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사바하틴 알리 지음, 이난아 옮김 / 학고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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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책을 읽다가 곧잘 울었다. 눈물이 많은 편이기도 했지만 아름답거나 슬프거나 불쌍한 것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부터 맺혔다. 지금도 대책 없이 울 때가 있는데 내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여느 사람들과 좀 다르다.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눈물이 솟구치는 때가 많으면서도 유독 ‘사랑’이야기에는 울지 않는다. 특히나 감동적이기를, 순애보이기를, 신파이기를 작정하고 쓴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오히려 팔짱을 끼고는 비판하는 태도로 읽으니 더 감정 이입이 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꽤 감동하면서 읽었다는 사랑 이야기를 읽고 눈물을 흘린 일은 드물고, 그런 작품을 좀처럼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런 내가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읽으면서는 울컥 무언가가 치밀더니 정말 뜨겁게 울어버렸다. ‘라이프 에펜디’ 그의 회한과 그의 어리석음. 그의 절망과 그의 한숨. 그의 고통과 그의 눈물이 모두 나의 것인 듯 느껴져서 걷잡을 수 없었다.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그녀의 삶이 어떤 면에서는 한없이 가엾어서 눈물이 났다. 라이프와 그의 마돈나 ‘마리아 푼데르’ 두 사람 모두 애처로워서 더 슬펐다. 아, 이 어리석은 사람들….


터키 문학은 아직까지는 내게 낯선 영역이다. ‘오르한 파묵’ 정도나 알까? 그런데 나는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대단한 작가임은 알겠는데, 왠지 내 취향에는 잘 맞지 않는 그런 작가 있지 않은가. 오르한 파묵이 내게는 그렇다. 그러던 터에 ‘사바하틴 알리’ 그를 이렇게 뒤늦게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너무 늦게 찾아왔다. 아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찾아왔다.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로. 이 작품을 읽다보면 라이프가 마리아의 자화상을 보고 첫눈에 반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탕달 신드롬’과도 같은…. 그런데 내가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읽으면서 라이프가 마리아의 자화상을 보면서 받았던 그런 충격을 고스란히 느꼈다면 과장일까.


사바하틴 알리, 그는 왜 이토록 늦게 찾아왔을까? 감시와 검열이 심한 체제, 터키 정부로부터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혀 온갖 억압을 당하던 그는 조국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게 되자, 국경을 넘어 불가리아로 망명을 결단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터키 정보국 소속으로 짐작되는 극우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때는 1948년.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출간한지 5년이 흘렀을 즈음이었다. 그는 그렇게 목숨을 잃었고 시신 또한 죽은 지 두 달이 지나서야 발견되었지만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는 반세기 이상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전해지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 터키 출판 시장에서는 여러 해 1위 자리에 올랐으며 2016년에는 영미권에 소개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11월,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 보면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라는 제목은 독자가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치명적인 여인에게 반해서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다가 결국은 어쩐지 버림 받는, 왠지 행복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랑을 한 불쌍한 남자의 시점으로 그려진 이야기일 것 같다. 나조차도 제목과 책표지를 봤을 때는 이런 예상을 했고 그런, 어쩌면 진부한 사랑이야기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않는 터라, 처음에는 이 작품을 외면했다. 그런데 알라딘 추천 시스템이 자꾸만, 이 책 한 번만 눈여겨 봐달라고 들이미는 게 아닌가. 아, 정말 귀찮게 하네, 어떤 작품이기에 그러는지 자세히 정보를 읽다 보니, 장바구니에 이 책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를 소개하는 글을 읽으면서 호기심이 발동했고, 미리보기로 책을 몇 장 넘겨 읽다 보니, 왠지 한 번은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았다. 단 몇 쪽 만으로도 문장이라든가, 그 문장 곳곳에 담긴 의미가 ‘그저 단순한 사랑이야기’는 아닐 듯싶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예상은 꼭 맞아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절반쯤 읽었을 때 이미 올해의 발견이다, 발견, 이런 흥분에 휩싸였다.


은행 말단 직원으로 일하다 어느 날 갑자기 해고당한 나(‘라심’)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려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만 번번이 퇴짜만 맞고 곧 완전히 곤궁한 상태가 되고 만다. 이때 우연히 만난 옛 친구 ‘함디’의 도움으로 새 일자리를 얻게 되고 그곳에서 동료로써 ‘라이프 에펜디’를 알게 된다. 그를 지켜볼수록 그가 남들과는 무척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라심. 어느 날 그가 그린 그림을 우연찮게 보고 나서는 ‘라이프 에펜디’에 대한 호기심은 호감으로 변한다. 그렇게 서서히 ‘라이프’와 가까워지면서 그가 어쩌다 그토록 삶에 무심한 사람이 되었는지, 그리하여 그저 목숨만 붙어 있는 존재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그의 비밀에 조금씩 다가서게 된다.

