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멘 호수.백마의 기사.프시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4
테오도어 슈토름 지음, 배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테오도어 슈토름의 작품은 처음 읽는다. 독일 문학은 지루하고 관념적이라는 생각에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 이 책도 언젠가는 읽어보겠다고 보관함에 담아두기만 했다. 도서관 신간 도서 코너에서 깨끗하고 산뜻한 모양새로 나를 반기지 않았다면 이렇게나 빨리 읽어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책을 빌릴 때 모두 다섯 권을 대출했는데, 이 작품을 가장 나중에 읽었다. 도서 반납 기간이 다 되어가서 읽을까 말까? 그냥 가져다줄까? 고민하다가 부랴부랴 읽었는데, 웬걸. 이번에 빌려온 다섯 권 가운데 가장 좋았다.

'임멘 호수', '백마의 기사', '프시케' 세 작품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작품인 '임멘 호수'를 몇 장 읽지 않고도, 이야기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 이미 ‘아, 이 책을 그냥 반납해했다면 정말 아까울 뻔 했구나.’ 생각했다. 어느 노인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액자식 구성 때문에 실화 같은 느낌을 준다. 한편으로는 낭만적이고도 한없이 서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마치 할아버지가 아름다운 동화 한 편을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동화는 시작부터 조금은 쓸쓸하다. 행복하게 끝날 것 같지는 않은 느낌이 든다.

소꿉친구인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베트. 어린 라인하르트에게 세계는 온통 엘리자베트이다. 엘리자베트는 그가 보호해야 할 존재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피어나는 그의 인생에서 모든 사랑스러움과 경이로움을 의미했다’('임멘 호수', 22쪽). 라인하르트는 직접 쓴 동화나 시를 엘리자베트에게 들려주며 언젠가는 그녀와 함께 인생을 꿈꾼다. 그렇지만 그 어린 아이 눈에도 어쩐지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만 같다. 산딸기를 찾아 숲속을 온통 헤맸지만 끝내 찾지 못했듯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 같다. 조금씩 성장하고 공부 때문에 고향을 떠나게 된 라인하르트는 엘리자베트와 줄곧 편지를 주고받으며 남다른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둘의 관계는 변하고 만다. 라인하르트가 선물했던 홍방울새가 죽고 그 자리를 에리히가 선물한 카나리아가 차지하고 있듯이.


“집에 오래된 노트가 있어. 거기에 온갖 노래와 시를 써넣곤 했지. 하지만 그만둔 지 오래야. 책갈피에 에리카 꽃 하나가 꽂혀 있어. 하지만 시든 거지. 그걸 누가 나한테 줬는지 알아?”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눈을 내리깔고 그가 손에 쥐고 있는 풀잎만 쳐다볼 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었다.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임멘 호수', 52쪽)


시든 에리카 꽃. 붙잡으려고 해도 도저히 잡히지 않는 호수 위의 수련. 세월의 변화와 함께 달라진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듯 온갖 자연 속 사물로 상징되면서 안타깝고도 애상적인 분위기를 전한다. “엘리자베트, 저 푸른 산 뒤에 우리의 청춘이 있었어. 그 청춘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라인하르트의 이 말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순수했던 시절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거의 예외 없이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 아닐까. '임멘 호수'는 순진무구한 첫사랑이 이런저런 현실 앞에서 무너지고,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전형적인 이야기임에도 읽는 내내 그 서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남다른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백마의 기사'는 슈토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고도 한동안 어디선가 백마를 탄 하우케의 고독하고도 쓸쓸한 모습이 눈앞에 나타날 듯하다. 이 작품 또한 액자 구성으로 이루어지기에 백마를 탄 기사가 실제로 존재했을 것만 같다. ‘백마의 기사’는 제방을 지키는 유령 기사의 이야기다. 안개 자욱한 바닷가를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백마를 탄 기사 이미지 때문에 작품 초반 분위기는 몽환적이면서도 조금 으스스하다. 그런데 이윽고 펼쳐지는 이야기는 조금 뜻밖이다. 어릴 때부터 바닷가 제방에만 온통 관심을 쏟은 하우케 하이엔- 그는 집이 가난하여 제방감독관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본인의 노력과 주변의 도움, 뜻하지 않은 기회 등으로 그 자리에 오르고 만다.

