17:07   좋아요 1 | URL
예! <약속>도 찜 완료입니다!
이 사람 증말 천재입니다. 천재. ㅎㅎ

비연 2020-08-2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 이거 어제 받았는데.. 좀 이따 읽을까 했건만. 잠자냥님 페이퍼 덕분에 다음 책으로. ㅋㅋ

잠자냥 2020-08-28 12:35   좋아요 0 | URL
추리소설 좋아하시는 비연 님께 이 작품은 약간 뭔가 좀 허전한(?) 심심한(?) 그 무엇이 느껴질 법도 합니다만, 좀 색다른 추리소설로 읽힐 거예요.

coolcat329 2020-08-28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폴스타프님 글 읽고 이 책과 <약속> 찜해둔 책인데 이번엔 정말 구입해야겠습니다.

Falstaff 2020-08-28 12:40   좋아요 1 | URL
이것으로 쿨캣님도 대머리 뚱보 할아버지의 팬으로 들어서게 되는 겁니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8-28 12:35   좋아요 1 | URL
쿨캣 님은 원래 대머리 뚱보 할아버지 팬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ㅋㅋㅋㅋ

coolcat329 2020-08-28 2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네! 맞습니다. 근데 잠자냥님의 팬이기도 하지요.☺☺☺

잠자냥 2020-08-28 22: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__^
 
바보 대산세계문학총서 159
엔도 슈사쿠 지음, 김승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으면서도 어쩐 일인지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읽노라면 신의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가톨릭 신도였고, 종교적 색채의 작품을 많이 써왔던 엔도 슈사쿠. 이런 소개만 보면,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잘 모르는 이들은 그가 신이나 믿음, 종교적인 구원의 문제를 강하게 주장하는 작품들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는 참으로 묘한 작가이다. 나처럼 종교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에게조차 엔도 슈사쿠의 작품은 별 거부감 없이 읽힌다.  게다가 시간이 조금 흐르면 또 다른 작품을 찾아 읽고 싶어진다.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신이 정말 존재할까 잠시 생각해 보기도 하고, 믿음이라는 게 무얼까 고민해 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엔도 슈사쿠가 작품 안에서 강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을 통해 종교적 믿음을 설파하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는 나약하고 평범한 인간들이 등장한다. <바보>에는 더 그런 인물이 나온다. 너무나 순수해서 ‘바보’처럼 보이는 인물.

<바보>는 엔도 슈사쿠의 작품 중 조금 특이하게 느껴진다. 첫 장면부터 색다르다. 평범한 일본의 가정집을 배경으로 아침부터 입씨름하는 남매의 모습이 그려진다. 똑똑하고 빈틈없을 것 같은 누이 ‘도모에’와 게으르고 철없는 ‘다카모리’가 아침부터 남매간에 흔한,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말다툼을 벌인다. 그런데 그날따라 다카모리에게 뜻밖의 편지가 오고, 편지 속에는 놀라운 일이 쓰여 있다. 오래전 다카모리가 잠시 펜팔 친구로 사귀었던 프랑스의 한 청년이 무턱대고 일본에 온다는 내용이 아닌가. 그렇다면 생면부지의 외국인 청년을 이 집에서 머물게 해야 한단 말인가? 도모에는 못마땅하다. 다카모리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기 앞으로 편지를 보낸 이 친구를 외면할 수도 없어서 그를 마중 나가기로 한다. 생각해 보니 그의 이름은 ‘가스통 보나파르트’로 무려 나폴레옹의 후손이다. 이 이야기에 도모에를 비롯한 집안 식구들은 호기심이 증폭한다. 나폴레옹의 후손이 우리 집에 손님으로 온다고?

오빠 다카모리를 비롯해 자기 또래 일본 남자를 모두 한심하게 여기던 도모에는 나폴레옹의 후예라는 말에 솔깃해한다. 나폴레옹 황제의 후예라면 왠지 우아하게 잘생긴 얼굴에, 어딘가 늠름한 매력을 발산하는 남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가장 낮은 등급의 선실을 이용해서 저 먼 프랑스에서 일본까지 온 나폴레옹의 후예 ‘가스통’의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옷차림이야 그렇다 쳐도 생김새가 영 아니올시다. 모든 점에서 꽝이다. 완전히 한 마리의 말을 닮은 기다란 얼굴. 꼭 도깨비 모양의 참마처럼 생겼다. 굳이 외국 배우와 비교해야 한다면 희극배우 ‘페르낭델’과 닮았다고나 할까. 게다가 행동거지는 또 얼마나 굼뜨고 어리숙한지 지켜보노라면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다. 가스통을 자기 집까지 불러들인 체면도 있어서 다카모리는 계속 가스통을 과대평가하려고 애쓰지만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딱 어린 아이 수준의 정신 연령이다. 나폴레옹은 무슨 나폴레옹의 후예,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어쨌든 먼 나라에서 찾아온 손님이니 다카모리 집에서는 가스통을 환대해주고 그에게 일본의 재미난 곳을 소개해주고자 늦은 밤 환락가로 그를 이끈다. 그런데 그는 참 이상하다. 유흥에도 도무지 재미를 못 느끼는 데다가 일본을 찾은 외국인이라면 마땅히 호기심을 느끼고 좋아할만한 도쿄타워 같은 관광코스도, 가마쿠라의 대불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오직 그가 일본에서 흥미를 느끼거나 관심을 갖고 쳐다본 것은 주인 없는 길거리의 불쌍한 개 한 마리나 어린애들 밖에 없다. 환락가에서 괜히 시비 거는 일본인들에게 두들겨 맞고도 그는 바보처럼 웃기만 한다. 덩치는 산만 한 이가 자기보다 작은 일본인들에게 맞으면서도 한 대 때릴 줄 모른다. 그는 정말 바보가 아닐까 의심이 들 즈음에 뜻밖에도 가스통은 다카모리네 집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일본 사람들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다고, 여러 종류의 일본인을 만나고 싶다는 이유가 전부이다.

