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으면서도 어쩐 일인지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읽노라면 신의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가톨릭 신도였고, 종교적 색채의 작품을 많이 써왔던 엔도 슈사쿠. 이런 소개만 보면,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잘 모르는 이들은 그가 신이나 믿음, 종교적인 구원의 문제를 강하게 주장하는 작품들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는 참으로 묘한 작가이다. 나처럼 종교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에게조차 엔도 슈사쿠의 작품은 별 거부감 없이 읽힌다. 게다가 시간이 조금 흐르면 또 다른 작품을 찾아 읽고 싶어진다.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신이 정말 존재할까 잠시 생각해 보기도 하고, 믿음이라는 게 무얼까 고민해 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엔도 슈사쿠가 작품 안에서 강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을 통해 종교적 믿음을 설파하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는 나약하고 평범한 인간들이 등장한다. <바보>에는 더 그런 인물이 나온다. 너무나 순수해서 ‘바보’처럼 보이는 인물.
<바보>는 엔도 슈사쿠의 작품 중 조금 특이하게 느껴진다. 첫 장면부터 색다르다. 평범한 일본의 가정집을 배경으로 아침부터 입씨름하는 남매의 모습이 그려진다. 똑똑하고 빈틈없을 것 같은 누이 ‘도모에’와 게으르고 철없는 ‘다카모리’가 아침부터 남매간에 흔한,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말다툼을 벌인다. 그런데 그날따라 다카모리에게 뜻밖의 편지가 오고, 편지 속에는 놀라운 일이 쓰여 있다. 오래전 다카모리가 잠시 펜팔 친구로 사귀었던 프랑스의 한 청년이 무턱대고 일본에 온다는 내용이 아닌가. 그렇다면 생면부지의 외국인 청년을 이 집에서 머물게 해야 한단 말인가? 도모에는 못마땅하다. 다카모리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기 앞으로 편지를 보낸 이 친구를 외면할 수도 없어서 그를 마중 나가기로 한다. 생각해 보니 그의 이름은 ‘가스통 보나파르트’로 무려 나폴레옹의 후손이다. 이 이야기에 도모에를 비롯한 집안 식구들은 호기심이 증폭한다. 나폴레옹의 후손이 우리 집에 손님으로 온다고?
오빠 다카모리를 비롯해 자기 또래 일본 남자를 모두 한심하게 여기던 도모에는 나폴레옹의 후예라는 말에 솔깃해한다. 나폴레옹 황제의 후예라면 왠지 우아하게 잘생긴 얼굴에, 어딘가 늠름한 매력을 발산하는 남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가장 낮은 등급의 선실을 이용해서 저 먼 프랑스에서 일본까지 온 나폴레옹의 후예 ‘가스통’의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옷차림이야 그렇다 쳐도 생김새가 영 아니올시다. 모든 점에서 꽝이다. 완전히 한 마리의 말을 닮은 기다란 얼굴. 꼭 도깨비 모양의 참마처럼 생겼다. 굳이 외국 배우와 비교해야 한다면 희극배우 ‘페르낭델’과 닮았다고나 할까. 게다가 행동거지는 또 얼마나 굼뜨고 어리숙한지 지켜보노라면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다. 가스통을 자기 집까지 불러들인 체면도 있어서 다카모리는 계속 가스통을 과대평가하려고 애쓰지만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딱 어린 아이 수준의 정신 연령이다. 나폴레옹은 무슨 나폴레옹의 후예,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어쨌든 먼 나라에서 찾아온 손님이니 다카모리 집에서는 가스통을 환대해주고 그에게 일본의 재미난 곳을 소개해주고자 늦은 밤 환락가로 그를 이끈다. 그런데 그는 참 이상하다. 유흥에도 도무지 재미를 못 느끼는 데다가 일본을 찾은 외국인이라면 마땅히 호기심을 느끼고 좋아할만한 도쿄타워 같은 관광코스도, 가마쿠라의 대불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오직 그가 일본에서 흥미를 느끼거나 관심을 갖고 쳐다본 것은 주인 없는 길거리의 불쌍한 개 한 마리나 어린애들 밖에 없다. 환락가에서 괜히 시비 거는 일본인들에게 두들겨 맞고도 그는 바보처럼 웃기만 한다. 덩치는 산만 한 이가 자기보다 작은 일본인들에게 맞으면서도 한 대 때릴 줄 모른다. 그는 정말 바보가 아닐까 의심이 들 즈음에 뜻밖에도 가스통은 다카모리네 집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일본 사람들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다고, 여러 종류의 일본인을 만나고 싶다는 이유가 전부이다.