그러나 미신과 전통을 굳게 믿는 마을 사람들에게 하우케의 이성적이고 냉철한 태도는 반감을 불러오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하우케는 이성과 기술로 자연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으며 주위 사람들의 반감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앞만 보고 나아간 데는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또한 컸으리라. 그러나 바로 그런 태도, 오만하며 누구와도 섞이지 못하는 태도는 그에 대한 불신을 강화하며 그 불신에 기묘한 소문이 덧붙여지면서 그와 그의 가족은 더욱 고립되고 만다. 스산한 분위기 때문에 하우케에게 불행이 덮칠 것 같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는데,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나고 말 때는 안타까움과 함께 깊은 연민이 솟구친다.

'임멘 호수'가 서정적 낭만으로 가득한 작품이라면 '백마의 기사'는 전설과 미신이 많은 바닷가 마을 사람들과 이성과 기술을 상징하는 인물인 하우케의 대립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담담한 어조로 전한다.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인 하우케를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성적이고 계몽적이기에 자신들과는 이질적인 존재, 이제까지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존재, 그래서 낯선 존재를 향해 사람들은 흉흉한 소문을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를 조금씩 믿어간다. ‘난폭한 사람이나 악독하고 고집불통인 성직자를 성인으로 만들거나, 단지 우리보다 더 뛰어나다는 이유로 능력 있는 사람을 유령이나 귀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백마의 기사', 212쪽) 했는데, 바로 그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슈토름은 어릴 때부터 고향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동화에 심취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 실린 작품 모두 전설이나 동화를 읽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여느 전설이나 동화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서정미가 넘친다. 자연을 무척 사랑했고, 그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는 슈토름의 빼어난 솜씨에서 한편의 서정시와도 같은 작품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테오도어 슈토름- 이제야 처음 만났지만 다른 작품도 더 궁금해지는 그런 작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9-01-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 제가 잠자냥 님의 꽁무니를 촐래촐레 쫓아다니는 것 같군요 하지만 거기에 매력이 가득하다면 기꺼이~...늘 땡큐요^^

잠자냥 2019-01-12 17:11   좋아요 1 | URL
ㅎㅎ 좋은 책은 많은 사람이 읽으면 더 좋은 거니까요. 모쪼록 즐거운 독서되시길~!
 
산소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6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첫 문장이다. <설국>의 내용은 가물가물해졌어도, 이 첫 문장만큼은 잊히지 않는다. 아름답다. 어떻게 저런 문장을 쓸 수 있는지 감탄 또 감탄할 뿐이다. <설국>은 읽는 내내 그 담백한 아름다움이 마음 깊이 새겨지는 작품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읽을 때면, 언제나 그만이 빚어낼 수 있는 섬세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정화되곤 했다.

<산소리>또한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설국>만큼 아름다운 작품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산소리>도 <설국> 못지않게 아름답다. 설국의 첫 문장처럼 강렬한, 잊기 힘든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책장을 천천히 넘기게 된다. 대단한 이야깃거리가 있지도 않다. 62세 노인이 주인공으로 하루하루 늙어간다는 것, 사그라지는 것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잔잔한 ‘소멸’ 이야기에 왜 그토록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 나도 늙어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는 신고의 나이에 이를 것이며, 그때가 되면 나 또한 그처럼 사그라지는 생을 쓸쓸히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신고는 올해 나이 예순둘. 몸이 늙어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흰머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유 없이 피를 토할 때도 있다. 게다가 어느 날은 40년 내내 손에 익었던 넥타이 매는 법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하루하루 이렇게 쇠락해 가는 그에게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만 들린다는 ‘산소리’까지 들려온다. 신고는 불안하기만 하다. 친구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다.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일이 낯설지가 않다. 그런데도 그 나이가 되도록 삶은 신고의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

아들 슈이치는 자신이 꾸린 가정은 뒷전이고 외도를 일삼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딸 후사코마저 결혼에 실패하고 친정으로 내려온다. 알고 보니 사위는 술과 마약에 절어 자살 소동까지 벌인 판이다. 그렇다고 아내와 사이가 좋은가 하면, 애초부터 신고는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사랑했던, 마음속으로 연모했던 대상은 아내의 언니- 그러니까 처형이었다. 처형 대신 아내를 선택한 그였으니, 결혼 생활이 애틋할 리 없다. 게다가 이제는 신고도 아내 야스코도 모두 예순을 넘긴 나이라, 부부 사이에 육체 접촉이라고는 그저 코를 골며 잠든 아내 코를 잡고 뒤흔들 때뿐이다.