그렇게 가스통은 다카모리의 집을 나와서 떠돌이와 다름없는 생활을 시작한다. 가진 돈이 많지 않아 주로 허름한 여인숙을 찾아다니다 보니 뜻밖의 사건, 사고에 휘말리게 된다. 주로 하층민들과 얽히면서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그의 삶은 흘러간다. 다카모리와 도모에 남매는 가스통이 집을 떠나니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럽다. 그 어린아이 같은 외국인이 일본에서 잘 버텨나갈지, 대체 왜 일본에 왔을지 궁금해 하면서 그의 행적을 뒤쫓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스통의 뒤를 쫓으면서 도모에와 다카모리는 그에게 서서히 ‘엄마가 불구의 자식에게 느끼는 애련함’이라고 할 수 있는 느낌을 갖게 되고 조금씩 연민을 느끼게 된다. 다카모리의 경우에는 조금 더 이 감정이 남달라서 가스통 같은 순수한 남자를 세상이 망가뜨릴까봐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바보>는 가스통이라는 이 말도 안될 만큼 순수한, 그래서 때로는 백치처럼 보이기도 하는 남자의 행적을 쫓으며 신과 인간, 믿음과 구원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작품은 작가가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가스통의 삶의 추적하는 형식으로 썼어도 됐을 법하다. 그런데 다카모리와 도모에라는 너무나 평범한, 도저히 소설 속 주인공으로는 삼을 것 같지 않은 두 인물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엔도 슈사쿠는 이렇게 평범한 인물들의 시선으로 (그들보다) 못나 보이지만 어쩌면 그런 그들이 지니지 못한 고결한 속성을 지녔기에 예수 또는 신의 모습을 닮은 가스통이라는 인물을 뒤쫓게 한다. 그들은 차츰 이 못난 바보 가스통에게 감화 받는다. 이런 구조로 작가는 보통의 인간 안에 깃든 선한 본성이라든가 믿음의 문제를 촉발해 나간다.

나폴레옹의 후예라는 가스통은 왜 고국을 떠나 일본에 왔을까? 언뜻 그의 과거가 스치듯 그려진다. 가스통이 태어난 사부아 지방에서는 얼간이 같은 사람을 포플러나무라고 부른다. 포플러는 성냥 만드는 데만 쓰일 뿐, 재목이나 기둥으로는 쓰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스통의 친구들은 그를 포플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런 세상에서도 가스통은 사람들을 믿고 싶어 한다. 지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나폴레옹처럼 영리하고 강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이 세상이 영리하고 강한 사람만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나 자기를 따르는 늙은 개와 같은, 약하고 슬픈 사람에게도 무언가 보람이 있는 삶의 방법이 가능하지 않을까 고민하며 이 낯선 땅에서 그런 삶의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가스통은 일본 곳곳을 떠돌며 어떤 사람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만의 계율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이란 그리 강하지 않다. 번번이 흔들린다. 흔들릴 때마다 그는 믿자고, 속는다고 해도 믿자고 자신을 다그쳐 나간다. ‘의심이 너무나도 많은 이 세계, 서로 상대방의 속마음을 캐려 들고 절대로 상대의 선의를 인정하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 문명이나 지식’을 가스통은 먼 바다 저쪽에 버리고 일본에 왔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을 믿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스통의 이 인간이라는 변하기 쉬운 존재를 ‘믿고자 하는 일’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도모에는 우리 인생에서 바보와 위대한 바보라는 두 가지 말이 어떻게 다른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꾸밈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꾸밈없이 모든 사람을 믿으며, 비록 자기가 속고 배반을 당해도 그 신뢰와 애정의 등불을 계속해서 지켜나가는 사람, 그 사람은 요즘 세상에서 바보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다.... 위대한 바보인 것이다. 자신의 몸을 태우면서 발산하는 작은 빛을 사람들의 인생에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비추는 위대한 바보이다. (<바보>, 254쪽)


가스통을 지켜보노라면 답답해진다. 너무나 바보 같아서 울화통이 치밀기도 한다. 사람을 믿는 일이 그렇게 쉬울까? 믿을 만한 사람을 믿어야지! 속으로 소리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믿을 만한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회의가 들기도 한다. 가스통 같은 사람은 분명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질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상은 그러하니까. 왜 사람을 믿지 않느냐는 가스통의 말에 “내가 믿지 않는 게 아니야. 다른 놈들이 나로 하여금 사람들을 믿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린 거지.”(165쪽)라고 말하는 살인청부업자 ‘엔도’의 말처럼 나 또한 이 세상에 무언가를 믿는다는 말이 얼마나 맹목적이고 바보 같은 일인가 마음속에서는 자꾸 반감이 치솟는다. 착한 사람이라든가 호인이라는 말은 눈 감으면 코 베어 갈 이 사회에서는 결국 바보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하는 도모에의 말에 더 공감이 간다. 엔도의 말처럼 세상은 선의가 온전하게 통하는 세상이 아니고, 애정이라든지 신뢰라든지, 이런 말들은 그저 쓰기 편하니까 쓰는 표어 같은 말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살인청부업자 엔도가, 도모에가 가스통에게 서서히 감화되듯이, 아니 감화라기보다는 자기도 모르게 가스통의 그 무엇에 이끌리듯이 나도 이 <바보>라는 작품에서 울컥 무언가 느끼기 시작한다. 이런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어? 이 무슨 동화 같은 이야기인가 코웃음을 치다가도 바보 같은 이 남자, 인간의 나약함과 모자람에 한없는 연민의 마음을 품고 그 못난 인간을 끝까지 믿어보고자 애를 쓰는 이 바보 같은 가스통의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가스통 자체가 위대하지 않기에, 위대하기는커녕 걸핏하면 울어대고 겁쟁이에다가 남들이 다 무시할 만큼 어리숙한 인간이기에, 그럼에도 그 약함을 짊어지고서 열심히 제 나름대로의 삶을 아름답게 꾸려가려는 모습에 끝내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다가 끝내 이 가스통의 모습이 신이 인간에게 품는 마음과 같다면, 신의 아들 예수가 인간을 향해 품은 마음과 같다면 신이라는 존재는 한번쯤 조용히 믿어 봐도 괜찮은 그런 존재가 아닐까 내 마음속에서도 희미한 믿음 같은 게 싹트기도 한다. 엔도 슈사쿠의 문학의 힘은 늘 이처럼 조용조용 속삭이는데도 깊고 강렬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0-08-12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부터 읽기 시작합니다.

잠자냥 2020-08-12 22:18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시길~!
 