라이프가 무척이나 오랜만에 마음을 열게 된 존재인 라심에게 자신의 노트를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하고, 그 노트를 통해 라심은 라이프의 지나간 삶을 만나게 된다. 그 노트 속에서 라이프와 마리아의 통렬하고도 절절한 사연이 펼쳐진다. 이렇듯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는 액자식 구성인데, 중심 이야기인 라이프와 마리아의 사연은 말할 것도 없고, 액자 밖 이야기 라이프와 라심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처음에 라심은 라이프를 그저 ‘피상적’으로만 알아간다.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의 남들과 조금 다른 면모(삶을 초월한 듯한 태도)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호기심 및 호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에게 서서히 다가간다.

그런데 이런 구조는 라이프와 마리아의 관계에서도 조금 모양을 달리할 뿐 비슷한 형태로 반복된다. 라이프가 마리아를 우연히 알게 되고 호감을 느끼는 장면들이 라심이 라이프에게 느끼는 그것과 강도만 다를 뿐 형태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가련하고, 심지어 가장 바보 같은 사람도 깜짝 놀랄 만큼 복잡한 영혼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 ‘이러한 내면을 헤아리려 하지 않고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섣불리 이해하고 손쉽게 판단’하고 만다. 라심이나 라이프나 그들 모두 그렇게 라이프를, 또는 마리아를 쉽사리 자신의 잣대만으로 판단하고 다가선다. 어쩌면 마리아 또한 라이프에게 그러했으리라. 이렇게 시작된 관계는 그들 인생에 저마다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라심에게 라이프가 그러했고, 라이프에게는 마리아가, 마리아에게는 라이프가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자신만의 시선으로 호감을 느끼며 다가서고, 인간관계를 맺어서 그 관계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면 그들은 행복감에 젖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리라. 하지만 그 관계가 틀어지는 것 또한 이처럼 섣부른 자기만의 판단(오해 또는 망상)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라이프가 바로 그런 씻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결백한 사람에게 저지르는 가장 큰 배신이며, 그러한 죄악을 저지른 나는 절대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것’(291쪽)을 비로소 깨닫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유폐해버리지만 이미 너무나도 늦었다.

‘라이프’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이 바보! 하면서 가슴을 치게 된다. 그 가운데 압권은 그가 다시 터키로 돌아가기로 하는 장면이다. 진심으로 이 답답한 사람을 어이할꼬 싶어진다만, 동양 그것도 이슬람 문화권에 속한 남자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마리아와 그런 면에서 또 한 번 좁힐 수 없는 차이 또는 간극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바로 그 장면에서 대부분은 그의 선택을 말리고 싶어지리라. 왜냐하면 그가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 사건은 결국 운명이 우리를 희롱하는 ‘진부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임을 모두가, 어쩌면 라이프 그 자신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진부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에 희롱당하는 장난감일 뿐이며, 진짜 삶은 이런 평범하고 하찮은 사건 조각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익히 보아왔다. 우리의 논리와 세상사의 논리는 절대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여자가 기차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창틈으로 석탄 부스러기가 날아와 눈에 들어가고, 여자는 무심하게 눈을 비빈다. 이렇게 평범하고 사소한 사건들이 맞물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을 멀게 할 수도 있다. (250쪽)



라이프가 그토록 마리아를 사랑했음에도 끝내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불멸의 그 마돈나를 잃고 마는 까닭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을 멀게 하는’ 그 평범하고 사소한 사건들 때문이다. 대부분의 모든 평범한 사람들 삶 또한 그러하기에 그의 이야기는 통렬하게 가슴을 울린다. 그 어느 누구에게나 삶에서 한 번쯤은 ‘마돈나’와 같은 존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한 순간의 ‘석탄 부스러기’와도 같은 사소한 일들로 그런 존재를 가졌다가도 놓쳐버리고 만다. 거기에서 삶의 온갖 비애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야기가 그저 단순한 ‘러브스토리’로만 읽히지 않는 것이다.


라이프의 ‘마돈나’와도 같은 존재를 단 한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었던 사람,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행복하게 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125쪽) 이런 심정을 단 한 번이라도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바하틴 알리의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절대로 쉽게 읽고 쉽게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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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8-01-24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어도 눈시울이 따뜻해지는데요... 맘도요...

잠자냥 2018-01-24 14:0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ㅎㅎ 그런데 책은 아마 훨씬~~ 좋으실 거예요.
 
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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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사건은 21세기의 타락한 남성성, 남성들의 독재, 흉측한 부성, 좀처럼 죽지 않는 가부장제의 유령을 드러냈다. (<레티시아>, 448쪽)


새해 들어 처음으로 읽기를 마친 책, <레티시아>가 꽤 마음을 무겁게 한다. 물론 이 책은 지난해 말에 읽기 시작했던 터라 굳이 새해에 읽고자 집어 들었던 책은 아니다. 새해 첫 책으로 골랐다면 아마 조금은 밝고 희망적인 책을 읽지 않았을까. 그런데 <레티시아>는 어둡고 암담하며 마음이 아프다. 그럼에도 <레티시아>는 좋은 책이다. 지난해 여름에 사두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2017년에 읽었다면 2017년의 좋은 책 목록에 올리고도 남았을 것 같다.