자식들도 불행해 보이고, 자신의 삶 또한 돌아보니 그다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끼는 신고에게 그나마 유일한 위로가 되는 사람은 며느리 기쿠코뿐이다. 신고는 또 한 번 금기의 대상을 향한, 자기도 미처 깨닫지 못한 욕망을 넘나든다. 오래 전에 처형을 연모했듯이 다 늙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며느리에 대한 묘한 감정에 고개를 갸웃갸웃하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신고는 다정다감하기 짝이 없는 시아버지로 딸 후사코조차 아버지는 못생긴 자신보다 기쿠코를 아낀다고 불평을 토로할 정도이다.

아내 야스코 또한 신고의 며느리 사랑이 남다르다고 누누이 말할 정도이다. 다만 둔감한 탓인지 신고 마음속 깊이 감춰진 욕망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데 아들, 그러니까 기쿠코의 남편인 슈이치는 모르는 척 눈 감았을 뿐이지 아버지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아는 눈치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아내만을 아껴주지 못하고 외도를 일삼는지도 모르겠는 그. 그런 아들 때문에 남몰래 속앓이하는 며느리가 가엾기만 한 신고는 아들의 외도 상대를 떼어놓기 위해 홀로 애쓴다. 


자식의 아내를 위해서 자식을 감각적으로 미워하는 것이 신고에게도 조금 이상했지만 자신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야스코의 언니를 동경했기 때문에 그녀가 죽고 나서 한 살 연상인 야스코와 결혼한 신고였다. 그런 자신의 이상(異常)이 생애의 저변을 흐르고 있어서 기쿠코를 위해 분개하는 것일까? (165쪽)


며느리를 욕망하는 시아버지라니?! 소름끼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을 읽노라면 솔직히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신고가 금기의 대상에게 느끼는 욕망은 곧잘 꿈속에서 형상화되곤 하는데, 꿈속에서도 신고가 욕망하는 바로 그 대상이 아닌 그 사람을 상징하는 다른 인물로 대치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삶, 꿈과 현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신고만이 기쿠코에게 묘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닌 듯싶다. 기쿠코도 시아버지에게 남다른 감정이 있음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 챌 수 있다. 하지만 신고도 기쿠코도 금기의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서로를 위하고 챙겨줄 뿐이다. 이 알 듯 모를 듯한 관계,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은 읽는 이의 몫이다. 이 조금만 넘어서도 ‘막장’이 될 수 있는 관계가 사뭇 쓸쓸하고도 애처롭게 보이고, 그런 일가의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한없이 담백하고 아름다운 문장 때문이리라.

신고의 기쿠코를 향한 욕망은 잃어버린 젊은 날에 대한 욕망으로 읽히기도 한다. 기쿠코가 유부녀임에도 어린아이 같은, 덜 성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종종 묘사되기 때문이다. 기쿠코는 젊은 날의 처형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리고 그 둘은 이토록 늙어버린 신고가 더는 다가설 수 없는 대상. 젊은 시절의 자기와도 같다. <산소리>는 이처럼 덧없이 사라져간 청춘, 늙어간다는 것의 고독과 상실감, 쓸쓸함, 그러면서도 그 나름대로 여전히 존재하는 욕망을 섬세하게 그린다.