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이 책을 읽을 줄은 몰랐다. 책이 출간됐을 때만 하더라도 솔직히 ‘응? 책까지 냈어?’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사람 중에 하나이다. 더욱이 나 또한 이 책에서 말하듯이 왜 네 번이나 성폭행당할 때까지 참았을까? 생각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김지은에게 2차 가해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듯, 김지은과 안희정의 관계를 불륜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런 일을 네 차례나 당할 때까지 참았어야만 했을까, 그리고 이렇게 책까지 내야만 했을까 생각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고 난 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김지은입니다> 출간 소식이 의아했던 까닭은, 김지은 그녀 자신은 이 일을 누구보다도 잊고 싶어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일과 함께 모두가 그녀를 잊고 일상으로, 안희정에게 성폭력을 당하기 이전, 미투를 하기 이전의 조용하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김지은은 그런 평범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2차 가해를 하는 이들 때문에 그런 평범한 일상으로의 복귀는 아직 멀어 보인다. 김지은 편에 서서 증언을 해주었던 동료들 또한 부당한 해고나 교묘한 압력 등을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떠나 미투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지 못하다. 그에 비해 안희정 편에 서서 증언하거나, 가해자를 편들며 피해자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간 이들은 그 후 빠르게 승진을 하는 등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서, 또는 그 권력에 기생해서 보란 듯이 살아가고 있다.

성범죄자 안희정은 어떤가? 감옥에 갔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끝장 났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한국 사회가 보란 듯이 증언해주고 있다. 그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특별히 감옥에서 풀려나 장례를 치르고, 전직, 현직 총리부터 시작해 정치권의 여러 인사들이 조문을 했다. 게다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는 문재인은 ‘대통령’ 문재인이라는 이름이 박힌 조화를 성범죄자에게 버젓이 보내기도 했다. 대통령이 성범죄를 저질러 형을 살고 있는 이에게 조화를 보내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사정이 이러하니, 장례식장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권력자임을 과시하며 오랜만에 정치 놀이를 즐겼던 안희정은 마음속으로 여전히 자신이 건재하다고 생각하며 이렇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치 예전에  정치자금 문제로 감옥 다녀온 것을 영웅시하고 자랑으로 여겼던 것처럼(이 책에는 그런 안희정의 태도와 그런 그를 신격화한 안희정 캠프의 분위기가 묘사되어 있다) 또 그렇게 여길지도 모른다. 억울하게 미투당한 가련한 피해자 안희정으로 정신 승리하면서, 또 그런 그를 그렇게 옹호해줄 수많은 안희정 지지자들은 그가 형을 마치고 나오면 다시 그 밑으로 속속 모여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성범죄를 저지른 자인데, 한국인들이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그러나 지금 한국이 성범죄를 저지른 권력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안희정에 이어 오거돈, 박원순에 이르기까지 충남지사, 부산시장, 서울시장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자들의 성범죄가 잇따라 일어났다. 심지어 안희정은 1심에서 무죄를 받기도 했다. 박원순 사태를 보면 한국은 정말 가해자 천국이다. 피해자를 피해자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피해호소인’이라는 참으로 신기한 말까지 만들어 내면서 가해자인 박원순의 죄를 덮어주기에 집권 여당을 비롯해 그의 지지자들까지 합쳐 모두가 가해자 편에 서서 피해자에게 2차 가해하기에 정신이 없다. 미통당 성폭력특위 위원으로 이수정 교수가 합류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제는 이수정 교수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러운 욕까지 그들은 마다하지 않고 있다.

나는 좀 궁금하다. 문재인과 민주당을 지지하고, 안희정을 지지하고, 박원순을 지지한다는 그들은 무엇 때문에 문재인과 민주당과 안희정과 박원순을 지지했는가? 십대들이 아이돌을 좋아하듯이 그들의 외모와 스타성을 보고 지지하고 좋아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18세 이상의 성인이 어떤 특정 정당을 지지하고, 그 정당의 정치인을 좋아하고 지지한다는 것은 그 정당의 이념, 기치, 그 정당에 속한 정치인의 생각, 신념, 가치관, 태도 등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것이리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그런 정당이나 정치인이 평소 자신들이 주장한 신념이나 가치관에 어긋난 행동과 태도를 보였을 때는 마땅히 질책해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된 애정이자 믿음이자 이성에 근거한 지지라고 생각한다. 문재인과 안희정과 박원순 같은 이른바 이 땅에서 ‘진보’라고 부르는 그들이 평소에 내세웠던 기치는 그들이 실제로 보여준 행보와 얼마나 어긋났는가? 미투를 지지한다고 말했던 안희정은 뒤에서는 김지은 뿐만 아니라 여러 여성들을 성희롱, 성추행했으며, 인권변호사이자, 누구보다 여성 인권에 더 민감했던 시민운동가 출신 서울시장은 성추행으로 고소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다면 충격과 함께 실망과 배신감이 먼저 들어야 하는 게 인간으로서 마땅한 감정이 아닐까? 박원순이 그럴 리가 없다고, 안희정이 그럴 리가 없다고 내내 가해자들을 두둔하면서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하는 짓을 서슴지 않는 것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은 물론 그 정치인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희정-오거돈-박원순으로 이어지는 잇따른 성범죄에도 그저 방관만 하고 있는 집권 여당, 그래서 이수정 교수까지 놓치고 마는 여당의 안일한 태도를 비난하고 꾸짖는 게 그 당의 지지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미통당에 합류했다고 이수정 교수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아끼는 민주당의 혁신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이렇게 말하면 나 또한 미통당 지지자로 몰아가겠지만 미안하다, 나는 미통당 증오하는 사람이다. 박원순의 죽음에 누구보다 심란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는 계속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숨기고 덮고, 어서 빨리 이 사태가 가라앉기만을 바라며,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히기만을 바라며, 병폐의 근원을 바로잡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김지은입니다>의 김지은은 미투로 안희정의 실체를 폭로하고, 그 기록을 이렇게 책으로 남겼다. 가해자의 목소리와 가해자를 편드는 수많은 2차 가해자의 목소리가 더 큰 세상에서 피해자의 이런 기록은 더없이 소중하다. 김지은의 이 기록이 없었다면 나는 안희정을 성폭력을 저지른 성범죄자로만 기억할 뻔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착취와 인권침해까지 일상적으로 자행한 참으로 저열한 인간이다. 2차 가해에 동참한 이들은 김지은이 안희정을 마치 아이돌처럼 좋아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고 말한다. 모두 안희정 측이 만들어낸 유언비어이다. 오히려 안희정은 김지은을 24시간 내내 대기시키며 종 부리듯이, 사적인 일까지 아무렇지 않게 시켰다. 김지은은 안희정의 비서이자 그의 아내 민주원의 비서이기도 했다. 연예인 매니저가 집안일까지 거들거나, 그의 가족 운전기사 노릇까지 했다는 기사가 나면 사람들은 그토록 비분강개하면서 왜 24시간 시도 때도 없이 일을 시키고, 아내 민주원의 운전사 노릇까지 한 김지은에게는 오히려 안희정을 좋아해서 스스로 그런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상한 여자라고 몰아세우는 걸까? 그들의 선택적 판단에는 참으로 기가 찰뿐이다.