<레티시아>는 2011년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이른바 ‘레티시아 사건’을 소재로 한 르포 문학이다. 열여덟 살 소녀가 실종되었고 잔인하게 죽임 당했다. 범인은 곧 잡혔지만 죽은 소녀의 시체를 찾는 일은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레티시아>는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이반 자블론카’가 그 사건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온갖 관련자를 인터뷰하여 사건과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삶을 재구성하여 완성해냈고 이 책으로 2016년에 프랑스 메디치상, 르몽드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레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가 떠오른다. 그 작품 또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인터뷰하고 기록하면서 써낸 르포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티시아>가 카포티의 그것과 다른 점은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죽임을 당한 소녀 ‘레티시아’와 더불어 그녀의 쌍둥이 언니 ‘제시카’의 삶을 그리는데 더욱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어떤 잔혹한 범죄가 일어나면 미디어는 범죄와 그 범죄를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중심으로 그/그녀가 얼마나 흉악한 인물인지 보도하기에 바쁘다. 요즘 이 땅을 뒤흔든 몇 건의 끔찍한 사건들- 십대가 유치원생 아이를 납치해 잔혹하게 살인한 사건, 이영학 사건, 자신의 아이를 친부가 죽여 놓고도 마치 살아있는 듯 연기를 하며 급기야 실종 신고까지 한 사건을 보라. 피해자는 사라지고 범죄를 저지른 이의 가정환경, 생활형편, 평소의 취미 생활 등등이 낱낱이 까발려지면서 그들이 얼마나 엽기적이고 잔혹하며 흉악한지 보도하기에 바쁘다. 그래야만 대중의 분노와 함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전율하면서 읽었지만 솔직히 어떤 부분에서는 불쾌감이 들기도 했다. 카포티는 범죄자들의 인간 내면을 묘사하는데 놀랍도록 치밀했다. 그들을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자 했고 그러다 보니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미화하기도 한다. 특히 ‘페리 스미스’에게는 카포티가 틀림없이 개인적 감정(그것이 연민이든 사랑이든)을 가졌으리라 짐작되고, 바로 그 때문에 그 잔혹한 범죄자가 때로는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레티시아>에도 레티시아를 죽인 끔찍한 범죄자 ‘토니 멜롱’의 이야기가 나온다. 토니 멜롱 또한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청소년기에 작은 범죄를 저지른다. 그로 말미암아 감옥을 드나들게 되고, 점점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그렇게 범죄와 술, 마약으로 이어지는 생활에 젖어들면서 정상인의 삶의 궤도를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끝내 한 소녀를 잔혹하게 납치하고 살인하게 된다. 그런데 그 시선은 감정을 배제한 기록에 가깝다. <레티시아>의 주인공은 절대로 가해자 ‘토니 멜롱’이 아니라 피해자 ‘레티시아’임을 이 책을 읽는 내내 알 수 있다.


이반 자블론카는 ‘내 책에는 단 한 명의 주인공, 레티시아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녀에게 갖는 관심은 마치 은총으로의 복귀처럼, 그녀의 본모습과 존엄성과 자유를 그녀에게 되돌려 줄 것’(9쪽)이라면서 이 책이 ‘토니 멜롱’이 아니라 ‘레티시아’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그녀가 죽은 뒤에도 미디어의 희생자로서 남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에 드는 곳에 처박혀서 마치 없는 듯이 지내는 레티시아’(11쪽)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자의 이런 태도 때문에 독자는 <레티시아>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한 소녀의 안타까운 삶에 더 주목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레티시아 사건을 ‘21세기의 타락한 남성성, 남성들의 독재, 흉측한 부성, 좀처럼 죽지 않는 가부장제의 유령을 드러’낸 사건으로 정의 내린다. 남성(들)에 의해 삶이 무너지고 파괴되다가 끝내 잔혹하게 죽임 당한 전형적인 ‘여성 혐오 범죄’라고 말한다. 이반 자블론카의 이러한 주장은 ‘레티시아’와 ‘제시카’ 쌍둥이 자매의 삶을 들여다보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레티시아(그리고 제시카)의 삶에는 ‘세 가지 부당함이 있었다. 하나는 폭력적인 친아버지와 기만적인 위탁가정 양부 사이에서 보낸 유년기, 다른 하나는 18세의 나이에 맞은 잔혹한 죽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건사고 기사, 즉 죽음의 구경거리로의 전락이 그것’(193쪽)이다.


레티시아와 제시카는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친아버지인 ‘프랑크 페레’는 술에 취해 툭하면 아이들과 아내를 학대하는 매우 폭력적인 아버지였다. 때로는 레티시아와 제시카를 던져버리기(!)도 하고, 아내를 협박할 용도로 아이들을 이용한다. 그런데다가 아내에게는 잦은 폭력과 강간이 이어졌다. 결국 레티시아와 제시카의 엄마인 ‘실비 라르셰’는 심리적인 죽음을 맞이하고는 우울증 등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프랑크 페레는 감옥까지 드나들고 엄마는 아이들을 돌볼 상태가 전혀 되지 못하고…. 이런 상태에서 쌍둥이 자매는 위탁가정에 맡겨진다.