슈이치와 기쿠코는 어떻게 될지, 큰딸 후사코는 영영 이대로 신고의 집에 눌러살지, 신고와 기쿠코의 관계는 또 어떻게 달라질지 이 작품은 선뜻 이렇다 할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결코 밝지만은 않은 그들의 앞날이 어찌될지 아무도 모른 채, 평범한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듯, 매우 일상적인 모습으로 잔잔히 끝맺는다. 다만, 그러는 사이에도 신고는 서서히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이 모두 그렇듯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제목을 왜 하필이면 <19호실로 가다>로 선택했는지는 이 책 맨 끝에 실린 단편 ‘19호실로 가다’를 읽고 나면 명확해진다. 이 단편집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여성으로 살아가는 녹록지 않은 삶을 그리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19호실로 가다’는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삶을 단연코 압도적으로 묘사한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를 읽을 때만 하더라도, 철저히 자기중심적인데다가 찌질함까지 두루 갖춘 한 남자로 인해 24시간 가까이 괴롭힘 당하는 바버라의 모습을 보며 분개했다. 이 작품에서는 그래도 그 거머리 같은 남자가 여자에게 스쳐지나가는 인물일 뿐이기에 하루만 참으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게다가 어떤 면에서는 그 찌질이 ‘그레이엄’이 망신 아닌 망신을 톡톡히 당하면서 끝나는 설정이라 나름 통쾌하기도 했다. ‘옥상 위의 여자’나 ‘남자와 남자 사이’ 같은 단편도 남자들로 인해 인생이, 또는 삶의 한 순간이 일그러지는 여자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그 작품들은 나름대로 여자가 남성들을 무시하거나(‘옥상 위의 여자’), 한 남자로 얽혀서 때로는 적이었을지도 모를 여성들이 서로 연대하면서 한 순간일지 몰라도 상처를 극복하는(‘남자와 남자 사이) 이야기가 펼쳐지기에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작품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작품인 ‘19호실로 가다’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19호실로 가다>는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서서히, 이 지구에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온전하게, 인간으로 홀로서기가 얼마나 부단히도 어려운지를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맨 마지막 작품에서 폭발하는 느낌이다. ‘19호실로 가다’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행복한 한 쌍이 등장한다. ‘수전과 매슈’ 그들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가운데 결혼한다. 둘 다 벌이가 좋은 직장을 가진 덕분에 금세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자식들마저 골고루(아들, 딸에 이어 아들딸 쌍둥이까지!) 낳을 정도로 정말로 흠잡을 데 없이 그들의 결혼 생활은 잘 굴러간다. 정원이 딸린 커다란 집과 네 아이. 파출부, 친구, 자동차, 사랑 등등 그야말로 행복한 가정이다. 


그런데 이조차도 어쩐지 미리 ‘예상한 그대로’였으며 어쩔 수 없이 단조로운 생활이 된다. 그런 가운데 수전은 차츰 자신의 인생이 사막이 된 것처럼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고 아이들도 어쩐지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기분.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게 되면서 수전은 자신이 결혼하고 임신한 순간부터 말하자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긴’ 인생을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결혼한 뒤로 12년 동안 단 한 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음을,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못했음을 깨닫고, 드디어 다시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아이들도 모두 학교에 가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편 매슈를 뒷바라지 하는 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며 집안일 또한 파출부에게 맡기면 된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기만 하면 될 텐데 이상하게도 수전은 자기가 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한다. 사실, 결혼을 하지도 않았으며, 아이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즐기는 나로서는 ‘혼자 있을 수 있는 그 시간’이 드디어 주어졌음에도 오히려 집안일을 끊임없이 찾아서 하고 있는 수전의 심리가 어떤 면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왜? 대체, 혼자 있을 때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 여자는 자기 혼자만의 시간에도 집안일을 하는 거지?’ 이런 심정이랄까. 