김지은은 권력에 도취된 자들, 대통령을 만들려고 모였다는 이들, 대통령 캠프라는 이름 아래, 불공정함을 바로잡고 약자를 보호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들이 모인 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부정과 불의를 폭로하기도 하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대의 앞에서 다른 모든 것은 사사로운 사건으로 치부된다. “너희들은 대통령을 만들러 온 거야, 원래 정치권은 이래”라며 폭력은 묵인되고, 또 그들 자신이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노래방에서 여자 후배를 옆에 앉혀 술을 따르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머리나 뺨을 주먹으로 때리기도 하고, 볼을 비비거나 껴안기도 한다. 술자리를 지키라며 새벽까지 집에 가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이 모두가 민주적이고 진보적이며 신사적인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을 홀렸던 안희정 캠프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통령만 만들면 이 모든 폭력과 부정과 불의는 다 묵인해도 되는 일일까?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 매뉴얼을 알게 되고 매우 놀랐습니다. 거의 24시간 대기 업무에 문자와 카톡으로 지시를 하고, 높은 신뢰 관계를 요구하는 비서에게 업무 이후에 온갖 개인적인 심부름을 아무렇지 않게 요구하며 성폭력까지 일삼았다는 것은 공공기권의 기관장으로서 도덕성은 물론 인간성까지 파괴한 끔찍한 처사입니다. (<김지은입니다>, 140쪽)


안희정 캠프에서 일하며 그의 권력에 취해 또 다른 작은 권력자들이 된 그들은 김지은의 미투가 있은 뒤에는 거짓이야기를 만들어 유포하는 데 앞장선다. 2차 피해의 대표적 가해자 23명 중에는 현직 국회의원 보좌진, 안희정 지지 페이스북 운영자, 안희정 경선 캠프의 전 온라인 담당자도 포함되어 있고, 그들 중에는 실형을 선고 받은 이도 있다. 그런데 안희정 사건이 후로도 박원순의 성추행 추문에 또 다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2차 가해자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면서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아가거나 피해자 변호인단이 의도가 있어서 꾸며낸 일이라는 둥 온갖 유언비어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기록된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가해자 측은 성범죄 사건을 ‘합의에 의한 관계’ ‘불륜 관계’로 정의하면서 ‘법적 문제’에서 ‘도덕적 문제’로 전환시키고, ‘꽃뱀’ 담론을 끌어와 생존자를 가정 파탄을 초래한 ‘가해자’로 안희정과 그의 주변 사람들을 피해자로 이미지화 했다. 또한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페미니즘 담론을 재해석하여 성폭력의 책임을 생존자에게 돌리는 전략을 취하며 성폭력 문제를 개인화했다. 가해자의 가족, 특히 아내들은 적극적으로 2차 가해에 동참한다. 한국 사회는 오직 가족과 관련해서 의리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 여성의 명예와 평판은 여전히 정상가족을 잘 유지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 결과 친족 성폭력의 피해자에게 친엄마가 나서서 침묵을 종용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안희정의 아내 민주원은 대표적인 2차 가해자이다. 민주원은 상화원의 부부 침실에 김지은이 들어왔다고 위증하며 김지은을 이상한 여자로 몰아갔으나, 그날 상화원의 숙소 옥상에서 안희정은 다른 여성을 만났다. 안희정이 미처 착신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 여성이 보낸 “옥상에서 2차를 기대하고 있어요”라는 문자가 김지은의 수행폰으로 연동되어 날아 온 것이다. 실제로 검찰 조사와 재판 중 안희정은 그날 밤 그 여성을 옥상에서 만나고 돌아왔다고 진술했고, 전화 내역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민주원은 안희정과 계속 같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럼에도 안희정이 옥상에서 다른 여성을 만나고 온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고 재판정에서 진술했다. 김지은은 이 책에서 위증한 이들도 처벌받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나 또한 그렇다. 민주원의 위증은 그냥 그렇게 조용히 파묻고 말 것인가?

안희정은 감옥에 가 있지만 그의 권력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 책에 따르면 미투 이후 모든 과정은 위력 그 자체였다. 안희정은 전지적 상사로, 그가 누군가를 자를 때는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는 한마디면 됐다. 별정직은 도지사에게 절대적인 채용과 면직 권한이 있었기에 지사의 말 한마디면 바로 해고 할 수 있었다. 안희정은 침묵만으로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런 지위를 갖고 있었다. 안희정은 30대에 대통령을 만들었고, 이후 재선 도지사, 유력 대선 후보로서 권력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과 친분 관계를 맺어왔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는 촘촘했다. 관계가 곧 권력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안희정은 도지사직을 내려놓았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안희정의 증인으로 나섰던 일부 사람들의 직급이 급상승했다. 오랜 시간 대의라는 명분으로 뭉쳐 주류로 살아온 권력자들, 그리고 그들과 관계 맺은 광범위한 사람들이 건재한 이 사회에서 김지은 같은 피해자가 기댈 곳은 정의롭게 나서주는 소수의 몇 사람뿐이다.


상사에게서 교수에게서 선배에게서 힘의 작동 원리에 따라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함께 적용되는 것이 위력이다. 위력의 무서운 점은 위협적인 말을 듣지 않아도, 스스로 몸이 굽혀진다는 것이다. 위력은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다. 타인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형적, 무형적인 힘이다. 폭행이나 협박을 동원한 경우는 물론,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의사를 제어할 경우도 포함된다. (<김지은입니다>, 174쪽)


최초 언론 고발 이후 안희정은 합의되지 않은 관계였음을 인정했고,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했으며, 미안하다고도 했다. 범죄에 사용한 휴대폰을 파기했다. 진술을 여러 차례 번복했고, 증거를 스스로 없앴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인 심문을 하지 않았다. 묻지 않았다. 재판부가 김지은에게 했던 것처럼 안희정에게도 16시간을 질문했다면 1심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안희정의 권력은 그렇게 계속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처음으로 도와주겠다고 나선 김지은의 선배는 지속적으로 압박과 위협을 받았다. 정치권의 의원들에게 회사를 그만둘 것을 종용받았고, 또 다른 선배 역시 자녀의 어린이집에 누군가 접근해 오는 일을 겪어 경찰에 신고했다. 증언을 한 후배는 모해위증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나중에 무죄 받음). 그리고 지금까지도 불이익과 부당함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성폭력에서 가해자는 피해자보다 권력자이다. 권력을 가진 가해자 편에 서는 일은 쉽다. 잃을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해자와 연대하기보다는 가해자 편에 서서 아무렇지 않게 2차 가해를 한다.


