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된 책, 이른바 고전을 좋아한다. 내가 고전 작품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 책들은 세월의 검증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오랜 시간의 검증을 통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읽을 책이 매우 많고 내가 살다갈 날들은 그에 비하면 짧기만 하다. 그런 세상이니 어느 정도는 검증 받은 책들을 먼저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물론 그런 책들 중에도 딱히 크게 마음에 남는 게 없는 작품도 종종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늘, 고전만 읽겠는가. 요즘 쏟아지는 책에도 당연히 눈길이 간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읽은 사람들 평이 대체로 좋고 ‘호텔에 종신 연금된 백작의 우아한 생존기’라는 설정이 흥미롭다. 날이 몹시 더운 것도 이 책을 선택하는 데 한몫했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에는 어쩐지 흥미위주의, 가벼운 책을 읽고 싶어지지 않는가. 이 작품 또한 그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 흥미진진하지만 묵직하게 남는 것은 그리 크지 않을, 그런 책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술술 읽힌다. 책장이 잘 넘어간다. 나는 세월의 검증을 받지 못한 책을 읽을 때면 좀 까탈스러운 태도로 책을 본다.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 읽는 다고나 할까? 여기저기서 추천 받았고, 극찬을 받았다는데 어디 한 번 보자 하는 심정. <모스크바의 신사>는 로스토프 백작의 시(詩)로 시작한다. 이 시는 이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윽고 희곡 형식으로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에 대한 재판이 묘사된다. 나는 이런 다양한 시도들이 좋은 작품임을 나타내려고 지나치게 애를 쓴 것처럼 여겨졌다. 192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종신 연금형을 받는 백작과 혁명 등등의 설정도 어떻게 보면 역사적 무대를 배경 삼아, 단순히 가벼운 작품은 아니라고 역설하려는 듯한 일종의 트릭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럼 그렇지’하는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100쪽을 넘기고 200쪽을 넘기면서 서서히 나는, 나도 모르게 알렉산드로 로스토프 백작. 이 불쌍한, 그러나 어쩌면 그의 친구 미시카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의 삶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응원하고 있었다. 그가 결심한 대로 마지막으로 추모 와인을 마시고 호텔 난간에서 몸을 던져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었다. 정말로 자살을 하려나? 그러면 안 되는데, 절대 안 돼! 이 사람아! 외치고 싶어졌다.
로스토프 그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러시아의 어느 백작이 아니라, 한 인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오롯이 지닌, 세상에서 보기 드문 한 존재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는, 안타까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 그는 나에게 그저 ‘러시아 최후의 신사’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성숙한 인간미를 갖춘 ‘최후의 인간’과도 같았다. 때문에 그의 삶이 이대로 무너지지 않기를, 그를 그렇게 가둬버린 혁명 세력들이 원하듯이 그가 그렇게 무기력하고 허무하게, 덧없이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집도 아닌, 호텔이라는 공간에서 감금된 채 지낸다는 것은 인간에게 더할 수 없이 무지막지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나라면 어땠을까? 로스토프 백작처럼 ‘환경에 굴복당하지 않고’ ‘환경을 지배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난 감옥 안에서도 책만 있다면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기는 하다만. 글쎄 정말 그럴까? 실제로 어느 한 장소에 감금된 채 이동의 자유를 빼앗긴다면,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희망조차 없이 살아야 한다면 삶이 견디기 쉬울까? 아마 나 또한 로스토프 백작이 그랬듯이 마지막 와인 한 잔을 마시고 호텔 난간에서 저 아래로 몸을 던지는 상상을 여러 차례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로스토프는 그러기를 거부한다. 어쩌면 그가 감금된 곳이 ‘집’이 아니라 ‘호텔’이라는 특수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호텔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백작은 친구도 얻고, 연인도 생기며, 심지어 딸도 얻는다. 때때로 자신을 찾아오는 옛 친구를 만날 수도 있다.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삶을 놓고 싶을 때마다 버티고 견디게 해줄 다른 이의 존재가 ‘호텔’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호텔을 오가는 사람들, 또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신뢰와 우정, 애정, 지지와 격려, 비록 갇힌 신세였지만 끝까지 존중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럴 만한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성품을 지녔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이 작품은 ‘신사’의 의미를 여러 번 생각해 보게 한다. 매너를 잘 갖춘, 귀족으로서의 예절이나 태도, 또는 그 계급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문화와 예술적 지식을 두루 갖춘 것이 과연 진정한 신사다움일까? 만일 로스토프가 그 모든 것을 갖추고도 따뜻하고 배려 깊은 성품,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약한 존재를 깔보지 않는 인격을 지니지 못했다면 그가 과연 ‘신사’로 느껴졌을까? 그래서 <모스크바 신사>의 ‘신사다움’이란 곧 ‘인간다움’이며, 이 책은 로스토프라는 진정한 신사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만 이 세상을 제대로 잘 살다가는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 작품을 읽다가 나는 여러 차례 울컥하고 실제로 몇 번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 장면 중 하나는 소피야 때문에 가슴을 졸이다가 로스토프가 다락방에 홀로 앉아 호로비츠가 연주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듣는 장면이다. 또 다른 부분은 미시카가 남긴 ‘빵과 소금’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는 장면에서였다. 러시아문학 황금기에 쓰인 작품 곳곳에서 ‘빵’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인용구를 나열한 부분에서 나는 주책없게 눈물이 쏟아졌다. 그 어떤 부분보다 이 두 장면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느껴졌다. 한없이 암담하고 우울한 상황에서도 음악을 들으며, 또는 문학 작품을 통해 자신을 위로하며 자신이 지닌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인간……. 이 두 장면은 오래도록 잊기 힘들 것 같다.
안에든 와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웃한 와인과는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같기는커녕 백작의 손에 들린 병 속의 내용물은 한 국가나 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복잡한 역사의 산물이다. 와인의 색깔, 향, 맛은 분명 그 와인이 태어난 지역의 특유한 지형과 고유한 기후를 나타낼 것이다. 그뿐 아니라, 와인은 생산된 해, 생산된 지역의 모든 자연 현상을 드러낼 것이다. 한 모금만 마셔도 와인은 생산지의 그해 겨울 추위가 풀린 시기, 여름 강우량의 정도뿐 아니라 그해 바람의 특징이나 구름 낀 날이 어느 정도나 되었을지에 관한 것까지 머리에 떠오르게 할 것이다. 한 병의 와인은 시간과 공간의 최종 추출물이고, 개성 그 자체의 시적 표현이었다. (<모스크바의 신사>, 233쪽)
와인 목록이 존재하는 것은 혁명의 이상에 어긋나며, 그것은 귀족의 특권과 인텔리겐치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표지와도 같다며 모든 와인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으로만 구분하여 단일한 가격으로 판매하게 된 세상. 그런 상황 속에서도 로스토프는 끝까지 와인 하나하나만의 독특한 개성을 찾고자 애를 쓴다. 위 구절에서 ‘와인’은 ‘인간’으로도 읽힌다.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획일화된 사회 속에서도 자신이 지닌 개성과 우아함을 잃지 않았던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그를 와인에 비유하자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며 깊고 순수한 향을 지닌 그런 와인이 아닐까.
<모스크바의 신사>는 이렇듯 주어진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간 한 남자의 삶의 궤적이 마지막까지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뻔한 스토리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작품은 몇몇 장면에서 완전히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결말 또한 그렇다. 그러니 누구라도 이 두꺼운 책을 한 번 집어 들면 흥미진진하게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의 검증을 받기에는 아직 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런 작품은 현대의 고전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