그러다가 나는 곧 깨달았다. 수전은 혼자 있었던 적이, 진실로 혼자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홀로 존재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더욱이, 아무리 집안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주어져봤자, 그 집은 남편과 아이들로 가득 채워진 공간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곳에서 결혼한 주부가 오롯이 혼자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애당초 나 같은 사람은 수전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수전이 홀로 있고자 애쓰는 모습에서는 안타까움과 함께 연민을 넘어서 어느 순간 슬픔이 밀려온다. 수전처럼 일주일에 한 번 방을 빌릴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하는, 그러므로 자기만의 온전한 방 한 칸을, 철저하게 혼자만의 공간을 누릴 수 없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떠오른다. 수전의 ‘19호실’ 그 평온의 공간마저 결국은 침범당하고 마는 것에서 분노와 함께 쓸쓸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가 글을 쓰려면(온전한 자기만의 사유를 하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수전은 결혼과 함께 자기만의 방은커녕 그런 공간을 빌릴 돈조차 갖추지 못한 신세가 되고 만다. 결혼 전에는 광고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한 사람으로 당당히 존재했던 그녀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혼을 하고, 정원 딸린 집에 살면서 파출부까지 두는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자기만의 ‘돈’도 ‘방’도 없는 것이다. 집 한곳에 수전의 방. 그러니까 ‘엄마의 방’을 만들어보기도 하지만 그건 수전의 아이들이 말하듯 ‘엄마의 방’이지 ‘수전의 방’은 아니다. 거기서 과연 그녀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그러다가 드디어 찾은 자기만의 방, 19호실- 그 허름한 공간에서 서서히 혼자가 되어가던 수전. 그러나 남편의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 공간마저 탄로 나고 더는 어디에서도 ‘철저히 혼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기에 좌절한 그녀가 내린 선택은 무척 마음 아프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 주변에서는 집에서 독립하기 위해 ‘결혼’을 선택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어떻게 그게 ‘독립’이냐고 나는 말리는 편이다. 정말로 독립을 바란다면 혼자 있을 ‘공간'을 만들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비혼 여성이 독립해서 살아가기란 그리 쉽지는 않다. 부모의 반대를 비롯하여,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될 수도 있으며, 막상 그 모든 조건을 갖추고도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서(심리적, 정신적, 또는 실제로 혼자 사는 여자를 향한 온갖 위험에 대한 공포) 선뜻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독립’이라는 미명 아래 ‘결혼’이라는 전혀 독립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고야 만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은 이 짧은 생에서 단 한순간도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살다 죽게 되는 삶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부모의 우산 아래서 남편의 우산 아래로 편입될 뿐이다. 인간이 그렇게 평생 단 하루도 철저하게 자기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그런데도, 많은 여성의 삶은 수전의 ‘19호실’ 같은 공간조차 얻지 못한 채 끝이 나고야 만다. ‘성인 두 사람이 단 1초도 서로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건 굴욕적’(‘한 남자와 두 여자’, 123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딸이었다가,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다시 또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남자와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여자라는 성(性)을 잃어버린’(‘남자와 남자 사이’, 227쪽) 채 ‘하루에 18시간씩 남자들의 포부를 지지해주면서 살아가게’(‘남자와 남자 사이’, 234쪽)된다. 그런 현실 속에서 ‘내가 있는 곳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완전히 혼자 있고 싶은’(‘19호실로 가다’. 305쪽) 공간은 요원하기만 하다. 사랑도, 결혼도, 가정도, 일도. 인간에게 혼자 있을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이 있을지 <19호실로 가다>는 쓸쓸하게 묻는다. 수전처럼 자기만의 ‘방’을 갖고자 안간힘을 쓰는 여성들의 고단한 삶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기에, 그런데도 그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기에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는 책을 덮고도 씁쓸한 마음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오래된 책, 이른바 고전을 좋아한다. 내가 고전 작품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 책들은 세월의 검증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오랜 시간의 검증을 통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읽을 책이 매우 많고 내가 살다갈 날들은 그에 비하면 짧기만 하다. 그런 세상이니 어느 정도는 검증 받은 책들을 먼저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물론 그런 책들 중에도 딱히 크게 마음에 남는 게 없는 작품도 종종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늘, 고전만 읽겠는가. 요즘 쏟아지는 책에도 당연히 눈길이 간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읽은 사람들 평이 대체로 좋고 ‘호텔에 종신 연금된 백작의 우아한 생존기’라는 설정이 흥미롭다. 날이 몹시 더운 것도 이 책을 선택하는 데 한몫했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에는 어쩐지 흥미위주의, 가벼운 책을 읽고 싶어지지 않는가. 이 작품 또한 그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 흥미진진하지만 묵직하게 남는 것은 그리 크지 않을, 그런 책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술술 읽힌다. 책장이 잘 넘어간다. 나는 세월의 검증을 받지 못한 책을 읽을 때면 좀 까탈스러운 태도로 책을 본다.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 읽는 다고나 할까? 여기저기서 추천 받았고, 극찬을 받았다는데 어디 한 번 보자 하는 심정. <모스크바의 신사>는 로스토프 백작의 시(詩)로 시작한다. 이 시는 이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윽고 희곡 형식으로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에 대한 재판이 묘사된다. 나는 이런 다양한 시도들이 좋은 작품임을 나타내려고 지나치게 애를 쓴 것처럼 여겨졌다. 192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종신 연금형을 받는 백작과 혁명 등등의 설정도 어떻게 보면 역사적 무대를 배경 삼아, 단순히 가벼운 작품은 아니라고 역설하려는 듯한 일종의 트릭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럼 그렇지’하는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100쪽을 넘기고 200쪽을 넘기면서 서서히 나는, 나도 모르게 알렉산드로 로스토프 백작. 이 불쌍한, 그러나 어쩌면 그의 친구 미시카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의 삶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응원하고 있었다. 그가 결심한 대로 마지막으로 추모 와인을 마시고 호텔 난간에서 몸을 던져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었다. 정말로 자살을 하려나? 그러면 안 되는데, 절대 안 돼! 이 사람아! 외치고 싶어졌다. 