그런데, 그 위탁가정에서도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물론 그 가정은 평화로웠고, 좋은 추억도 많았다. 하지만 그 평온함 아래는 또 하나의 끔직한 비극이 숨어 있었다. 위탁가정의 양부로부터 두 자매는 온갖 성추행을 당한 것이다. 제시카의 경우가 특히 더 심했다. 제시카는 이 가정에 완전히 입양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양부의 성추행을 묵묵히 견딘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동생은 살해당하고, 위탁가정은 해체되고, 양부의 범죄를 털어놓은 죄 아닌 죄로 위탁가정의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제시카,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동생, 입양가정, 순결, 삶의 기쁨, 익명성 그리고 평온을. 그녀는 동생이 죽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이 파트롱 씨의 노리개였다는 걸 알게 된 가족이 위기를 맞은 후에야 침묵을 깨기로 결정했다. 청소년기 내내 그녀는 가족의 사랑과 안정적인 생활, 그리고 어딘가 있을 곳에 대한 바람의대가로 위탁가정 아버지의 추행을 견뎠다. 약간의 애정과 자신의 몸을 맞바꾼 것이다. (398쪽)


<레티시아>를 읽다보면 레티시아의 가정뿐만이 아니라, 범죄자인 토니 멜롱의 가정, 그리고 레티시아의 아버지였던 프랑크 페레의 가정 등 거의 모든 집안에서 폭력적인 아버지와 학대 받는 어머니 구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가장 정상적으로 보였던 레티시아의 위탁가정 또한 결국 그 집안의 가장인 ‘질 파트롱’의 지속적인 성추행(위탁가정으로 왔던 소녀들은 레티시아와 제시카만이 아니었다. 질 파트롱은 나머지 다른 소녀들에게도 성추행을 지속적으로 해왔음이 밝혀졌다)이 있었다. 이반 자블론카는 이렇게 프랑스의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학대받고 죽임 당하는 여성들의 삶을 폭로하기도 한다.



부부 사이에 있어서 폭력은 반복되는 모욕, 위협적인 행동, 희롱, 정서적인 협박, 심리적 압박, 아이들에 대한 위협, 강제적인 성관계, 따귀 때리기, 구타, 가혹 행위 등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그 목적은 상대를 지배하고 자신에게 예속시키는 것이다. (.......) 프랑스에서는 교살되거나 총에 맞아 죽은 가정주부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수십 통의 욕설 문자메시지의 표적이 되었다가 끝내 맞아 죽은 전처들, 성관계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칼에 찔려 죽은 여성들이 해마다 100명 이상이나 나온다. (36쪽)


레티시아는 유년기 때부터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 내에서 친부와 양부에게 구타와 학대 성추행 등 온갖 폭력을 당하다가 끝내 사회에서 만난 남자에게 납치되어 잔혹하게 살해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반 자블론카는 명백히 레티시아의 죽음이 남성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끝내 죽임까지 당하고 마는 전형적인 ‘여성 혐오 범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레티시아는 구타당하고, 칼에 찔리고, 목이 졸렸다. 그녀의 시신은 금속 톱에 의해 토막이 났고, 쓰레기통에 담겨 있다가 물에 던져져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 레티시아는 ‘과잉 살해’를 당했다. 몇 시간 만에 생기발랄한 소녀가 살덩어리, 피투성이가 된 사지, 잘린 머리, 시멘트 블록이 달린 몸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소멸이, 중단된 구강성교로부터 시작된 시퀀스를 매듭지었다. 그녀의 내면에 굴복해야 할 여성이, 깔아뭉개고 파괴되어야 할 여성이 있다는 점에서 레티시아는 여성으로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처벌이자 동시에 복수이기도 한 레티시아 살해는 여성 혐오 범죄이다. (429쪽)


<레티시아>를 읽노라면 그녀의 죽음이 단순히 저 먼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일뿐이라고 치부할 수 없어진다. 이런 사건은 전 세계 여성,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비극임을 알기 때문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라고 말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 못하는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게 어떻게 여성 혐오 범죄이냐고 묻는다. 정말 이해를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범인은 그 화장실에 들락거린 수많은 남성들은 그냥 둔 채 한 여성만을 죽였다. 더더군다나 그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레티시아를 죽인 토니 멜롱 또한 레티시아가 자신에게 ‘No’라고 말한 순간 분노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욕망이 레티시아의 거절과 함께 좌절되자 더 이상 그 소녀를 지배할 수 없음에 분노하여 살인을 저질렀다. 토니 멜롱의 어머니가 만일 자신이 아들에게 ‘No'라고 했다면 아들은 자신조차 죽였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점은 그러므로 의미심장하다. 이런 남성들의 폭력성에 이반 자블론카는 크게 분노하고 개탄한다.