그렇게 가스통은 다카모리의 집을 나와서 떠돌이와 다름없는 생활을 시작한다. 가진 돈이 많지 않아 주로 허름한 여인숙을 찾아다니다 보니 뜻밖의 사건, 사고에 휘말리게 된다. 주로 하층민들과 얽히면서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그의 삶은 흘러간다. 다카모리와 도모에 남매는 가스통이 집을 떠나니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럽다. 그 어린아이 같은 외국인이 일본에서 잘 버텨나갈지, 대체 왜 일본에 왔을지 궁금해 하면서 그의 행적을 뒤쫓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스통의 뒤를 쫓으면서 도모에와 다카모리는 그에게 서서히 ‘엄마가 불구의 자식에게 느끼는 애련함’이라고 할 수 있는 느낌을 갖게 되고 조금씩 연민을 느끼게 된다. 다카모리의 경우에는 조금 더 이 감정이 남달라서 가스통 같은 순수한 남자를 세상이 망가뜨릴까봐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바보>는 가스통이라는 이 말도 안될 만큼 순수한, 그래서 때로는 백치처럼 보이기도 하는 남자의 행적을 쫓으며 신과 인간, 믿음과 구원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작품은 작가가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가스통의 삶의 추적하는 형식으로 썼어도 됐을 법하다. 그런데 다카모리와 도모에라는 너무나 평범한, 도저히 소설 속 주인공으로는 삼을 것 같지 않은 두 인물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엔도 슈사쿠는 이렇게 평범한 인물들의 시선으로 (그들보다) 못나 보이지만 어쩌면 그런 그들이 지니지 못한 고결한 속성을 지녔기에 예수 또는 신의 모습을 닮은 가스통이라는 인물을 뒤쫓게 한다. 그들은 차츰 이 못난 바보 가스통에게 감화 받는다. 이런 구조로 작가는 보통의 인간 안에 깃든 선한 본성이라든가 믿음의 문제를 촉발해 나간다.
나폴레옹의 후예라는 가스통은 왜 고국을 떠나 일본에 왔을까? 언뜻 그의 과거가 스치듯 그려진다. 가스통이 태어난 사부아 지방에서는 얼간이 같은 사람을 포플러나무라고 부른다. 포플러는 성냥 만드는 데만 쓰일 뿐, 재목이나 기둥으로는 쓰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스통의 친구들은 그를 포플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런 세상에서도 가스통은 사람들을 믿고 싶어 한다. 지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나폴레옹처럼 영리하고 강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이 세상이 영리하고 강한 사람만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나 자기를 따르는 늙은 개와 같은, 약하고 슬픈 사람에게도 무언가 보람이 있는 삶의 방법이 가능하지 않을까 고민하며 이 낯선 땅에서 그런 삶의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가스통은 일본 곳곳을 떠돌며 어떤 사람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만의 계율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이란 그리 강하지 않다. 번번이 흔들린다. 흔들릴 때마다 그는 믿자고, 속는다고 해도 믿자고 자신을 다그쳐 나간다. ‘의심이 너무나도 많은 이 세계, 서로 상대방의 속마음을 캐려 들고 절대로 상대의 선의를 인정하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 문명이나 지식’을 가스통은 먼 바다 저쪽에 버리고 일본에 왔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을 믿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스통의 이 인간이라는 변하기 쉬운 존재를 ‘믿고자 하는 일’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도모에는 우리 인생에서 바보와 위대한 바보라는 두 가지 말이 어떻게 다른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꾸밈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꾸밈없이 모든 사람을 믿으며, 비록 자기가 속고 배반을 당해도 그 신뢰와 애정의 등불을 계속해서 지켜나가는 사람, 그 사람은 요즘 세상에서 바보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다.... 위대한 바보인 것이다. 자신의 몸을 태우면서 발산하는 작은 빛을 사람들의 인생에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비추는 위대한 바보이다. (<바보>, 254쪽)
가스통을 지켜보노라면 답답해진다. 너무나 바보 같아서 울화통이 치밀기도 한다. 사람을 믿는 일이 그렇게 쉬울까? 믿을 만한 사람을 믿어야지! 속으로 소리치게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믿을 만한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회의가 들기도 한다. 가스통 같은 사람은 분명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질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상은 그러하니까. 왜 사람을 믿지 않느냐는 가스통의 말에 “내가 믿지 않는 게 아니야. 다른 놈들이 나로 하여금 사람들을 믿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린 거지.”(165쪽)라고 말하는 살인청부업자 ‘엔도’의 말처럼 나 또한 이 세상에 무언가를 믿는다는 말이 얼마나 맹목적이고 바보 같은 일인가 마음속에서는 자꾸 반감이 치솟는다. 착한 사람이라든가 호인이라는 말은 눈 감으면 코 베어 갈 이 사회에서는 결국 바보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하는 도모에의 말에 더 공감이 간다. 엔도의 말처럼 세상은 선의가 온전하게 통하는 세상이 아니고, 애정이라든지 신뢰라든지, 이런 말들은 그저 쓰기 편하니까 쓰는 표어 같은 말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살인청부업자 엔도가, 도모에가 가스통에게 서서히 감화되듯이, 아니 감화라기보다는 자기도 모르게 가스통의 그 무엇에 이끌리듯이 나도 이 <바보>라는 작품에서 울컥 무언가 느끼기 시작한다. 이런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어? 이 무슨 동화 같은 이야기인가 코웃음을 치다가도 바보 같은 이 남자, 인간의 나약함과 모자람에 한없는 연민의 마음을 품고 그 못난 인간을 끝까지 믿어보고자 애를 쓰는 이 바보 같은 가스통의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가스통 자체가 위대하지 않기에, 위대하기는커녕 걸핏하면 울어대고 겁쟁이에다가 남들이 다 무시할 만큼 어리숙한 인간이기에, 그럼에도 그 약함을 짊어지고서 열심히 제 나름대로의 삶을 아름답게 꾸려가려는 모습에 끝내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다가 끝내 이 가스통의 모습이 신이 인간에게 품는 마음과 같다면, 신의 아들 예수가 인간을 향해 품은 마음과 같다면 신이라는 존재는 한번쯤 조용히 믿어 봐도 괜찮은 그런 존재가 아닐까 내 마음속에서도 희미한 믿음 같은 게 싹트기도 한다. 엔도 슈사쿠의 문학의 힘은 늘 이처럼 조용조용 속삭이는데도 깊고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