로스토프 그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러시아의 어느 백작이 아니라, 한 인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오롯이 지닌, 세상에서 보기 드문 한 존재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는, 안타까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 그는 나에게 그저 ‘러시아 최후의 신사’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성숙한 인간미를 갖춘 ‘최후의 인간’과도 같았다. 때문에 그의 삶이 이대로 무너지지 않기를, 그를 그렇게 가둬버린 혁명 세력들이 원하듯이 그가 그렇게 무기력하고 허무하게, 덧없이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집도 아닌, 호텔이라는 공간에서 감금된 채 지낸다는 것은 인간에게 더할 수 없이 무지막지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나라면 어땠을까? 로스토프 백작처럼 ‘환경에 굴복당하지 않고’ ‘환경을 지배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난 감옥 안에서도 책만 있다면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기는 하다만. 글쎄 정말 그럴까? 실제로 어느 한 장소에 감금된 채 이동의 자유를 빼앗긴다면,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희망조차 없이 살아야 한다면 삶이 견디기 쉬울까? 아마 나 또한 로스토프 백작이 그랬듯이 마지막 와인 한 잔을 마시고 호텔 난간에서 저 아래로 몸을 던지는 상상을 여러 차례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로스토프는 그러기를 거부한다. 어쩌면 그가 감금된 곳이 ‘집’이 아니라 ‘호텔’이라는 특수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호텔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백작은 친구도 얻고, 연인도 생기며, 심지어 딸도 얻는다. 때때로 자신을 찾아오는 옛 친구를 만날 수도 있다.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삶을 놓고 싶을 때마다 버티고 견디게 해줄 다른 이의 존재가 ‘호텔’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호텔을 오가는 사람들, 또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신뢰와 우정, 애정, 지지와 격려, 비록 갇힌 신세였지만 끝까지 존중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럴 만한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성품을 지녔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이 작품은 ‘신사’의 의미를 여러 번 생각해 보게 한다. 매너를 잘 갖춘, 귀족으로서의 예절이나 태도, 또는 그 계급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문화와 예술적 지식을 두루 갖춘 것이 과연 진정한 신사다움일까? 만일 로스토프가 그 모든 것을 갖추고도 따뜻하고 배려 깊은 성품,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약한 존재를 깔보지 않는 인격을 지니지 못했다면 그가 과연 ‘신사’로 느껴졌을까? 그래서 <모스크바 신사>의 ‘신사다움’이란 곧 ‘인간다움’이며, 이 책은 로스토프라는 진정한 신사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만 이 세상을 제대로 잘 살다가는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 작품을 읽다가 나는 여러 차례 울컥하고 실제로 몇 번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 장면 중 하나는 소피야 때문에 가슴을 졸이다가 로스토프가 다락방에 홀로 앉아 호로비츠가 연주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듣는 장면이다. 또 다른 부분은 미시카가 남긴 ‘빵과 소금’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는 장면에서였다. 러시아문학 황금기에 쓰인 작품 곳곳에서 ‘빵’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인용구를 나열한 부분에서 나는 주책없게 눈물이 쏟아졌다. 그 어떤 부분보다 이 두 장면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느껴졌다. 한없이 암담하고 우울한 상황에서도 음악을 들으며, 또는 문학 작품을 통해 자신을 위로하며 자신이 지닌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인간……. 이 두 장면은 오래도록 잊기 힘들 것 같다.



안에든 와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웃한 와인과는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같기는커녕 백작의 손에 들린 병 속의 내용물은 한 국가나 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복잡한 역사의 산물이다. 와인의 색깔, 향, 맛은 분명 그 와인이 태어난 지역의 특유한 지형과 고유한 기후를 나타낼 것이다. 그뿐 아니라, 와인은 생산된 해, 생산된 지역의 모든 자연 현상을 드러낼 것이다. 한 모금만 마셔도 와인은 생산지의 그해 겨울 추위가 풀린 시기, 여름 강우량의 정도뿐 아니라 그해 바람의 특징이나 구름 낀 날이 어느 정도나 되었을지에 관한 것까지 머리에 떠오르게 할 것이다. 한 병의 와인은 시간과 공간의 최종 추출물이고, 개성 그 자체의 시적 표현이었다. (<모스크바의 신사>, 233쪽)


와인 목록이 존재하는 것은 혁명의 이상에 어긋나며, 그것은 귀족의 특권과 인텔리겐치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표지와도 같다며 모든 와인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으로만 구분하여 단일한 가격으로 판매하게 된 세상. 그런 상황 속에서도 로스토프는 끝까지 와인 하나하나만의 독특한 개성을 찾고자 애를 쓴다. 위 구절에서 ‘와인’은 ‘인간’으로도 읽힌다.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획일화된 사회 속에서도 자신이 지닌 개성과 우아함을 잃지 않았던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그를 와인에 비유하자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며 깊고 순수한 향을 지닌 그런 와인이 아닐까.