남성적인 의미로서의 인간은 더 나쁜 존재다. 가끔 내가 제시카의 곁에서 거북함을 느끼는 것은 내가 남자이기 때문이고, 그녀가 살아오는 내내 남자들이 그녀에게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다. 남자들, 분란이 생기면 커터 칼로 해결하는 것도 남자이고, 당신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남자이고, 당신이 들고 있어야 하는 키친타월에 정액을 쏟는 것도 남자이고, 당신을 칼로 찌르는 것도 닭의 목을 자르듯 당신의 목을 자르는 것도 남자이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당신은 쾌락의 대상, 노리개일 뿐이다. 또한 장관들, 지도자들, 텔레비전에 나와서 떠드는 사람들, 알고, 명령을 내리고, 옳은 사람들, 당신에 대해, 당신의 위에서, 당신의 속에서, 당신을 통해 말하는 사람들도 남자들이다. 결국 언제나 남자들이 이긴다. 그들은 당신을 자기들이 원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까닭이다. 처음으로 나는 나의 성이 수치스러워졌다. (445쪽)


책을 덮고 나서도 ‘레티시아’나 ‘제시카’ 쌍둥이 자매의 사진을 찾아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범죄자인 ‘토니 멜롱’이나 ‘질 파트롱’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알라딘에서 이 책과 관련한 리뷰들을 보다가 그만 ‘레티시아’의 사진을 보고 말았다. 정말 앳된, 평범한 소녀의 웃는 얼굴에 더 마음이 시렸다. 열여덟 짧은 생을 남성들의 온갖 폭력에 시달리다가 결국 참혹하게 죽은 소녀. 그녀가 이제는 정말 평온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남겨진 쌍둥이 제시카의 앞으로의 인생은 부디 폭력에 더 이상 희생되지 않기를. 그저 행복하기를 바라게 된다. <레티시아>는 이렇게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삶과 죽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피해자를 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가진 존재로 바로 세운다. <레티시아>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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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한 악마 창비세계문학 27
표도르 솔로구프 지음, 조혜경 옮김 / 창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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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는 바다에서는 끊임없이 보물이 나온다. 물론 보물을 건지는 일은 전적으로 탐험가의 손에 달렸다. 탐험가가 보물이 파묻힌 곳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그는 보물을 건질 확률이 다른 이들보다 더 높을 것이다. 문학의 영역에서 보물이 있을 만한 지역을 골라본다면 러시아는 절대 어느 지역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널리 알려진 수많은 러시아 작가의 이름을 나열하는 일이 지금 의미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러시아 작가 이름을 대보라고 한다면 당신 또한 적지 않은 이름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표도르 솔로구프. 이번에는 이 이름을 그 바다에서 건졌다. 사둔지는 꽤 되었는데, 미루다가 이제야 읽었다. 가장 큰 소감은 ‘러시아라는 바다, 문학의 보물창고’ 와도 같은 그곳에 대한 감탄이었다. 이런 작가가 숨어(?) 있었다니! 아니, 숨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내가 미처 몰랐을 테니까. 이 새로운 작가를 읽게 된 계기는 순전히 뒤표지에 쓰인 문구 때문이었다. ‘인간 내면의 비열한 악마성과 추악한 현실 속, 악의 형상화 도스토예프스키를 잇는 가장 완벽한 러시아 소설’


책장을 펼치자마자 의미심장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난 사악한 여자 마법사를 불에 태우고 싶었다.’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착한 소설, 감동으로 독자를 감화할 작품은 아니라는 느낌이 확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1장부터 <허접한 악마>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굉장히 ‘고약한 소설’이다. 시작부터 인간의 온갖 비열하고 추접한 근성이 여과 없이 폭로된다. 아니, 폭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일상생활 속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어떤 장소에 이런 인간들만 모여 있다면 정말 단 한 시간이라도 그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뛰쳐나올 것만 같다. 그런데 사실 잘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런 속성을 지니지 않았던가? 단지 그러지 않은 척, 잘 포장하고 있을 뿐.


그런데 <허접한 악마>의 인물들은 그런 포장을 모른다. 악하고 못된 모습 비열하고 야비하고 저속하고 이기적인 온갖 모습을 ‘그냥’ 드러낸다. 주인공인 중학교 교사 ‘뻬레도노프’는 그중 단연 독보적이다. 이 인간은 장학사가 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꿈이다. ‘그는 어찌 되었든 간에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았고 사람들을 싫어했으며 자신의 이익 및 만족과 연관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19~20쪽)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자유사상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책이 보이도록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어떠한 견해도 없었고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88쪽)은 그런 인간이다. 다음과 같은구절을 읽노라면 그의 인간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뻬레도노프는 천상에서 전해지는 이런 낯선 풍경 가운데 더럽고 무기력한 지상의 거리들과 집들이 풍기는 나른함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 때문에 지쳐갔다. 그는 숭고함도 지상에서의 어떤 위로도 찾지 못했다. 지상의 고독 가운데에서 두려움과 애수에 지친 악마처럼 죽은 자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감정은 무뎌졌고 그의 인식은 타락과 파멸의 수단이 되었다. 그가 인식하기 이전에 그에게 도달하는 모든 것은 비열하고 더러운 것으로 바뀌었다. (.....) 그는 깨끗하고 곧은 기둥 옆을 지나갈 때면 그것을 구부리고 더럽히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그 기둥을 뭔가로 더럽힌 것을 발견할 때면 기뻐서 웃음이 나왔다. 그는 깨끗하게 씻은 중학생들을 증오했고 그들을 괴롭히고 싶어 했다. 그는 더러운 것을 더 잘 이해했다. 좋아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물건도 없었다. (143쪽)