대부분의 성폭력은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되기에 가해자들은 여전히 조직의 핵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피해자를 향한 조직적인 공격을 시작한다. 2차 가해다. 가해자는 여전히 해당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서 피해자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피해자가 그 힘 밖으로 나오려면 그 분야에서 쌓아온 자신의 미래도 함께 버려야 한다. (<김지은입니다>, 296쪽) 


사람들은 김지은에게 묻는다. 꼭 얼굴을 드러냈어야 했느냐고, 김지은은 말한다. 가해자에게 법적 처벌을 가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한 뒤 가장 두려웠던 것은 문제 제기를 한 후 그녀가 조용히 묻히고 사건도 사라지는 것이었다고. ‘나’는 소리 없이 사라지고, 가해자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또 다른 피해자가 계속 양산되는 결과가 가장 두려웠다고. 왜 네 번이나 당했느냐고도 묻는다. 김지은은 이렇게 묻고 싶다고 말한다. “왜 직접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는가?” “왜 세 번이나 입장을 번복하였는가? 일관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왜 검찰 출두 직후 휴대폰을 파기했는가?” 왜 법원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은 가해자 안희정에게 이렇게 묻기보다는 피해자에게 힐난하듯이 질책하듯이 비난하듯이 질문하는 것일까? 피해자는 모든 것을 잃는 싸움을 하고도 만신창이가 되는 반면 가해자의 영향력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듯이 대한민국에서 많은 여성들은 김지은의 모습으로 살아가곤 한다. 성폭력을 일상폭력으로 불러야 할 만큼 직장에서, 가정에서, 연인관계에서, 학교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김지은입니다>는 그런 모든 이들을 위한 용기 있는 기록이다. 가해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이 책을 진심으로 권하고 싶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0-08-10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수정 교수 욕하는 글들을 보고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이수정 교수가 그간 쌓아온 업적이 ‘미통당의 성폭력대책 특별위원회에 합류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아닌게 되더라고요. 순전히 자기 노력과 실력 경험으로 또 여성을 비롯한 약자의 편에 서고자 하는 마음으로 행보를 이어간 사람인데, 그런 분이 ‘성폭력 대책 특별위원회‘에 들어가게 된건 당연한 처사 아닌가요. 그 일로 세상이 시끄러워지고 정치인이 되지는 않을거라는 이수정 교수의 인터뷰가 계속 실려야 하다니...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어요.

잠자냥 님의 이 책에 대한 리뷰 기다렸는데 읽게 되어 너무 좋네요.
왜 네 번이나 참았냐, 왜 그토록 오래 말 안하고 있었냐 등의 말들을 하는 2차가해자들이 꼭 한 번 읽어보아야 할 책입니다. 잠자냥 님과 함께 더불어 권합니다.

잠자냥 2020-08-10 14:20   좋아요 0 | URL
민주당 지지자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민주당에 독이 된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그렇게 무턱대고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암튼 요즘의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 행태는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책을 뒤늦게라도 읽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게 책 보내 주신 분께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저도 어쩌면 은근한 가해자 시선을 거두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끔찍하기도 합니다.

독서괭 2020-08-1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요즘 읽고 있는데 잠자냥님 생각에 깊이 공감합니다.

잠자냥 2020-08-11 12:30   좋아요 0 | URL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책 끝까지 잘 읽으시고 주변 분에게 추천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ㅎㅎ
 
맥티그 을유세계문학전집 102
프랭크 노리스 지음, 김욱동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연주의 소설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한국인이라면 거의 알고 있을 김동인의 <감자>에서 그려지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돈과 성(性) 같은 욕망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다 마침내 타락하고 마는, 심지어는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타락의 끝판을 보여주는 인간군상들. 김동인이라는 작가 자체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이 짧은 단편의 자연주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수작임에는 틀림없다. 자연주의의 대가인 에밀 졸라의 수많은 작품들, <루공마카르 총서> 시리즈의 내용들도 하나 같이 이야기를 달리 할뿐 주인공들은 환경이 나빠지거나 좋지 못한 유전적 기질, 지나친 탐욕과 성적 욕망 등으로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에밀 졸라를 매우 좋아했고, 그의 작품을 본보기처럼 삼았던, 그래서 미국의 에밀 졸라로 불리는 ‘프랭크 노리스’의 <맥티그>에는 이런 자연주의 모든 특성이 담겨 있다. 주인공 ‘맥티그’는 폴크 거리에 기거하는 가난하고 투박한 치과 의사로 아주 커다란(동물처럼 느껴질 정도의) 덩치에 아둔한 머리, 타인 앞에 내놓기도 부끄러운 천박한 취향 등등 도저히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다. 여성은 물론이려니와 남성 사이에서도 그다지 친구로 삼고 싶지 않은 그런 인간 유형이랄까. 그런데 그토록 아둔하다는 이 인간이 어쩌다 치과 의사가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는 정식으로 치의학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어릴 적에 어쩌다가 치과 일을 하는 사람과 가깝게 지냈고 그 곁에서 이른바 ‘야매’로 치과 일을 익혔을 뿐이다. 얼마나 무식한(?) 치료법인지, 짐승 같은 엄청난 힘을 자랑하면서 이를 손으로 뽑아내기도 한다.