<모스크바의 신사>는 이렇듯 주어진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간 한 남자의 삶의 궤적이 마지막까지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뻔한 스토리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작품은 몇몇 장면에서 완전히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결말 또한 그렇다. 그러니 누구라도 이 두꺼운 책을 한 번 집어 들면 흥미진진하게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의 검증을 받기에는 아직 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런 작품은 현대의 고전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8-08-08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고 나서 에이모 토울스의
데뷔작 우아한 연인을 읽고 있습니다.

작가의 고급진 취향은 역시나 대단하네요.
다만 너무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 상대적으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듭니다.

잠자냥 2018-08-08 09:2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그 책 나중에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그레이스 페일리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로운 단편을 읽는 일은 늘 즐겁다.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작가의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보통 나는 그런 작가의 책을 선뜻 사서 읽지는 않는다. 정말로 나와 잘 맞을지 미심쩍고 아직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에 도서관을 이용해서 첫 만남을 시도한다. 물론 예외도 있다. 단 한 번 읽어 본 적이 없는데도 덜컥 책을 사는 작가도 있다. 그레이스 페일리《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이 그런 책 중 하나였다.

다른 이들은 어땠을지 모르겠다. 이 책 표지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수록’이라는 코멘트가 적혀 있다. 내게는 그 코멘트가 이 책을 선택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하지는 않았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지도 않았고, 그가 쓴 서문조차 책을 다 읽은 뒤에야 대충 훑어보았다. 오히려 출판사 책 소개 글 가운데 ‘단 세 권의 단편집으로 미국문학의 전설이 된 작가’라는 문구에 눈이 갔고, 그래서 미리보기로 몇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첫 번째 작품의 몇 줄을 읽다가,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내가 반한 구절, 이 책을 사게 만든 그 문장은 바로 다음과 같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났다. 나는 새로 지은 도서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잘 지냈어? 내 인생. 내가 말했다. 27년을 부부로 살았으니 그렇게 말해도 무방하다고 느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 뭔 인생? 내 인생은 전혀 없었다고. (「소망」, 15쪽)


전남편, 27년을 함께 살았던 그를 ‘내 인생’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꽤 신선했다. 이런 표현을 쓰는 작가라면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흥미가 돋았다. 이 책을 구매할 무렵, 때마침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를 읽던 참이었다. 단편 모음집의 장점은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단편모음집끼리)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19호실로 가다》와《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은 주인공이 거의 여성 화자이며 그 목소리로 그들의 삶을 다룬다. 그런데 도리스 레싱의 작품을 읽다 말고 그레이스 페일리의 작품을 읽다가 깜짝 놀란 부분이 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 요즘- 그러니까 적어도 2000년대 이후로 쓰인 작품들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찾아보니 대부분의 작품들이 1960년대에 쓰였단다. 그런데도 시대 간극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엄청 쓰다. 독하다. 이토록 독설 가득한 작품들로 가득 채워진 단편 모음집을 읽은 적이 언제였더라? 있기는 있던가? 싶을 정도로 거의 모든 작품이 쌉싸래하다.《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에 실린 작품들을 맛으로 표현하자면 겨자를 잔뜩 친 음식을 먹고 난 뒤 혀끝에서 느껴지는 알싸함이라고나 할까. 또는 눈물이 날 만큼 아주 매운 맛.



크리스마스 2주 전 엘런이 내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페이스, 나 죽으려나 봐.” 그 주에 나 역시 죽어가고 있었다. (살아 있다」, 88쪽)


첫 작품소원만큼이나 강렬한 도입부를 보여주는살아 있다는 위와 같이 시작한다. 크리스마스를 2주 앞두고 친구를 비롯해 자신 또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문학작품에서 보통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거나, 주인공 주변에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있다면 인생을 돌아보면서 회한에 쌓인 정서를 내뿜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죽음을 앞두고 삶을 미화하지도 찬양하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삶의 지리멸렬함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을 비롯하여 그 주변 인물들이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이 실은 그다지 대단하지도 위대하지도 않다고 낱낱이 까발린다.