뻬레도노프는 자기 능력으로 장학사 자리를 차지하려는 게 아니라,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꾼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비열한 인간은 생긴 건 또 반반한지 여자들이 줄을 선다.  늙고 못생긴 ‘바르바라’ 또한 그런 여자 중 하나이다. 바르바라는 뻬레도노프의 장학사 자리를 꿰차고 싶어 하는 그 속물근성을 훤히 꿰고 있다. 공작부인과의 확인되지 않은 친분을 이용해 ‘공작부인이 자신과 결혼하면 당신에게 장학사 자리를 약속’하셨다고 뻬레도노프를 흘린다. 뻬레도노프는 그 이야기에 물론 솔깃하고, 바르바라와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에 빠진다. 이런 그들 사이에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보통 다음과 같다.



“주근깨 아가씨요? 개구리가 친구 하자고 할 정도로 입이 큰 아가씨죠.”
바르바라는 점점 악의에 가득 차서 말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너보다 아름답지. 그 여자를 택해서 결혼할 수도 있어.”
뻬레도노프가 말했다.
“그 여자와 결혼한다면 그년의 눈깔에 염산을 확 뿌려버릴 거야!”
바르바라는 분노에 가득 차서 얼굴을 붉히고 몸을 떨면서 말했다.
“네게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데.”
뻬레도노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뱉지 마!”
바르바라가 소리쳤다.
“뱉을 건데.” (33쪽)


문학 작품 속에서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연인(?)의 모습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은 작품 속에서 내내 거의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를 결혼 상대자로서 1순위에 놓고 있는 것이다. 물론 뻬레도노프는 장학사 자리를 노리는 게 가장 크고, 바르바라는 늙고 못생긴 외모로 누구 하나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는 처지에 뻬레도노프 정도의 남자를 ‘장학사’ 카드로 낚을 수 있다는 욕심 때문에 쉽사리 그를 포기하지 못한. 뻬레도노프와 바르바라는 과연 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뻬레도노프라는 인물 그 자체에 있다. 이 인간은 교사라는 직분을 그저 중학생들을 괴롭히는데 쏟는다. 가정 방문까지 하면서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부모 앞에서 해당 학생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그 학생이 부모에게 혼나는 광경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즐긴다! 게다가 바르바라 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서 집에 있는 고양이도 곧잘 학대한다. 이렇게 혐오스러운 캐릭터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면서도 이 인간은 바르바라가 자신을 독살할지 모른다는 망상, 동료가 자신의 지위를 노려 자기의 치부를 밀고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날마다 시달린다. 가학과 피학 성향은 물론 비루한 속물근성에 병적일 정도의 피해의식까지! 정말 인간의 온갖 나쁜 습속은 그 안에 모두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기괴한 모습을 두루 갖춘 뻬레도노프는 문학 작품 속에서 쉽사리 만날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하고 <허접한 악마>에 생생함을 불어넣는데 큰 역할을 한다. 온갖 악랄함을 사랑하는 뻬레도노프 그 자신이 바로 ‘허접한 악마’일 텐데, 만일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이 인물에 크게 감탄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한편 <허접한 악마>는 뻬레도노프와 바르바라로 대변되는 온갖 저열한 세계와 상반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뻬레도노프의 제자인 중학생 소년 싸샤와 자유분방한 아가씨 류드밀라의 사랑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류드밀라는 한때 뻬레도노프와 혼담이 오가기도 했는데, 청순한 미소년 싸샤를 보고는 반해버려 그를 타락의 길로 이끈다. 싸샤는 처음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타락한 인간 뻬레도노프와 반대되는 인물로 순수함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그도 시간이 갈수록 류드밀라와의 유희 속에서 점차 그 순수함을 잃어간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엇갈리듯 교차하다가 막판에 가면무도회라는 ‘난장판’속에서 마침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인다. 그러면서 인간 세계에서 순수함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속되고 허망한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사건으로 귀결된다. 이 두 개의 이야기를 각자 전개해나가다가 하나로 모아서 폭발시키는 작가의 능력 또한 대단하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허접한 악마’인 뻬레도노프를 그저 미워할 수많은 없는, 독특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이런 인물이 곁에 있다면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싫을 것 같은데, 작품으로 그의 행동을 엿보고 있노라면, 이 가련하고 허접한, ‘악마’조차 되지 못하는 비루한 인간에게 묘한 연민이 들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이 세계를 살아가노라면 한두 번쯤은 그렇게 행동하거나 생각했을 수밖에 없는 속물적인 보통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그가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누구에게 돌을 던지랴,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하랴, 누구에게 혀를 끌끌 차랴….