어쨌든 야매일지언정 치과 의사 기술을 갖춘 그는 크게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살아간다. 딱히 취향도 없어서 유일한 휴식이라는 게 그저 싸구려 음식을 먹고 스팀 맥주를 마시고 콘서티나를 연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뜻밖의 로맨스가 찾아온다. 친구 ‘마커스’가 이가 아픈 자기 사촌 ‘트리나’를 맥티그에게 보낸 것이다. 무엇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이 아둔한 남자는 ‘트리나’라는 존재에도 처음에는 무덤덤하기 짝이 없다. 왠지 귀찮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치과 치료라는 것이 어찌 보면 은근히 남의 속살(?)을 보고 만지게 되는 작업이라 이런 일을 거듭하는 사이에 맥티그는 트리나의 여성적인 매력에 서서히 굴복해간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 트리나가 매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맥티그를 도저히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 이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게다가 트리나와 마커스는 사촌이면서도 남들이 보기에는 공식적인 연인이나 마찬가지 사이다. 마커스도 트리나도 그걸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맥티그 같은 사람이 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있으랴. 그럼에도 사랑에 달뜬 맥티그는 마치 사자가 구석에 몰린 쥐 한 마리를 꿀꺽 집어 삼킬 듯한 태도로 트리나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이 끔찍한 남자의 고백에 낭만은커녕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 트리나는 덜덜 떨면서 빨리 치과를 벗어날 생각만 한다. 그 이후로도 맥티그를 생각할 때면 큼직하고 각진 머리, 두드러진 턱, 금발 머리카락다발, 둔하고 느릿한 몸, 잘 돌아가지 않는 아둔한 지능만이 떠오를 뿐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치료를 하러 치과에 자주 찾아갈수록 그의 육체적인 힘에는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끌려가는 것이다. 정말 동물적인 본능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에 이르는데,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더욱이 결혼과 동시에 트리나는 놀랍게도 복권이 당첨되어 5천 달러라는 큰돈이 생긴다. 트리나 같은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은커녕 로맨스도 꿈꾸지 못했던 맥티그가 결혼에 이어 아내가 복권에 당첨되어 5천 달러라는 돈까지 생기게 된 것이다. 이제 이들 앞에 펼쳐질 인생은 탄탄대로일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자연주의’에 근거한 소설이다. 그들은 애초에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으로 착각한 동물적 본능으로 결합한 부부이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큰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 이 두 가지 사실만 봐도 두 사람의 인생이 순탄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더라도 딱히 행복하지는 않을 것임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게다가 여기에는 ‘마커스’라는 인물도 존재한다. 그는 트리나를 선뜻 맥티그에게 ‘양보’하지만 트리나가 복권에 당첨되어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속으로 자신의 그 양보의 미덕을 크게 후회한다. 트리나를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 5천 달러는 내 손에 있을 텐데!(대체 왜 부인의 돈을 자기 돈으로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하며 그 날아간 기회를 몹시 안타까워하고, 그런 질투와 시기는 급기야 맥티그를 향한 증오로 변한다. 맥티그가 마커스 그 자신이 누려 마땅했을 행운을 모두 빼앗아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뜻하지 않게 주어진 5천 달러에 맥티그-트리나-마커스라는 기묘한 삼각관계는 이 세 사람의 인생을 예상 밖으로 이끌어 간다.

이 두 남자 사이에서 트리나는 희생양인가 싶지만, 트리나라는 인물도 두 남자와 견주어 별다를 바 없는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떤 면에서는 한결 더 기이하다. 5천 달러라는 돈이 생겼다면 마땅히 좀 더 누리고 살 것 같은데, 그녀는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 늘 돈을 아끼는 구두쇠이긴 했지만 복권에 당첨되고 나서는 특별히 더 인색해진다. 그녀는 그 엄청난 행운이 그들을 타락시키고 낭비벽에 빠지게 만들까봐 두려운 나머지 그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너무 멀리 가버린다. 5천 달러는 돈은 신탁으로 맡겨두고 이자만 받아서 살아가면서 전보다 더 전전긍긍하며 궁핍하게 살아간다. 그런 아내를 맥티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서서히 그녀에게 정나미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돈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트리나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러할 거 같다.


"아, 사랑스러운 내 돈, 사랑스러운 내 돈!” 그녀가 속삭였다. “널 너무 사랑해! 모조리 내 것이야. 동전 한 푼까지. 그 누구도 절대로 네게 손댈 순 없어. 절대로. 내가 널 얻으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노예처럼 일해서 너를 모았는데! 더 모아야지, 더, 더, 더 많이 모을 거야. 매일매일 조금씩.” (354쪽)


여기에 또 다른 기이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마리아’와 지독한 구두쇠인 유대인 노인 ‘저코우’ 커플이다. 이 두 사람은 처음에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조금 특이한 취미가 있었으니, 그녀는 늘 자신이 오래 전에 아주 호화롭게 살았으며 자기 집에는 황금 식기 세트가 있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다. 저코우 노인은 마리아에게 늘 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하더니 어느새 가까워져 마리아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가 반한 것은 결코 마리아가 아니다. 그녀가 들려주는 황금 식기 세트에 홀딱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이 기괴한 부부의 인생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다. 어차피 그 두 사람은 있지도 않은 황금식기에 미쳐 있기 때문이다.

<맥티그>에는 “이 모든 사건이 있지도 않은 황금 식기 세트 때문에 일어났다니.”라며 트리나가 한탄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있지도 않은 마리아의 ‘황금 식기 세트’는 트리나, 맥티그 부부 사이에도 존재한다. 5천 달러를 가졌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 큰돈. 그 돈 앞에서 맥티그와 트리나, 마커스 이 세 사람은 서로의 욕망에 충실하며 파국으로 치달아 간다. 좋지 못한 유전적 기질, 그런 이들에게 주어진 뜻하지 않은 큰돈, 인간의 끝을 모르는 탐욕. 나날이 나빠지는 생활환경. 그런 상황 안에서 인간은 얼마나 밑바닥으로 타락해 갈 수 있는지 <맥티크>는 섬뜩하게 그려나간다. 프랭크 노리스는 서른둘이라는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만일 그가 한 삼십년만 더 살았더라도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에 버금갈 작품을 여럿 남기지 않았을까 섣불리 상상해 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0-08-05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멋진 리뷰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 하는 책이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리뷰를 보고
나니 굳이 읽...

암튼 낭중에 중고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구요.