“인생은 그렇게 멋진 게 아니야. 앨런.” 내가 말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너절한 하루하루와 너절한 남자들뿐이야. 돈은 없고, 늘 깨지고, 바퀴벌레만 득시글거리고, 일요일이라고 해봐야 아이들을 데리고 센트럴파크에 가서 저 더러운 호수에서 배를 타는 게 고작이야. 뭐가 그렇게 멋있어, 앨런? 대단하게 잃을 건 또 뭐고. 겨우 2년 남짓 더 사는 거야. 아이들을 보겠지. 온갖 더러운 것도 볼 테고, 뜨겁게 밀려드는 불꽃 파도 속에서 세상의 모든 치즈 구멍이 터져버리는 것도 볼 거야......”
“난 그 모든 걸 보고 싶어.” 앨런이 말했다.  (
살아 있다, 90쪽)


그레이스 페일리의 작품이 계속 쓰디쓰기만 하다면, 삶의 남루함과 인생의 너절함만 이야기한다면 읽는 내내 고통스러울 것이다. 인생이 힘든 걸 몰라서 내가 이런 책을 또 마주하고 있나 싶을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은 바로 저 구절, ‘난 그 모든 걸 보고 싶다’는 앨런의 말 속에 있다. 아무리 삶이 비루하고 넌더리나는 것일지라도, 그 모든 것을 살아서 생생하게 보고 싶다는 앨런의 소망은, 곧 그레이스 페일리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인생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과 마주하여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용기, 바로 그 안에 삶의 위대한 역설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살아 있다에서 결국 앨런은 죽고 ‘나’는 살아남는다. 장례식장에서 앨런의 아들을 보고 동정심이 생긴 ‘나’는 앨런의 아들에게 “내가 널 데려가서 키워줄까?” 하고 묻는다. 하지만 물음과 동시에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만일 아이가 좋다고 하면 돈이며 방이며 게다가 잠자기 전 10분 동안 보살펴주는 문제며 그 모든 걸 어떻게 해결할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앨런의 아들은 말씀만으로 고맙다면서 그 제안을 거절하고 그녀는 안도한다. 이 얼마나 현실적인가.

이렇게 그레이스 페일리의 단편 속 등장인물들은 특별한 지위나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남다른 재주를 지녔거나 외모가 빼어나지도 않다. 대단하게 선하거나 모범적이지도 않다. 자기 욕망에 충실하며 그 욕망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때로는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부분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빠듯하고 벅차서 가장 사랑해야 마땅할 대상인 아이에게도 손찌검을 하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소박하게 일자리와 집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보통 사람들의 삶이 다 그러하지 않은가? 물론 아이에게 손찌검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부모가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내 저급한 직업과 검댕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은 구질구질한 집 때문에 미쳐 돌아버릴 만큼 진이 다 빠지지 않은 날이면 내게 이런 일자리와 집을 준 신을 찬양한다. (나무에서 쉬는 페이스, 115쪽)


적당하게 이기적이고, 때로는 선한 생각을 할 줄도 알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보통은 자기 잇속부터 챙기는 사람들, 그러나 그것이 사회 규범에 크게 어긋난다거나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못 봐줄 정도는 아닌 평범한, 그래서 비루해 보이는 사람들의 인생. 그런 삶이《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에서 펼쳐진다. 아름답기보다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씁쓸하고 매운 삶.

그런데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찾아 먹으며 스트레스를 푼다. 그러고 나서 다시 살아갈 힘을, 위안을 얻는다. 이 책에 실린 17개 단편들이 바로 그렇다. 이봐, 당신, 이 세상 보통 사람들의 인생은 이렇게 지독하고 씁쓸해. 다들 당신 인생과 별반 다를 바 없어. 인생은 결코 달콤하지 않아. 그렇지만 어쩌겠어? 이 쓰디쓴 인생 한 번 견뎌봐야지. 그래도 살아야지.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생의 쓰디쓴 면까지도 성숙하게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준다고나 할까.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문장, 그러니까 이 책의 정수는 그레이스 페일리의 분신인 ‘페이스’에게 그녀의 아버지가 직접 쓴 시를 읽어주는 부분에 담겨 있지 않나 싶다.



어린 시절이 지나가고
젊은 시절이 지나가고
인생의 황금기 또한 지나간다.
노년이 지나간다.
내 딸아, 너는 왜
노년은 다를 거라고 여기느냐? (
페이스의 오후 한나절 ,75~7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