도스토예프스키가 창조한 병적인 인물들과 함께, 이반 곤차로프 <오블로모프>의 침대를 떠날 줄 모르는 남자 ‘오블로모프’- 그리고 표도르 솔로구프의 허접한 악마 ‘뻬레도노프’는 문학 작품이 창조한 가장 잊기 힘든 주인공일 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인물을 발견하고, 그런 인물들이 엮어나가는 온갖 사건 속에서 생의 진실을 마주하는 행운이 끊임없이 이어지기에 러시아 문학을 읽는 일은 무척이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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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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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한 권으로 된 개정판이 나오기 전에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1권 <비밀노트> 2권 <타인의 증거> 3권 <50년간의 고독>으로 나눠 읽었는데 굉장히 우울했다. 책 읽으면서 이렇게 우울하고 고통스럽기도 참 오랜만이었다. 무척 슬프고 산다는 게 뭔지, 인생이 뭔지 책장을 덮고서도 한동안 먹먹하다. 이 작품은 놀랍도록 흡인력이 강하기 때문에 다음 장을 읽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이 책은 1993년에 출간 후 절판되었다가 다시 나왔는데, 그동안 많은 사람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수집대상이었다고 한다. 나부터도 이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빌려 읽을 수도 있었는데 사보고 싶어서 도서관에서는 일부러 읽지 않았다. 게다가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두고두고 세월이 흐를 때마다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것.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문장이 아름다워서 계속 음미할 책도 아니다. 오히려 문장은 거의 수식이 없고 거칠고 건조하고 투박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알게 되었고, 그 뒤로 그녀의 작품은 할 수 있는 한 모두 찾아 읽었다.

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로 작가는 한 형제의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라는 알파벳 철자의 순서만 다른 쌍둥이 형제. 이 아이들은 전쟁 때문에 시골의 한 노파에게 맡겨진다. 이 노파는 이 아이들을 ‘개자식’들이라고 부르며 사랑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런 생활을 겪게 한다. 전쟁 전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보낸 세계는 따스한 보살핌으로 가득한 생활이었다면 전쟁 후 시골에서 겪는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그 자체다.

그들은 어른에게 구타당할 때 아프지 않으려고 서로 때리면서 신체를 단련한다. 배고픔, 추위, 학대 등등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자유롭고자 어린아이 둘이 스스로 온갖 훈련을 하는 모습부터가 충격적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앞선 충격은 비할 바가 못 된다. 폭력, 살인, 강간, 매춘 등등 불편한 이야기가 내리 등장한다. 그런데도 책을 덮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그런 고통스러움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시작될 때 루카스와 클라우스는 엄마의 따뜻한 사랑으로 충만했던 모습이다. 그랬던 아이들이 고작 몇 주 만에 철저하게 파괴된다. 그리고 그 파괴는 결국 먼저 인생을 살아간 ‘어른’들로 인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인생을 배워나간다. 삶의 쓰라림을 익혀나간다. 그런데 이 아이들의 세계를 파괴한 어른들, 작품 속에 나오는 온갖 어른들을 미워할 수만은 없던 건 왜일까. 그들의 악행이, 그들의 비뚤어진 정신이 아이들의 세계를 파괴했는데도 결국에는 모두에게 연민이 생긴다.

단순히 전쟁 때문에, 어른들 때문에 파괴된 아이들의 이야기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책을 집어 들고 계속 읽어가다 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고독한 존재인지, 타인의 사랑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지 깨닫게 된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어느 것이 거짓인지 모든 것이 혼돈인 상태로 책을 덮으면서도 뚜렷하게 알게 되는 것 하나. 인생은 고독하고 슬프다는 것- 그나마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철저한 고독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그 어떤 소설보다도 아프고, 아프다.



    그래요, 제일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50년간의 고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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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12-13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친구가 선물해줘서 읽게 됐는데,
완전 좋았지만,
너무 슬프고 아파서 다시는 읽고 싶지 않아요.

님의 리뷰를 다시 읽으니,
그 먹먹함이 살아나는듯 하네요~--;

잠자냥 2017-12-13 11:42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심정적으로 몹시 힘들어지는 책입니다;; ㅠ_ㅠ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 개정판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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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 제목만 봐도 아, 이 책은 경제성장을 비판하는 책이겠구나, 추측해 볼 수 있다. 맞다. 비판한다. 그런데 그 비판을 조목조목 집어가는 내용들이 어떤 면에서는 꽤(?) 충격적이다. 이 책 자체가 전복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다. 읽다보면, 어쩐지 과거 불온 서적이라고 명명되었던 어떤 사회과학서적의 이론들과 맞물려져 있는 듯 하잖아? 하는 생각이 드는 구절도 있고, 어떤 지점은 그래서 모두 ‘아나키스트’가 되자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게 정말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그런데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 자체에 대해서도 이 책은 처음부터 이렇게 지적한다.