잠자냥 2020-08-05 14:15   좋아요 0 | URL
제 리뷰는 이야기 초반에 속할 뿐입니다~ ㅎㅎ
나중에 중고로 나오면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수용소 - 교도관의 수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지음, 김현정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행가방>, <외국여자>의 세르게이 도블라토프가 이번에는 수용소 이야기로 찾아왔다. 도블라토프는 1959년 레닌국립대학교 핀란드어과에 입학했으나 학업 태도가 나빠 3학년 때 퇴학당한다. 얼마나 불성실하면 학교에서 쫓겨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후 입대 통지서를 받는다. 그리하여 1962년부터 3년 동안 교도관으로 군 복무를 하게 되는데, 처음 열 달 동안 복무한 곳이 바로 이 책 <수용소>의 배경인 코미공화국이다. 레닌그라드 출신에 교양 있게 자란 대학생(이었던) 그에게 범죄자가 득시글한 수용소 생활은 말하지 않아도 꽤 끔찍했을 것이다. 도블라토프는 그런 곳에서 편지와 시(詩) 등 글을 쓰며 버텨나간다. 제대 후인 1960년대에 쓴 작품부터 미국 이민 후인 1980년대에 쓴 작품까지 집필 시기가 모두 다른 열네 편의 단편을 ‘편집장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묶은 것이 바로 이 책 <수용소-교도관의 수기>이다.

이쯤 이야기하니, 러시아 문학을 조금 아는 이들은 ‘또’ 수용소 이야기인가! 하고 혀를 찰 수도 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나 <수용소군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이 기록> 등을 이미 머릿속에 떠올린 이들도 있으리라. 도플라토프도 그런 상황을 인식했던지, 이 책 시작 부분에서 그런 상황을 언급한다. 이 <수용소>를 책으로 내고 싶다는 제안을 이미 두 번이나 퇴짜를 맞았다면서 너스레를 떤다. 거절당한 이유는 도블라토프 그 자신에게는 비극(?)이겠지만,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담담히 털어놓는 그의 목소리는 독자에게 왠지 모르게 웃음을 유발한다. ‘수용소 주제는 고갈됨, 끝도 없는 감옥 회상록에 독자들은 신물 남, 솔제니친 이후로 이런 주제는 끝났어야 했음.’ 이런 이유로 <수용소>는 여러 차례 출판을 거절당한 것이다.

도블라토프는 항변한다. 자신의 책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솔제니친은 정치범 수용소를 묘사하지만 자신의 작품은 형사범 수용소가 배경이라는 점을 첫째 이유로 든다. 실제로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는 정치범이나 사상범처럼 대단한(?) 범죄자는 하나도 없다. 그저 그곳에는 밀수꾼, 절도범, 국고횡령범, 환투기로 수감 중인 자, 살인자, 성추행범 등 막장 중의 막장인 범죄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두 번째로, 솔제니친은 죄수였지만 도블라토프 자신은 교도관이었다는 점을 든다. 교도관의 눈으로 수용소 생활을 관찰하고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보리스 알리하노프’ 사병이 도블라토프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도블라토프가 내세운 가장 큰 차이는 다음과 같다. 솔제니친에 따르면 수용소는 지옥 그 자체이다. 그러나 도블라토프는 이렇게 말한다. ‘제 생각에 지옥은 우리 자신들인데 말이죠.’ 그가 보기에 수용소에 갇힌 자들이나 교화하겠다는 일념 아래 그들을 관리하는 교도관이나 인간은 모두 ‘지옥’일 뿐이다.

인간 모두가 지옥이라면, 이 이야기는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그래서 읽기 고통스러운 작품이 아닐까, 게다가 살인자에 성추행범에 도둑 등등 밑바닥 인생을 살다 감옥에 갇힌 이들의 이야기니 얼마나 더 끔찍하랴 싶어서 굳이 이런 걸 읽고 싶지는 않아, 하고 꺼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추악하고 비루하고 저속한 속성도 분명 있지만 그런 이들 조차도 어떤 면에서 평범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인간의 모습은 지옥일지언정 그 개인 한 사람의 모습에는 때로 천국 같은 면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도블라토프는 이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범죄자들에게서 바로 그 ‘평범함’을 발견한다. 그에 비해 교도관들은 어떤 면에서는 범죄자들과 다를 바 없는, 때로는 그들보다 더 저속한 민낯을 보여주기도 한다. 도블라토프가 그리는 ‘수용소’는 말 그대로 ‘평범한’ 인간들이 모인 공간일 뿐이다.

도블라토프가 생각하기에 수용소는 삶과 동떨어진 특수 공간이 아니다. 단지 일상과 격리된 공간일 뿐, 그 안에서 생활하는 죄수들을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블라토프는 말한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 관심은 삶이지 감옥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지, 괴물이 아니고요.” 바로 이런 관점 때문에 이 작품은 기존의 러시아 문학에서 다뤄진 수용소와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심각하고 암울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도블라토프 특유의 심드렁한 유머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미소 짓게 만든다. 특히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는 빵 터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럼, 넌? 이 새끼야.”
“결혼했지.” 비극적이라는 듯 마르코니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아는 여자야?”
“아니, 나도 거의 모르는 여자. 너 많이는 안 변했네....” (37쪽)


더욱이 도블라토프는 ‘지옥은 우리 자신’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을 끔찍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사람들은 변합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변하죠. 좋은 쪽에서 나쁜 쪽으로든 그 반대로든 말입니다.’ 말하며 인간이 악한 것이 아니라,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사람은 변할 수밖에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그 나약함을 이해하고 연민 어린 시선을 보낸다. 수용소에서 도블라토프, 즉 ‘보리스 알리하노프’는 인생의 깊이와 다양성에 경악한다. 사람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를 보게 되고 처음으로 자유와 잔인함, 폭력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시(詩)와 같은 생각 없는 잔인함도. 습기와 같은 평범한 폭력도’ 목격한다. 그가 떨어진 세상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완전히 동물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린 사람도 있고, 서슬 퍼런 줄칼로 싸워 댔고, 개를 먹고, 문신으로 얼굴을 덮었고, 염소를 강간한 이도 있다. 차 한 봉지 때문에 살인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내와 자식들을 나무 드럼통에 넣고 절여 버린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이 수용소에 갇힌 자들을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다.

