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티그 을유세계문학전집 102
프랭크 노리스 지음, 김욱동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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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소설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한국인이라면 거의 알고 있을 김동인의 <감자>에서 그려지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돈과 성(性) 같은 욕망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다 마침내 타락하고 마는, 심지어는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타락의 끝판을 보여주는 인간군상들. 김동인이라는 작가 자체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이 짧은 단편의 자연주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수작임에는 틀림없다. 자연주의의 대가인 에밀 졸라의 수많은 작품들, <루공마카르 총서> 시리즈의 내용들도 하나 같이 이야기를 달리 할뿐 주인공들은 환경이 나빠지거나 좋지 못한 유전적 기질, 지나친 탐욕과 성적 욕망 등으로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에밀 졸라를 매우 좋아했고, 그의 작품을 본보기처럼 삼았던, 그래서 미국의 에밀 졸라로 불리는 ‘프랭크 노리스’의 <맥티그>에는 이런 자연주의 모든 특성이 담겨 있다. 주인공 ‘맥티그’는 폴크 거리에 기거하는 가난하고 투박한 치과 의사로 아주 커다란(동물처럼 느껴질 정도의) 덩치에 아둔한 머리, 타인 앞에 내놓기도 부끄러운 천박한 취향 등등 도저히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다. 여성은 물론이려니와 남성 사이에서도 그다지 친구로 삼고 싶지 않은 그런 인간 유형이랄까. 그런데 그토록 아둔하다는 이 인간이 어쩌다 치과 의사가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는 정식으로 치의학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어릴 적에 어쩌다가 치과 일을 하는 사람과 가깝게 지냈고 그 곁에서 이른바 ‘야매’로 치과 일을 익혔을 뿐이다. 얼마나 무식한(?) 치료법인지, 짐승 같은 엄청난 힘을 자랑하면서 이를 손으로 뽑아내기도 한다.

어쨌든 야매일지언정 치과 의사 기술을 갖춘 그는 크게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살아간다. 딱히 취향도 없어서 유일한 휴식이라는 게 그저 싸구려 음식을 먹고 스팀 맥주를 마시고 콘서티나를 연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뜻밖의 로맨스가 찾아온다. 친구 ‘마커스’가 이가 아픈 자기 사촌 ‘트리나’를 맥티그에게 보낸 것이다. 무엇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이 아둔한 남자는 ‘트리나’라는 존재에도 처음에는 무덤덤하기 짝이 없다. 왠지 귀찮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치과 치료라는 것이 어찌 보면 은근히 남의 속살(?)을 보고 만지게 되는 작업이라 이런 일을 거듭하는 사이에 맥티그는 트리나의 여성적인 매력에 서서히 굴복해간다.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 트리나가 매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맥티그를 도저히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 이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게다가 트리나와 마커스는 사촌이면서도 남들이 보기에는 공식적인 연인이나 마찬가지 사이다. 마커스도 트리나도 그걸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맥티그 같은 사람이 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있으랴. 그럼에도 사랑에 달뜬 맥티그는 마치 사자가 구석에 몰린 쥐 한 마리를 꿀꺽 집어 삼킬 듯한 태도로 트리나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이 끔찍한 남자의 고백에 낭만은커녕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 트리나는 덜덜 떨면서 빨리 치과를 벗어날 생각만 한다. 그 이후로도 맥티그를 생각할 때면 큼직하고 각진 머리, 두드러진 턱, 금발 머리카락다발, 둔하고 느릿한 몸, 잘 돌아가지 않는 아둔한 지능만이 떠오를 뿐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치료를 하러 치과에 자주 찾아갈수록 그의 육체적인 힘에는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끌려가는 것이다. 정말 동물적인 본능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에 이르는데,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더욱이 결혼과 동시에 트리나는 놀랍게도 복권이 당첨되어 5천 달러라는 큰돈이 생긴다. 트리나 같은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은커녕 로맨스도 꿈꾸지 못했던 맥티그가 결혼에 이어 아내가 복권에 당첨되어 5천 달러라는 돈까지 생기게 된 것이다. 이제 이들 앞에 펼쳐질 인생은 탄탄대로일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자연주의’에 근거한 소설이다. 그들은 애초에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으로 착각한 동물적 본능으로 결합한 부부이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큰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 이 두 가지 사실만 봐도 두 사람의 인생이 순탄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더라도 딱히 행복하지는 않을 것임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게다가 여기에는 ‘마커스’라는 인물도 존재한다. 그는 트리나를 선뜻 맥티그에게 ‘양보’하지만 트리나가 복권에 당첨되어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속으로 자신의 그 양보의 미덕을 크게 후회한다. 트리나를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 5천 달러는 내 손에 있을 텐데!(대체 왜 부인의 돈을 자기 돈으로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하며 그 날아간 기회를 몹시 안타까워하고, 그런 질투와 시기는 급기야 맥티그를 향한 증오로 변한다. 맥티그가 마커스 그 자신이 누려 마땅했을 행운을 모두 빼앗아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뜻하지 않게 주어진 5천 달러에 맥티그-트리나-마커스라는 기묘한 삼각관계는 이 세 사람의 인생을 예상 밖으로 이끌어 간다.