근본적인 해결을 구하는 사람들은 유토피아주의자, 꿈을 꾸고 있는 사람, 낭만주의, 상아탑 속의 사람이라고 불려지고, 현상을 그대로 계속할 것을 말하는 사람이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될수록 무시하고 목전의 돈벌이에 전념한다는, 그러한 사람들이 ‘현실주의자’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상식’이라고 생각해온 상당수의 개념들이 절대로 ‘상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그 생각들 때문에 ‘도저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상식’적이지 않은 세상이구나. 하는 '앎' 때문에 괴로움이 고개를 쳐들게 된다. 저자는 그런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책의 작은 소명 중 하나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엄청 ‘괴롭고’ 있으니 이 책은 내게는 소명을 다한 셈인가?

20세기에도 그렇고, 21세기도 그렇고 경제발전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공고화 되어서 전 세계적인 헤게모니로 군림하고 있다.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나 파시스트 나치나 레닌주의자나 스탈린주의자 등이 모두 공유하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중 어느것이 경제발전을 가장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경제발전이 필요하다고 하는 점에는 20세기의 이들 주요한 이데올로기 간에 의견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 ‘경제발전 이데올로기’가 21세기에도 계속된다면, 모두가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 이 책의 큰 줄기다.

‘발전’이라는 말, ‘세계화’라는 말의 등 뒤에서 교묘히 감춰진 채 자행되는 ‘착취’를 사회 구성원들 자체가 스스로 ‘착취’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갈수록 무감각해져서. ‘착취’의 대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노동력의 대가로 돈을 받아 별로 쓸모도 없는,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고 정신을 갉아먹는 물건들을 소비하는데 쓰여지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

돈을 벌지않으면 가난뱅이가 될지 모른다.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공포. 또는 병이라도 나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공포가 기본적으로 사회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 저자는 이러한 공포가 사회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의 안전구조가 취약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 어쩌라고? 대안이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책이 제안한 대안은 생각해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소비와 노동력 착취의 대상인 ‘인재(人材)’에서 보통의 ‘인간’으로 돌아오면 된다는 것이다. 돈을 벌고, 소비하면서 즐거움을 얻는 경제인간에서 값이 매겨져 있지 않은 즐거움, 사고파는 일과 관계없는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정작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물건들은 상업광고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텔레비전에서 사라, 사라, 외치는 물건들만이라도 사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것 자체도 큰 결심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지름신’이나 ‘뽐뿌질’ 같은 인터넷 용어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확실히 SNS나 블로그 등등 남에게 보여주는 삶이 지배적인 생활이 되면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지르는 것’ ‘지른 항목’ 등등의 폴더까지 만들어 가면서서 무의미한 소비, 사지 않아도 될 것들을 산다. 그러면서 타인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런 ‘지름’을 더욱 활발하게 하기 위해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이 일해야 하는 -그럼으로써 상층 지배계급에게 노동력은 더욱 더 착취 당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나 또한 이 지점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가장 충격 받았던 것은 원주민들이 일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가져야 할 것이 없었기에, 기본적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먹을 것 등등만 있으면 되었기에, 그들은 돈이 필요 없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한들 하루 서너 시간 이상, 아니 열 시간 일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삶은 견디지도 못했다(그러니 총과 칼,무기를 앞세워 강제로 노예를 삼아 노동력 착취를 자행한 것이다).


그럼 그들은 남는 시간을 무엇을 했느냐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고 등등. 자유롭고 창의적인, 상상력 넘치는 하루 하루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배고프면 사냥하고 고기 잡아 먹고. 남는 시간은 다시 ‘유희’와 함께 하루를 만들어가고. 그랬던 원주민이 거의 씨가 마른 까닭은 하지 않았던 일을 강제노역 당하면서 스스로 그런 삶을 견디지 못해 병들어 죽은 경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면서 대체 뭘 위해 일하는지도 모르는 채,그렇게 살지 않으면 남에게 뒤떨어지고, 타인에게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을까 두려워서 그런 공포감 때문에 계속 일한다. 그러고 나서 그 일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타인과 보조 맞추기 위해 사고, 지르고, 소비하고. 분에 넘치는 소비를 다시 메우기 위해 또 일하고, 일한다. 그것이 모두 파이가 커지면 나눠먹는 조각도 커질 것이라고,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이 다 같이 경제성장, 발전하고 있는 과정이라는 ‘환상’을 계속 부추키고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진실로 풍요로운 삶이란 어떤 삶일까, 돌아보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조금 덜 쓰고, 나 스스로를 위해 즐거워질 수 있는 시간을 조금만 더 갖도록 하자. 그게 진짜 ‘성장’이고 ‘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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