도블라토프가 보기에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는 맹인인 경우도 많고, 그런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그는 ‘사람을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으로 나누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공산당원과 무정부주의자로 나누는 것도 그렇고. 악인과 의인으로 심지어 남자와 여자로 나누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사람은 사회의 영향 아래 부지불식간에 변하기 때문이다. 수용소와 자유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기도 하다. 수용소는 정부를 꼭 닮았다. 특히 소비에트 정부와 닮았다. 수용소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즉 규율)가 존재하며 국민(죄수)과 경찰(경비대)을 보유하고 있다. 정당에 문화 산업도 있고, 국가로 귀속될 수 있는 것은 다 있다. 심드렁한 웃음 속에 이렇게 소비에트 사회를 수용소에 빗대면서 자신이 속했던 체제에 대한 쓴소리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후에 이 작품을 발표했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구린이 말했다.
“저들은 얼마나 많은 민중을 짓눌렀을까요?”
“누구 말입니까?” 나는 못 알아들었다.
“이 멍멍이들 말입니다…. 레닌과 제르진스키. 피도 회향도 없는 기사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구린을 신용할 수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대체적으로, 이 구린이란 자는 왜 이렇게 내게 솔직하게 구는 걸까…?
죄수는 진정하지 못했다.
“여기 나는, 예를 들자면, 절도로 살고 있죠. 모틸은, 가령, 몽둥이를 여기로 던진 게 아니고요. 게샤는 뭔가 여자 밀수꾼 정도고…. 보시다시피, 한 사람도 손에 피 묻히는 짓은 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이들은 러시아를 피로 불바다를 만들었는데도, 그래도 괜찮다….”
“글쎄,” 내가 말한다. “이미 과하십니다….”
“거기에 뭐가 그렇게 과합니까? 그들이 바로 모든 걸 피바다로 만들었는데….” (265~266쪽)


도블라토프의 <수용소>에서 죄수와 교도관은 똑같이 쌍욕을 섞어서 말하고, 똑같이 감상적인 노래를 부른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없는 처지에 꾹 참았고 심지어 그들은 서로 매우 닮아 보인다. 빡빡 깎은 머리, 거무죽죽한 얼룩으로 뒤덮인 다 튼 몰골, 마구간 냄새가 나는 군화, 멀리서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는 죄수복과 군복. 그들은 어찌나 닮았는지 자리 교체가 있었나 싶을 정도이다. 거의 모든 죄수가 경비 역할을 할만 했고, 거의 모든 교도관이 감옥에 있을 법하다. 그래서 어느 죄수는 이렇게 묻기도 한다. “여보세요, 나리님! 우리 중 감옥에 있는 건 누굴까 너 아님 나?” (232쪽). 악인도 선인도 없다고, 그저 환경에 따라 인간은 변하기 쉬운 아주 나약한 존재라고, 이것이 수용소 삶의 핵심이라고 도블라토프는 쓸쓸한 유머와 연민어린 시선으로 담담하게 전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0-08-03 1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양반 소설 정말 좋은데, 아쒸, 또 지만지! 책 구경하기가 겁나네요. 얼마나 비쌀지 말입니다.

˝얼마나 불성실하면 학교에서 쫓겨나는지 알 수 없지만˝.... 전 압니다. 연속해서 학사경고 두 번 먹으면 그냥 이해가 됩지요. 그래도, 제가 공부 하나는 잘 했던 것이, 그러고도 무려 8학기 만에 졸업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
제 주변에 학사경고 두 번에 8학기 졸업은 저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공부 잘 한 거 아녜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8-03 11:16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이 양반 책은 지만지에서만 출간할 모양인가 봐요. 전 그래서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었어요. ㅎㅎ

오, 폴스타프 님 공부잘한 모범생(?) ㅋㅋㅋ 전 대학 때 술쳐먹고 다니느라 학사 경고 즈음까지 간 성적을 1, 2학년 때 연달아 받았지요... ㅋㅋㅋㅋ 근데 폴스타프 님은 엄청나게 술 마셨을 거 같은데, 학사 경고를 두 번이나 받고도 8학기 만에 졸업하셨군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0-08-10 09:35   좋아요 0 | URL
폴스타프 님... 우리 악수 한 번 하십시다. 제가 학사경고 한 번에 또 한 번은 간신히 학고를 피했는데, 저 역시 8학기만에 졸업했습니다. 졸업식날 친구들이 ‘너 무슨 빽으로 졸업하냐!‘ 고 했더랬지요. 저에게 빽은 없었습니다. 그저 노력, 노력....만이 살길이었습니다. 이상 학고 맞았지만 노력했다 말하는 1인 드림.

Falstaff 2020-08-10 10:11   좋아요 0 | URL
좋습니다. 저는 이렇게 위안합지요.
친구들은 다 취업 공부하는데 혼자 전공 책 꺼내놓고 기말고사 준비하는 비감을 겪지 않고 인생을 얘기하는 건 말도 안 되며,
수십년이 지나도 기말고사에서 장렬하게 F 맞는 악몽을 꾸는 경험이 없으면 삶을 모르는 거라고요.
아, 그 시절의 노력, 노력이여. 답안지 제일 끝에, ˝선생님, D도 좋습니다. F는 절대 안 됩니다.˝라고 써야 했던 비장하고 개같은 젊은 시절이여.....
근데 이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모르겠습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8-10 10:14   좋아요 0 | URL
저는 친구들 모두 일주일에 한 두번 학교 나와 몇시간만 머물다 집으로 돌아가던 4학년 시절에, 매일 학교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1,2학년 수업을 같이 들어야 해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맨 뒤에 앉아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 하아-
어쩌다 한 번 수업 빠지면 과제를 물어보아야 하는데 차마 1,2학년 학생들에게 묻기 민망스러워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교수님께 달려가 물어야 했습니다... 아, 정말 힘든 시간이었어요. 4학년때 너무나 열심히 학교 다녔습니다. 그래봤자 졸업할 때 학점 평점은 2.0 이었습니다... 인생.....

잠자냥 2020-08-10 11:05   좋아요 0 | URL
아 이 사람들 증말 알라딘 서재에 쓰는 글만 보면 공부깨나 한 사람들 같은데 다 구라군요.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여기서 명함도 못 내밀겠습니다. 3,4학년 때 열심히 노력해서 졸업 평점 3.76까지는 끌어올렸는데 다락방 님 2.0 어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08-12 12:59   좋아요 1 | URL
아니.... 이 방 댓글 이거 어쩌면 좋아요. 정말 너무너무너무 재미지네요. 저처럼 한결같이 공부를 못하면서도 꾸준히 학교만 다닌 학생들에게는 완전 신세계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8-12 13:07   좋아요 0 | URL
어쩐지 단발머리 님은 모범생일 거 같았어요! (학교 잘가면 모범생ㅋㅋㅋㅋ) 이거 참 (남들 다 하는) 8학기 졸업모임이라도 만들어야 하는가. 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