이 두 남자 사이에서 트리나는 희생양인가 싶지만, 트리나라는 인물도 두 남자와 견주어 별다를 바 없는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떤 면에서는 한결 더 기이하다. 5천 달러라는 돈이 생겼다면 마땅히 좀 더 누리고 살 것 같은데, 그녀는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 늘 돈을 아끼는 구두쇠이긴 했지만 복권에 당첨되고 나서는 특별히 더 인색해진다. 그녀는 그 엄청난 행운이 그들을 타락시키고 낭비벽에 빠지게 만들까봐 두려운 나머지 그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너무 멀리 가버린다. 5천 달러는 돈은 신탁으로 맡겨두고 이자만 받아서 살아가면서 전보다 더 전전긍긍하며 궁핍하게 살아간다. 그런 아내를 맥티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서서히 그녀에게 정나미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돈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트리나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러할 거 같다.


"아, 사랑스러운 내 돈, 사랑스러운 내 돈!” 그녀가 속삭였다. “널 너무 사랑해! 모조리 내 것이야. 동전 한 푼까지. 그 누구도 절대로 네게 손댈 순 없어. 절대로. 내가 널 얻으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노예처럼 일해서 너를 모았는데! 더 모아야지, 더, 더, 더 많이 모을 거야. 매일매일 조금씩.” (354쪽)


여기에 또 다른 기이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마리아’와 지독한 구두쇠인 유대인 노인 ‘저코우’ 커플이다. 이 두 사람은 처음에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조금 특이한 취미가 있었으니, 그녀는 늘 자신이 오래 전에 아주 호화롭게 살았으며 자기 집에는 황금 식기 세트가 있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다. 저코우 노인은 마리아에게 늘 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하더니 어느새 가까워져 마리아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가 반한 것은 결코 마리아가 아니다. 그녀가 들려주는 황금 식기 세트에 홀딱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이 기괴한 부부의 인생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다. 어차피 그 두 사람은 있지도 않은 황금식기에 미쳐 있기 때문이다.

<맥티그>에는 “이 모든 사건이 있지도 않은 황금 식기 세트 때문에 일어났다니.”라며 트리나가 한탄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있지도 않은 마리아의 ‘황금 식기 세트’는 트리나, 맥티그 부부 사이에도 존재한다. 5천 달러를 가졌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 큰돈. 그 돈 앞에서 맥티그와 트리나, 마커스 이 세 사람은 서로의 욕망에 충실하며 파국으로 치달아 간다. 좋지 못한 유전적 기질, 그런 이들에게 주어진 뜻하지 않은 큰돈, 인간의 끝을 모르는 탐욕. 나날이 나빠지는 생활환경. 그런 상황 안에서 인간은 얼마나 밑바닥으로 타락해 갈 수 있는지 <맥티크>는 섬뜩하게 그려나간다. 프랭크 노리스는 서른둘이라는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만일 그가 한 삼십년만 더 살았더라도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에 버금갈 작품을 여럿 남기지 않았을까 섣불리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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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8-05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멋진 리뷰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 하는 책이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리뷰를 보고
나니 굳이 읽...

암튼 낭중에 중고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구요.

잠자냥 2020-08-05 14:15   좋아요 0 | URL
제 리뷰는 이야기 초반에 속할 뿐입니다~ ㅎㅎ
나중에 중고로 나오면 꼭 한 번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